천하를 약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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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량한날
작품등록일 :
2024.07.31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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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31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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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이는 곳-1

DUMMY

땅은 넓고 사람은 적었다. 그러나 사람이 살 수 있는 땅은 턱없이 적었다.


땅은 힘이다. 사람을 먹여 살리는 힘.


한정된 땅을 아버지와 아들들이 공유하고, 또 그 아들이 손자들과 공유하면, 사람이 많아진 땅은 힘을 잃는다. 사람을 먹여 살릴 힘을.


땅이 사람을 먹여 살리지 못하면 사람은 칼을 들고 이웃집으로 쳐들어간다. 그렇게 되면 공멸이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막기 위해 초원의 목자[牧者]들은 원칙을 정했다. 다 큰 아들은 새 땅을 찾아 떠나고 덜 자란 아들은 옛 땅을 지키기로. 누대에 이어 사람이 살 수 있는 땅을 넓히기로.


말자 상속의 원칙이었다.


장이족[長耳族] 소년 운유에게 그 원칙은 잔인한 것이었다.


“너는 비록 나이가 적지만 철마[鐵馬]를 길들였으니 어른 대접받을 자격이 있다. 우리 부락에 사람이 너무 많아졌으므로 이제 독립해라. 기왕이면 네 병신 누나도 같이 데려가고.”


아버지의 명령으로 운유는 부락을 떠나야 했다. 원칙대로면 덜 자란 그는 아직 보호받아야 했지만, 세상일이 다 그러하듯 원칙은 융통성 있게 준수되었다.


그리하여 운유는 홀로서기를 시작했다. 절름발이 병신 운린과 이백여 명의 단이족[短耳族] 청년 처녀도 함께였다.


독립을 기념하여, 아버지는 운유에게 청동 귀걸이 한 쌍을 선물해줬다.


청동 귀걸이 한 쌍만 선물해줬다.


“내가 재산을 헐기 아까워 재물을 나눠주지 않는 게 아니다. 네게 선물해준 그 귀걸이는 신비한 힘과 만금의 가치가 있는 보물이다.”


짠돌이 아버지의 변변찮은 변명이었다.


“그래서 이 보배로운 귀걸이에 무슨 쓸모가 있죠?”


운유를 대신하여 운린이 항의했다.


“그 귀걸이를 가지고 다니면 모쪼록 좋은 일이 생길 거랬다.”

“누가요?”

“나한테 그걸 팔아넘긴 친구가.”

“그래서 아버지한테는 무슨 좋은 일이 생겼던가요?”


아버지는 쓸모없는 병신 주제에 귀찮게 꼬치꼬치 캐묻는 딸에게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뺨을 갈겨주었다. 대답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짠돌이 아버지의 철면피를 뚫지 못한 남매는 결국 내쫓기듯 부락을 떠나게 되었다.


덕분에 분위기는 아주 화기애애했다.


뺨이 팅팅 부은 절름발이 병신 하나. 병신은 아닌데 너무 어린 애송이 하나.


그 둘을 믿고 따라야 하는 청년 처녀 수백.


그들의 낯빛만큼이나 희망찬 출발이었다.


그래도 손 놓고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있는 거라곤 희망뿐인 젊은 목자들은 새로운 터전을 찾아서 유랑했다.


서쪽에는 이미 많은 부락이 자리매김해 있었던바. 그들은 해가 뜨는 곳으로 향했다. 저마다 부모에게 몇 혹은 몇십 마리씩 물려받은 가축을 몰며 동쪽으로 이동했다.


퍽 고생스러운 나날이었다. 목자들은 강인하고 참을성 있는 전사들이었지만, 그런 그들에게조차 초원은 매정하고 엄혹한 땅이었다.


굶주림. 추위. 짐승. 죽음. 갖가지 재난이 닥쳐왔고, 이백여 명으로 출발했던 무리의 숫자는 조금씩 줄어들었다.


판단력과 실행력이 남다른 일부 청년들은 야밤을 틈타서 무리를 이탈해버리기도 했다.


그러한 나날의 끝에, 그들은 마침내 임자 없는 땅에 다다랐다. 하얀 초원의 극동, 회색 산맥 아래의 초지였다.


그럭저럭 푸르고 그럭저럭 넓고 그럭저럭 물이 흐르는 땅. 산을 끼고 있었으므로 초원에 귀한 돌과 나무를 구하기도 쉬웠다. 새로운 터전으로 그럭저럭 괜찮을 성싶었다.


운유의 무리는 그 땅에 터를 잡기로 마음먹었다.


합리적인 선택이었지만, 결과는 좋지 못했다. 그들과 같은 처지의 또 다른 무리가 뒤늦게 나타난 탓이었다.


두 무리는 지쳐 있었고, 또 다른 땅을 찾으러 떠나기 싫어했다. 그러나 회색 산맥 아래의 초지는 두 무리를 먹여 살릴 힘이 없었다. 둘 중 한쪽은 떠나야 했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 떠날지를 정해야 했다. 제비뽑기, 가위바위보 따위로는 당연히 둘 다 승복하지 않을 테니, 칼과 활을 들고 싸워서 정해야 했다.


“아······.”


운린은 탄식했다. 이쪽에는 병신년과 애새끼가 있었고, 저쪽에는 다 큰 장이족 전사가 있었기에.


늦게 온 무리는 웃었고, 먼저 온 무리는 울었다. 싸움의 승패는 뻔한 것이었기에.


“······우리가 떠나겠습니다.”


칼을 뽑고 시위를 당기기도 전에 운린은 항복을 결단했다. 하지만 그조차 순조롭지 못했다. 늦게 온 무리는 먼저 온 무리의 얼마 없는 재산과 처녀들마저 강탈하려 들었다.


결국, 싸움은 필연이었다.


패배도 마찬가지였다.


가축과 처녀들을 빼앗긴 운유의 무리는 꼬리 만 개처럼 달아났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그들은 회색 산맥을 넘었다.


회색 산맥 너머에는 검은 평원이 펼쳐져 있었다. 온통 벌판과 구릉뿐인 하얀 초원과 달리 삼림과 택지, 야산이 이곳저곳에 있는 평원이었다.


그들보다 앞서 이 검은 평원에 터를 잡은 부락들도 있었지만, 그 숫자는 많지 않아 보였다. 임자 없는 땅이 널려 있을 듯했다.


드디어 고난이 끝난 걸까. 그들은 기대감에 부풀었다.


성급한 기대였다.


검은 평원은 하얀 초원 못잖게 척박했고, 앞서 터 잡은 부락들과 이민족들은 상냥하지 않았다.


동화와 다르게 고난 뒤에는 또 다른 고난들만 있었다. 번번이 불운마저 겹쳤다.


회색 산맥을 넘어 평원에 도착했을 때 백여 명이었던 무리는 다시 구십으로, 그리고 칠십으로 줄어들었다. 칠십은 육십으로 줄었고, 또 삼십으로 줄어들었다.


다행히 삼십부터는 더 줄지 않았다. 오히려 늘어나기 시작했다. 나이 먹은 운유가 앞장서고 죽을 고비를 넘기며 단련된 단이족 전사들이 뒤따른 덕택이었다.


약간의 세월이 흘러 어느덧 검은 평원 최강자의 반열에 이름을 올린 운유는 철혈을 하사받은 삼십의 용사와 충직하고 헌신적인 삼천의 전사를 거느렸다.


어지간한 부락쯤은 마음만 먹으면 하룻밤 사이에 몰살시킬 수 있는 군대였다.


운유는 실제로 그렇게 했다. 저 옛날 그를 쫓아내고 회색 산맥 아래 자리 잡았던 부락은 무참히 학살당했다. 애 어른 남자 여자 그 누구도 다음 날 아침 해를 보지 못했다.


그밖에도 수많은 부락과 이민족이 운유의 군대에 의해 도륙당했다. 모두 일찍이 그를 핍박했던 이들이었다.


그가 지나가는 곳마다 잿가루와 연기가 치솟았고, 죽음의 꽃밭이 만발했다. 힘없는 자들은 그저 재앙이 지나가길 빌어야 했고, 힘 있는 자들도 감히 재앙과 맞서려 들지 않았다.


그럭저럭 괜찮은 나날이었다.


검은 평원의 운유와 삼십 철혈용사와 삼천 전사의 학살극은 나그네들의 입을 통해 악몽처럼 퍼졌고, 그 악몽은 나날이 갱신되어 점차 신화가 되어갔다.


어쩌면 정말로 신화가 되었을지도 몰랐다.


푸른 옥토에서부터 준동하여 진격해온 수십만의 토인[土人]들만 아니었더라면.


하얀 초원의 남쪽, 검은 평원의 서쪽에 존재하는 푸른 옥토.


젖과 꿀이 흐르는 그 기름진 땅의 토인족들은 일개 촌읍을 초월한 국가를 형성했다. 단일한 땅에서 단일한 우두머리가 호령하니 물경 수십만의 토인족이 북으로 동으로 폭포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초원과 평원의 부락들은 부득불 땅을 지키기 위해 싸웠다. 운유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리하여 삼천 전사가 고꾸라졌다.


삼십 철혈용사의 깃발도 꺾였다.


끝내 쇳빛의 군마마저 더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토인족의 피가 호수를 이루고 시체가 섬처럼 우뚝 솟았지만, 그럼에도 토인족들은 여전히, 징그러우리만치 바글대고 있었다.


숫자의 폭력이었다.


운유는 한숨 쉬듯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의 청동 귀걸이가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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