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빌어먹을 세상 따위 3
춘천 시내의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해결한 뒤.
김현지가 건네준 곰인형을 들고 식당의 화장실로 들어갔다.
변기칸에 들어선 후, 곰인형을 정밀해부했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손톱만한 크기의 마이크로 SD 카드를 발견했다.
곧바로 백팩 안에 들어있는 노트북을 꺼냈다.
노트북의 카드 리더기 쪽에 마이크로 SD 카드를 삽입하자.
노트북 화면에 카드 안에 저장된 파일이 드러났다.
스위스 UPS 은행의 계좌번호와 비밀번호였다.
아드레노는 코인에 돈을 묻어둔 게 아니었다.
녀석은 스위스 은행에 돈을 예치한 게 틀림없었다.
계좌 잔고 증명서 파일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녀석의 스위스 계좌에 거액이 예치된 사실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아무리 못해도 한화로 수십억 이상일 것으로 추정되었다.
마이크로 SD 카드를 오른손에 쥔 채.
단전에서 한가닥의 열양진기를 끌어올렸다.
강렬한 화기가 손바닥에 느껴짐과 동시에 마이크로 SD 카드가 불길에 휩싸이며, 한줌의 재로 산화했다.
삼매진화의 순기능이었다.
곰인형을 화장실의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 후, 식당을 재빨리 빠져나왔다.
택시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서울에 도착할 무렵, 기사 아저씨에게 말했다.
"인천국제공항으로 가주세요."
아저씨가 약아빠진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추가 요금을 주셔야 할 것 같은데요."
그는 미터기를 꺽은지 오래였다.
지방 택시는 원래 그런 모양이었다.
"얼마나 더 드려야 하죠?"
"약속하신 금액에서 추가로 20만원을 더 주십시오."
"너무 많이 요구하는 거 아닌가요?"
"인천공항으로 가려면 영종대교를 건너야 하는데 통행료가 만만치 않거든요. 그리고 춘천으로 되돌아가려면 기름값도 많이 들어요."
나는 15만원에 택시를 대절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사 아저씨는 추가로 20만원을 더 요구하고 있었다.
돈독이 잔뜩 오른 양반이었다.
"좋습니다. 원하시는 대로 돈을 드릴테니 인천공항으로 가주세요."
"편안하게 모셔다 드리죠. 헤헤헤...!"
기사 아저씨가 간사한 웃음을 내비치며 영종대교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35만원에 달하는 택시비를 지불하고 공항 출입구에 내려섰다.
공항 청사에 들어선 뒤, 근처의 화장실로 들어갔다.
변기칸에서 백팩을 통째로 외교행낭에 집어넣었다.
백팩에는 1억이 넘는 한화가 들어있었다.
외교행낭을 어깨에 매고 외교관 전용 출국 심사장으로 향했다.
일본 외교관의 위조 여권을 내밀자, 법무부 소속의 출입국 관리 직원이 매의 시선으로 여권을 살폈다.
그는 여권 사진과 내 얼굴을 주도면밀하게 살핀 뒤.
여권에 출국 도장을 찍어주었다.
당연히 외교행낭 검사는 생략되었다.
이래서 외교관 여권이 좋은 모양이었다.
*
창가쪽 비지니스 좌석에서 기내식으로 나온 볶음밥으로 배를 채우는 한편.
창밖에 펼쳐진 짙은 운무에 시선을 모았다.
취리히에 도착하자마자 UPS 은행을 방문할 생각이었다.
아드레노의 비밀 계좌에 예치된 거액의 비자금을 독식하고 싶었다.
녀석의 비밀 계좌는 나만 아는 사실이었다.
영감님은 절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내 마음대로 녀석의 비자금을 가로챌 수 있다는 의미였다.
아드레노의 비자금을 내 것으로 만들기로 작심했다.
내 노력의 대가였다.
영감님에게 조금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돈에는 나름의 주인이 있었고.
아드레노의 비자금은 내가 주인이 될 운명이었다.
12시간의 비행 끝에 스위스 취리히에 도착했다.
공항을 나서자 길가를 오가는 택시들이 보였다.
택시에 몸을 실은 뒤, 운전기사에게 유창한 영국식 영어로 행선지를 밝혔다.
"UPS 은행으로 가주세요."
"예. 손님."
20분 정도가 지나자 차창 밖에 UPS 은행 건물이 보였다.
택시비를 지불하고 차에서 내려섰다.
그 후, 은행 안으로 천천히 걸어들어갔다.
은행은 한산한 편이었다.
대기표를 뽑을 필요가 없었다.
비어있는 3번 창구에 앉자 은행원이 물었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계좌를 확인하려고 왔습니다."
"계좌번호와 비밀번호를 아시나요?"
"네. 알고 있습니다."
은행의 전용 메모지에 계좌번호와 비번을 적어서 그에게 내밀었다.
은행원이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뒤편 사무실 쪽으로 사라졌다.
15분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까.
은행원이 잔고 증명서를 들고 내 앞에 나타났다.
그가 건넨 잔고증명서에 시선을 모았다.
<10,000,000 USD>
미화 1천만 달러였다.
한화로 130억이었다.
내 예상을 한참이나 초과하는 거액이었다.
나는 아드레노의 비자금을 30억 정도로 추정했다.
허나 녀석은 내 예상보다 훨씬 많은 비자금을 보유하고 있었다.
은행원에게 넌지시 말했다.
"계좌의 돈을 다른 은행 계좌로 이체하고 싶은데, 가능한가요?"
"얼마든지 가능하십니다. 고객님."
킹덤 캐피털에 개설한 스트롱 인베스트먼트의 계좌번호를 은행 용지에 적어서 그에게 건넸다.
10분 정도가 지나자, 은행원이 친절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계좌 이체 작업이 완료됐습니다.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그리 말하며 모니터 화면을 내 쪽으로 돌려주었다.
계좌 이체 결과를 눈으로 확인한 뒤, 은행을 유유히 빠져나왔다.
그날 밤.
나는 스위스의 4성급 호텔방에서 캔맥주를 음미하며 테이블에 놓여있는 노트북에 2개의 USB 메모리를 연결했다.
킹덤 캐피털 은행에 접속하자 스위스 은행에서 입금된 1천만 달러(130억)가 보였다.
그중에서 900만 달러(120억)를 창신 증권에 개설한 스트롱 인베스트먼트 계좌로 이체했다.
바탕화면에 떠 있는 '마이 창신'의 아이콘을 클릭하자, 트레이딩 프로그램이 실행되었고.
주식 계좌에 새로 입금된 120억 전액을 삼승전자의 주식을 매수하는데 투입했다.
이제 나는 총 254억 어치의 삼승전자 주식을 소유하게 되었다.
주식 매수 작업을 끝마친 후, 캔맥주를 물처럼 들이켰다.
나름의 성취감을 맛본 탓인지 오늘따라 맥주맛이 좋았다.
그 즈음, 영감님의 짤막한 익명 메시지가 아이폰에 들어왔다.
<스위스에서 단서를 확보했나?>
영감님은 내 행적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꿰고 있었다.
그가 제공한 외교관 여권을 사용해서 그런 것 같았다.
선불폰을 이용해 영감님에게 익명 메시지를 전송했다.
<단서를 아직 찾지 못했어요.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영감님의 메시지가 다시 아이폰에 들어왔다.
<반드시 단서를 찾아내도록. 그게 자네의 임무일세.>
'미안하지만 영감님이 그토록 찾아해매는 아드레노의 비자금은, 제가 좋은 곳에 쓰겠습니다.'
마음 속으로 그리 말하며, 창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취리히의 아름다운 야경에 시선을 고정한 채.
김문성의 부동산 시행사업에 관해서 심사숙고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는 자신의 부동산 개발회사에 10억만 투자하면 열배 이상으로 불려주겠노라고 호언장담했다.
나는 녀석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했다.
나름의 사업성이 있다고 판단한 탓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녀석에게 사업의 주도권을 일방적으로 넘길 생각은 없었다.
그가 원하는 대로 10억을 투자할 경우, 최소 절반에 달하는 권한을 요구할 계획이었다.
그게 순리였다.
지금 현재 내 수중에는 한화로 18억이 조금 넘는 돈이 있었다.
그 중에서 즉시 사용 가능한 자금은 14억 안팎이었다.
검은머리 외국인 자본(스트롱 인베스트먼트)을 가장해서 녀석의 부동산 개발회사에 지분 참여 형식으로 투자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조만간 녀석을 만나서, 투자 문제에 관해서 진지한 논의를 갖기로 마음먹었다.
*
12시간의 비행 끝에 다시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공항 청사의 로비에서 설렁탕으로 배를 채운 뒤.
공항 철도에 몸을 실었다.
서울역 근처의 호텔에 여장을 풀자마자, 김문성의 연락처로 한통의 전화를 걸었다.
다음날 오후.
명동 근처의 카페에서 김문성을 만났다.
우리는 커피를 음미하며 진지한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10억을 투자하면 나에게 지분을 얼마나 줄 수 있죠?"
그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지분투자는 힘들고, 그냥 투자를 해줘. 그러면 내가 일이 성사됐을때 투자 원금과 수익금을 줄게."
"죄송하지만 저는 지분 투자 외에는 관심이 없어요. 10억을 줄테니 나에게 부동산 개발회사의 지분을 50% 정도 챙겨주세요."
그러자 김문성이 말도 안된다는 표정을 지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모든 일을 다하고, 투자금도 너보다 많이 댄다구!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세상 물정에 어둡구나."
"그럼 할 수 없네요. 투자 얘기는 없던 걸로 합시다."
단호한 어조를 내뱉으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자.
녀석이 다급한 얼굴로 내 팔을 재빨리 잡아끌었다.
"왜, 그렇게 성격이 급해. 조금 생각을 해보자. 일단 자리에 앉아봐."
결국 못 이기는 척 자리에 앉았다.
직후 녀석이 은근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아무 쓸모없는 맹지를 3종 주거지역으로 용도변경을 하려면 지자체장과 해당 지역 국회의원, 시의회 의장을 모두 우리 편으로 만들어야 하거든."
"그 사람들을 모두 구워삶아야 한다는 말씀인가요?"
"그렇지. 그래서 돈이 많이 들어. 너한테 10억을 투자금으로 받는다고 해도, 자금 사정이 녹록치 않아."
그에게 물었다.
"선배님이 투자한 금액은 얼마죠?"
"20억 정도를 투자했어. 너보다 2배 이상 많은 돈이지. 그래서 절반에 달하는 지분을 줄 수가 없는 거야."
나름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투자금도 너보다 많고, 로비도 내가 전부 책임지는데 어떻게 50%를 주냐고. 니가 내 입장이래도 절대 수용할 수 없는 일이지."
녀석이 내 눈치를 살폈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은근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너희 아버지가 검찰 인맥이 좋다고 하던데...? 혹시 우리한테 도움을 줄 수 있어?"
"그게 무슨 뜻이죠?"
녀석이 기다렸다는 듯 즉답했다.
"실은 내가 로비하려는 대상이 중원시의 김상곤 시장인데, 그 작자가 요즘 배임 횡령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는 모양이야. 그걸 우리가 해결해주면 맹지를 3종 주거지역으로 전환하는 게 어렵지 않을 거야."
그에게 넌지시 물었다.
"검찰 수사를 무마해주면 나에게 절반에 달하는 지분을 줄 수 있나요?"
"할 수 있겠어?"
"아버지를 졸라봐야죠. 일단 내가 한번 알아볼게요."
"오케이. 이번 일만 해결해주면 너한테 50%에 달하는 지분을 줄게."
"그 전에 법인 설립 서류를 한번 보고 싶네요."
녀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서류 가방에서 부동산 개발회사의 설립 서류를 꺼내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법인명이 조금 희안했다.
'중원의 희망'이라는 법인명이었다.
납입 자본금은 20억이었고, 등기상 대표 이사는 김문성이었다.
그리고 주주명단에는 김문성 단독으로 이름이 올라간 상태였다.
100%의 지분을 보유한 게 확실했다.
하지만 회사 이름이 너무 이상했다.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녀석에게 물었다.
"회사 이름이 너무 이상한데요?"
그가 희미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중원시의 희망이 되자는 의미로 작명한거야. 왜. 많이 이상해?"
의미는 나름 괜찮았다.
이제 본론으로 돌입할 차례였다.
"저는 선배님을 믿지만, 사람 마음이란게 화장실 들어갈 때랑 나올 때 다르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뭔가 확실히 약정서 같은 걸 받았으면 하는데요."
"각서를 작성하자는 말이냐?"
"김상곤 시장의 검찰 수사를 무마하는 대가로, 절반에 달하는 지분을 나에게 양도한다는 각서를 작성해 주세요."
녀석이 내 눈치를 살피며 넌지시 말했다.
"각서라는 게 법적으로 증거가 안돼. 그리거 이번 일은 검찰 로비를 하는 거라서..."
그가 말끝을 흐렸다.
각서를 쓰지 않으려고 잔대가리를 굴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할 수 없죠. 저는 이만 자리에서 일어날게요."
각서를 쓰라고 강요한 탓일까.
이번에는 녀석이 나를 붙잡지 않았다.
나름의 자존심인 모양이었다.
그날 밤.
서울역 근처의 호텔방에서 치맥을 즐길 무렵.
김문성의 전화가 걸려왔다.
1시간 뒤.
녀석이 내 호텔방에 나타났다.
우리는 곧바로 본론에 돌입했다.
"니가 원하는 대로 해줄테니까 김상곤 시장의 검찰 수사를 확실히 무마해줘."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자, 녀석이 준비해온 각서를 나에게 내밀었다.
그의 각서를 확인한 뒤, 지갑 속에 수납했다.
"김상곤 시장을 수사하는 검사가 누구죠?"
그가 즉답했다.
"중앙지검 특수부에서 조사를 하는 것 같더라."
"특수부라면 재벌과 정치인을 전담해서 작살내는 조직 아닌가요?"
"맞아. 그래서 쉽지 않나봐. 아무튼 김 시장 말로는, 검찰 특수부에 확실한 인맥이 있어야 말빨이 통할거라고 하더라."
김문성은 성진그룹의 검찰 특수부 인맥을 철석같이 믿는 눈치였다.
하지만 나는 이번 일을, 내 힘으로 해결할 계획이었다.
"중앙지검 특수부의 최고 책임자가 누구죠?"
"특수부를 쥐락펴락하는 정찬수 중앙지검장."
"정찬수 지검장을 구워삶으면 게임이 끝나는 건가요?"
녀석이 기대만발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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