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블랙요원 7
타임스퀘어 광장에 들어설 찰나, 아름다운 함박눈이 하늘에서 쏟아졌다.
그런 탓일까.
전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들은 영롱하게 쏟아지는 함박눈을 만끽하며.
자기들끼리 기념 사진을 찍거나, 눈사람을 만들거나, 눈을 주먹 크기로 만들어서 눈싸움을 하는 등의 놀이를 즐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허나 나는 그들을 도외시한 채.
뉴욕 양키스 모자를 착용한 사람들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들 중의 한명이 접선자였다.
접선자가 과연 누굴까.
힌트는 뉴욕 양키스 모자 하나였다.
하지만 타임스퀘어 광장에 운집한 사람 중에서, 양키스 모자를 쓰고 있는 사람은 어림잡아 300명이 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나는 매의 시선을 과시하며 3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주도면밀하게 관찰했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불안한 눈빛을 하고 있는 백인 여성을 발견했다.
그녀의 동공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내 눈은 속일 수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은밀한 시선으로 나를 주기적으로 훔쳐보고 있었다.
물론 내 외모가 마음에 들어서 추파를 던졌을 가능성도 있었지만, 나는 왠지 그녀가 접선자로 추측되었다.
본능적인 직감이었다.
그녀의 불안한 시선이 수십차례나, 나에게서 머물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 탓이다.
그녀의 뒤로 은밀히 돌아갔다.
검지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에 접선자라는 영어 단어를 차분히 써내려간 탓일까.
그녀가 몸을 가늘게 떨더니 금세 저 멀리 사라졌다.
태도를 보아하니 접선자가 확실해보였다.
오늘의 미션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택시를 이용해서 뉴저지의 훈련캠프로 돌아왔다.
택시비는 내 알 바 아니었다.
캠프에 배정된 내 방으로 들어서자, 훈련 교관이 사무적인 어조로 말했다.
"다음 훈련지로 이동할 준비에 착수 하십시오."
훈련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었다.
다음날.
시카고 인근의 비밀 캠프에서 점심 식사를 끝마치고, 내 방에서 휴식을 취할 무렵.
새로운 교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손에는 한권의 책이 들려있었다.
교관은 정체불명의 책을 나에게 내밀며 조곤조곤한 어조로 말했다.
"이 책은 정보요원의 올바른 행동규범을 자세히 서술한 책입니다. 페이지는 300페이지 안팎이고, 4시간 안에 책 속의 내용을 모두 외우셔야 합니다."
그에게 물었다.
"기억력 테스트의 일종인가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4시간 안에 책을 외우는데 성공할 때까지 테스트는 계속 진행될 겁니다. 그럼 이만."
교관은 그말을 끝으로 내 방에서 조용히 사라졌다.
단전에서 끌어올린 내공 한줄기를 뇌간 깊숙이 숨어있는 송과체 쪽으로 올려보냈다.
순간 뇌기능이 평소보다 수십 수백배로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나는 책을 술술 넘겼다.
그럴 때마다 책 속의 내용이 뇌속에 차곡차곡 저장됐다.
머릿속에 물리적인 기억 저장 장치가 있는 것 같았다.
그 정도로 나는 컴퓨터같은 기억력을 자랑했다.
5분 만에 책 한권을 모두 외웠다.
더 이상 볼 필요도 없었다.
4시간 후.
교관이 다시 내 앞에 나타났고.
나는 그에게 책 속의 내용을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완벽히 구술(口述)했다.
그런 탓일까.
교관이 까무러칠듯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당연한 귀결이었다.
다음날.
오늘도 기억력 테스트가 이어졌다.
교관은 내 방에 나타나자마자 커다란 설계도면을 침대 위에 펼쳤다.
침대가 가득찰 정도의 분량이었다.
"제임스는 이 설계도면을 오늘도 4시간 안에 모두 카피하셔야 합니다."
설계도면은 잠수함 모형을 하고 있었다.
그에게 슬쩍 물어봤다.
"어떤 종류의 잠수함이죠?"
그가 즉답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대서양에서 맹위를 떨쳤던 독일의 U보트 잠수함입니다."
내 시선은 설계도면으로 향했다.
설계도면은 복잡한 선으로 연결된 상태였다.
"설계도면의 내용을 머릿속에 담으라는 말인가요?"
"맞습니다. 이번 테스트 역시 4시간 안에 통과하시면 됩니다."
"좋습니다. 지금부터 시작할테니 이만 나가보시죠."
그리 대꾸하자, 교관이 쓴웃음을 지으며 내 방에서 조용히 모습을 감췄다.
그가 장내에서 사라지자마자, 한가닥의 내공을 송과체로 전송했고.
직후 수백배 이상으로 영민해진 내 두뇌가 설계도면의 내용을 머릿속에 생생히 저장했다.
4시간 뒤.
나는 커다란 제도 용지를 테이블 위에 펼친 뒤.
각도기, 축적자, 삼각자, T자를 이용해서 머릿속에 주입된 U 보트의 설계도면을 완벽하게 재현해 냈다.
그런 탓일까.
교관이 귀신을 보는 듯한 시선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내 완벽한 기억력에 진심으로 감탄한 모양이었다.
*
나는 텍사스 인근의 비밀 캠프로 이동했다.
낙하산을 이용한 고공 침투 훈련을 하는 한편.
사격 훈련도 병행할 계획이었다.
캠프에 도착한 당일부터 지하 사격장에서 온갖 총기를 이용해서, 내 사격 실력을 마음껏 뽐냈다.
천안통을 베이스로한 내 사격 실력은 지상 최강이었다.
인간의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백발백중의 명중률을 과시하며 사격 교관을 수십번이나 놀라게 만들었다.
며칠 뒤.
이제 공수훈련을 할 차례였다.
공교롭게도 내 공수 훈련을 담당하는 교관은 빌어먹을 개자식인 게리 스톤 수석작전요원이었다.
그가 증오로 번들거리는 눈빛을 드러내며 나에게 말했다.
"네놈은 신체능력이 탁월한 관계로 일반적인 공수 낙하 훈련은 아무 의미가 없을 거다."
스톤 아저씨의 말에 묵묵히 귀를 기울였다.
"그래서 나는 공수 훈련의 최고봉인 윙슈트 훈련을 네놈에게 선사하기로 결정했다."
그에게 물었다.
"윙슈트가 뭐죠?"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헬기에서 요상하게 생긴 낙하산을 갖고 왔다.
사람이 옷처럼 입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래서 이름이 윙슈트인 모양이었다.
"윙슈트는 새를 모형으로 해서 개발된 놈이지. 당연히 일반적인 낙하산보다 스피드가 최고 10배 이상 빠르다."
"스피드를 제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윙슈트를 입고 낙하를 하다가 사망하는 사람이 한해 수백명에 달할 정도지."
스톤 아저씨가 비웃듯 나를 쳐다봤다.
일종의 도발이었다.
"물론 네 녀석은 강한 놈이라 윙슈트 따위를 즐기다가 사망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거다."
그의 말대로 나는 금강불괴에 버금가는 몸을 갖고 있었다.
윙슈트를 입고 고공낙하를 즐기다가 사망할 가능성은 제로에 불과했다.
날카로운 암석에 충돌하거나 뾰족한 계곡에 추락해도 내 몸은 멀쩡할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어느 정도 충격을 받겠지만, 충분히 감당 가능한 수준이었다.
"좋습니다. 마음에 드네요. 이왕 훈련을 할거면 윙슈트를 입고 테스트를 합시다."
그의 입가에 비릿한 조소가 내걸렸다.
내가 윙슈트를 입고 낙하를 하다가 사망할 거라고 지레짐작하는 눈치였다.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재빨리 윙슈트를 입고 수송기가 있는 활주로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스톤 역시 나를 뒤따라서 수송기에 몸을 실었다.
잠시 후, 우리를 태운 수송기가 푸른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러기를 얼마 뒤.
지상 1,000미터 상공에 도착했다.
스톤이 야비한 미소를 지으며 이죽거렸다.
"윙슈트를 선택한 건 네놈이니, 절대 나를 원망하지 말거라."
"신경쓰지 마십시오. 어차피 사람의 목숨은 하늘에 달린 거니까."
순간 그가 분한 얼굴로 쏘아부쳤다.
"새파랗게 어린 자식이 이 순간에도 잘난체를 하는구나."
그의 개소리를 귓등으로 흘리며 짙은 운무 속으로 미련없이 몸을 내던졌다.
내가 착용한 윙슈트는 바람을 쾌속하게 가르며 시속 100킬로 이상의 속도로 내달렸다.
그 덕분일까.
극한의 스피드를 온몸으로 만끽하며 목표지점을 향해 신속하게 다가갔다.
바로 그 즈음, 거대한 기암절벽으로 둘러싸인 계곡으로 내 몸이 빨리듯 스며들었다.
강력한 바람이 나를 그곳으로 몰아넣는 형국이었다.
흡사 용권풍같았다.
나는 단전의 내공을 이용해서 용권풍과 맞먹는 강렬한 회오리바람과 정면으로 맞섰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용권풍이 내 기세를 감당하지 못한 채.
저 멀리 달아나버렸다.
그와 동시에 내 몸이 200미터 상공으로 급격히 솟구쳤다.
5갑자에 달하는 내공의 파워가 여실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나는 내공의 힘으로 죽음의 순간을 모면하자마자, 다시 전방을 향해 성난 야생마처럼 쾌속하게 질주했고.
그 덕분에 목표지점에 예상보다 무려 20분 이상 빠른 속도로 안착하는데 성공했다.
윙슈트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이 전무한 상황에서 이룩한 성과였다.
그래서였을까.
스톤 아저씨는 물론이고 낙하산 교관들 모두, 나를 경이로운 시선으로 올려다봤다.
제대로된 교육 없이 단 한번 만에 윙슈트 아티스트 반열에 올라선 까닭이었다.
이틀 후.
아침 식사를 끝마치고, 야외 훈련장에 들어서자 사격 교관이 심각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그가 진중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제임스의 한계를 시험해볼 생각이에요."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저기 앞에 보이는 건물 안에는 테러범에게 납치된 선량한 시민이 있어요."
그의 설명은 계속 이어졌다.
"제임스는 고무탄을 이용해서 테러범을 신속하게 제거한 뒤, 인질을 반드시 구출하십시오."
그에게 말했다.
"테러범 연기를 하는 교관이 총 몇명이죠?"
그가 아무렇지 않은 태도로 즉답했다.
"30명이에요. 제임스의 능력이라면 혼자서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을 거에요."
눈 앞의 교관은 내 사격 능력을 철석같이 믿는 눈치였다.
"고무탄의 파괴력이 어느 정도죠?"
"얼굴에 직격당하면 대다수 죽겠죠."
"고무탄을 사용하면 테러범 연기를 하는 교관들이 죽지 않을까요?"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교관들 모두 얼굴과 손발을 가릴 수 있는 전신 방탄복과 헬멧을 걸치고 있으니까."
"제가 사용하는 총기는 뭐죠?"
교관이 기다렸다는 고무탄 전용 소총을 나에게 내밀었다.
그는 32발의 총알이 들어있는 탄창을 건네주었다.
"고무탄에 페인트가 첨가된 녀석이니까 교관들의 방탄복에 흔적을 남기면 승리하는 방식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고무탄 전용 소총을 유심히 살폈다.
고무탄 전용 소총은 사거리와 파괴력에 한계가 있는 녀석이었다.
물론 나에게는 이 정도면 충분했다.
"교관들이 사용하는 총기는 뭐죠?"
"물론 그들 역시 페인트가 묻어있는 고무탄을 사용할 예정입니다."
고무탄 전용소총에 32발의 탄환을 장전한 뒤, 그에게 물었다.
"건물에 지금 들어가면 되나요?"
교관이 전신 방탄복과 방탄 헬멧을 나에게 내밀었다.
얼굴과 손발까지 완벽히 방어할 수 있는 종류의 방탄복이었다.
"아무리 고무탄이라고 해도, 얼굴에 맞으면 죽습니다. 그러니 얼굴을 방탄헬멧으로 보호하십시오."
나에겐 별로 쓸모가 없었지만, 교관이 주는 대로 방탄복과 헬멧을 착용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방탄복과 방탄 헬멧을 재빨리 착용한 뒤, 전방 3킬로에 위치한 4층 건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건물 안에 들어설 찰나. 위쪽에서 고무탄이 비오듯 쏟아졌다.
텅텅텅텅텅텅텅텅텅텅텅텅텅!!
고무탄이라 그런지 고무가 통통 튀는 소리가 났다.
고무탄에는 페인트 성분이 묻어있었다.
당연히 내 몸에 페인트 흔적이 남는 순간, 게임이 종료된다.
사실상 내가 사망한 것이나 진배없었기 때문이다.
출입구 옆의 그늘진 회랑의 뒤편에 몸을 숨긴 채.
기감을 외부로 방사하자, 건물 안에 포진한 교관들의 기운이 심중에 드러났다.
교관들은 2층에 6명, 3층에 12명, 4층에 12명씩 포진해 있었다.
1층에는 없었다.
나를 상대하기 어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내 사격 솜씨가 월드 챔피언급이라는 사실을 잘 아는 탓이었다.
고무탄의 유효 사거리는 길어봤자 50미터 내외였다,
그리고 총알의 속도 역시 일반적인 금속 총알보다 한참이나 뒤떨어졌다.
하지만 비좁은 실내에서는 나름 엄청난 파괴력을 자랑하는 녀석이었다.
나는 4층에 있는 녀석들부터 제거하기로 작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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