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물들이 착각한다 괴물 천재 피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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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태유 아카데미 작가
작품등록일 :
2024.08.11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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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8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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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2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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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재촬영은 무슨

DUMMY

3화. 재촬영은 무슨




착각이 아니다. 기면증도 아니다.


“진혁아.”


또다시 시간을 거슬러 왔다. 이번엔 무려 6시간 전이다.

어떤 방식으로 발생하는 현상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결과만은 같다.


처음 루프를 겪었을 때 막내가 그랬던 것처럼, 감독이 내 앞에서 똑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넌. 괜찮겠냐? 감독 할 수 있겠어?”


······여전히 온몸에 소름이 돋긴 한다. 내가 생생히 기억하는 6시간 전으로 돌아왔다니.


이게 처음이라면, 분명 여기서 망설였겠지.


하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 비현실적인 현상도, 갑작스러운 감독 자리도.


“···하겠습니다.”


그제야 조금씩 생각했던 것 같다.


루프는, 내 상상보다 훨씬 유용할지도 모르겠다고.



*



촬영감독 구영회는 카메라만 30년 만진 베테랑이다.


단편영화로 시작해 지상파 드라마를 거쳐, 거액의 연봉 제의를 받고 GTBN으로 건너왔다.


당연하게도, 그동안 렌즈를 통해서만 사람을 보진 않았다. 드라마를 찍다 보면 오히려 맨눈으로 사람을 보게 되는 경우가 많다.


감독, 배우를 포함한 다양한 스태프들. 구영회는 자연스럽게 어떤 놈이 싹수 있는지 정도는 알아볼 수 있게 됐다.


“다음 씬 준비합시다.”


구영회는 자신의 옆에서 담담하게 말하는 피디를 보았다.


이진혁. 나름 콘티도 그릴 줄 아는 놈이고, 처신도 싹싹하게 하는 놈이다.


외주 출신이라 뒷얘기가 좀 들리긴 하는데, 구영회 입장에서는 오히려 그래서 더 정감 가긴 했다.

카메라 감독이 되는 루트도 외주 피디 못지않게 열악하니까.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백날 정감 가봤자 능력 없는 놈은 하루 만에 사람을 잃는다.

반대로 정은 안 가도 능력 있는 놈은, 사람을 끌고 다니기 마련이고.


같이 회의는 자주 했어도 이진혁이 직접 감독하는 걸 보는 건 처음인데···


잘하진 않아도 사고만 안 쳤으면 좋겠다고, 구영회는 생각했다.

그렇잖아도 좀 전에 B팀 윤 피디가 거하게 똥을 싸놨으니까.


“이번 씬은 그냥 대표와 팀장의 대면이 아닙니다.”


세트 위의 배우들에게 이진혁이 전달한다.


“이전에 윤슬이 박도진에게 실망했기 때문에, 기존 커플에 위기감을 주는 만남이에요. 시청자는 윤슬이 하권우랑 이어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평소보다 시선, 감정, 진하게 갑니다.”


긴장을 안 하는 타입인지 의외로 디렉팅은 술술 나온다.

앵글 안에서 대기하던 배우 김태성과 유수현도 공감하듯 고개를 주억거린다.


“미디엄 투샷 먼저 가볍게 가봅시다. 스탠바이······ 액션.”


간결한 사인과 함께 3번 카메라가 돌고, 배우들이 짧게 호흡을 주고받은 후, 이진혁의 목소리가 재차 스튜디오를 울린다.


“컷. 좋습니다.”


그리고는 곧바로 메인 카메라 쪽으로 다가와 말한다.


“구 감독님. 이번 원샷 클로즈업은 고정하지 말고 트래킹 살짝 넣는 거 어떻게 생각하세요?”

“···어, 어. 괜찮지. 분위기 보고 비교해도 되고. 일단 한번 담아보자.”

“네. 유 배우님 원샷 갑니다! 메인 스탠바이-”


구영회는 홀린 듯 이진혁의 말을 따라 카메라 틸트 손잡이를 쥐었고,


“액션!”


사인과 함께, 대사 치는 유수현의 얼굴을 따라 앵글을 미세하게 따라붙었다.


고정했을 때보다 감정 표현이 확 살아나는 게 느껴진다. 시청자 입장에서는 이전 씬과 대비되어 훨씬 도드라져 보일 것이고.


“컷! 좋습니다! 김태성 배우님 2번 카메라, 마찬가지로 트래킹 따라붙습니다. 스탠바이······ 액션!”


속도감 있게 상대 배역의 컷도 담아낸다. 이번엔 촬영팀 세컨드가 카메라를 조작했다.


“컷!”


잠시 후 울려 퍼진 사인과 함께, 이진혁은 모니터에 코를 박았다.


그러나 찍은 걸 한 번은 다 돌려봤을까. 몇 초 지나지도 않았는데, 피디가 다시 머리를 들고 디렉션을 준다.


“김 배우님, 동일한데 시선 조금만 내릴게요. 네, 좋습니다. 다시 갑니다. 스탠바이-”


배우 개인 디렉팅은 짧고 간결하다. 저게 처음 감독 자리에 앉은 놈이라고?


“액션!”


얼른 촬영팀 세컨드 뒤로 몸을 옮긴 구영회가 보조 모니터를 훑는다.

그리고 김태성의 마스크가 이전보다 훨씬 자연스럽게 담기는 걸 확인한다.


······권태용이 배우 다루는 걸 따로 가르쳤나?

아니, 애초에 가르쳐도 이렇게 세세한 걸 알려줄 수가 있나?


손끝에 전율이 흐르는 느낌이다.


하지만 생각을 이어갈 새도 없이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고, 구영회는 메인 카메라로 허겁지겁 돌아와야 했다.


이어서 두 사람의 오버 숄더 샷까지 순식간에 따낸다.

여기까지 들어간 테이크가 단 7개.


그쯤 구영회는 마른침을 삼키며 직감했다.


드라마국이 조만간 한번 뒤집히겠다고.



*



그렇게 30분쯤 지났을까. 이진혁이 휴식을 선언했다.

배우가 지쳐서도, 촬영이 막혀서도 아니었다.


이번 세팅에서 찍을 씬을 모두 찍었기 때문이었다. 미술팀이 세트를 교체해야 해서, 어쩔 수 없이 배우와 나머지 스탭이 휴식을 취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 시간에 진짜 휴식하는 사람은 없었다.


“···실장님. 나 빨리 대본 좀 갖다줘요.”

“왜? 너 다다음 씬까지 없는데?”

“왜긴! 지금 오케이 나오는 속도 안 보여?! 넋 놓고 있다가 쓸려나가게 생겼다고!”


한 배우와 매니저의 대화를 시작으로,


“차, 창훈아! 반사판 없이 라이트 3개, 맞지?!”

“예 감독님! 구 감독님 컨펌 받았습니다!”

“다음 씬도 미리 받아놓고, 애들 단속해라! 조명에서 촬영 발목 잡는 놈 나오면 진짜 뒤진다!”


느슨하게 풀려있던 스탭들까지.


단 한 사람의 피디, 아니 감독이 보여준 퍼포먼스에, 스튜디오 전체에 불이 붙었다.


“메모리! 메모리 여분 갖고와!”

“태성 씨! 의상 지금 교체하셔야 돼요!”

“뭐? 보조출연들 담배 피우러 간 게 자랑이야?! 빨리 잡아 와!”


그렇게 수십의 사람이 발등에 떨어진 불똥을 피해 뛰어다니는 가운데.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이 상황을 만든 원흉은 촬영감독 옆에서 콘티나 뒤적거리며 뭔가를 메모하고 있었다.


가끔 뭔가를 이야기할 때마다 촬영감독이 소스라치게 놀라는 것만 빼면, 퍽 평화로운 투샷이었다.



*



예정된 촬영이 모두 끝난 후. 나를 바라보는 배우와 제작진의 얼굴이 뭔가 떨떠름하다.


뭘 걱정하는지 알겠다. 오케이 사인이 너무 빨리 나오니까 싹 다 재촬영해야 하는 거 아니냐, 뭐 그런 생각이겠지.


하지만 크게 걱정할 건 없다고 본다. 시간이 돌아가기 전, 구 감독에게 확인받은 컷들을 중심으로 담았으니까.

배우가 지쳐서 차마 맞추지 못한 디테일도 조금씩 넣어봤고.


나는 살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다들 걱정마세요. 급하게 찍은 것처럼 보여도 나름 신경 쓰면서 찍었습니다. 재촬영은······ 글쎄요. 그건 제가 판단하는 게 아니라서 잘 모르겠네요.”


그러자 이제는 숫제 괴물 보듯이 나를 쳐다본다.


이게 아닌가. 그럼 뭐가 문제야? 퇴근도 일찍 하는데 활짝 웃어도 모자랄 판에.


팔짱 끼고 서 있던 촬영감독 구영회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미친놈. 재촬영은 무슨.”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카메라를 정리한다. 그 모습을 본 다른 제작진은 피식 웃으며 세트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래, 이게 조기 퇴근하는 팀의 분위기지.


그쯤 나도 박선영 피디와 막내에게 마무리를 지시했다.

어쨌든 내일도 촬영이 있으니, 조금이라도 빨리 쉬는 게 남는 장사다.


시계를 확인하니 이제 저녁 6시 반 조금 넘었다.

루프가 일어나기 전과 비교하면 3시간이나 차이 난다.


새삼, 감독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제작 편차가 크게 날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오롯이 내 능력으로 만든 결과가 아니라서 경계심이 들긴 하지만, 드디어 연출로서의 첫발을 뗀 느낌이다.


앞으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정도는 감이 온다.


“이 피디님! 오늘 찍은 파일, 바로 편집 감독님한테 보낼까요?”

“아니. 그건 모니터링 따로 봐야 돼.”


오늘 찍은 것들은 아쉽지만 편집실로 바로 보내지는 못한다.

권태용 감독과 촬영감독의 확인을 한 번 더 거쳐서 들어가겠지.

···여차하면, 지영국 CP까지 검수할지도 모르고.


그럴 일이 없기를 바라며 스마트폰을 들었더니, 타이밍 좋게 전화가 왔다.


“예, 감독님.”

-아니, 진혁아! 촬영 벌써 끝났다고?!

“아, 예. 소식 들으셨나 보네요.”

-···어, 어. 그렇긴 한데···.


감독은 뭔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잠시 망설이더니, 이내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다! 일단 정리해서 퇴근시켜. 오늘 고생 많았다.

“알겠습니다. 그, B팀은 어떻게 됐습니까?”

-여기야 뭐, 거의 애 보고 있지.


감독은 단단히 사이가 틀어진 윤 피디와 최필립 배우의 말을 몇 번이나 번갈아 들어주고 있다면서, 우는 소릴 했다.


-촬영은 미뤄야 될 거 같고. 저녁이나 먹이고 정리하면··· 9시 돼야 끝날 거 같다.


이래서 감독이 스튜디오에 늦게 도착했구나.


나도 이른 퇴근이라 그쪽으로 붙을까 물어봤지만, 감독은 한사코 거절하면서 통화를 끊었다.


스튜디오에 퇴근을 공지하자, 최소한의 조명만 남기고 세트의 불이 꺼졌다.

인사를 나눈 제작진과 배우들은 하나둘 자리를 떴다.


물론 스케줄 짜야 하는 박 피디나 막내, 그리고 세트를 만들어야 하는 미술팀처럼 남는 인원도 꽤 있었지만, 그건 각자가 맡은 일이니 어쩔 수 없고.


나도 퇴근길에 올랐다. 상암동 주변의 오피스텔로 향한다.


촬영을 두 배로 한 셈이라 그런지 유난히 피곤하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언제 또 오늘처럼 루프가 일어날지 모르니까.


한편으론 기대가 됐다.



*



“···뭐? <백만불> A팀 감독을 누가 봤다고?”


지영국 CP가 외투를 입으려다 다시 내려놓고, 스피커폰에 대고 물었다.

그러자 상대방이 여상스럽게 대답한다.


-이진혁 피디요. 오늘 뭔, B팀 사고 터져서 그렇게 됐다는데? 못 들었어요?


물론 B팀 관련 얘기는 직접 보고 받았다. 근데 이 얘기는 처음 듣는다. 권태용은 분명 B팀 철수시키고 A팀만 굴린다고 했었다.


“······권태용이 이 또라이 새끼가. 명진아, 다시 통화하자.”

-예? 형님, 형님!


뚝.


통화를 종료한 지영국은 곧바로 권태용의 번호를 눌렀다. 화면을 누르는 손가락에 힘이 잔뜩 들어간다.


보나마나 뻔하다. 지가 아끼는 후배 한번 키워주겠다고 몰래 스튜디오 돌린 모양인데. 방송국이 어디 그렇게 굴러가는 조직이던가?


방송국엔 서열이 있다. 그리고 서열이 있는 이유는 하나다.


공평하게 기회를 주기 위함이다. 촬영 한 번에 드는 돈이 억소리나는 판국에, 순서 안 지키고 엄한 놈에게 돈 들어가면 몇 년씩 시다바리 하며 기다리던 놈들만 병신 되는 거다.


그럼 그놈들은 또 가만히 있나? 그때부터 새치기하려고 온갖 수를 쓰겠지. 방송국 아사리판 나는 전형적인 레퍼토리다.


서열에 따라 정확히 기회를 부여받아야 하고, 기회 줬을 때 못 하면 그때 쳐내면 된다.


이게 바로 지영국이 기수에서 유일하게 CP직을 달 수 있었던 이유다.


그런데, 웬 외주 출신 하나가 이번에 선을 넘었다.

이진혁.


사실 지영국도 이진혁이 미워서 기회를 안 주고 있는 게 아니었다. 마땅한 경력을 채우면 당연히 기회를 준다.


다만 외주와 방송국의 경력을 일대일로 쳐주기가 힘드니, 좀 더 기다리라는 것이다.

근데 그새를 못 참고 선을 넘어?


이진혁은 아무리 권태용이 들이밀었더라도 한사코 거절했어야 했다.


재촬영 때문에 제작비 날아가는 건 둘째치고, 다른 애들 때문에라도 이번 일은 그냥 못 넘어가겠다.


“···아니 근데, 이 새끼는 전화를 왜 이렇게 안 받아?”


그렇게 말하자마자 노크 소리가 울리고, CP실에 누군가 들어왔다.


“형님. 그만 닦달하십쇼. 저 왔습니다.”

“너, 너 임마! 어쩌자고 새파란 놈을···!”


그런데 혼자가 아니다. 권태용의 뒤를 따라 한 명이 더 들어온다.


······구영회?


“···아니, 구 감독? 구 감독은 여기 왜?”

“지 팀장. 일단, 어떤 마음인지는 알겠거든? 근데 이거 먼저 보고 얘기하자고.”


그렇게 말하며 작은 노트북 하나를 책상 위에 얹는다.

화면을 열었더니 오늘 일자가 찍힌 촬영 원본파일이다.


두 사람이 문을 닫고 진지한 얼굴로 지영국을 쳐다보자, 심상치 않음을 느낀 그도 별말 없이 파일을 재생했다.


그렇게 물끄러미 바라보기를 한참.


미간을 구긴 채 턱을 괴고 있던 지영국이 목을 가다듬었다.


“······큼. 구 감독. 이거, 얼마나 걸렸다고?”

“3시간도 안 걸렸어. 컷마다 2테이크 끊어야 나오는 속도야. 근데 보다시피 그 퀄리티고.”

“흐음···.”


지영국은 손가락으로 노트북을 툭툭 두드렸다.


···천재라면, 얘기가 좀 다르긴 한데.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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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9화. B팀 촬영 (1) +2 24.08.18 1,830 35 13쪽
8 8화. 질 사람은 진다 +3 24.08.17 1,840 32 14쪽
7 7화. 뜰 사람은 뜨고 +2 24.08.16 1,863 33 14쪽
6 6화. 해피엔딩 +2 24.08.15 1,948 33 12쪽
5 5화. 신세 졌습니다 +3 24.08.14 2,016 35 12쪽
4 4화. 터치 +3 24.08.13 2,030 37 12쪽
» 3화. 재촬영은 무슨 +3 24.08.12 2,085 38 13쪽
2 2화. 해보겠습니다 +3 24.08.11 2,344 35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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