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의 물약이 아니라, 그냥 H₂O라고...
나는 베이비 박스에 버려졌고, 보육원에서 자랐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부모님이 있는 것과 없는 것에 대한 차이를 극명하게 느꼈다.
마치 그들은 산 정상에서 알콩달콩 사진을 찍을 때, 난 이제 막 산 초입에 들어선 느낌이랄까.
넘어지지 말라고 잡아주는 사람도, 격려해 주는 사람도 없었다.
원장이라는 아줌마는 뒷돈을 받기에 급급했고, 얼떨결에 그 광경을 목격한 나는 원장의 유독히 엄한 시선을 받아 가며 지냈다.
아무튼 아주 지랄맞은 인생이다.
왕따와 은따 사이를 넘나들며 기계처럼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입학해서 진로에 대해 고민이 생겼다.
그렇게 내가 선택한 것은 화학이었다.
화학으로 온갖 것들을 다 만들 수 있으니 취업 걱정은 덜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게, 관심을 두다 보니 화학이라는 게 재미있기도 했고 신기하기도 했다.
나는 그때부터 주기율표를 마법 주문처럼 중얼거리곤 했다.
수헬리베붕탄질산플네나마알규인황염아칼칼.
성적이 나쁘지 않아 괜찮은 대학의 화학공학부에 들어갈 수 있었다.
성인이 되었어도 24살까지 보육원에서 생활할 수 있었지만, 미련 없이 500만 원을 받고 고시원 생활을 시작했다.
원장 아줌마가 눈치도 팍팍 줬으니까.
대학에 들어간 나는 틈날 때마다 알바를 해야 했기 때문에, 동기들과는 친하게 사귀진 못했다.
내가 인싸의 기질을 갖추고 잘생겼었으면 좀 달랐으려나?
그렇게 되다 보니 내 인생은 공부밖에 답이 없다고 생각했고,
공부를 하다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그냥 통째로 외워버렸다.
장학금도 받을 수 있게 됐다.
그렇게 오로지 공부에만 전념하는 나의 모습에 교수님은 권유했다.
‘랩실에 들어올 생각 없나?’
나는 랩실로 입성했다.
그때부터 교수님의 온갖 논문과 연구를 옆에서 서브하며 코피를 팡팡 터트렸고.
랩실에서 살다시피 하며, 아니 실제로 랩실에 살았다.
간이침대까지 구비해 놓았으니까.
누군간 노예 생활을 한다고 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교수님이 식권도 끊어줬고, 좁디좁은 고시원 생활보다 훨씬 좋았다.
정말 많은 것을 배웠고, 많은 것을 느꼈다.
다른 애들이 술집에서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을 땐, 나는 비커를 기울이며 실험을 진행했다.
히키코모리처럼 두문불출했고, 오타쿠처럼 파고들었다.
알면 알수록 신기한 화학은 나의 궁금증을 더욱 자극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석사 박사 학위를 넘어 나는, 대한민국 최고의 공대 교수가 될 수 있었다.
‘됐어!’
자성을 띠지 않는 합금을 플라즈마 공정으로, 나노 분말로 치환해 자성을 띠게 만드는데 성공했다.
처음엔 자성이 약해서 실패에 실패를 거듭했지만,
랩실에서 굴러먹던 불굴의 의지로 밤낮없이 연구해 매진한 결과 성공할 수 있었다.
자성이 강한 물질에서 관찰되는 정방정 구조가, 내가 개발한 물질에도 관찰되자 동료 교수들이 미친놈이 결국 해냈다고 찬사를 보내왔다.
자성이 없는 물질이 자성을 띠게 된 것인데, 세계 최초로 나노 분말에 정방정 구조를 갖추게 만든 것이다.
무에서 유를 창출!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공정을 또 한 번 걸쳐, 보다 더 촘촘하고 밀도 높은 원소 구조로 더 강력한 자기적 특성을 극대화시켰다.
희토류 아웃!
이젠 K 분말의 시대!
희토류 자성에 전혀 뒤처지지 않는 나노 분말은, 공정 공장만 갖추어진다면 희토류보다 더 싼 값으로 판매할 수도 있었다.
‘떼 부자 되는 일만 남았겠어? 축하해!’
‘나 좀 직원으로 써 줄 수 있겠나? 하하하!’
세상을 등한시하고 한 곳만 파고 또 파다 보니 여기까지 와버렸다.
역시 세상은 노력한 자의 것이라고 했는가?
도파민이 마구 터져 나오는 것 같았다.
이젠 좋은 차 좋은 집, 여자도 사귀고 토끼 같은 자식들을 낳는 일만 남은 것 같았다.
사람들은 믿을까?
베이비 박스에 버려졌던 내가, 죽어서도 이름을 남길만한 업적을 만들어냈다는 걸.
역시 사람은 노오오력하면 안 되는 게······.
순간 어지럽다고 생각 했을 땐, 눈을 떠보니 병원이었다.
‘폐암 4기입니다. 이미 뇌나 골수 여기저기에 전이가 있어···.’
손을 댈 수가 없단다.
증상은 없었냐고?
시부랄 난 피곤해서 그런 건 줄 알았지.
그래그래, 우리나라의 전체 사망원인 원인 중 1위가 폐암이라는데 내가 거기에 또 섭섭하지.
싯팔! 난 담배도 안 피우는데?
버림받은 고아는 둘째 치고 참 유전자도 좆같다.
이 싯팔 좆같은 세상! 아니 좆같은 폐암 새끼라고 해야 하나?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베이비 박스에 버려져 갖은 고생은 개 같이 하면서, 남들 엄빠찬스 타고 있을 때 나는 기어서 여기까지 왔다.
한강에 도착한 나는 소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쿨럭! 쿨럭!”
기침과 함께 입가를 훔쳐내자, 검붉은 피가 짙게 묻어 나왔다.
“나 더 산다! 시발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데! 바퀴벌레처럼···.”
내가 조금 더 사는 게, 나를 억까하는 세상에 엿을 먹이는 일이라 생각됐다.
“더 살···.”
순간, 시야가 휘청였다.
* * *
눈꺼풀이 무거웠다.
병원인가?
희미한 의식이 서서히 돌아오는 게 느껴졌다.
“재미있게 보셨다면 동전 하나씩 던져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자! 여러분! 다음 공연에 앞서 보여드릴 것이 있습니다. 아주 진귀한 물건이죠.”
병원인가?
무슨 소리야?
TV 소린가?
그래 싯팔, 뭐라도 들리는 걸 보니 아직 살아 있구나.
“행운을 부르는 팔찌! 이건 악마를 쫓는 목걸이! 이걸 차고 있으면 악마 따윈 얼씬도 못···.”
나는 끈적한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렸다.
웬 천막이 보였다.
나는 지끈거리는 두통과 함께 주위를 훑었다.
이게 다 뭐야?
위로는 천막이 쳐져 있었고, 그 외엔 모두 나무로 이루어져 있었다.
마차?
한강에서 쓰러지고 눈 떠보니 이런 곳이다.
마차로 병원 가는 중인가?
정신 차려 미친놈아! 요즘 누가 마차를 써?
나는 마차로 짐작되는 입구의 천을 살며시 걷었다.
이거 꿈이냐?
웬 노숙자 같은 사람들이··· 아니, 중세 시대에서나 볼 법할 차림새의 서양인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때 송곳으로 후벼 파는 듯한 두통이 한 차례 밀려왔다.
반사적으로 머리를 짚은 나는 머리가 축축하다는 걸 깨달았다.
손을 내려다보니 핏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아, 내 머리! 의식을 잃었을 때 머리가 깨졌나?
그래서 헛것도 보이는 거고?
일단 나가 보자.
밖에 나와 보니 더 가관이었다.
바글바글 거리는 사람들이 구경하듯 동그랗게 모여 있었고, 꽃관을 쓴 여성들이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고 있었다.
그때, 열다섯 살로 보이는 소녀가 놀란 눈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오빠! 죽은 줄 알았잖아! 오빠? 라온 오빠? 괜찮아?”
라온?
“누구세요?”
“나 에렌이잖아. 에렌. 못 알아보겠어?”
* * *
3일뒤.
나는 그 동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머리를 쥐어뜯고 생각 끝에 인정할 수밖에 있었다.
일단 살았다고 좋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나는 중세 시대 같은 곳으로 환생했다.
에렌은 내 물음에 착하게도 차근차근 대답해 주었다.
내가 깨어난 순간.
사람들은 모두 기적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3미터 높이에서 떨어져 머리를 부딪쳤다고 했으니까.
숨도 멎고 심장도 뛰지 않아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살아난 것이다.
그런데 시부레 왜 귀족 왕족도, 아니고 하필이면 유랑민 집단의 일원으로 빙의된 것일까.
<푸른 눈의 유랑단>
이들은 자신을 유랑단이라 자칭했는데, 내가 보기엔 행동거지가 ‘집시’와 다를 바가 없었다.
집시란 지역 이곳저곳을 유람하며, 사람들에게 춤과 노래를 선사하고 던져주는 동전을 받아가며 살아가는 이들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타지역에서 싸게 구입한 물품들을 잡화처럼 다른 지역에 팔기도 했다.
행운을 부르는 새끼줄 팔찌, 악마를 쫓는 목걸이 등등, 고열을 내려주는 이상한 물약까지.
거기서 더 파는 게 있다면 무리의 여성, 매춘까지 시킨다는 것.
이상한 약도 팔고 포주 역할도 하고.
말만 유랑단이지 하는 짓거리가 집시와 똑같았다.
이 미친놈들은 이런 걸 낭만이라고 말한다.
팔아서 이윤을 남길 수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 새끼들.
내 처지는··· 노예와 가까운 수준이었다.
이 세계에 대해 알음알음 물어보니, 하나의 제국이었던 대륙은 내부의 갈등과 전쟁으로 여러 개의 왕국으로 분열된 세상.
그에 유랑민이 넘쳐나고 부모를 알 수 없는 고아가 수두룩한 시대가 되었다.
나도 고아였단다.
고아였던 나를 어린 시절 데려다 키워, 사람에게 동전을 받기 위해 재롱을 부리게 했다.
아니 근데 이거 유괴한 거 아니야?
이 몸의 나이는 17살.
얘기를 더 들어보니,
나이가 점점 먹어가면서 이 몸의 재롱은 서서히 치어리딩 같은 것으로 바뀌어갔다.
말 그대로 세 네 명이 나를 높이 던져 주면 공중제비를 돌고, 사람 탑을 쌓아 더 높게 아주 더 높게.
밥을 너무 많이 먹으면 무겁다고 주식으로 스프를 줬단다.
이동하면서 공연을 선보이는 것이 아니라, 끌려 다니면서 노예생활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지금 나는.
세 명이 나를 공중에 던졌고, 허공에 높게 떠오른 나는 재빠르게 공중제비를 돌았다.
내가 깨어난 후 하루 뒤에 이놈들은 이것부터 시켰다.
그런데 운동신경 하나 없던 내가 이게 왜 되냐고···,
아마 몸이 기억하는 것 같았다.
“오!”
“와···!”
짝! 짝! 짝!
얼굴이 온통 구정물인 사람, 허리가 굽은 노인, 한쪽 눈이 멀어 회색빛인 사람, 또 신나서 팡팡 뛰는 어린아이들. 개중에 꽤 근사하게 차려입은 그들도 나를 보며 환호하며 동전을 던졌다.
단원들이 연주하는 악기들이 더욱 흥을 돋웠다.
“와! 날아다니네 날아 다녀!”
“엄마! 엄마! 저것 좀 보세요!”
신물질을 개발해 역사에 이름을 남길지도 몰랐던 내가, 지금 서커스를 하고 있다 씨벌.
이윽고 내 순서가 끝나자, 40대 후반의 콧수염을 한 중년인이 사람들 앞으로 나왔다.
그의 이름은 아렉.
아렉이 내 어깨를 탁! 짚었다.
“삼일 전에도 저희 공연을 봐주시러 오신 분들의 얼굴도 보이는 것 같은데, 그때 이 친구가 어떻게 됐었습니까? 무려! 5미터에서 떨어져 머리가 깨졌었습니다! 심장도 멎었고 숨도 쉬지 않았죠. 그때 보신 분 계십니까?”
사람들이 삼분의 이 쯤 손을 올리자 모두가 웅성거렸다.
“맞아! 내 눈으로 직접 봤다고!”
“신이 도우신 게야.”
“피가 엄청 나던데!?”
이 상황을 즐기듯 웃던 아렉이 말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아주 멀쩡하고 건강하기까지 합니다.”
사람들이 놀랍다는 듯 웅성거렸고, 아렉이 그들의 목소리를 잠재우듯 손을 들어 올렸다.
“우리의 소중한 동료, 라온에게 일어난 일은 운이 좋았던 것도, 신의 도움도 아니었습니다.”
아렉이 안주머니에서 아주 작은 유리병을 꺼냈다.
엄지손가락만 한 유리병엔 투명한 액체가 담겨 있었다.
그가 대중들에게 가까이 가며 목소리를 깔았다.
“어떤 마법사가 한정적으로 만들었다는 마법의 물약.”
아렉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 물약이 라온을 살려냈습니다. 제가 움직이지 않는 라온의 입에 직접 흘려보냈죠.”
아렉이 의미심장한 얼굴로 말했다.
“제가 가진 수량은 서른일곱 개. 오늘 이곳을 떠나기 전! 여태까지 여러분이 보여주신 성원에 보답하고자, 동화 열 다섯 냥에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누군가는 돈이 없어 침만 삼켰고, 어떤 이들은 벌써 사겠다고 줄을 서고 있었다.
나는 아렉의 뒤통수를 쳐다봤다.
아아, 아렉 이 새끼는 나를 팔아먹을 계획이 다 있었구나.
어제 저 유리병에 변태 같이 히쭉거리며 물을 채우더니, 그거 시냇물이잖아 시벌롬아?
그냥 물 H₂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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