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명보트에서 살아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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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재
작품등록일 :
2024.09.02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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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9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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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2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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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침몰

DUMMY

막막한 바다 한가운데에서 일곱 쌍의 눈동자들이 바삐 움직이며 서로를 훑고 있다. 갑작스런 상황 속에서 서로 눈치를 보는 그 와중에도 거센 파도 속 위태롭게 떠 있는 구명보트는 아주 조금씩, 새까만 물 속을 향해 가라앉고 있었다.


“보트가 너무 무거워요. 이대로면 몇 시간 안에 침몰합니다.”


진혁이 먼저 침묵을 깼다. 지금의 보트는 무게 때문에 모터를 켜도 앞으로 나아가질 못하고 있었다. 아직 사고의 충격에서도 채 벗어나지 못한 다른 여섯 명의 사람들의 벙찐 표정이 더더욱 굳어졌다. 이제 막 다섯 살이 된 지후는 엄마 은정의 품 속으로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은정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어떡하죠···? 짐이라도 다 버려야 할까요?” 


진혁은 보트를 쭉 훑었다. 워낙 급박한 상황에서 탈출한 사람들이었기에 애초에 들고 온 짐도 많지 않았다. 옷가지나 휴대전화, 지갑 같은 자잘한 것들을 버리는 정도로는 택도 없을 터였다. 그렇다고 물이나 비상식량, 연료를 버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한 명 더 살릴 생각으로 버렸다간 일곱 명이 전부 굶어 죽을 것이 분명했다. 


“그 정도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애초에 다들 짐도 별로 없지 않습니까?” 짧은 스포츠머리를 한 건장한 청년이 진혁의 생각을 대변하듯 말했다.

“그럼 뭐, 다른 방안 있어요?” 은정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녀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했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낼 용기는 없었다.


누군가 한 명이 희생해야 한다.


잠깐의 정적 사이에 오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민희는 다른 사람들을 천천히 훑어 보았다. 이 6인승 보트에는 지금 현재 일곱 명의 사람이 타고 있었다. 이제는 저 아래 심연으로 사라진 여객선 마리아호의 선원이었던 젊은 청년, 어린 남자아이와 그의 어머니, 짧은 머리를 한 청년, 머리가 길고 수염이 덥수룩한 40대 남자, 깔끔하게 생긴 중년 남자, 그리고 자신까지. 여기서 만약 한 명이 희생해야 한다면 누가 될까.


민희는 적어도 자신이 우선순위는 아니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동시에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에게 약간의 실망감을 느꼈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이런 상황에서는 보통 젊은 남자가 희생하고, 여자와 아이들을 구하지 않던가? 타이타닉 같은 것만 봐도 말이다. 비록 이러한 전통은 비대칭적이던 성별 간 권력에서부터 기인한 일종의 ‘기사도 정신’ 이긴 하겠지만, 그걸로 내가 살 수 있다면 최대한 이용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불쾌했지만, 생존 앞에서 그 정도는 충분히 눈 감고 넘어갈 수 있었다. 


그래서 민희는 네 명의 남자를 주의 깊게 관찰했다. 이는 일종의 직업병이기도 했다. 소설가에게 주변의 모든 것은 소재이고, 또 분석하고 알아내고 이해해야 하는 존재들이니까. 벌써부터 리더의 아우라가 보이는 저 남자는 선원이다. 외관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나머지 세 사람은 겉으로만 봐서는 어떤 사람들인지 쉽게 짐작할 수가 없었다. 짧은 머리는 군인이나 운동선수 쯤 되어 보였고, 덥수룩한 머리는···노숙자? 예술가? 그리고 중년은 좀 배운 직업 같았다. 검사라던가, 교수라던가 하는. 그래서 민희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희 그러면···일단 통성명이라도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거라도 해야 무언가 진전이 있을 것 같은데요.”


그렇게 그녀를 시작으로 시계방향으로, 모두 각자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민희는 이 과정이 무슨 서로 상품을 팔기 위해 소개하는 과정 같다는 생각을 했다. 각자 자신의 상품인 본인 목숨의 가치를 열심히 설명하는 자리.


그녀는 간단하게 자신을 26살, 소설가 주민희 정도로만 소개했다. 그녀의 작품들이 딱히 유명한 것은 아니었기에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는 듯 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글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그녀를 썩 달가워 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워낙 괴팍한 글을 여태껏 써 왔으니까.


민희의 왼쪽, 남자아이를 품에 안은 여자의 이름은 임은정, 아이의 이름은 김지후. 그녀는 34살, 아이는 5살. 그녀는 맞벌이 중인 직장인이며 휴가를 내고 아이와 둘이서만 여행을 가던 중이었다. 민희는 그녀의 표정과 말투를 보며, 그녀 또한 자신처럼 안정감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했다. 확실히 아이와 어머니는 이 배에서 가장 생존 확률이 높은 조합이었다. 어느 누가 어린 아이를, 또는 아이의 어머니를 희생시키려 들겠는가?


그 다음, 덥수룩한 머리와 수염을 한 조금은 추례한 몰골을 한 남자는 자신을 40살, 장재혁이라고 소개했다. 사람들은 그의 직업을 궁금해 했지만, 불안해 보이는 표정과 벌벌 떠는 손이 너무 딱해 보여서 그 누구도 감히 물어보지 못했다.


짐작하기로는 백수, 노숙자, 또는 예술가 정도일 것 같았다. 분명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외관이지만 묘하게 자신과 공명하는 부분이 있는 듯 보이기도 했다. 저렇게 불안해 하는 건 아무래도 자신이 1순위라고 생각해서겠지, 하고 민희는 생각했다. 만약 백수나 노숙자라면 사회에 기여하는 바가 없다는 것이 그의 발목을 붙잡을 것이었다. 누가 희생을 자진하지 않는 한 이제 모두 자기가 살아온 삶의 가치를 증명해야 할 테니까.


그 다음은 아까 짐을 버리는 건 소용없을 거라고 말했던 건장한 청년이었다. 큰 덩치와 날카로운 인상을 자랑하는 이 청년의 이름은 정길현. 23살, 제대까지 1달도 채 남지 않은 말년병장. 마지막 휴가이니만큼 통 크게 해외여행을 가려는 것일까.


군인이라는 저 신분은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양날의 검이 될 것이었다. 직업군인도 아닌 병 신분이기에, 게다가 힘든 군복무를 이제야 다 끝내 가는 말년병장이기에 동정심을 유발할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자진해서 희생하기를 바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동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만약 누군가가 자진해서 희생한다면 이 사람이지 않을까, 하고 민희는 내심 생각했다. 군대에 대해서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보통 창작물에서는 군인이 자진해서 희생하고, 아군 진영에 떨어진 수류탄에 고민 없이 몸을 던지곤 하니까, 하는 막연한 생각이었다.


그의 옆, 배의 모터 옆에 앉은 남자의 직업은 모두가 이미 알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이진혁, 36살. 이제는 저 아래 심연으로 사라진 마리아호의 갑판수. 출중한 항해 능력을 가졌고 유일하게 뭘 해야 할지 아는 사람이었기에 모두의 생환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존재였다. 그가 없는 이 구명보트는 길 잃은 채 태평양 한복판을 배회하다가 마리아호와 역사를 같이 할 것이 분명했다. 민희는 내심 그가 부러웠다. 어찌 보면 생존이 거의 확정되었다고 볼 수도 있으니까.


진혁은 자기 소개보다는 상황 설명에 더 많은 시간을 쏟았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지금 여기서 가장 가까운 육지는 태평양 한가운데 있는 웨이크 섬이라는 곳으로, 모터만 작동된다면 5일 정도만 버티면 갈 수 있는 거리이다. 그곳에 도착하기만 한다면 모두 구조될 수 있을 것이며 구조대를 기다리는 것보다 이 쪽이 훨씬 생존 확률이 높을 것이었다.


다만, 선상에 식량이 얼마 없고 물 또한 인당 생수 두 병 정도밖에 없기 때문에 쉽지 않은 여정이 될 것이라는 점, 그리고 모터가 작동하려면 일단 무게를 줄여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소개를 마쳤다.


마지막, 뿔테 안경을 쓰고 정장을 입은 중년 남성. 이름은 김형남이고 나이는 62살, 직업은 목사. 지적인 생김새를 보고 민희는 그의 직업을 검사나 회계사 정도로 짐작했기에 목사는 예상 밖이었다. 목사라면 자진해서 희생을 하겠다고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예수처럼 모든 죄인을 구원하지는 못하더라도, 여섯 명을 구원하는 정도면 희생할 법 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는 이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이기도 하니까, 어쩌면 삶에 미련같은 게 별로 남아있지 않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모두의 자기소개가 끝나자 다시금 침묵이 그들을 덮쳤다. 방 안의 코끼리에 대한 얘기를 대놓고 꺼내는 건 생각보다 많은 용기를 요하는 것이었다. 누가 봐도 희생할 일 없을 법한, 후순위인 사람이 그 얘기를 꺼내는 것은 죄악일 것이고 위험군에 속한 사람이 얘기를 꺼내는 것은 자살 행위일 것이었기에.


모두의 눈길이 이리저리 흔들리다가, 이내 이 중 가장 리더같은 사람에게로 집중되었다. 진혁은 여섯 쌍의 눈동자 앞에서, 정말 맡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이 작은 사회의 리더가 되어야 했다. 그는 근원을 알 수 없는 구역감을 참아 내며 말을 꺼냈다. 


“모두가 살기 위해서는 한 명이 희생해야만 합니다. 누군가 자진해서 희생을 해 주신다면 정말 너무나 감사하고 또 죄송스러운 일이겠지만, 만약 그 누구도 자진하지 않는다면 투표를 해서라도 한 명이 내려야 할 것 같습니다. 생명의 가치를, 그 무게를 재고 견준다는 게 저로써도 정말 힘들고 하기 싫은 일이지만, 지금의 상황에서는 그것밖에 방법이 없을 것 같습니다. 일단···혹시 자원하실 분이 계실까요.”


말을 마친 진혁이 보트를 훑어 보았지만 누구도 손을 들지 않았다. 공기가 싸늘해진 것은 저물어 가는 태양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바다 한가운데였기 때문일까. 차가운 공기가 모두를 짓눌렀다. 


작가의말

처음 연재해봅니다. 원래 다른 곳에 써보던 글인데 최대한 여기저기 올려보고 싶어서 와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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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18] 서서히 다가오는 NEW 6시간 전 2 0 9쪽
17 [17] 구조대 24.09.13 2 0 8쪽
16 [16] 비극 앞에서 인간은 24.09.12 9 0 9쪽
15 [15] 두 개의 이름 24.09.11 8 0 10쪽
14 [14] 주마등 24.09.10 10 0 8쪽
13 [13] 비장의 한 수 24.09.09 9 0 8쪽
12 [12] 일촉즉발 24.09.06 7 0 8쪽
11 [11] 미싱 링크 24.09.06 7 0 9쪽
10 [10] 모성애 24.09.06 6 0 10쪽
9 [9] 1보 전진 1보 후퇴 24.09.06 7 0 10쪽
8 [8] 투쟁 그 끝에는 24.09.05 9 0 10쪽
7 [7] 선의의 거짓말 24.09.05 8 0 10쪽
6 [6] 자기희생 24.09.04 10 0 10쪽
5 [5] 생존 본능 24.09.04 9 0 10쪽
4 [4] 궤변 그리고 분열 24.09.03 9 0 9쪽
3 [3] 살인자의 회고록 24.09.03 7 0 9쪽
2 [2] 살아야 하는 이유 24.09.02 13 0 9쪽
» [1] 침몰 24.09.02 24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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