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사자, 고려에서 깨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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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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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02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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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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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DUMMY

나는 그 뒤로 개경에서 좀 더 머무르며 신변 정비와 동시에 동북면으로 갈 준비도 조금씩 해 두었다.

이번에 가게 되면 그곳에서 몇 년을 있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 한 달쯤 준비한다고 해서 내게 뭐라고 하는 이는 없었다.

내가 아니더라도 지채문 상장군부터 준비할 것이 많아서 바로 임지로 부임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사이 해는 바뀌고 을묘년(乙卯年, 1015년)의 새해가 밝았다.

가족을 모두 잃어 함께 명절을 지낼 사람도 없는 나는, 임억과 둘이서 새해와 대보름을 함께 쇠었다.

물론 중추사 강감찬의 집에 머물고 있느니만큼, 그 집에서 그동안 명절 음식도 잘 나누어 주고 대접을 잘 해 주기는 했다.

그러니까 그냥 쓸쓸하게만 명절을 보낸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개경에서 한두 달을 보내고 나서, 내가 화주(和州)에 도착했을 때.

내 공식적인 지위는 장군(將軍)으로서 화주방어사(和州防禦使)를 겸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내 동북면 도순검사(都巡檢使)로 나와 함께 부임해 온 지채문 장군이 대번병마(大番兵馬)의 직을 받들어 동북면 지병마사(知兵馬事)에 임명되면서 화주에 병마사부(兵馬使府)를 설치하게 되었고, 덩달아 나도 그 보좌직 격인 병마부사(兵馬副使)까지 겸직하게 되었다.

병마부사는 원칙상 4품관이므로 5품관인 나와는 대품(對品: 품계와 관직이 일치함)이 맞지 않았지만, 적임자가 따로 없다는 이유로 내가 직급보다 높은 품계를 맡게 되었다.

어차피 장군으로 관직을 올려 받을 때부터 품계는 함께 올리지 않았기에 이미 대품이 맞지 않는 상황이었다.

어쨌든 그런 상황이니 엄밀히 말하자면 그냥 병마부사(兵馬副使)는 아니고 수병마부사(守兵馬副使)라고 할 수 있었는데, 앞에 붙은 수(守)는 행수법(行守法)에 따라 관직을 맡은 이가 관직의 품계에 비해 낮은 품계라는 것을 말한다 (반대로 행(行)이 붙으면, 관직을 맡은 이가 관직의 품계에 비해 높은 품계임을 말한다).


다만 진짜 문제가 되는 건 내가 품계보다 높은 병마부사 자리를 맡은 것보다도, 이것이 이름에서 느껴지는 것과 다르게 무관직(武官職)이 아니라 문관직(文官職)이라는 점이었다.

이러한 배경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애초에 병마사라는 것이 단순히 군대의 통솔을 위함만이 아니라 동북면의 행정도 함께 살피는 외관직(外官職)의 성격을 동시에 갖고 있다는 점이고, 둘째로 군사 지휘의 최상부는 무관이 아니라 문관이 맡아야 한다는 암묵적인 원칙이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문관이 무관직을 겸직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흔하지만, 그 반대는 사실 흔하지 않았고, 때문에 내 병마부사 겸직이 개경에서 문제가 되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는 어느새 소리 소문도 없이 무마되었는데, 애초에 병마사인 지채문부터가 무관 출신으로 문관직을 겸직한 상황으로 이미 예외가 만들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앞서 병마사가 되기 전에 무관직으로 이해되는 도순검사로서 동북면에 부임해 오긴 했지만, 이전에 이미 정3품 우상시(右常侍)에 임명되어 무관임에도 문관직을 가질 수 있도록 허락을 받은 상황이었다.

사실 두 차례의 여진과의 전쟁을 거치면서 무관들이 특히 공로를 세우거나 신임을 사서 예외적으로 문관직에 보임(補任)되는 사례들이 드물어도 종종 있어 왔고, 그런 예외를 들어 개경에서 강감찬 등이 내 병마부사 임명에 강하게 찬성을 했던 모양이다.


여하간 그런 특혜를 받아 병마부사라는 관직까지 나아가게 되었지만, 이것은 실제로 내가 바라던 것은 아니었다.

화주 방어사로서의 일도 쳐내기 벅찰 정도인데, 동북면 전반의 일을 다루어야 하는 병마부사로서 해야 하는 일은 그 이상이었다.

그야말로 동북면의 모든 사무가 지채문에게 올라가기 전에 내 손을 한 번씩 다 거친다고 보면 될 일이었다.

일이 일이다 보니, 이걸 여전히 화주군 낭장(郎將)에 불과한 임억에게 떠넘기는 것도 가능하지 않았다.

휘하에 주어진 두 명의 병마판관(兵馬判官)과 네 명의 병마녹사(兵馬錄事)와 더불어 나는 실질적으로 동북면의 군사와 행정 실무를 두루 보아야 했다.


“자네가 어지간한 과거 출신 관리들 못지않게 글에 능숙하니 그야말로 다행일세. 내 자네가 이런 인재인 줄 진즉에 알아보았지.”


그리고 애석하게도 내 상관인 지채문 상장군은 그런 나를 알뜰살뜰하게 잘 이용하고 있었다.

더 좋게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실제로 그랬다.

지채문은 지난 전쟁 때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끝까지 충의로 임금의 몽진(蒙塵) 길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켰던 무장이었고, 그런 이유로 임금의 큰 신의를 산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냥 충성스럽고 끝인 것이 아니라, 지략(智略)도 있고 무예도 뛰어났으니, 무관으로서는 상당한 인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조차도 이런 행정 실무에는 사리가 밝지 않았고, 글과 문서를 다루는 데 부족함이 있었다.

그러니 무관임에도 그런 일을 의외로 능숙하게 잘 처리하는 나를 부관으로서 잘 이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진과의 거래를 위한 각장(榷場)을 설치하는 일에 대해서 개경에서 비답(批答)이 내려왔습니다.”


물론 여기에도 한 가지 장점이 있긴 했는데 가장 큰 목적인 중기병 양성을 위한 실무를 처리하는 데 있어서 여기저기 손을 벌릴 필요 없이 큰 틀에서 내가 모든 일을 주관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이번 일 만큼은, 동북면 병마사의 권한으로 임의로 처리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서 개경에 상신(上申)을 올려야 했다.

다름이 아니라 여진으로부터 말을 대대적으로 사들이기 위해서 국경 시장이라 할 수 있는 각장을 설치할 계획이 있었고, 이것은 당연히 조정의 재가를 필요로 할 정도의 일이었다.

그리고 조정에서 그 응답이 오늘 내려온 것이었다.


“그래서, 개경에서는 뭐라고 하던가?”


아무리 실무를 나한테 거의 맡겨 놓고 있다고 하지만, 중기병 양성은 병마사에게 있어서도 매우 각별한 관심사였다.

그와 관계된 일 중에서도 수위를 다툴 만큼 중요한 일이니 지채문도 바로 자세를 고치고 앉아서 물어 왔다.


“각장을 두어 보되 아직 항례(恒例)로 삼지는 말고 시범적으로 양순한 동여진(東女眞) 부락들에게만 거래를 허락해 주어 시범적으로 운용해 보라고 합니다.”

“애매한 응답이군. 일은 벌여 보되 잘못되면 우리가 책임을 지라는 이야기일 것이네.”


지채문이 예리하게 위에서 내려온 응답의 맹점을 짚었다.

내가 생각해도 조정의 생각이 그것과 크게 다를 것 같지는 않았다.

도대체 그저 국경에서 여진족과 거래를 좀 하는 데 있어서 문제가 될 소지가 무엇이 있겠느냐 싶지마는, 그게 그렇게 단순한 문제는 아니었다.

내가 여기 오기 전에 거란이 성을 쌓는 것을 막아 낸 의주(義州), 그러니까 거란 측에서 이르는 보주(保州)는 사실 지난 전쟁으로 완전히 폐지되기 이전에는 고려와 거란이 거래하던 각장이 설치되어 있던 곳이다.

이런 국경 시장은 당연히 일반적인 시장과는 의미를 달리했다.

거란이 그곳에 각장을 설치했던 이유는, 그곳을 잠재적으로 자기 영토로 굳히고자 하는 야욕을 그때부터 보였기 때문이었다.

거란은 이 각장을 통해서, 고려뿐만 아니라 압록강 유역의 서여진(西女眞)과의 국제 거래를 거란 쪽에 유리하게 통제하고 국경 바깥의 정보를 탐측하는 용도로 이용하기도 했다.


그런 실정이었으니 만약 고려 측에서 동여진을 상대로 이곳 동북면에 각장을 설치한다면 그 목적이 거란이 가지고 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 있었고, 실제로도 그런 의도가 전혀 없다고 할 수 없었다.

단순히 동여진과 거래를 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동여진을 제어하려는 수단으로 삼게 될 것이며, 당연히 이는 여진에 대한 고려의 영향력을 일체 인정하지 않는 거란으로 하여금 심기를 불편하게 할 것이다.

좀 지나치게 말하자면, 일이 잘못될 경우, 이 각장은 거란이 또 다른 전쟁을 일으키기 위한 명분으로 활용될 수 있었다.

고려의 조야(朝野)는 모두 전쟁을 각오하고는 있었지만, 만약 그 전쟁을 지채문과 고의신 정도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워서 회피할 수 있다면, 국익을 위해서라도 개경 조정은 반드시 그리하고도 남을 것이다.


“좀 위험해 보이기는 하지만 내 생각에 이 일은 그래도 반드시 진행해야 할 걸세.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지채문의 물음은 많은 것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일이 잘못될 때를 걱정해서 해야 할 것을 못 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가족이 모두 거란군의 손에 도륙된 뒤로 고의신의 가장 큰 목표가 된 것.

그리고 이제 내 목표기도 한 것은, 바로 거란군에게 가족의 죽음을 복수하는 것이었다.

솔직히 얼마나 거란군 목을 베어 대야 이 복수가 이루어질지는 몰랐지만, 내가 충분히 했다고 생각될 때까지는 이 복수를 멈출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중기병 양성은 내 복수를 위해서, 더 나아가 전쟁의 반복을 저지시킬 고려의 대승을 위해서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었다.


“해야지요. 말을 조금씩 사들여 오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아무리 짐승이라지만 흘레붙여서 번식시키는 데는 시간이 걸리니 여기에 만족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곡식과 재화를 각장을 통해서 대량의 말과 거래를 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기병을 양성하는 데도 필시 큰 전진이 있을 뿐 아니라, 장기적으로 여진이 가진 말의 수를 줄여 동북방 국경을 안정시키는 일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

이번 일에 있어서 물러설 이유는 없었다.

이것을 할 게 아니라면, 내가 애초에 동북면까지 와야 할 이유가 무엇이었단 말인가.

그리고 그런 내 생각은 병마사 또한 공유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 자네 말이 옳네. 이건 반드시 우리가 동북면에 있는 동안 해내야만 할 일일세.”


***


각장을 새롭게 펼 곳으로는 여러 곳이 물망에 올랐는데, 모두 화주(和州) 이북에서 새롭게 척경(拓境: 경계를 넓힘)한 곳들이었다.

처음에는 화주 바로 북쪽, 본래 여진과의 경계가 있던 가림(椵林)이라는 곳에 각장을 둘까 생각했으나, 조정에서 이곳에 장주(長州)라는 고을을 두고 성을 쌓은 뒤 방어사(防禦使)를 파견할 계획이라는 것을 알려 온 뒤로 즉시 후보지에서 제외했다.


조정에서 명확하게 지시한 것은 아니지만, 이미 손에 넣은 가림 일대가 아니라, 여진과의 경계를 북쪽으로 조금 더 밀어 올린 곳에 각장을 설치하라는 의도가 다분히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다음으로 고민한 곳이 바로 파지(巴只) 혹은 선위(宣威)라고도 하는 가림의 동북쪽 지역, 그리고 그보다 북으로 더 올라간 발해의 옛 정주성(睛州城) 구지(舊地)였다.


제대로 된 측량법과 지도 제작법이 부재한 만큼 동북면과 그 경계 바깥을 그린 지도가 알아보기 형편없기는 했으나, 내가 대충 어림해 보기에는 그 발해의 정주(睛州)가 설치되었던 성 일대가 대충 미래의 함경도 함흥(咸興) 일원에 해당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이번에 각장을 어디에 설치하는가의 문제는 여진과의 경계를 어디서 굳힐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했다.


그러니 당연히 이걸 우리 맘대로 정해 버리는 것은 힘들었다.

여진을 일방적으로 제압하고 말을 듣게 할 것이 아니라면, 이걸 결정하는 데는 결국 여진족들의 의견도 중요했다.


때문에, 나는 결정을 서두르는 대신에, 발해인(渤海人)으로 여진인들과 섞여 살다가 십여 년 전에 내투(來投)한 장포(張鋪)라는 자를 불러 들어 여진인들과의 협상 전면에 내세웠다.

그는 이제 백두산(白頭山) 남쪽으로는 거의 남아 있지 않은 발해인(渤海人) 취락(聚落) 가운데 하나 출신이었다.

젊은 시절부터 고려와 여진족 부락들을 오고 가며 상업에 종사하던 이였고, 때문에 동여진 부락(部落)들에 대해서는 남들보다 상세하게 알고 있는 자였다.

물론 여진어에도 능숙함은 물론이고 말이다.

그를 나중에 각장을 열게 되면 사소한 이권을 떼어 주겠다는 구실로 적극적으로 움직이게 만드는 작업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우선 한 말씀 올리자면, 여진인들은 믿을 수가 없는 자들입니다. 특히 여기 동북면 바깥 갈라전(曷懶甸)에 자리한 동여진삼십성(東女眞三十姓)은 대부분이 옛날 백산말갈(白山靺鞨) 족속으로 원래 백두산 북쪽과 갈라하(曷懶河)와 통문하(統們河, 두만강) 바깥에 살던 자들이 구국(舊國, 발해)이 멸망한 이후에 하나둘 내려와 자리를 잡은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이 옛 발해 사람들을 모두 밀어내거나 못살게 군 탓에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등지고 상국(上國, 고려)으로 귀부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것입니다. 남의 땅을 밀어내고 차지하는 습속부터가 고약하기 짝이 없는 자들이니 신의를 주고 믿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가만 보니 여진인들을 오래 상대한 것 치고 장포는 그들에 대한 악감정이 상당해 보였다.

지금은 동여진이 차지한 갈라전이란 땅은 본래 발해의 5경(京) 가운데 하나인 남경남해부(南京南海府) 속지(屬地)로 발해의 다른 곳에 견주어서도 말갈인들의 수가 적고 옥저(沃沮)로부터 이어지는 예인(濊人)들, 그러니까 고구려 계통의 민호(民戶)가 다수를 차지한 곳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거란의 침공으로 나라가 망하면서 이곳은 권력의 진공 상태가 되어 일부는 거란에 끌려가 요동 각지에 사민(徙民)되고, 일부는 또 고려로 내투해 들어오고, 또 일부는 발해 부흥을 내세운 정안국(定安國) 등에 합류하거나 하면서 이리저리 흩어지고, 그 빈자리를 통문하(두만강) 유역에 살던 백산말갈 ― 곧 지금의 동여진 일파가 내려와서 채운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아무리 발해라는 이름 아래에서 함께 섞여 살았다고는 해도, 막상 나라가 망한 다음에 그 과정이 그리 평화롭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장포가 여진인들에게 그다지 좋은 감정이 있지 않다고 해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그리고 그의 말이 꼭 그른 것도 아니었다.

실제로 갈라전의 동여진 삼십성(三十姓)은 저들 유리할 때는 한데 뭉쳐서 권리를 주장하고, 불편한 일이 생기면 자기들이 한 덩어리가 아니라 서른 성씨로 나뉘어 있으니 자기 일이 아니라며 발을 빼기 일쑤였다.

어떤 때는 고려로 들어와서 신속(臣屬)을 청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거란에 조공(朝貢)하기도 했다.

그러다 때로는 고려에다가 거란 정보를 흘리기도 하고, 거란에다가 고려 정보를 흘리기도 하는 등 중간에서 종종 이간질까지도 하는 것이다.


그렇게 거란은 이들을 장백산삼십부여진(長白山三十部女眞)이라고 해서 자기들 속부(屬部)로 취급하고, 고려는 고려대로 이들을 동여진(東女眞)이라 부르면서 기미(羈靡)를 시행하고 있었다.

고려와 거란 모두가 이들이 자기들에게 예속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물론 이 여진족 무리들은 거란과 고려 사이에서 표리부동(表裏不同)하게 자기들 이익만 셈할 뿐이지만 말이다.


그들이 이익이 되는 일이기만 하면 무슨 일이든지 가리지 않는다는 것은, 최근에 활개 치는 동여진 해적들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갈라전의 장백산 여진 가운데 일부는 그들보다 북쪽에 자리한 보다 강대한 여진 세력인 포로모타부(蒲盧毛朵部, 여진어: *Fulmudo)의 동해 전체를 무대로 한 해적질에 함께 참여하고 있었다.


이 동여진 해적들은 근래 들어서 특히 동해안(東海岸) 여러 고을에서 문제가 되고 있었는데, 동해안 고을들이 이들에게 입은 피해가 그동안 적잖았다.

거란과의 국운을 건 싸움의 연속으로 인해 나라의 역량이 서북면에 집중되고 있긴 했지만, 이곳에서도 보이지 않는 전쟁이 길게 계속되고 있는 셈이었다.


“우리의 목적은 분명하네. 저들이 원하는 곡식과 저포(苧布) 따위를 건네주고 말을 최대한 사들이면 되네. 그들이 우리와 신뢰 관계를 구축하지 못하더라도, 이러한 거래가 자기들에게 이롭겠다는 생각만 할 수 있게 만들면 될 것일세.”

“그 정도는 충분히 가능합니다. 갈라전 땅이 농사를 짓기에 그다지 좋은 땅은 아니라 쌀은 농사지을 수도 없고 오직 조, 피, 보리, 수수, 귀리에 의지할 뿐이라 늘 곡식이 부족하고, 그 땅에서 삼과 모시가 드물게 나기는 하나, 여진인들이 베를 짜는 기술이 좋지 못해 쓸 만한 직물을 만들지 못합니다. 더욱이 그곳에서 비단은 매우 귀하여 부르는 것이 값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원하는 이런 것들을 가져다주고 말과 바꾸자고 하면 종래에는 응하기는 할 것입니다. 다만 그들도 교활할지언정 어리석지는 않습니다. 필시 갈수록 각장에 의지하게 되어 고려가 원하는 대로 휘둘리게 될 것을 우려할 것입니다.”

“그 점은 당장 고려할 것은 아닌 것 같네. 그런데 앞서 자네의 말대로 저들이 하나의 부족이 아니라면 저들끼리 의견의 일치를 보기는 힘들지 않겠는가?”

“그건 그렇습니다. 저들이 삼십 부락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을 잘 이용해 보겠습니다. 설령 협상이 잘되지 않더라도 일단 이쪽에서 각장을 열고 보면 아마 그들 가운데 일부는 이익을 취할 생각에 눈이 멀어 각장에서 거래를 트고자 할 것입니다.”


나는 어차피 다른 대안도 없었기에 일단 장포를 믿고 일을 진행해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사실 그가 제안하고 있는 것은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제공하고 상대방이 내부에서 의견 통일을 못 보도록 이간질하겠다는 고전적인 전략이었다.

그러나 때로는 고전적인 것이 가장 효과적일 수도 있는 법이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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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6

  • 작성자
    Lv.59 인두리
    작성일
    24.09.17 18:19
    No. 1

    냉병기 전쟁에서 초인을 제일 잘 써먹는 방법은 중기병인듯
    정예 중기병 양성해서 들이박으면 뭐 버티는 군대가 없을듯ㅋㅋ 초인이 선두에서 다 찢는데 이길 재간이 없지

    찬성: 7 | 반대: 0

  • 작성자
    Lv.56 칼즈낙
    작성일
    24.09.17 19:01
    No. 2

    사실 동아시아 최대 분탕 빌런이 여진족이죠. ㅈ같은 돼지꼬리 머리에 달고 댕기면서 만주땅에 남아있는 고구려의 정체성(발해인 포함)을 약탈과 금나라로 맥이 끊기게 만들고, 나중에 청나라때는 만주땅 전체를 곱게 포장해서 바퀴벌레같은 한족들한테 갖다 바쳐버리죠.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91 강아지똥떡
    작성일
    24.09.17 19:08
    No. 3

    ㅈㅂㄱㄱㅇ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4 대역
    작성일
    24.09.17 19:14
    No. 4
  • 작성자
    Lv.22 David.N.
    작성일
    24.09.17 22:07
    No. 5

    주인공이 쓰는건 단순한 전략입니다

    바로 "당근과 철퇴"로 당근을 안먹는 놈들은

    철퇴로 대가리를 깰 것입니다

    찬성: 3 | 반대: 0

  • 작성자
    Lv.43 조졸졸
    작성일
    24.09.17 23:06
    No. 6

    재밌어요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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