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작 인간일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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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민
작품등록일 :
2024.09.02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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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2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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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2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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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인간일 뿐인데

DUMMY

***



마왕 케인 데 레자르.

마계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마계에 군림하고 있는 마왕.


큰 키에 매섭게 찢어진 눈매.

딱 벌어진 어깨와 탄탄한 근육.

중저음의 허스키한 보이스.

누가 보아도 단숨에 겁을 먹을 만한, 압도적인 무력이 느껴지는 외관과 목소리.


거기에 더해지는 무표정의 얼굴은 그를 더더욱 강하고 고독하게 연출했다.

케인의 얼굴에서 미소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케인은 웃지 않았다.

아니, 웃을 수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케인은 반란을 일으켜 선대 마왕을 죽이고 마왕의 자리에 올랐다.

그 몇백 년의 시간 속에서 그는 감정이란 것을 잃었다.


가장 소중했던 가족과 연인을 잃었다.

평생 함께 할 것이라 믿었던 동료들을 잃었다.

자신의 편이라 믿었던 배신자들을 제 손으로 처단했다.


수십 리터의 피를 제 손에 묻힌 케인의 눈동자는 시간이 갈 수록 빛을 잃었다.

그리고 마침내 선대 마왕을 죽이게 된 순간.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마계에서 가장 큰 성, 마왕 성.

그는 언제나 그곳에 앉아 있다.


거대한 성엔 주인을 제외하면 단 한 사람만이 드나들었는데.


“마왕님!”


바로 보좌관 데스탈리온.

옆에 다른 마족을 두기 싫어하는 마왕이 유일하게 곁을 허락한 남자.

마왕 케인과는 다른 유순한 성격으로, 실제로 부드러운 얼굴엔 미소가 끊이질 않았다.

덕분에 마계의 많은 이들에게 연심과 호감을 얻고 있었다.


“왜?”

케인의 입이 차갑게 열렸다.

제아무리 유일하게 곁에 둔 보좌관이라도 마왕의 차가운 목소리를 피해갈 순 없었다.


그래도 이는 많이 발전한 것이었다.

원래 케인은 그 누구에게도 대답은커녕, 말조차 하지 않았으니까.

케인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대답하게 된 것은, 데스탈리온의 엄청난 노력의 성과였다.


“하렌 가문의 영주 아들이 군대를 이끌고 찾아왔습니다”

데스탈리온이 눈으로 마왕 성 밖을 가리켰다.


“알겠다.”

케인은 무표정으로 왕좌 옆에 놓여 있던 검을 집어 들었다.


“본보기로 절반은 죽이시죠. 안 그러면 계속 찾아올 겁니다. 얕보이고 있는 거라는 거 아시잖아요!”

데스탈리온이 간절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상관없다”

케인이 짤막하게 대답하고는 성문을 열었다.


거대한 성문이 끼익 소리와 함께 열리며 바깥의 햇볕이 들어온다.

덕분에 어둡던 마왕 성의 내부가 밝게 비쳤다.


마왕 성 넓은 내부의 창문은 모두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다.

내부를 밝히는 건 고작 일정하게 걸린 은은한 촛불뿐이었다.


성문에서 이어진 넓은 광장.

모든 바닥이 마계의 광석으로 만들어진 광장은 하얗게 빛을 발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광장의 위에 수백 명의 기사가 검을 빼 들고 서 있었다.


“위대하신 마왕님을 뵙습니다”

맨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한 남자.

고개를 숙이자 긴 머리가 땅에 닿을 듯 찰랑거리며 내려갔다.


“인사는 됐다. 어차피 날 죽이러 온 것 아닌가?”

케인이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그래도 예의는 지켜야지요. 신, 하렌 웨이드 감히 마왕님께 결투를 요청합니다”

“결투라기엔 뒤에 병사들이 많군”

“공정한 결투라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 알겠다.”


하렌 웨이드의 눈이 광기로 물들었다.


“자, 그럼. 모두 위대한 케인 님께 검을 들어라”

웨이드의 말이 끝나자마자 수백 명의 기사가 고함을 지르며 케인에게 뛰어들었다.


고달프구나.

나는 이런 삶을 원했던 것인가.

이게 내가 그토록 눈물겹게 원했던 마왕의 삶.


케인이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 웃음에는 어떠한 감정도 없었다.

오로지 자기 자신을 향한 떫은 연민만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귀족들이 마왕의 자리를 얻기 위해 케인에게 반역을 일으키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선대 마왕까지만 해도 그런 일은 거의 없었지만, 유독 케인이 마왕이 되며 잦아졌다.


케인 또한 반란을 일으켜 마왕의 자리를 얻었기 때문일까.

많은 가문의 영주가 군사를 이끌고 케인을 향해 검을 겨눴다.


그럼에도 케인은 한 번도 그들을 죽인 적이 없었다.

충분히 모두를 죽일 수 있는 힘이 있음에도, 케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또다시 마족들을 자신의 손으로 죽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마족들이 이 사실을 알 리가 없을 터.

마족들은 케인을 그저 살육을 못 하는, 이빨 빠진 호랑이라고만 생각했다.


까앙-

날카로운 금속 소리가 마왕 성 전체를 울린다.

끊이지 않는 칼질, 여기저기서 날아오는 마법.


그런 광경을 멀리서 지켜 보고 있는 보좌관 데스탈리온의 눈동자가 슬프게 물들었다.


“마왕님···”


대체 왜일까.

현 마왕인 케인은 권력 남용과 횡포를 일삼던 선대 마왕들과는 달랐다.

많은 이들에게 베풀려고 했고, 억압보단 자유를 주었다.


호의를 악의로 갚는다는 말은 이럴 때를 두고 하는 말이군.

당장이라도 끼어들어 전투를 돕고 싶지만, 그럼 또 혼나겠지.


케인의 명령이었다.

데스탈리온은 어떤 일이 있어도 모든 전투에 참전하지 말 것.


데스탈리온이 약해서가 아니었다.

마왕의 보좌관을 몇백 년 동안 해낼 만큼 충분히 강했다.

검술이면 검술, 마법이면 마법.

모든 것을 준수한 실력으로 다뤘다.


데스탈리온이 검을 쥐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하나.

케인 데 레자르의 지독한 걱정이었다.


“됐나?”

케인이 검을 검집에 집어넣으며 물었다.


“어, 어?”

주변을 돌아본 하렌 웨이드가 당황했다.

순식간에 수백의 정예 병사들이 바닥에서 나뒹굴고 있었으니 당연했다.


“경은 덤비지 않나?”

“으, 으악!”

케인이 손가락으로 웨이드를 가리키자, 웨이드가 꽁무니 빠지게 도망갔다.

아마 손가락에서 마법이 뿜어져 나오리라 생각했겠지.


마왕은 그런 웨이드를 무표정으로 바라보다가 등을 돌렸다.

터벅터벅 마왕 성의 문으로 다시 걸어가는 케인의 뒷모습은 왠지 유난히 고독해 보였다.


“다녀오셨습니까”

케인이 가까이 다가서자 문이 저절로 열리며 데스탈리온이 인사했다.


“피곤하군”

“목욕물을 준비해뒀습니다. 편하게 쉬시죠”

“고맙다”


케인이 두르고 있던 망토를 벗어 데스탈리온에게 건넸다.

그리고는 마왕 성의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 케인의 모습을 바라보던 데스탈리온이 성 밖으로 나섰다.


“어이- 하렌 가의 개들아”

데스탈리온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방금전까지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와 목소리.


광장에 쓰러져 있던 하렌 가의 병사들이 공포심에 질린 얼굴로 데스탈리온을 바라봤다.

데스탈리온을 바라보는 모두의 몸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단지 목소리만 들었음에도 생존 본능이 온몸에 도망치라고 경고했다.


“마지막 경고다. 다음에도 또 찾아온다면 마왕님이 아닌 내가 직접 나서지. 마왕 성에 도달하기도 전에 너희의 목을 모조리 자르겠다.”

“··· 예”

“목소리가 작군. 마왕님이 다시 나오시기 전에 모조리 죽여줄까? 너희의 몸을 흔적조차 남지 않게 없애는 건 일도 아니거든. 난 너희가 회개하여 돌아갔다고 보고하면 그만이야.”

“예!!!!!”

“예!!!!! 다시는 반란을 일으키지 않겠습니다!!”


저마다 고함을 지르며 줄행랑을 친다.

곧, 광장에서 생명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항상 뒷정리는 내 몫이란 말이지”

데스탈리온이 한숨을 쉬고는 주위를 둘러봤다.


처참하게 부서진 바닥 타일들.

여기저기 떨어져 있는 검의 파편들.

사방에 튀어있는 핏자국들.


다시 한숨이 나온다.

이거 다 언제 치우냐?


어? 잠깐.

동쪽에서 느껴지는 이 기운은-


“마계가 열렸다.”


케인이 언제 나왔는지 데스탈리온의 옆에 나타났다.


“역시 제가 잘못 느낀 게 아니었군요”

“위치는 절망의 절벽. 인간인가?”

“인간이요?”

“내가 다녀오도록 하지”

“제가 가겠습니다”


데스탈리온은 자신을 바라보는 케인의 눈동자와 마주했다.

그리고는 이내 단념했다.


“예, 다녀오시죠. 어떻게 제가 마왕님의 뜻을 거역하겠습니까”

“레자르라고 편하게 부르라니까”

“됐습니다. 그게 더 불편해요”

“알겠다.”


케인의 등 뒤로 거대한 날개가 펼쳐졌다.

날개는 마왕의 상징.

데스탈리온을 포함해 일개 마족들은 절대 펼칠 수 없는, 마왕만의 고귀한 상징이었다.


“목욕은 다녀와서 하도록 하지”

“식기 전에 다녀오세요”


거대한 날개가 펄럭이자 주위에 거센 바람이 일었다.

곧, 케인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



같은 시각, 마계의 끝.

절망의 절벽.


위로나 아래로나 끝이 보이지 않는 절벽에 누군가 매달려 있었다.

긴 생머리의 여자가 떨어지지 않으려 손톱에서 피가 나도록 절벽의 모퉁이를 꽉 잡고 있었다.


“사, 살려주세요!!”

여자의 울음 섞인 목소리는 주위 마물의 시선을 끌기 충분했다.


“까---악”

하늘을 날아다니던 기괴하게 생긴 거대한 새 마물이 여자를 먹잇감으로 포착했다.

그대로 날개를 접고 빠르게 하강하는 마물.


“꺄아아악!!”


이대로 죽는구나.

뭐, 여기서 죽으면 내가 죽었다는 걸 아무도 모르긴 하겠네.

다행인 건가.


여자는 눈을 질끈 감았다.


···.

어라?

왜 몸이 아프지가 않지?

아픈 것도 못 느낄 정도로 단번에 죽은 건가?


그나저나 죽으면 몸이 하늘로 떠오른다는 말은 사실이었구나.

가볍게 하늘로 올라가는 느낌.

꽤 나쁘지 않은 느낌이네.

천국이 있다면 조금만 멀길.


근데 왜 어디선가 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


여자가 눈을 살며시 뜬다.

가늘게 열린 눈은 자신을 안고 있는 한 남자를 포착했다.

남자는 등에 달린 거대한 날개로 공중을 날고 있었다.


“꺄, 꺄악!”

여자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그에 남자가 무미건조한 눈동자로 여자를 바라봤다.


“일어났군”

“누구세요? 인간이세요?”

“인간처럼 보이나?”

“아니요! 아니니까 물어봤죠!”

“···”


남자는 그런 여자를 안은 채 땅에 착지했다.

끝이 보이지 않던 절벽의 위로 올라온 것이다.


“넌 뭐지?”

“제가 먼저 물었는데요”

“여긴 마계. 한낱 인간이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인간 주제에 어떻게 마계의 틈을 연 거지?”

“마계요? 무슨 소설도 아니고 진짜 웃기다! 하하! 하하하..”


웃으며 주위를 둘러보던 여자의 얼굴이 점점 굳기 시작했다.


빨갛게 물든 하늘, 검은색의 달.

기괴하게 생긴 나무들과 벌레들.

설령 마계라는 게 있다고 하면 정말 이곳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곳이었다.


"진짜 마계예요? 마족들이 사는 그런···?"

"그렇다"

“멋···”

“?”

“멋있잖아!”


여자가 초롱초롱해진 눈으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케인은 그런 여자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봤다.


케인이 인간을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반응을 보이는 인간은 처음임이 확실했다.

보통은 마계에 들어오게 되면 공포감과 절망감에 휩싸이게 되었으니까.


“그럼 그쪽은”

“난 마···”

“괴물이죠? 마계에 사는 건 당연히 괴물이니까”


케인이 대답하기도 전에 여자는 자신의 추리를 확정 지었다.


“괴물?”

“아닌가요? 아까 그 날개도 그렇고! 지금은 사라진 것 같지만”

여자가 케인의 등을 매만졌다.


“감히-”

케인이 거칠게 여자의 손을 쳐냈다.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화라기보다는 당황스러움이었을 것이다.

누군가 자신의 몸에 손을 댄 것은 몇백 년만이었다.

데스탈리온조차 마왕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아, 죄송해요. 근데 괴물치고는 꽤 인간이랑 닮았네요?”

여자가 케인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겁이 없군”

“그런 소리 많이 들었어요”

여자가 헤헤 웃었다.


대체 이 여자는 뭘까.

인간 주제에 나를 마주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

내가 누군지를 몰라서일까.

아니, 내가 누군지 알았어도 반응이 다를 것 같진 않다.

오히려 더 신났으면 신났지.


“다시 돌아가라”

“어디로요?”

“인간이면 인간계로 가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닌가?”

“싫어요”

“싫다고?”

“전 이곳이 마음에 들었어요. 여기서 살래요!”


여자가 해맑게 웃는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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