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을 찾는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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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mpidsky
작품등록일 :
2024.09.05 11:29
최근연재일 :
2024.09.14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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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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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7 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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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DUMMY

한줄기 섬광과 함께 붉은 피가 허공으로 솟구친다.


아침 일을 나왔다가 머리를 잃은 한 청년의 육체가 허무하게 무너져버렸다. 아직도 솟아나오는 따뜻한 피가 주변 땅을 붉디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순박한 농부로서 살아왔던 청년은 차가운 검 아래에 그렇게 허무하게 숨을 거두었다.


검을 한번 떨쳐 피를 털어낸 이는 교황의 검이라 칭송받는 팰러딘이었다.

황금빛 머리칼과 새하얀 얼굴이 눈부시다. 목 언저리까지 늘어진 블론드 아래로 가슴부터 허리까지 황금빛 십자가가 새겨져 있는 은빛 플레이트 아머를 착용하고 있다. 은빛의 플레이트 아머 위로 하얀색 장백의가 발치까지 드리워져있다. 신부의 웨딩드레스처럼 새하얀 장백의 아래로 은빛의 당자를 밟고 있는 그리브가 보인다.

떠오르는 해를 뒤로 한 채 왼손으로 고삐를 거머쥐고 당당히 서있는 모습이 장엄하다.

그는 언덕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마을을 아름다운 청록빛 눈으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신의 사자들아. 어리석은 양들에게로 다가가 그들의 길 잃음을 바로잡을지어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좌우로 벌려 서있던 6명의 팰러딘들이 말에 박차를 가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팰러딘들의 뒤에 서있던 종자들은 천천히 움직이며 마을의 입구를 틀어막았다.

무거운 말발굽 소리와 함께 흙먼지를 피워 올리며 마을 속으로 사라지는 팰러딘들.


얼마 지나지 않아 고요하던 마을의 아침은 충천하는 화광과 고요를 찢는 비명소리로 가득 차올랐다.

그리고...

그런 마을을 내려다보는 황금빛 팰러딘.


아무 말 없이 묵묵히 마을을 바라보던 팰러딘이 고삐를 당겼다. 그의 백마가 힘차게 울부짖으며 두 다리를 허공으로 차올린다. 아직도 더운 김을 피워 올리는 피가 묻은 검을 든 채 금발의 팰러딘은 앞서간 이들의 뒤를 따라 천천히 말을 몰았다.


평화로워야 할 아침.

밥 짓는 연기가 오르고 새벽일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순박한 농부들이 닭 울음소리를 배경삼아 콧노래를 흥겹게 불러야 할 시간. 하지만 마을의 아침을 깨운 것은 닭 울음소리도 아니고 순박한 농부의 콧노래도 아닌 사람들의 비명소리들이었다.

하늘마저 불사를 듯 불꽃들이 충천한다.

비명소리와 고함소리가 섞여 아수라장을 만든다. 도망치는 사람, 손에 잡히는 것을 들고 휘두르는 사람. 정신 나간 듯 주저 앉아버리는 사람. 그리고 그들 사이를 뛰어다니며 불을 지르는 사람까지.


평화로웠던 마을은 이미 한 편의 지옥도로 변해버렸다.


"이러고도 너희가 진정한 신의 사도라 할 수 있느냐!"


분노와 슬픔으로 가득 찬 외침.

6명의 팰러딘이 아무런 저항도 못하는 힘없는 양민들을, 그들을 지키기 위해 검을 든 전사들을, 그리고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농기구를 든 농민들을 학살하는 모습을 보던 중년인이 외쳤다.

마을을 지키기 위해 검을 든 전사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그는 무력감과 분노로 몸을 떨고 있었다.


"길 잃은 양들로 하여금 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중년인에게 돌아온 것은 지휘관의 차가운 목소리.

어느새 중년인의 앞에는 황금빛 팰러딘이 말을 탄 채 서있다.

팰러딘의 말에 동의하는 듯한 말의 투레질소리.

그리고 중년인에게로 향하는 차갑게 빛나는 청록빛 안광.


"미······ 미쳤군."


말 위의 팰러딘을 응시하는 중년인의 푸른 눈동자가 흔들린다. 검의 손잡이를 잡고 있는 두 손이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었다.

그런 중년인을 바라보며 황금빛 팰러딘은 천천히 말에서 내렸다.


"나는 교황의 검, 팰러딘의 캡틴 후안."


팰러딘의 지휘관.

후안은 자신의 이름을 밝힌 후 중년인을 응시했다.

이름을 밝히고 이름을 듣는다.

결투의 의식.

눈앞의 중년인이 검사로서의 훈련을 받지 못했을 것임이 분명함에도 마을을 지키기 위해 검을 들었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 후안은 중년인을 하나의 전사로서 상대해주기로 마음먹은 듯 했다.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후안의 청록빛 눈동자에 마을을 지키던 최후의 전사가 비쳤다.


"당신에게 밝힐 이름은 가지고 있지 않아. 기대를 저버려서 미안하군."


자조적인 미소를 지은 중년의 전사는 거대한 투핸드 소드를 휘두르며 후안을 향해 돌진했다. 거대한 투핸드 소드가 공기를 가르며 위협적인 소리를 흘린다.


"주의 뜻을 받드니, 보라. 주의 뜻이 적을 막으며"


후안은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검을 살짝 빗겨 중년인의 검을 옆으로 흘렸다. 혼신의 힘을 다해 일도양단의 기세로 내리치던 중년인은 후안의 검에 무게중심을 잃고 자세가 흐트러져버렸다. 살짝 중년인의 공격을 흘리는 것만으로도 완전히 우세를 잡은 후안은 바로 허리를 틀며 검을 위로 비스듬히 베어 올렸다.

콰앙!

땅에 꽂히며 지축을 울리는 거대한 투핸드 소드의 날을 타고 거슬러 올라가는 후안의 검.

자세를 바로 잡으려는 중년인의 눈에 자신의 검 날을 따라 타고 올라오는 후안의 검이 들어 왔다.

이미 중년인의 지척에까지 이른 상태.

중년인은 피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검날을 바라봤다. 아니 피할 생각을 할 시간도 없었다. 중년인의 눈동자 속에 아름다운 빛을 뿌리며 날아오는 후안의 검이 가득 들어왔다.


"주의 말씀으로 벌할지니, 이에 나는 주가 있음을 증거하도다."


아름다운 빛을 뿌리며 호선을 그린 검의 궤적이 중년인, 마지막 한 명 남은 전사의 목을 베고 지나간다. 휘청거리며 뒤로 몇 걸음 물러난 중년인의 눈이 부릅떠졌다.

가느다란 혈선을 만들고 중년인의 목을 지나간 후안의 검.

차가운 빛을 발하던 그 검은 언제 뽑혔냐는 듯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주여···."


울음 섞인 목소리.

고군분투하며 검을 휘두르던 마지막 전사는 지친 육신을 차가운 바닥에 뉘였다. 잘려진 상처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가 선연한 핏빛 무지개를 만들며 땅으로 떨어지며 차가운 바닥을 적신다. 마을을 지키던 최후의 전사는 그렇게 숨을 거뒀다.


기사들의 등에서 풍기는 불길함에 서둘러 달려온 에쉴리를 제일 처음 맞이한 것은 청년의 주검이었다. 언제나 콧노래를 부르며 에쉴리에게 산에서 따온 개암이나 머루 같은 열매들을 듬뿍 안겨주던 테리가 눈도 감지 못한 채 마을의 입구에서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그 청년의 뒤를 이어 에쉴리의 눈에 들어온 것은 언제나 자신을 놀리던 개구쟁이 토마스의 얼굴이었다. 지금도 에쉴리를 놀리는 것 마냥 몸은 어디론가 숨긴채 얼굴만 내밀고 있다.

에쉴리는 뒷걸음질 쳤다.

도저히 테리와 토마스의 시체를 넘어 마을로 달려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녀의 가족이 마을 안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도 발은 움직여지지 않았다. 에쉴리는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그녀의 머리는 마을로 향할 것을 명하고 있었지만 몸이 따르지 않았다.

언니 로렌이 말하던 것이 마을에 화를 불러올지도 모른다던 어른들의 말이 떠올랐다. 에쉴리는 정신없이 산으로 달음박질쳤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애쉴리가 정신없이 달려온 곳은 그녀의 언니와 함께 자주 찾던 에쉴리만의 비밀공간이었다. 수풀이 우거진 곳에서 마치 그녀만을 위해 준비된 것인 마냥 동그랗게 터져있던 곳. 에쉴리는 잔디 위에 엎어져 끊임없이 울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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