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출 거부자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판타지

별명은변명
작품등록일 :
2024.09.07 22:50
최근연재일 :
2024.09.16 19:28
연재수 :
2 회
조회수 :
19
추천수 :
0
글자수 :
10,871

작성
24.09.14 18:58
조회
13
추천
0
글자
13쪽

서한율

DUMMY

서한율은 좀비에게 물리면서 ‘나, 사실은 살고 싶었구나.’ 하고 깨달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파도에 떠밀려 해변에 놓인 쓰레기처럼 여겼기에 도망치지도, 비명도 지르지 않고 퇴근길, 어둑한 골목에서 피비린내 나는 파도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을 수면 아래로 집어삼킬 마지막 파도임을 깨닫는 순간, 후회가 밀물처럼 그의 눈가를 적셨습니다.


첫 파도는 아버지의 가출이었습니다. 그의 나이 8살 때의 일입니다. 가난한 미술가인 그의 아버지는 언제나 목탄에 검게 물든 손을 흔들며 아들의 하원 시간에 맞춰 유치원 앞에서 기다렸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햇님이 능선 너머로 저물고서야 부모님이 데리러 왔기에 먼저 유치원을 나서는 서한율은 언제나 부러운 시선을 등에 업고 아버지의 품에 안겼습니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노을 아래 긴 그림자를 뒷꿈치에 매달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서한율은 그 길이 행복했습니다. 문방구에서 엄마가 금지하는 불량식품을 하나 집어 들면 그의 아버지는 검지를 입술 앞에 세우고 “대신, 엄마한테는 비밀이야.” 하고 말했습니다. 그는 몰래 먹는다는 기쁨보다 아버지와 비밀이 생기는 게 좋았습니다. 그는 그 비밀을 영원히 간직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어린 그는 TV를 보는 것보다 아버지의 무릎 위에 앉아 채워져 가는 캔버스를 바라보는 것이 더 좋았습니다. 고래가 보고 싶다 하면 아버지는 뚝딱 그려냈습니다. 방금 전엔 사자를 그렸던 붓이 고래를 그려내는 게 마법 같았습니다. “또 무엇을 그려볼까요.” 하고 콧노래 하는 아버지의 낮고 조용한 음성이 그의 눈꺼풀을 언제나 부드럽게 감겼습니다.


잠에 든 어린 그를 깨우는 것은 식탁 위에 놓인 음식 냄새였습니다. 식당일을 마치고 돌아온 어머니 또한 하얀 식탁보 위에 색색의 음식을 채웠습니다. 잠이 덜 깬 눈을 비비며 거실로 나서면 아버지는 반찬 그릇을 놓으며 분주했고 어머니는 국 그릇을 놓으며 “한율이, 잘 잤어?” 했습니다.


모두 식탁에 앉아, 신에게 감사 기도를 올리고 아버지가 수저를 들 때면 어머니는 아버지의 손등을 부드럽게 찌르며 미간에 주름을 잡았고 아버지는 “아차차.” 하며 물감에 물든 손을 씻고 돌아왔습니다. 수저가 그릇에 달그락거립니다. 국에서 하얀 김이 퍼집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눈을 마주 보며 미소 짓는 순간을 그는 밤하늘의 별을 보듯 고개 들어 바라봤습니다. 어린 서한율은 행복이 무엇인지 잘 몰랐지만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것도 영원히 간직할 수 있겠다고.


초등학교에 입학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하교 후 집에 왔을 때, 아버지는 없었습니다. 이젤도 캔버스도 물감도 붓도 사라져 있었습니다. 그는 도둑이 든 것만 같아 덜컥 겁이 났고 옆집의 문을 두드리며 도둑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아주머니는 나와서 집안을 둘러보고 서한율을 자신의 집에 데려갔습니다. 그곳은 같은 빌라임에도 냄새도 구조도 달랐습니다. 아주머니는 식탁 의자에 앉아 깔깔 웃으며 통화를 했고, 그는 거실 TV 앞에 앉아 보는 척했습니다. 곧 창밖에 밤이 드리우자, 넥타이를 맨 피곤한 표정의 남편이 오고 무서운 표정의 교복을 입은 아들이 왔습니다. “얘, 밥 먹어라.” 하고 서한율을 불렀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와 먹어야 하니까요.


옆집 남편이 소파에 앉아 런닝 차림으로 신문을 펼쳤을 때, 어머니가 서한율을 데리러 왔습니다. 그녀는 연신 “죄송합니다.” 했고 쌀쌀맞아 보이던 아주머니는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이게 뭐 별일이라고.” 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식탁에 앉아 저녁을 준비하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릇이 달그락거리고 수전에서 물줄기가 시원한 소리를 냅니다. 냄비에서 끓는 소리가 나자 어머니는 눈가를 훔치고 뚜껑을 열었습니다. “아빠는?” 하고 서한율이 묻자, 그녀의 어깨가 들썩였습니다.


아버지가 떠나고 몇 달이 지나자, 갑자기 떠오른 일인 듯 어머니는 말했습니다.


“그리고 싶은 게 멀리 있어서 거기 가신 거야.”


그는 “네.” 하고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이미 친구들이 그를 둘러싸고 손가락질하며 “아빠가 집 나갔대요.” 노래를 부르며 놀려댔기에 더는 놀랄 일도 아니었습니다.


중학생이 되어서도 서한율은 어머니에게 아버지에 대해 묻지 않았습니다. 버려진 자신과 어머니가 애처로웠습니다. 아버지에 대해 묻는 것은 헌신적으로 자신을 키우는 어머니의 인생에 상처를 남길 것만 같았습니다. 또한 자신이 아버지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싫었습니다. 모든 궁금증을 삼켰습니다. 그것은 가슴에 턱하고 걸려서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썩어가더니 우울이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말수가 적은 아들이 사춘기를 겪는 것이라 짐작했고, 학교의 친구들과 선생님은 그를 과묵한 학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그 즈음 자신을 고립하는 방법에 대해 조금씩 알아갔습니다. 입을 일자로 길게 다물고 눈을 느리게 깜빡이면 그 누구도 그의 감정을 궁금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우울을 들키지 않은 것에서 안도감을 느꼈습니다.


서한율을 덮친 두 번째 파도는 가난이었습니다. 교복 바지는 복숭아뼈가 드러날 만큼 짧아졌고 상의는 손목을 덮지 못할 만큼 작아졌습니다. 그는 자라나는 자신의 몸이 원망스러웠습니다. 앞으로 1년만 흐르면 고등학교를 졸업할 테고 그 뒤엔 교복 따위는 입지도 않을 텐데 하고 버텼습니다.


등교길에 선도부원은 그를 복장 불량으로 잡아냈습니다. 그들은 바지를 줄인 것이 아니냐며 멋부리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았지만, ‘대체 어떻게 가난함으로 멋을 부릴 수 있나요.’ 하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비가 오는 날이면 밑창이 해진 신발은 스펀지처럼 빗물을 빨아들여 그의 발을 적셨고, 허벅지 살에 쓸려 닳은 바지 가랑이가 부끄러워 언제나 다리를 오므리고 앉았습니다. 가난은 그의 걸음걸이와 자세를 쪼그라들게 했습니다. 작은 옷이 티 나지 않도록 어깨를 움츠리고 종종걸음을 걷는 그에게 친구들은 괴상하다는 꼬리표를 달며 소곤거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담임 선생님이 그를 불러 체육 교재실 옆 창고로 데려갔습니다. 작은 환기창으로 스며든 햇살 아래 뽀얀 먼지가 일렁이는 그곳에는 졸업생들이 기증한 교복이 있었습니다. “곧 졸업인데, 교복 사는 건 너무 아깝지.” 하고 말하며 선생님은 제일 큰 교복 상의를 꺼내, 서한율의 몸에 대며 사이즈를 가늠했습니다. 서한율의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물론, 먼지 때문만은 아닙니다. 가난을 들켜버린 게 창피했습니다.


졸업 후에, 서한율은 도망치듯 군 입대했습니다. 줄곧 성적은 좋았던 그가 수능도 보지 않겠다고 하자, 선생님은 화를 냈습니다만 8만 원의 졸업 앨범도 사지 못한 그에게 응시 비용 6만 원이 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공부엔 뜻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는 그에게 선생님은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입을 꾹 다물며 이번엔 그의 자존심을 지켜주었습니다.


식당 허드렛일을 하는 어머니는 새벽에 식자재를 날라야 했기에 식탁 위에 만 원짜리 몇 장과 삶은 계란 아래 편지를 두었습니다. 서한율은 못 본 척하고 보충대로 향했습니다. 머리를 민 청년들이 가족에게 늠름한 척 경례하고 흙먼지 날리는 연병장을 향해 걸음을 옮겼습니다. 서한율은 그들 틈에 섞여 다치지 말라는 말을 전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걸었습니다.


서한율은 군인이 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습니다. 훈련소에서부터 두각을 나타낸 그는 자대 배치 뒤에도 소위 ‘A급’이라 불렸습니다. 통제된 환경 속에 감정을 숨기는 것은 그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하고 목소리를 높이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군이 병사에게 원하는 자세는 감내였습니다. 그는 이미 그 자세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달이 밝게 비추는 길을 전우들과 군장을 메고 행군했습니다. 서한율은 서울보다 선명한 별빛을 감상하며 힘든 기색 없이 걸었습니다.


“와, 서한율 병장님은 지치지도 않으십니다.”


뒤에 따르는 후임병이 거친 숨을 토하며 말했습니다.


서한율은 미소 지으며 답했습니다.


“안 그런 척하는 거야.”


그는 전역 후에 어머니에게 큰절을 올리며 잘 자라게 해주어서 감사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더는 걱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학창 시절과 군 생활을 견뎌낸 그는 이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세상은 감내한다면 이겨낼 수 있는 상대처럼 보였습니다.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그에게 세 번째 파도가 덮쳤습니다. 그 파도는 인간이었습니다.


전역 후, 군 시절 취득한 자격증을 기반으로 작은 건축디자인 회사에 취업한 서한율은 단순 사무직이었지만 몇 주 뒤에는 작은 팜플릿을 만들었고 몇 개월 뒤에는 설계 도면까지 그렸습니다. 회사는 그에게 업무에 필요한 교육을 해준다는 핑계로 과다한 업무를 떠안겼습니다.


그는 감내했습니다. 그것이 유일하게 자신 있는 것이니까요.


새벽부터 밤늦도록 뻑뻑해진 눈을 주무르며 모니터 앞에 매달렸습니다. 그 피곤함이 몸을 짓누를 때, 서한율은 그 지친 상태를 노력의 증거라고 믿었습니다. 이 또한 감내한다면 달콤한 결실이 되어 모래를 삼킨 듯한 갈증을 씻어주리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가족이 운영하는 그 작은 회사는 잘 버티고 있는 서한율이 짜증났습니다. 1년이 되기 전에 떨어져 나가야 그에게 패배자라는 낙인을 찍고 싼 임금의 새 사람을 앉힐 수 있는데, 도무지 저 녀석은 그럴 기미가 안 보이는 겁니다.


그날은 이사가 팔을 걷어붙였습니다.


“야이새꺄.” 하며 서한율의 보고서를 얼굴에 던졌습니다.


“고졸이라 폰트 크기가 뭔지 몰라? 왜 씨발 맨날 알려줘야 하냐.”


바닥에 흩어진 서류를 주워드는 서한율을 이사는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더듬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하고 서한율은 말했습니다. 자리로 돌아가 앉은 그는 자신을 탓했습니다. 그리고 좀 더 노력하자고 다짐했습니다. 그 다짐은 가슴 한켠에 응어리져서 말라 비틀어지더니 자기혐오가 되었습니다.


인간은 참으로 야비해서 감내하는 자들을 숯처럼 달궈서 사용한다는 사실을 그는 몰랐습니다.


아침에 칫솔질을 하며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는 게 점점 괴로워졌습니다. 군 전역 후 불과 몇 개월 만에 가슴속에 활활 타오르던 자신감은 이미 재가 되어 까맣게 변했습니다. 그을음으로 가득한 어두운 속내를 감추고 또다시 어깨를 움츠리고 종종걸음으로 회사와 집을 오갔습니다.


‘시간이라는 파도가 나를 옮길 뿐이야. 회사로 집으로.’ 하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그 즈음 자기 혐오에 찌든 그는 죽고 싶었고 때마침 그를 데려갈 파도를 마주했습니다. 가로등 불빛이 희미한 어둑한 골목에 비틀거리는 그것은 이상하리만치 어두운 그림자 속에 묻혀 있었습니다.


취객으로 생각하고 옆으로 걸음을 옮겨 걸었습니다. 점점 가까워지자, 비틀거리던 그것은 몸을 곧게 펴더니 갑자기 달려들었습니다.


가로등 불빛 아래 드러난 그것의 얼굴은 아랫입술이 없어서 치아가 뿌리까지 다 보였고 창백하고 축축한 피부는 이미 썩어 문드러져 있었습니다.


뒷걸음질을 치던 그는 멈춰섰습니다. 발을 붙든 것은 몸을 얼게 만든 공포도 반격을 위한 준비도 아니었습니다.


포기. 더는 노력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었습니다.


그의 목덜미에 좀비는 날카로운 이빨을 박아 넣고 한입 크게 베어물었습니다. 공중에 흩날린 피가 그의 얼굴에 점점히 박혔습니다.


쓰러진 그의 몸은 좀비가 이를 박을 때마다 힘없이 흔들거렸습니다. 잔잔한 파도가 해변에 놓인 것을 건드는 것처럼.


그는 그렇게 파도를 받아들였습니다.


푸른 달이 밤하늘을 밝혔습니다. 그 빛은 수면 아래에서 바라보는 태양처럼 일렁였습니다. 그 순간, 그는 고래가 수면 위로 뛰어오르는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갑자기 눈물이 흘렀습니다. 하지만 이유는 알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이미 죽었으니까요.


서한율은 행복에 대해 잘 몰랐지만 어쩌면 행복했을지도 모릅니다.


그의 첫 죽음은 그렇게 끝났습니다. 잔잔한 파도 속에서, 고요한 바다 위에서.


그리고 3일 뒤, 그는 두꺼운 유리벽 안에서 깨어났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구출 거부자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 구출 거부자 24.09.16 6 0 12쪽
» 서한율 24.09.14 14 0 13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