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여공 학우위원장 김양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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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수달
작품등록일 :
2024.09.10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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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9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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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1 0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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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DUMMY

아직 학생들이 등교하지 않은 이른 시간.


수현이 가슴팍에 결재 서류를 잔뜩 안고 분주히 복도를 걸어가고 있다. 170cm가 훌쩍 넘는 큰 키에 밝은 갈색의 긴 생머리, 설탕 가루를 뿌려놓은 듯 뽀얀 얼굴에 박힌 커다란 눈을 가진 누가 봐도 감탄할 외모를 지닌 그녀였다.


살짝 살이 오른 허벅지가 드러난 짧은 교복 치마가 수현이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좌우로 살랑거렸다.


코너를 돌아 길게 이어진 복도로 들어서니 정 가운데 위치한 ‘학우위원장실’ 푯말이 보였다.


아직 냉기가 가시지 않은 새벽 향기가 수현의 코끝을 스쳤다.


재학생들은 새 학기가 시작되고 신입생 입학식이 있은 지 이틀밖에 되지 않았지만, ‘서울여자공업고등학교’ 학우위원회는 쏟아지는 업무에 쉴 새 없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작년 겨울, 12월에 진행된 선거에서 새로운 학생회장이 당선되자마자, 기존 학생회를 해체하고 새롭게 ‘학우위원회’라는 조직을 만들어 학교 내 모든 학생 권력 기관들을 장악해 나갔다.


그 속도가 매우 빨라서 새해가 오기 전, ‘서울여자공업고등학교(이하 줄여서 ‘서울여공’)’은 학우위원장 일인 독재 체제가 확립되었다.


문제는 그 놀라울 정도로 카리스마적인 인물이 교내 모든 과거의 유산들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바꾸고 싶어 한다는 점이었다.


열어놓은 창문으로 풍겨오는, 아침이슬에 촉촉해진 향긋한 풀냄새를 맡으며 수현은 위원장실 문 앞에 섰다.


수현은 숨을 가다듬고 손을 들어 가볍게 노크했다.


“들, 들어오세요.”


문 건너에서 과로에 쓰러지기 직전인 목소리가 희미하게 흘러나왔다.


수현이 한 손으로 서류 뭉치를 받치고 능숙하게 반대 손으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위원장실 안에서는 초상화 작업이 한창이었다.


초췌한 목소리의 주인공이 반쯤 감긴 눈으로 커다란 캔버스 앞에 서서 수현을 돌아보며 죽어가는 얼굴로 밝게 인사를 했다. 작년 교내 미술 경시 대회에서 입상한 학생이었다.


캔버스에는 인상주의 화가 에드가 드가의 작품, ‘스타’를 베낀 초상화가 그려지고 있었다. 그림 속 여인은 길게 쭉쭉 뻗은 팔다리와 군살 없이 완벽한 비율의 몸매를 자랑하며 발레 동작인 ‘아라베스크’ 자세를 하고 있었다.


특히 한껏 쓸어 올린 풍성한 번 헤어(Bun hair, 일명 ‘똥머리’)가 인상적이었다.


수현은 고생한다는 의미로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끌려온 학생은 눈물도 말라 버린 퀭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대신했다.


“비서실장 왔는가.”


캔버스 너머로 수현을 찾는 엄숙한 목소리가 들리자, 수현은 얼른 얼굴부터 빠끔히 내밀려 인사했다.


“나 왔어, 위원장.”


창문으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을 등지고 선 위원장이 캔버스에 그려진 인물과 동일한 포즈를 한 채 수현을 맞이했다.


마치 너무 보정을 심하게 해서 사기꾼이라고 비난받는 인플루언서처럼 기껏해야 150cm 정도밖에 되지 않는 자그마한 여학생은 어린이 발레 교실에서 배운 동작을 엄마한테 자랑하듯 자신에게 심취한 표정이었다.


수현이 다가가자, 위원장은 잠시 휴식이라는 듯 턱 끝으로 까딱거렸다. 그것을 보고 그림을 그리던 학생은 꾸벅 인사하고는 위원장실을 황급히 빠져나갔다.


“이 짓도 곤욕이다, 씨.”


위원장은 한숨을 내쉬며 귀찮은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뒤편에 놓인 고풍스러운 책상으로 걸어가 의자에 몸을 깊숙이 기대며 앉았다.


국어사전 두세 개는 가뿐히 넘을 만한 분량의 보고 서류를 책상 위에 척 올려놓고는 수현이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양춘이, 오늘도 고생이 많네.”


높다랗게 쌓인 서류들을 보니 양춘은 절로 한숨이 다시 새어 나왔다.


“이래 너저분하게 우르르 다 가꼬 오면 우야노. 요약을 해서 결재만 딱 하면 되게 만들어 와야지.”


걸걸한 대구 사투리로 양춘이 수현에게 핀잔을 줬다.


“제일 위에 놓인 서류철에 지난주, 각 학과별 활동 보고 내역을 요약해 놓았어.”


이에 질세라 수현이 여유롭게 받아쳤다.


“음, 여윽시 비서실장이 일 하나는 단디 한다니까. 내 도와주는 건 수현이, 니 밖에 없다.”


양춘은 신이 난 아이처럼 배시시 웃으며 서류철을 펴고는 제대로 읽어 보지도 않고 마구 서명하기 시작했다.


비록 신체 비율은 아까 전 그림과는 전혀 다르지만, 풍성하게 올려 묶은 커다란 똥머리만큼은 마치 중전마마의 가체처럼 자신의 위엄을 가감 없이 뽐내고 있었다.


어린아이 장난치듯 양춘이 좌우로 고개를 까딱거릴 때마다 연한 갈색빛이 도는 홍채를 가진 큼지막한 눈동자가 하늘하늘 반짝였다.


양춘은 거침없이 결재란에 이름을 휘갈기던 중 가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조그만 코끝을 지그시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가도 금세 솜털이 보송보송한 얼굴로 활짝 웃으며 선홍빛 입술을 크게 벌려 옆집 아저씨처럼 캑캑거리며 웃어댔다.


일하는 꼴을 옆에서 본다면 한 대 세게 쥐어박고 싶을 심정이겠지만, 작은 얼굴에 오밀조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양춘의 얼굴을 보면 금방이라도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는 그녀였다.


하지만 서울여공에서 감히 그녀의 윤기 나는 흑발에 손을 댈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교사들마저도 돌아버린 그녀를 보면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는 형국이었다.


“자, 이제 시마이!”


만년필 뚜껑을 닫으며 양춘이 말했다.


“수고했어.”


수현이 피식 웃으며 양춘이 서명한 서류들을 챙겼다.


“아, 맞다. 오늘 최고회의 몇 시라 켔노?”


의자에 기댄 채 배를 탁탁 두드리며 양춘이 물었다.


“열 시, 시작이야. 그럼, 그때 봐.”


“수고해라.”


가져온 서류 뭉치를 다시 가슴팍에 가득 안고 수현이 위원장실을 빠져나갔다.


홀로 남은 양춘이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어느새 밝아진 교정은 수분기 없는 까끌까끌한 모래 냄새를 풍겼다.


펑퍼짐한 국방색 점퍼를 걸친 채 등교하는 학생들을 내려다보는 양춘의 얼굴에 자식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그녀의 교복 치마 아래로 쭉 뻗은 하얀 다리 끝에 보이는 투박한 검정 군화가 단단히 바닥을 짓누르고 있었다


*


오전 10시. 위원장실에서는 최고회의가 막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정식 명칭은 ‘학우민주자치최고회의’, 서울여공 학우위원회의 최상급 의사 결정 기구이다. 참여자는 단 세 명뿐. 학우위원장이자 의장인 김양춘과 제1비서, 권수현 비서실장. 그리고 서기국장 겸 학과자치본부장 배태형이 유일한 멤버이자 그들은 현재 서울여공을 장악한 권력의 핵심이었다.


상석에 양춘이 앉아 있고 그녀를 기준으로 오른편에 수현, 왼편에 태형이 앉아 있다. 다들 그녀의 입을 주시하며 회의가 시작되길 기다렸다.


뭔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턱을 괴고 있었던 양춘이 갑자기 꼬았던 다리를 풀며 벌떡 일어났다.


수현과 태형은 곁눈질로 서로를 바라보며 이게 또 뭐 하는 짓인가 의아해했다.


양춘이 가만히 서서 자신의 두 심복을 내려다 봤다. 그러자 태형이 그녀를 따라 잽싸게 일어났다. 그 모습을 보고 수현도 살며시 소파에서 살며시 엉덩이를 땠다.


키가 큰 수현 못지않게 태형도 중학교 시절 배구부였던 만큼 키가 훤칠했다. 고목나무의 매미처럼 우뚝 솟은 두 사람 사이에 똥 짤막한 양춘이 끼자, 그녀가 왈칵 화를 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선이 못마땅했기 때문이었다.


“이것들이 미쳐가지고, 어따 데고 감히!”


뜬금없이 발악을 해대는 상사를 보고 부하 직원들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눈치만 볼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양춘이 소파에 털썩 주저앉고 팔짱을 낀 채 다리를 꼬았다. 수현과 태형도 엉거주춤 엉덩이를 소파에 내려놓았다.


“회의 시작하자.”


심기가 불편한 양춘이 감정을 억누르며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수현과 태형은 각자 준비해 온 자료들을 펼치기 시작했다.


*


늘 그랬듯 오늘 회의도 사실상 양춘의 앙탈과 투정으로 끝을 맺었다. 이것도 싫다, 저것도 싫다. 그건 왜 이러냐, 저건 또 왜 그러냐. 바뀌라, 바뀌라, 바뀌라!


부하들에게 잔뜩 화풀이를 해댄 양춘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학우 식당을 향해 팔랑팔랑 걸어갔다. 그 뒤로 감정의 쓰레기통 역할을 톡톡히 해낸 수현과 태형이 지친 몸을 이끌고 뒤따랐다.


학우 식당은 과거 학생 식당이었던 건물을 이름만 새롭게 바꾼 시설이었다. 양춘이 취임한 후 교내 모든 부분이 이런 식으로 바뀌었다.


공식적으로 서울여공의 학생회는 해체되었지만 새롭게 출범한 학우위원회가 한 일이라곤 과거의 유산에 새 이름표를 붙이는 행위뿐이었다.


과거 달라진 점이 있다면 우선 회의가 어마어마하게 늘어났고, 그 회의는 철저히 계급에 따라 진행되며, 모든 사항은 각 단계별 회의를 거쳐 최종적으로 ‘학우민주자치최고회의’에 소속된 서울여공 권력의 ‘빅쓰리’에 의해 정해지는 의사 결정 방식뿐이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김양춘이 지 꼴리는 데로 학교를 주물러 대고 있는 판이었다.


양춘이 식당 안으로 들어서자, 1학년들은 그녀를 보고 두려움에 떨며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머리 숙여 인사를 했다.


2학년들은 반말로 인사해야 하나 경어를 써야 하나 고민하며 말끝을 흐렸다. 3학년 역시 무시무시한 후배의 등장에 숨을 죽이고 입안에 밥을 밀어 넣는 대에만 집중했다.


“그래, 그래. 마이 무래이.”


사람 좋은 얼굴로 학생들에게 인사하며 양춘은 뒤짐을 쥔 채 인파 속을 가로질렀다.


학생들로 바글바글한 테이블과 달리 스무 개가 넘는 의자가 놓인 널찍한 식탁에 양춘이 자리를 잡았다. 그 앞으로 수현과 태형이 나란히 앉았다.


수현과 태형 등 뒤로 난 큰 창으로 햇볕이 잘 들었고, 탁 트인 시야에 교정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그들이 자리를 잡자 곧장 급양국장이 급양국 학생들과 함께 식판을 들고 다가왔다.


“어이, 예리미.”


입으로는 급양국장을 맞이하고 있지만, 양춘의 눈은 예림의 손에 들린 음식에 초점이 맞춰졌다.


“위원장, 회의는 잘했어? 고된 업무에 몸 축날까 봐 오늘은 내가 특별히 신경 좀 썼어.”


한껏 아양을 떨며 급양국장은 직접 양춘의 앞에 인삼이 잔뜩 들어간 삼계탕을 내려놓았다. 한눈에 봐도 세 그릇의 삼계탕에 담긴 닭의 크기가 어마어마하게 차이가 났다.


“음, 그래. 고생했다, 가봐라.”


급속히 차가워진 양춘의 반응에 급양국장이 안절부절못하는 사이 태형이 살며시 턱을 돌려 급양국장에서 사라지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 그럼 맛있게 먹어.”


급양국장은 서둘러 학생들을 데리고 사라졌다.


양춘은 쓴맛을 싫어했다. 개초딩 입맛인 그녀에게 인삼이 가득한 삼계탕이라니. 이번에는 급양국장이 너무 어른스러웠다.


“먹자.”


양춘이 숟가락을 들자, 두 사람도 식사를 시작했다.


“음식을 골고루 먹어야지.”


국그릇에서 인삼을 골라내고 있는 양춘을 보고 수현이 말했다.


“그래도 쓴 건 싫다.”


뾰로통한 표정을 짓는 양춘을 보고 옆에서 태형이 거들었다.


“학교와 학우들의 영광된 미래를 위해서는 위원장 건강이 제일 중요하다구.”


태형이 장난치듯 자신의 국그릇에 담긴 인삼을 양춘의 그릇으로 옮겼다. 그러자 수현도 자기 몫의 인삼을 양춘에게 마구 양보했다.


“아, 싫다고!”


떼를 쓰는 어린아이 놀리듯 양춘의 앙탈에도 두 사람의 짓궂은 장난은 계속됐다.


디저트까지 깔끔하게 먹어 치운 양춘은 인품 넘치는 사장님처럼 불룩해진 배를 쓰다듬으며 넓은 창을 통해 교정을 바라봤다.


식판에는 안타깝게도 선택받지 못한 인삼들이 수북했다. 그 옆으로 한때 생명체였던 동물을 사체들이 즐비했다.


급양부 학생들이 다가와 테이블을 정리하자, 수현이 고개를 살짝 숙여 감사를 표했다. 태형도 식사가 만족스러웠는지 급양부 학생들을 칭찬했다.


“뷰가 마음에 안 드는군.”


양춘의 한마디에 태형이 뜨악하고 그녀를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이건 또 뭐 하자는 짓인가 싶어 수현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


양춘의 집무실에서 긴급 최고회의가 열렸다.


안건은 교정을 새롭게 단장하는 양춘의 지시였다.


“지금 진행 중인 업무로도 이미 모든 학과가 풀 캐파야.”


수현이 양춘을 달래며 말했다.


“예산도 벌써 전년도 대비 120% 이상 소모했다고.”


서기국장인 태형도 계산기를 두드리며 난감한 기색이 역력했다.


“캐파야 쥐어 짜내면 되고, 예산은 여기저기가 조금씩 줄이며 충분하다.”


전혀 말을 들어먹지 않는 상사를 보고 두 부하가 불끈 주먹을 쥐었다.


“식사란 인간 존엄의 가장 기본 아이가!”


양춘이 옆에 놓인 탁자를 주먹으로 쾅 내려치며 앵앵거렸다.


“우리의 표어가 뭐꼬, 우리가 뭐 때문에 혁명을 했냔 말이다!”


양춘의 호통에 수현과 태형이 반사적으로 자세를 바로 고치고 큰 소리로 외쳤다.


“스스로를 존엄케 하라!”


충성스러운 두 부하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양춘이 소파에 몸을 뉘었다.


“참모장, 오라 캐라.”


새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강아지처럼 양춘의 두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작가의말

서울여자공업고등학교 학우위원회 학우위원장 김양춘!

그녀의 돌아버린 활약이 이제 시작됩니다!




많은 관심과 사랑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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