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빈집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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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작품등록일 :
2024.09.10 15:32
최근연재일 :
2024.09.12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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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2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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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자살 방해작전

DUMMY

최고의 숙면이었다.

사실 달달한 향기가 아니라 비릿한 피비린내였다. 보송보송 푹신한 매트리스가 아니라 축축한 진흙바닥이었고, 날아오를 것 같았던 몸도 그저 몽중몽 상태일 뿐. 더구나 베개라고 잡은 것은 누군가의 잘린 머리였다. 미끌미끌 끈적거리는 피가 잘린 머리에서 쏟아지고 있었다.


오키나와 섬 주변으로 빼곡하게 미국 함대가 집결한 상태다. 지상 전투부와 해군부대, 후방 보급까지 합하면 섬인구가 모두 뭉쳐도 며칠을 버티기 어렵지만, 그것은 이론일 뿐.

미군의 함대가 섬을 장악한 이후 매일처럼 공습을 쏟는 이유도 거꾸로 생각하면 쉽게 함락이 되지 않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지금도 사방에서 터지는 파편들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오키나와 남쪽 슈리성 근처에서 흙더미에 갇힌 것도 같은 이유였다.


펑!!


흙더미에 갇힌 순간에도 포탄이 터졌다.

전차포가 지나가기를 기다린 뒤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얼굴에 묻은 흙을 털어냈지만, 반복되는 폭격으로 한치 앞을 볼 수 없기는 마찬가지.

더듬더듬 포복자세로 흙더미를 빠져나오자마자 턱턱 시체들이 걸렸다. 팔이며 다리며 어딘가 하나씩 잘려나간 더미들이 물컹하고 밟혔다.


어둡다.

그래도 조금씩 선명해지는 것을 보니 곧 새벽이 오겠지만, 지금은 해뜨기 직전. 포탄 잔해에서 가물가물 올라오던 연기가 새벽바람에 휙휙 갈라졌다.




습도를 가득 머금은 공기에서 비린내가 났다. 물 냄새였다.


툭툭


곧 빗방울이 두둑 떨어졌다.

본능적으로 하늘을 향해 입을 벌렸다. 입 안에 고여 있던 흙덩어리들을 캑캑거리면서 뱉어내는데 핏물이 쏟아져 나왔다. 손바닥에도 피가 고였는데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떨어진 다른 사람의 머리를 내 것으로 착각한 것처럼, 다른 사람의 팔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피는 어깨에서부터 타고 내려왔다. 옷을 걷어 뼈에 꽂힌 파편을 빼내고, 잡히는 대로 시체의 군복을 벗겨 피가 흐르는 어깨를 휘감았다.


움직이기에는 비오는 날씨도 나쁘지 않다. 시야가 흐려져서 발각이 어려울 것이란 계산이었으나 가랑비로 시작된 비는 점점 장대비로 바뀌었다. 완전히 젖은 몰골로 도착한 기지에는 장대비에도 불구하고 성조기가 걸려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적진의 풍경은 어쩌면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들어가서 죽을 확률도 높았으므로. 차라리 개죽음이 나을 정도로 혹독한 고문을 받을 수도 있다. 제발 죽여 달라고 부르짖는 순간이 오더라도 지금 담아둔 풍경을 떠올리며 버텨볼 생각이다.


“특이사항 발견. 지원바람.”


보초병이 총구를 겨누며 가까이 다가왔다.


“손들어!”


양 손을 머리 뒤로 포개며 돌아섰다.


“엎드려!”


무릎을 꿇은 뒤 바닥으로 완전히 엎어졌다.


“뭐야?”


자던 군병들이 모였다. 기껏 이런 놈 하나 때문에 깬 것이 어이없었는지 ‘개자식’과 함께 발길질이 날아들었다.


“일단 좀 맞고 시작하자.”


각오했던 일이다.


“그만 못해?!!”


발길질은 뒤따라 나온 상병에 의해 바로 저지당했다 .


“신원은?”

“확인 중입니다.”

“일단 밖으로 꺼내.”


현재로선 가장 높은 지휘관은 상병이다. 엎드린 상태에서 상병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일본은 집단자살 작전을 시행 중입니다. 작전을 막을 아이디어가 있습니다.”


하품이나 갈기던 병사들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고작 넝마나 걸친 오키나와 촌놈이 영어를 한다고?


“끌고 가.”


상병이 눈으로 암묵의 장소를 특정했다. 언어가 되는 이상 활용가치는 충분하다. 천천히 조사하기로 결심하는 순간이었다.


“천천히 앞으로 가.”


양손을 머리 뒤로 모은 뒤 포복 자세 그대로 움직였다. 지켜보던 보초병이 명령을 시정했다.


“일어서서 앞으로.”


천막을 둘러서 마련된 공간은 의무실을 겸하는지 약제 냄새가 풍겼다.

곧 보건의가 들어왔다. 그는 코를 킁킁거리며 큼큼한 곰팡이 냄새를 찾아냈다.


“벗어.”


보건의는 물에 희석된 약제를 온 몸에 뿌렸는데, 폭탄에 맞은 상처에 약이 닿는 순간 기절하는 줄 알았다.


1945.5.1.


보건의는 기록지에 날짜를 적은 뒤 의료용 장갑을 꼈다. 기계적으로 검진이 이어졌다.


“입 벌려.”


비록 육안이지만 혓바닥까지 검진을 마쳤을 때 반삭의 병사가 들어왔다.


“끝났습니까?”

“곧.”

“어떻습니까?”

“대충 정상.”

“혈압, 체온, 언어, 청력 모두 말입니까?”

“그래.”


반삭은 초면이 아니다. 방금 전 개자식 소리와 함께 걷어차였으니까.


“야!”


그는 대뜸 소리부터 질렀다.


“너 땜에 잠 설쳤잖아.”


보건의가 나가자 행동은 더 거칠어졌다. 타이프 세팅 중 몇 번이나 손으로 책상을 내려쳤는데 그때마다 편철된 서류들이 휘익 날렸다.


“이름!”


반삭은 자료를 보며 질문을 반복했다.


“······”


대답하지 않았다.

반복해서 이름을 부르는 것은 기선제압이었다. 모멸감 목적으로 복창시키는 저런 행동이 미군에서도 사용되는군.


탕!!!!


반삭이 책상을 쳤다.


“이름!”

“······”


“하아······ 미치겠네!”

“······”

“계속 이럴 거야?!!!”


고함이 쩌렁쩌렁 울렸다.


“좋아.”


반삭은 세팅된 타자기를 덮었다. 이걸 덮으면 협상이든 뭐든 관계는 끝이고, 그렇다면 점령의 자격으로 즉결처분을 할 수도 있다는 엄포였다.


“마지막 기회야.”


반삭은 은혜를 베푸는 것처럼 타이프를 다시 열었지만


“······”

“야!!”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약이 바짝 올랐다.


“야 이 새끼야!!”


육중한 몸체로 멱살을 잡으려는 순간 금발의 장교가 들어왔다.

서른 서넛쯤. 날선 목소리. 주름 잡힌 미간에도 불구하고, 아직 볼 살이 남은 얼굴이었다.

반듯한 이마, 정성을 들인 면도, 한 올 흐트러지지 않은 머리카락, 과일향이 섞인 물비누 향, 손목의 시계까지 딱 떨어지는 엘리트 군인의 외관이었다.


“내가 하지.”


그는 집단자살과 관련된 보고를 받았을 것이다. 장교가 직접 신원불상 포로를 심문한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게 사안을 판단한다는 것.

반삭은 경례와 함께 사라졌다.


“지금부터 잘 들어.”


금발은 백지와 볼펜을 앞에 놓은 뒤 뭉개지는 발음 없이 또박또박 말했다.


“여기다 아는 정보 모조리 써. 전부.”


각을 잡은 그는 의심을 거두지 않는 눈빛으로 책상을 톡톡 쳤다.

어디부터 얼마나 써야 하는지는 묻지 않았다. 질문이 없자 금발이 바로 확인을 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내용을 알기 때문에 쉽게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언제 태어났고, 학교 다닌 거, 가족관계까지, 모두. 알겠지?”


신상정보는 내놓는 순간 언젠가는 내 목을 조르는 칼이 된다. 그보다 확실한 담보는 없으므로.


-생년월일 미상. 가족 없음. 고아 또는 버려짐. 무학.

-조선에서 징집되어 오키나와로 옴


어떤 정보도 없는 내용. 작성은 쉽게 끝났지만 보기에 따라 장난으로 비쳐질 수도 있었다.

금발은 단어들을 앞뒤로 분석하며 쉽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영어는 어떻게 배웠지?”


금발은 날카롭게 논리의 공백을 파고들었다.


“교회입니다. 선교사님들이 고아들을 돌보셨죠. 그 분들과 대화를 하려면 영어가 편하거든요.”


금발은 턱을 쓰다듬으며 지나치게 아귀가 맞는 대답에서 틈을 발견했다.


“선교사들은 현지어를 배우지 않나? 그리고 학교를 안 보낼 리가 없잖아.”


금발의 관찰력도 탁월했다. 그래서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답을 준비해 놓았다.


“말했듯이 식민지에서 교육할 기회는 공평하지 않습니다. 보통학교도 경쟁률이 어마어마해서 진짜 보통 아이들은 시험에 붙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일본 아이들은 프리패스죠. 운이 좋아서 학교에 붙어도 돈이 없으면 또 아웃이고요. 선교사님들이 읽고 쓸 수 있도록 야학이나 학교를 세우기는 하지만 일본 놈들이 허가를 해주지 않아요. 그래서 학교를 졸업해도 학력이 인정되지 않습니다.”


금발은 설득되면서도 밀리는 기분이 들었는지 꼬투리를 잡았다.


“그런데 왜 일본을 위해 싸우지?”

“왜라니? 총으로 쏘는데 어떻게 거부해? 넌 목숨이 몇 개라도 돼? 우린 학교에서도 일본도로 얻어맞으면서 수업을 받아. 그것도 특혜라고 세뇌당하지. 그게 식민지라고!!”


핏대를 올리고 나서야 신상에 대한 검증을 멈췄다. 일본을 적대시하는 내적 동기까지 갖춘 완벽한 협력자가 제 발로 걸어 왔다. 웰컴이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같은 편이야.

눈으로 의도를 전달하자, 방심한 금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인데···”


비로소 본론으로 들어갔다.


*


10군단 기지로 들어갈 때는 넝마차림의 신원불상이었으나, 나올 때는 잘 빠진 일본군복과 카메라까지 공수 받은 어엿한 정보원 신분이 되었다.


미군 입장에서는 적의 군복 한 벌과 카메라 한 대로 천장을 모르는 성과를 뽑을 수 있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실패하더라도 제 발로 들어 온 협력자 하나 잃는 정도. 다행히 그는 사라져도 찾을 사람이 없는 고아 신분. 정보원으로는 최상의 조건이었다.


돌아오는 길은 장대비가 멎어서 제법 섬의 운치가 느껴졌다.


카메라보다 필름 받기가 더 어려워서 아껴서 찍어야 하지만, 이런 운치를 놓칠 수는 없다.

라이카 카메라로 소나무를 찍을 때였다.

아이를 업은 여자가 물동이를 내려놓고 쉬고 있었다. 엄마가 쉬는 시간은 아기가 젖을 먹는 시간이기도 했다. 등에 업혔던 아이의 엉덩이가 들썩거리자 여자는 아이를 돌려서 젖을 먹였다. 아이의 세상 다 가진 표정이 고스란히 카메라에 들어왔다.


찰칵!!


그때였다.


함포사격이 개시되었고,


쾅!!


순식간에 함포사격 포탄 파편이 여자의 머리를 날렸다. 엄마의 머리가 홱 날아가는 것도 모르고 아기는 열심히 젖을 빨았다. 머리가 없는 엄마 몸에 매달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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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빈집털이 24.09.10 67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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