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빈집털이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대체역사, 판타지

경복궁
작품등록일 :
2024.09.10 15:32
최근연재일 :
2024.09.12 23:15
연재수 :
3 회
조회수 :
101
추천수 :
0
글자수 :
15,008

작성
24.09.10 22:15
조회
65
추천
0
글자
12쪽

빈집털이

DUMMY

내 꿈은 시나리오 작가다.

뒈질 것 같은 날도 노트북 끌어안고 한 줄이라도 썼다.

매년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공모전에도 매달렸다. 특히 올해 공모전은 기대가 되는 게 글을 쓰다가 딸깍하고 자물쇠가 들어맞는 느낌이랄까. 아귀가 딱 맞는 정렬. 머리에서 반짝 전등이 켜졌다가 시원하게 빠져나갔다. 청량하고 맑고 가벼운. 아마도 접신이 이런 기분이 아닐지.


드디어 발표 날이다.

내 작품이 세상으로 나올 수 있을 것인가. 빛을 볼 수 있을 것인가.

두근두근 쫄깃했다.


후-

심호흡을 하고 사이트로 들어가서 공모전 조회 배너를 찾은 뒤

클릭!


응시번호를 입력하세요.

3459


이름을 입력하세요.

이해율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숫자, 자음, 특수문자 조합들을 하나하나 꾹꾹 눌렀다.

마지막으로 수험번호와 이름을 한 번 더 스캔한 뒤 힘껏 엔터.


탁!!


자판이 경쾌하게 튀었다.

눈에 힘을 모으고 기대감을 내뿜으며 모니터를 보았다.






엔터를 쳤음에도 모니터는 하얀 공백이었다.


“어?”


다시 엔터를 쳤다.



여전히 아무 것도 없었다.

축하합니다.

이름이 없습니다.

어떤 말도 없이 통째로 빈 화면 그대로.


“하·····················”


“아니, 수고했다는 말 정도는 해주지.”


탈락이라는 안내라도 나와야 정상이 아닌가.

통째로 빈 화면은 아무리 봐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이런 식이면 차라리 공개적으로 발표를 하든가.


“합격자들에게만 미리 연락을 돌렸다면?”


기대감을 못 버리고 휴대폰을 보았지만 그쪽도 잠잠하기는 마찬가지. 혹시 몰라서 이메일 휴지통까지 뒤졌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스팸까지 탈탈 털어도 없다.


“12년 동안 넣었으면 성의를 봐서라도 한 번쯤 붙여주겠다.”


고작 이런 취급을 받으려고 큰 모니터 앞에 두고 깊은 시름 하였는지.

지원해 줘서 고맙다는 빈말조차 못 듣는 망생이는 서럽다.

더 비극은 현직 백수라 길게 서러워 할 여유도 없다는 것.

현생은 숨만 쉬어도 나가는 돈이 있다. 전기며 수도며 통신료며. 더구나 앞으로 1년을 버틸 총알도 마련해야 한다. 내 꿈은 소중하므로.


신(臣)에게는 12년의 세월을 엿 바꿔 먹을 한량한 시간과 쓸데없이 반반한 얼굴이 있다.

사진만 내면 연락이 오는 마법의 얼굴.

신(神)은 반반한 낯짝은 주셨지만 재능에는 더럽게 인색하셨지. 뭐 나도 인내로 버티는 중이니 피장파장이라고 할까.


어쨌든 12년차 폐인 생활에도 아직은 삭지 않은 얼굴로 생활고를 해결하는 중이다.

그동안은 편의점이며 카페며 몇 가지로 돌려막았는데 이번엔 경로를 수정했다.

바로 보조출연 알바. 기나긴 시나리오 작가의 여정에 뭐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희망회로를 돌리면서.

신(神)이 이기나, 신(臣) 이기나, 오기 같은 건 아니고(맞다고 해도 어쩔).


일단 알바머글에서 보조출연 검색.


이름, 나이, 사진, 가능한 날짜 시간을 보내주세요.

보내실 곳. 깨톡 FHgYut576.


망생이가 좋은 점은 필요할 때 화력 집중.


-날짜 시간 언제든 가능요.


사진을 첨부해서 보내기를 클릭했다.


여기서 한 가지 팁을 보태자면 사진은 여권용이 좋다. 국가가 공인하는 날것의 원판. 고작 보조출연 따위로 최하 징역부터 시작하는 공문서를 뜯어고치는 용자라면 다른 큰일을 할 테니까.


예상대로 바로 문자가 왔다.


-비상 엔터고요, 오셔서 B데스크 찾으면 됩니다. 거기서 수속 밟고 촬영 들어가고요, 출연료는 보통 새벽에 촬영이 끝나니까, 촬영 끝나는 날 저녁 6시 이전까지 입금됩니다.

-알겠습니다.

-혹시 계좌로 못 받는 사정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그럼 신분증 들고 두시까지 세트장으로 오실게요.

-네.


보조출연은 처음이라 세트장의 위용을 몰랐다. 데스크 찾기 쯤 어렵지 않을 것 같았는데 미로 같은 출입문,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사람들, 전화 받을 때는 어렵지 않게 느꼈는데 직접 찾으려니 쉽지 않았다.


“비데스크, 비 데스크?”


세트장 입구의 간이 출입문 옆에 대충 B라고 적은 A4용지를 발견했다.


“B?”

“비상엔터. 비상. B상. B?”


달랑 종이 한 장에 매직으로 쓴 B.

비상엔터와 B데스크의 연결고리를 찾는 중에 스텝 목줄을 건 남자가 소리를 질렀다.


“오늘 처음 오신 분!!”

“오늘 처음 오신 부운-!!!”


비니를 푹 눌러쓴 스텝은 왼손을 높이 들고 흔들었다.


“오늘 처음 오신 분들은 여기로 오실께요.”


좌표로 가는 사이, 비니는 휴대폰 사진과 대조하면서 천천히 말을 시켰다. 사실 그는 본 좌의 실물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처 음 오 신 분 마 즈 실 까 요?”

“예.”


그때 B데스크 앞쪽에서 뉴욕 양키스 야구 모자를 쓴 40대 남자가 헉헉거리며 다가왔다. 고개를 반쯤 꺾은 모양새가 뭔가 뜻대로 안 풀려 보였다.


“저쪽에서 여기로 가랍니다. 경력인데 기록이 삭제됐다나?”

B데스크에서 튕겨 나온 뉴욕 양키스는 자신이 경력자임을 강조했다. 시스템에 입력이 안 되었고, 신입으로 절차를 또 밟아야 하며, 자신만 불필요한 절차를 밟는 것이 불편하다는 내용이었다.


“시스템이 그렇다니까 오긴 왔는데, 이런 건 저쪽 경력에서 해결해 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비니는 양키스의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건성이다가 양키스가 쓴 모자를 가리켰다.


“머리 눌리면 안 되는 거 모르실까요?”


비니는 짜증을 꾹꾹 누른 톤으로 다른 보조출연자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들은 머리가 헝클어지지 않도록 꼿꼿하게 들고 있었다.


“저 분들은 머리가 대가리라서 헤어 조심하실까요?”


일이 제대로 안 풀려서 뿔이 난 양키스도 계속 애송이 취급하는 비니에게 폭발했다.


“이보세요!!”


양키스는 더 말하려다 에잇, 모자를 벗었다. 양키스의 헤어를 본 비니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번에는 색이 문제였다. 염색이 덜 빠진 탈색머리는 군데군데 얼룩져 있었다.

비니는 모자보다 탈색에 더 예민했다.


“시대극에 밝은 염색 안 되는 거 모르실까요?”


비니의 거듭된 신경질에 양키스도 더는 참지 않겠다는 듯이 앞으로 나섰다. 체형만 보면 양키스가 압도적이었다. 머리 하나는 더 큰데다 덩치도 몇 급은 차이가 났다. 양키스가 비니를 내려다보는 투 샷만으로도 위용이 느껴졌다.


“헤어도 소품이라고 생각 못해봤어요? 1946년에 크레이놀이 번쩍번쩍 광이 나는 염색약을 만들어서 대유행이었다고!! 그게 전형을 파괴하는 의미가 되어서 범죄까지 간 거고.”


양키스는 탈색이 전쟁이후 저항정신의 결과물이라는 논리를 전개하려고 하였으나,


“됐고요.”


단칼에 썰렸다.


“카메라나 신경 쓰실께요. 머리카락 한 가닥 한 가닥 다 잡힌다고 보시고요, 그 시대에 염색을 하네 마네, 머리카락 때문에 집중이 되네 마네, 그딴 컴플레인 방어하느라 씨에스 인력이 얼마나 갈려 나가는지 아실까요? 진짜 경력 맞으실까요?”

“보조출연도 다 작품분석 합니다. 그리고 나 프로피도 있고 당신보다 이 바닥에 오래 굴렀어.”


양키스가 거듭 불쾌함을 드러냈지만,


“일단 알겠고요.”


‘일단 알겠고요’는 ‘일단 닥치세요’로 들렸다.


양키스는 에잇- 옅게 신음소리를 내는 것이 전부였다.


“이해율니임, 지금 계약서 링크 보냈으니까아 바로 작성해 주실께요오.”


방금까지 살벌했던 비니는 급 낭낭해져서 내게 전달사항을 알려주었다.


“나는 왜 안 보내줍니까?”


양키스는 계약서 링크를 받지 못하자 까칠해졌다. 계약서가 없다는 건 아직 스페어 신세라는 것. 링크를 타고 이름, 주소, 주민번호, 전화번호, 신분증 본인인증, 계좌번호까지 채워 나가는 동안 양키스와 비니는 큐알 작성을 두고 신경전을 벌였다.


“선생님은 수기로 도와드릴께요.”

“큐알 찍으려고 저기서 이리로 왔다니까요. 안되면 안 된다고 처음부터 말이나 해 주든가. 계약서도 없이 끌려 다니다가 팽 당하면? 그때 가서 없는 사람 되는 건데 그쪽이라면 믿겠어요?”

“계약서는 수기로도 되세요. 시스템 입력은 다음부터 가실게요.”

“이보세요, 나는 오늘 죽어요. 나 사형수라고!! 다음은 없어요. 알아들어요?”


양키스는 자신의 주장이 계속 튕겨 나오자 답답함을 토로했다.


“이름도 안 묻고, 배역도 안 묻고, 대충 선생님으로 때우잖아. 그거 모를 거 같아도 다 알아요. 선생이라고 부르면서 뒤통수나 안 갈기면 다행이지. 하여간 방송국 놈들,”


양키스는 계속 폭주하지만 비니는 더 대응하지 않았다. 그럼 뒈지시든가, 그런 태도.


“밤새 촬영하고 오후 두시까지 세트장으로 와서 밀린 잠자고. 컷 안 당하려고 제일 먼저 와서 대기하는 거, 누가 대기시간까지 알아 달래? 남들 다 되는 절차가 나는 왜 안 되냐 이거잖아. 왜 자꾸 불안하게 계약도 안 하고 질질 끌고 다니느냐고?”

“선생님 정보가 안 와서 그래요. 정보가 있어야 링크라도 보내죠.”


강제로 그들의 설전을 들으면서 큐알을 채워나갔다.

계약서는 상당히 고차원적이었다. 정보 크로스 체크도 조금씩 뒤틀어 놔서 조금이라도 앞의 정보와 일치하지 않으면 다음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신뢰도를 최대한으로 끌어올리면서 미세하게 틀어진 정보 세팅도 특이했다. 모든 동의가 끝나야 마지막에 코드가 생성되는 설계였다.


그 사이에도 양키스는 항의를 계속했다.


“경력기록이 삭제되었다면 신규 입력이라도 돼야지 않습니까? 신규까지 막혔다면 시스템에서 튕긴 건데. 더구나 오늘 사형으로 촬영이 끝난다고요. 나중에 편집이라도 되면 기록이 전혀 없을 거고···.”


그때 큐알 작성이 끝났다. 그러자 비니는 단칼에 양키스의 말을 잘라버렸다.


“같이 움직일게요.”


자신의 말이 썰린 양키스. 그러나 화를 내는 대신 눈빛이 밝아졌다.


“나도 같이요?”


비니가 뒤에 눈이 달린 것처럼 쓱 돌아보며 말했다.


“두 분 다 따라 오실게요.”


양키스는 언제 날을 세웠냐는 듯 비니 뒤에 바짝 붙었다. 촬영장까지 달고 들어간다는 건 희망이 있다는 것.


“나도 가는 겁니까? 시스템 입력 못해도 가도 됩니까?”


양키스는 차마 비니 옆으로는 못 붙고 한 걸음 뒤에서 재차 물었다.


“현장에서 감독님이 직접 처리합니다.”


비니는 원칙적인 말만 건넸지만 양키스의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불평을 뚝 그친 아이처럼 비니 뒤를 바짝 따르는 양키스와 보조를 맞추었다. 그리고 아까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양키스든 비니든 대답을 해주기를 바라면서.


“혹시 작품이 시대극인가요?”


양키스 말대로 1946년은 염색의 AtoZ가 달라진 시기였다. <노동자용 금발>이 비속어로 쓰일 정도로 염색이 활발했던 것도 맞다. 이걸 어떻게 아냐고? 내 작품이 같은 시대니까.


양키스는 슬쩍 쳐다보면서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몰랐어요? 하긴 보조에 신입이니까.”


같은 시대를 다룬 작품이 맞다.


“영화 제목도 아시나요?”

“영화? 아우- 영화는 다 죽었어. 아니 탈은 이 바닥 스타일인데 도통 아는 게 없네. 요즘은 오티티니 뭐니 드라마가 대세죠. 평생 영화만 찍어대던 송강범도 환승했으면 말 다했지.”


‘영화’단어에 꽂혔던 양키스가 머리를 반쯤 옆으로 기울이더니 중얼거렸다.


“참, 제목이... 양아치 뭐 그런 거였는데... 아, 빈집털이. 그거 같아요. 뭘 터는지는 모르겠지만.”


양키스는 비니를 보면서 자신의 말에 확신이든, 정보든 기대하였으나, 비니는 무표정하게 걷기만 했다.


<식민지 빈집털이>

내 작품의 제목이다.


1946년이 포함된 시대극에 빈집털이 제목까지 같을 확률은?


머리가 아득해졌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식민지 빈집털이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3 집단자살 방해작전 24.09.12 11 0 10쪽
2 빈집털이 24.09.11 25 0 11쪽
» 빈집털이 24.09.10 66 0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