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빈집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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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작품등록일 :
2024.09.10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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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2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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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1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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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털이

DUMMY

비니는 쓱쓱 미끄러지듯 걸으며 속도를 재촉했다.


“빨리 움직이실게요.”


양키스는 재빨리 비니 뒤로 바짝 붙었다.


12년 동안 같은 책상에 앉아서 사계절을 보냈다. 암막 커튼 너머 하얗고 파랗고 지글지글 타는 계절은 별개의 세계였다. 쪼들린 내면으로 버틴 시간들. 그렇다고 시장이나 트렌드까지 몰랐다는 건 핑계가 되지 못했다. 더구나 망생이 주제에 외길 시나리오만 도전했으니. 그런 점에서 보조출연은 좋은 선택지라고 생각했다. 또 진입장벽이 낮은 직종답게 은행거래가 막힌 신불자들 사정까지 배려하는 시스템도 호감이 갔다.


내 생각들을 철회해야 될지도 모르겠다.

내 작품을 통으로 유린당한 것도 모자라, 유린한 자들 밑에서 일용직으로 생계를 구걸하는 상황이라면. 현금거래가 안 되는 신불자 배려가 아니라 애초에 그들의 진입자체를 차단하려는 의도라면. 대가리 꽃밭마냥 하오하오 받아들인 거라면.


극단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판단을 위해서는 정보가 더 필요했다.


“사형수 배역이라고요?”


흡-


정보를 얻으려고 던진 질문에 양키스가 호흡을 삼켰다.

보조출연에 불과하지만 배역으로 불리는 순간 진심이 된다. 그의 승천한 광대가 그걸 말해주었다.


“에이- 오늘 끝인데 뭐. 좀비물도 아니고, 회상으로 나올 것도 아니고, 그냥 땡이지.”

“원래 장르가 뭔가요?”


계속되는 질문에 대배우처럼 겸손을 떨던 양키스가 나를 쳐다보았다. 부러움과 온갖 잡다한 감정이 섞인 눈빛. 곧 양키스의 승천했던 광대가 내려왔다.


“그쪽은 금방 자리 잡겠는데? 목소리도 괜찮고.”


양키스는 자신은 경쟁도 되지 못한다고 느꼈는지 이내 아쉬움이 담긴 표정마저 사라졌다.


“이 바닥은 대단한 스펙도 안 통하거든. 나 같은 하삐리 눈에도 저 새끼가 될 놈인지 아닌 놈인지 정도는 알아. 장벽 자체가 어나더 레벨이니까. 될 놈 중에 꼬꾸라지는 놈은 있어도, 안 될 놈 중에 확 뜨는 놈은 없어. 물론 운 빨은 빼고.”


양키스는 자신의 안목을 믿어보라는 격려를 늘어놓았다.


“일단 버티는 게 힘들 거야. 집안이나, 돈이나, 빽이나, 스폰이나, 뭐라도 잡고 버틴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절대 안 돼. 자기만의 한 칼. 그렇게 올라도 마지막 신기루는 너무 짧으니까. 꼭대기에 있어도 선택 받아야만 되는 건 디폴트고.”


양키스의 구구절절 지당하신 말씀을 듣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서. 그때 비니가 맥을 끊었다.


“여기에 큐알코드 찍을께요.”


비니는 QR 인식기에 핸드폰을 대는 모양을 취했다. 핸드폰에 생성된 QR코드를 인식기에 대자 스튜디오 번호와 담당자 이름이 나왔다.


삐-


“저 소리는 어째 들을 때마다 삑사리 같단 말이지.”


양키스는 스튜디오로 출퇴근 하는 직원처럼 틈만 나면 자신의 경력다움을 어필했다. 이 바닥에 혜성같이 나타난 뉴 페이스, 신상인 나를 의식하면서.


“정상처리 됐고요, 이제 스튜디오로 들어가니까 빨리 움직일게요.”


비니는 QR코드가 없는 양키스가 열폭하지 않도록 꼭 집어서 당부도 잊지 않았다.


“같이 따라 오실께요.”


비니는 경보수준으로 빠른 걸음이어서, 거의 뛰다 걷다 3-1 스튜디오에 도착했다.


“여기서 기다리면 담당자가 나올 겁니다.”


마땅한 분장실도 없이 천막 한 귀퉁이에서 검정 양복으로 환복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름표를 목에 건 30대 남자가 다가왔다.


“수고하실께요.”


비니는 왔던 경로로 사라졌다. 그는 초짜들의 QR코드를 만들고 위치까지 이동시키는 것이 역할의 전부인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비니에게 자신의 경력다움을 어필했던 양키스가 입맛을 다셨다.


“이리로 오세요.”


캐스팅 디렉터. QR코드에서 담장자로 나왔던 한준보가 앞장서서 걸었다.

양키스도 한준보의 목에 걸린 캐스팅 디렉터 직함을 놓치지 않았다. 캐스팅 감독 눈에 들면 조연 정도는 받을 수 있다. 정식출연의 고지가 엉뚱한데서 뚫릴지도. 반대로 눈 밖에 나면 다음은 없다.


한준보는 스튜디오 3-7에서 멈췄다. 스튜디오는 한산했다. QR코드에는 3-1로 되어 있었는데 무언가 어긋났다는 신호 같았다. 3분 정도 어색한 시간이 지나자 목줄이 없는 40대 후반의 남자와 30대 여자가 들어왔다.


“왜?”


한준보는 양손을 엑스자로 그으며 남자에게 신호를 보냈다. 말끔한 정장 덕분에 그의 엑스자는 칼날처럼 예리한 맛이 났다.


“씨발, 말로 해.”


남자에게 수신호 따위는 통하지 않았다. 그는 한준보가 들고 있던 프로덕션 배당표를 툭툭 치며 성질을 냈다.


“감독님, 일단 탈색 얼룩도 있고요.”


캐스팅 디렉터가 깍듯하게 호칭으로 부르는 저 남자가 총감독. 그렇다면 옆에 여자가 작가인가? 둘 다 목줄 따위는 없었다. 그들이라면 이 시나리오 전체를 알고 있을 것이다. 시나리오만 보면 증거는 명확한데.


“뭐?”


감독의 눈이 양키스의 머리로 향했다.


“모자 좀.”


모자 안 머리카락 상태를 예리하게 잡아낸 한준보는 손으로 모자를 벗는 시늉을 했다.

분위기에 압도된 양키스는 지난번처럼 1946년의 염색과 시대정신을 항변하지 못하고 순한 양처럼 모자를 벗었다.


“스프레이 뿌려. 어쩌겠어. 지금 와서.”


감독은 단순했다.


스프레이요?

눈만 끔뻑이는 한준보. 이번엔 여자가 나섰다.


“그거 뿌림 붕 떠서 조선어학당 될 텐데요. 게다가 사형순데.”

“조선? 잘 됐네. 아직은 조선이지. 정부수립도 안했으니까.”


여자도 입만 나와서 더 나서지 못했다.


“한 컷이야, 한 컷. 난 또 뭐라고.”


다시 이런 일로 부르지 말라는 경고를 날리고 돌아서는 감독.


“감독님!!”


한준보가 감독을 불렀다. 사실 그 전에 감독의 발은 이미 멈춰 있었다. 감독의 동선에 내 얼굴이 들어왔던 것. 그는 미친놈처럼 빤히 얼굴을 쳐다보았다.


“야쿠자 배역에 스무 살 푸둥푸둥한 물살보다는 아무래도 저쪽이.”


한준보는 물러서지 않고 캐릭터 변경을 요청했다.


“한감독 자꾸 왜 그래? 야쿠자 평균 수명이 얼만지나 알고 그래? 그 정도면 딱이야, 딱.”


감독은 내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고 건성으로 대답했다.

물론 한준보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즉각 양키스의 소매 밖으로 삐져나온 문신을 가리켰다. 한 템포 늦게 의도를 알아차린 양키스가 얼른 소매를 내려서 문신을 가렸다.


“몸에 문신 더 있죠? 타투 같은 거라도.”


물 타기 용도로 타투를 거론했지만, 그의 말은 ‘날 것’의 조폭에 대한 환대(?)였다. 양키스가 얼굴이 붉히며 머뭇거리자 한준보가 확신으로 대답을 재촉했다.


“보여줄 수 있을까요?”


말은 부드러웠지만 상당히 위압적이었다.


“···”


양키스는 자신의 목줄을 쥔 캐스팅 감독의 요구를 묵살했다. 어떤 역린을 건드렸는지 이마 주름이 선명해지도록 인상을 썼는데, 그때 눈빛도 같이 돌아있었다. 그러나 한준보도 만만치 않아서 계속 양키스를 건드렸다.


“저기요?”


양키스는 귀까지 붉어진 상태로 대답대신 훗- 숨을 내쉬었다. 머리 위로 푹푹 스팀이 오른 게 보이는데도 한준보는 물러서지 않았다.


“여보쇼들.”


더는 물러설 곳이 없다고 판단한 양키스가 달관한 얼굴로 말했다.


“조폭 양아치 역은 안할랍니다. 내가 한 때 몸에 그림도 좀 그리고 놀았던 건 맞는데, 나 손 씻었거든. 배역까지 그런 걸 할 생각은 없어요.”


양키스의 말은 진실일 것이다. 도둑놈 보고 도둑이라고 하면 욕이니까. 조폭이 조폭역할을 하면 다큐니까.


감독은 혼자 이리저리 통 밥을 재더니 양키스에게 뜻밖의 주문을 요구했다.


“지금 미간과 이마 주름이 특이한데 한 번 더 해보죠?”


장난하심?

전혀 어려운 요구가 아니었지만, 지금 분위기는 그게 아니었다.


세로로 푹 패인 미간 주름은 두 눈에 힘을 줄수록 선명해지는데 평소에도 쓰는 근육이라 자연스럽다. 눈꺼풀을 내리면 근육도 같이 늘어지는 기교적인 주름. 거기다 이마의 주름까지 합쳐져서 기괴한 표정이 만들어졌다.


‘모천식!!’


양키스의 표정에 부합하는 인물.

작가만 만들 수 있는 가상의 인물.


오!!


가장 놀란 사람은 나다.

내가 만든 호랑이 주름 설정에 딱 부합하는 인물이라니. 저 양키스가?


“딱이네.”


감독의 말에 여자가 나서서 캐릭터를 설명했다.


“조폭이나 야쿠자는 아니고요. 백색 양복에 백색 구두가 특징인 목사예요.”


여자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왕년에 주먹 좀 쓴 설정이 숨어 있다. 호랑이 주름을 가진 전직 조폭 출신 목사.


양키스의 눈이 반짝였다.


“대신 대사가 좀 있어요. 설교하는 역할이라.”

“대사요?!”


양키스가 그렇게 바라던 조연으로 업그레이드 되는 순간이다.


“감사합니다!!!”


양키스는 한 때 조직에 있었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조폭처럼 각을 잡고 허리를 굽혔다.


“아직 확정은 아니에요.”


여자의 수습이 무색하게 감독이 캐릭터를 고정시켰다.


“백목사는 픽스. 이제 뭐 남았지? 야쿠자하고 사형순가? 얘가 야쿠자 가면 그 푸등푸등 물살이 사형수 되는 건가?”


사람을 앞에 두고 얘, 쟤로 멸칭하는 감독. 빡칠 포인트가 한 두 개가 아니라 어질어질했다.


“사형수죠.”


여자가 단번에 정리했다. 이번엔 이견이 없었다. 푸릉푸릉 물살이라도 무게가 나갈수록 교수대는 위험하다. 반대로 내 얼굴은 화면도 예쁘고, 뭔가 서사가 있을 것 같은 시대상까지.


그리하여 양키스와 나는 각각 스튜디오 3-1, 3-7로 찢겨졌다. 머릿속은 대책을 마련하라고 시끄러운데 시나리오는커녕 핸드폰까지 압수되어서 공식적인 자료조차 찾지 못한 상태로.


“일단 환복하시고요.”


세트장에 도착하자마자 소품 담당이 넝마를 던졌다.


“입은 옷은 그 비닐에 담아서 여기 행거에 걸어두세요.”


비닐봉투도 던졌다.


“오늘 씬은 사형장으로 나와서 의자에 앉는 장면입니다. 대사는 없고요, 마지막에 얼굴만 주요배역과 함께 지나가듯 나와요.”


어영부영 넝마를 걸치고 조연출에게 설명을 들었다. 연기랄 것도 없고 동선 합만 맞추는 수준이었다. 오로지 조연출의 설명이 디렉팅의 전부였다. 화면에는 고작 몇 초 나오는데 그조차 안성욱 배우의 병풍 역할이었다.


액션!!


감독의 사인에 안배우가 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배우의 페이스에 맞추며 걸었다. 오로지 걷는 것만 잘하면 되었다.


컷!!


감독의 지시대로 동작을 멈추었다. 컷 사인에 카메라가 가까이 왔다.


액션!!


카메라가 원을 그리며 천장에 달린 형광등과 실루엣을 여러 각도에서 담았다.


컷!!


배우를 둘러쌌던 카메라가 뒤로 빠졌다.


액션!!


카메라는 멀리서 이동을 잡았다.

사형장까지 직진만 마치면 맡은 역할은 끝난다. 계단을 오른 뒤 의자에 앉기까지 조연출 지시대로 시선을 고정했다. 이윽고 보자기를 얼굴을 씌우는데,


‘이게 맞나?’


의구심이 들었다. 동시에 목에 밧줄이 걸렸고,


컷!!


감독의 오케이가 떨어졌다.


탁!


그리고 암전.


*


단언컨대 생애 최고의 숙면이었다.

잠에서 깬 순간, 습기가 쫙 빠진 솜처럼 가벼워진 몸을 느꼈다. 까마득한 시절의 달착지근한 햇살까지 최고의 아침을 맞았다. 옆에서 뒹구는 잘린 머리통을 보기 전까지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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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집단자살 방해작전 24.09.12 11 0 10쪽
» 빈집털이 24.09.11 25 0 11쪽
1 빈집털이 24.09.10 65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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