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지스탕스(RESIST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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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
작품등록일 :
2024.09.11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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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9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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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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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학생

DUMMY

명월고에서 맞이하는 두 번째 봄이었다. 살랑바람에 교정에 만개한 벚꽃이 부드럽게 흔들렸다. 운동장에는 연분홍색의 벚꽃잎이 천천히 흩뿌려지고 있었다. 담장을 따라 늘어선 나무들에선 어느새 투명할 정도로 여린 새싹들이 돋아나고 있었다. 그 속에서 나는 거친 숨을 내쉬며 운동장을 뛰어 다녔다.

체육시간을 맞아 다른 반 친구들과 축구 대항전 중이었다. 어느새 가쁜 숨은 턱 끝까지 차 올랐고 체육복은 땀으로 흥건했다. 체육시간이 가장 좋았다. 오직 승리하기 위한 전략과 팀워크만 생각하고 골을 넣기 위해 열정적으로 뛰어다니면 되었다. 온 정신을 몰두해 땀을 흘리다 보면 온갖 걱정과 불안을 망각할 수 있었다. 나는 더 열정적으로 뛰어다녔다. 친구들에게 공을 달라고 소리치고, 격렬하게 몸싸움을 하고, 골대를 향해 힘껏 슈팅을 때렸다. 우리 편이 파울을 당하면 금방이라도 싸울 기세로 역정을 냈다.

종소리와 함께 경기가 끝났다. 우리팀의 승리였지만 기쁘지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고 눈을 감은 채 한숨을 내쉬었다. 눈꺼풀 사이로 싱그러운 햇살이 아른거렸다. 잠시 후 친구들과 함께 수돗가로 향했다. 시원한 물줄기로 세수와 등목을 하고 벤치에 앉아 땀을 식혔다.

“야, 살살 좀 해. 왜 이렇게 축구만 하면 거칠어져.”

수형이가 물에 흠뻑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2학년이 되면서 그와 다른 반이 되었다. 하지만 겹치는 체육시간이나 수준별 이동 수업 시간이 되면 당연한 듯 함께했다.

“할 거면 제대로 해야지.”

나는 숨을 고르며 무심한 듯 대답했다.

“그나저나 2학년 때는 남녀 합반 좀 해주는 줄 알았더니. 이러면 남녀공학이 무슨 의미냐. 진짜 생각할수록 열받네.”

수형이가 물에 흠뻑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그의 시선은 벤치에 앉아 있는 여학생들에게 가 있었다.

“그러게 말이다.”

나는 텅 빈 운동장을 멍하니 바라본 채 대답했다.

“너는 반응이 맨날 왜 그러냐.”

“그냥, 다 재미없다.”

“너 요즘은 유상민이랑 안 어울리는 거 같더라?”

“뭐, 그건 아니고 나는 이과고 걔는 문과니까.”

나는 애써 쓴웃음을 지며 대답했다.

“오늘 학교에 귀빈 오나보다.”

갑자기 수형이가 교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때 검은색 승용차가 교문을 통과하며 본관으로 유유히 들어왔다. 이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학교에 방문하는 모든 차량은 교문을 지키는 경비 아저씨의 안내에 따라 본관 진입로가 아닌 샛길로 가게 되어 있었다. 샛길은 후문 주차장으로 이어져 있었다. 본관 진입로를 이용하는 차량은 학교 재단 이사장님이 방문할 때밖에 없었다. 바로 오늘이 그날이었다. 이미 1교시에 이사장님의 차가 정문을 가로질러 본관 앞에 주차되어 있었다.

“저기 본관에 이사장님이랑 교장 선생님도 나왔는데?”

“장학사라도 오나?”

“그건 아닌 거 같은데.”

“왜?”

“장학사가 벤츠 S클래스를 타겠냐.”

“그런가.”

“그랜저나 에쿠스면 몰라도.”

“하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벤츠의 움직임을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이윽고 본관 앞에 멈춰선 벤츠의 뒷좌석에서는 한 중년의 남자가 내렸다. 고급스러운 네이비 슈트를 입고 있는 그는 큰 키는 아니었지만 풍채가 다부졌다. 이사장과 교장의 환대를 받아서 그런가 어딘가 품격도 있어 보였다. 오직 등장만이 그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건 아니었다. 그보다는 짚고 있는 지팡이가 더 강한 인상을 남겼다. 연배와는 어울리지 않는 지팡이였다. 자세히 보니 그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오른쪽 다리를 미세하게 절고 있었다. 세 다리를 이용해 걷고 있었지만 그 자태는 무척이나 단단해 보였다.

이어서 뒷좌석에서 한 남학생이 따라 내렸다. 그는 명월고의 교복을 입고 있었다. 단번에 그가 전학생이라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당연히 다리를 저는 분은 그의 아버지일 것이었다.

“대단한 전학생인가 본데?”

“귀티 나긴 한다.”

“뭐 이렇게 하얘?”

“몇 학년일까.”

벤치에서는 친구들이 각자 호기심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드라마틱한 등장 때문에 주목을 끄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내가 보기에는 딱히 특별할 것도 없어 보였다. 키도 평균보다 조금 큰 듯했고, 머리도 두발 규정의 표본을 보여주는 듯 반듯했다. 교복 차림도 단정했다. 셔츠는 바지 안에 깔끔하게 넣어져 있었고 넥타이는 목 끝까지 채워져 있었다. 신발도 에어맥스가 아닌 평범한 운동화였다. 재미없는 녀석이 분명했다. 관찰 대상이었던 전학생은 벤치에서 왁자지껄함을 느꼈는지 시선을 옮겼다.

그는 이쪽을 응시했다. 운동장에 비춰오는 봄 햇살에 눈이 부신지 왼손을 이마에 가까이 가져가 차양을 만들었다. 손 그림자 때문에 정확히 누구를 바라보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을 마주하는 순간 호기심이 일었다. 그건 또래에게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눈빛이었다. 아주 깔끔하게 정제된 우울 같기도 했고, 너무 일찍 무언가를 알아버린 슬픔 같기도 했다. 그는 아버지가 부르자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마주친 시선은 발걸음보다 느리게 움직여 마치 억지로 끌려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수업이 시작되었지만 하나도 귓가에 들리지 않았다. 복잡하게 엉켜 있는 고민을 떠안은 채 이걸 어떻게 풀어야 하나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바로 나를 반겨주었던 세계로 어떻게 복권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가을 소풍 이후로 나는 더 이상 상민이와 어울리지 못했다. 잠시 맛보았던 권력과 그 특권, 일상에서 맛볼 수 없는 일탈, 그리고 그 행위 속에서 도취되어 있던 자의식과 우월감은 모두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상민이와 함께 모든 게 빠져나간 자리에는 텅 빈 내가 있을 뿐이었다.

나는 상민이와 그의 무리로부터 배척되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괜히 교실에서 폼을 잡고 있어 보기도 했고, 애써 반 아이들을 규합해 소란을 피워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멀리서 상민이의 무리를 응시했다. 어쩌면 다시 친구가 될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다. 에어맥스가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열었던 것처럼, 다시 멋진 무언가가 있으면 그들과 함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에어맥스를 또 샀다. 나이키 재킷도 구입했다. 디젤 청바지와 지샥 손목시계도 구입했다.

상민이도 내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건 예전처럼 친구가 되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다. 그는 내가 가진 것들이 필요할 뿐이었다. 그는 예전처럼 내게 다가와 전혀 새로운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신발과 옷을 빌려달라고 했다. 예전 같으면 서로의 궁핍한 처지를 알고 있기에 당연하게 물물교환을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저 일방적으로 빌려 갈 뿐이었다. 나는 이런 징조들이 다시 친구가 되고 싶어하는 걸로만 착각했다. 겨울 방학 때에는 상민이가 집 앞에 직접 찾아와 신발과 옷을 받아 가기도 했다. 그럴 때면 막연한 기대를 하곤 했다. “너도 같이 갈래?” 하지만 나는 대문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다시금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은 채워지질 않았고 오히려 근심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봄이 되자 상민이는 빌려간 것들을 되돌려주지 않기 시작했다. 물어보면 집에 놓고왔다, 깨끗하게 주려고 드라이크리닝을 맡겼다, 내일 가져오겠다 등의 다양한 핑계를 대기 시작했다. 더불어 그의 곁에 있는 관석이의 태도도 180도 바뀌어 있었다. 그는 내게 무척이나 위협적으로 대했다.

“야, 누가 안 준대? 씨발 좀 기다려.”

상민이에게 다가가기만 해도 그는 내게 늘 공격적 태도를 취했다.

“기윤아 진짜야. 깜빡하고 할머니 댁에 놓고 왔어.”

“에휴, 벌써 이 주째잖아.”

나는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한숨 쉬는 거 존나 거슬리네. 이 새끼도 내 이름만 들어도 오줌 지리게 만들어야 되는데.”

관석이는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상민이에게 말했다. 상민이는 실소와 함께 애써 나를 위하는 척했다.

“야, 농담 좀 살살해라. 아무튼 다음 주에 연락 줄게.”

그는 관석이의 비호를 받으며 유유히 사라졌다.

학교 생활이 공허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해 주고 더불어 달콤한 열매를 안겨주던 세계는 나를 완전히 추방해 버렸다. 삶이 전락해 버렸다. 완연한 봄이 되었지만 홀로 지냈던 겨울방학의 외로움은 여전히 지속되었다. 어떻게 하면 그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복권의 메시지를 담아 파견한 사신이었던 신발과 옷은 소식을 전하기는커녕 돌아오지도 않음으로써 나의 불안은 더 커져만 갔다.

쉬는 시간, 창밖을 보니 벤츠가 교문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진입로에 쌓여 있던 벚꽃잎은 수면 위에 보트가 지나갈 때 생기는 물살처럼 부드럽게 흩날렸다. 이사장의 차도 학교를 빠져나갔다. 문득 본관 앞에서 마주했던 전학생의 시선이 생각났다. 어떤 녀석이길래 그런 분위기를 갖고 있던 건지 궁금해졌다. 곧이어 수업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잠시 후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놀라고 말았다. 문이 열리며 담임 선생님과 함께 전학생이 들어왔던 것이다.

관찰하듯 새로운 얼굴을 지켜봤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내가 본관에서 마주한 건 다른 녀석인가 싶을 정도였다. 오히려 새로운 시작에 잔뜩 설레는 듯 눈빛은 생기 있게 빛나고 있었고,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서려 있었다.

“자, 이 친구는 서울에서 전학을 오게 됐고 집안 사정 때문에···.”

“선생님, 죄송한데 제가 소개해도 될까요.”

전학생은 갑자기 선생님의 말을 끊으며 물었다. 선생님은 그의 당돌함에 당황한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서민재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는 교탁 앞에 서더니 밝은 미소로 당당하게 말했다. 무언가 이어질 줄 알았던 자기 소개는 이게 전부였다. 그는 소개를 마치자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의 인사에 자연스럽게 환영의 박수 소리가 들렸지만 무척이나 옅었다. 모두들 당황한 듯 어리둥절해하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전학 오게 된 사연이나 첫만남의 소감 등을 기대하고 있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그게 끝이야? 더 할 말은 없고?”

선생님도 의아한 눈으로 그에게 물었다.

“네. 딱히 할 말이 없네요.”

그는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머금은 채 답했다.

“뭐, 그래···.”

선생님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전학 오면 신고식으로 노래도 해야 되는데.”

반장이 큰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그런 전통은 없었다. 그러나 모두가 합을 맞춰 환호하기 시작했다.

“노래해, 노래해!”

그는 놀란 눈으로 선생님을 바라봤다.

“괜찮겠어?”

선생님이 미소와 함께 눈썹을 위아래로 움직이며 묻자 그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제가 좋아하는 라디오 헤드의 <Creep>를 짧게 불러보겠습니다.”

주저하지도 않는 그의 반응에 작은 환호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나는 적잖이 실망했다. 당시 우리에게 인기 있던 가수는 다이나믹 듀오나 버즈, SG워너비 정도였다. 라디오 헤드는 처음 듣는 가수였고 선곡한 노래조차 생소했다. 유행도 모르는 고리타분한 놈이구나 싶었다. 선생님은 자신이 체벌할 때 쓰던 짧은 막대기를 그에게 건넸다. 그는 막대기를 마이크 삼아 목청을 가다듬더니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But I'm a creep

I'm a weirdo

What the hell am I doin' here?

I don't belong here

어느새 나는 그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노래를 아주 잘 부르는 건 아니었지만 묘한 끌림이 있었다. 그는 마치 노래는 이렇게 순수하게 불러야 한다고 알려주는 것만 같았다. 창가에서 불어오는 부드러운 봄바람에 살랑이며 파도치는 커튼, 그리고 비스듬히 떨어지는 봄 햇살이 모두 노래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노래가 끝나자 모두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박수를 쳤다. 그는 부족했던 자기소개를 노래 한 곡으로 풍성하게 채워버렸다.

“어디 보자, 민재는 저기 빈자리 가서 앉아.”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선생님이 지정해 준 자리로 가서 앉았다. 이윽고 수업이 시작되었지만 나는 자꾸 녀석에게 시선이 갔다. 짧은 순간에 그는 많은 것을 아주 밀도 있게 남겼다. 또래답지 않은 노래 취향, 많은 시선을 받으면서도 어딘가 여유로운 태도, 주저하지 않는 자신감, 자신만의 색깔로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에너지. 내겐 적잖은 충격이었다. 에어맥스를 신지 않아도 사람이 빛이 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녀석이 궁금해졌다.

그에 대한 호기심은 머지않아 하나둘 채워졌다. 바로 그의 요란한 등장이 가져온 소문 때문이었다. 이제 전교생이 그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는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아는 종합병원 이사장의 둘째 아들이었다.

많은 아이들이 사실 여부를 묻기 위해 그를 찾아왔다. 심지어 다른 반에서도 찾아왔다. 정말이야? 진짜야? 왜 우리 학교로 온 거야? 라면은 뿌셔 먹어봤어? 온갖 질문이 쏟아졌다. 집이 몇 평인지, 집에서는 호칭이 뭔지, 경호원이나 집사가 있는지 하는 쓸데없는 호기심도 있었다. 포경 수술을 안 아프게 해줄 수 있는지 의료 상담을 하는 녀석도 있었다. 그는 질문 공세가 쏟아지자 움츠러들기 시작했다. 해명하기 힘든 어려운 헛소문도 있었다. 친구들 앞에서 노래를 부를 때의 여유로움과 자신감은 이제 방어 기제로 활용하고 있었다.

“나는 잘 몰라. 호적 파였거든 아버지한테.”

“그거 헛소문이야. 나 사실 탈북민이거든.”

“예약했어? 안 했지? 오늘 상담 예약은 마감했는데.”

그는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엉뚱한 대답을 했다. 효과는 확실했다. 호기심을 갖고 접근했던 애들은 당황해하며 주춤주춤 돌아갔다. 그리고 다신 질문을 하지 않았다. 나는 뒤에 앉아 그의 대답을 들을 때마다 피식 웃곤 했다.

“우리 가문은 프리메이슨이라 사적 생활은 비밀이야. 알면 다쳐.”

어느 날에는 그의 대답을 듣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러자 그가 뒤를 돌아보더니 내게 물었다.

“이제 더는 안 물어보겠지?”

“호적 파인 탈북민에 프리메이슨이면 말 다했지 뭐.”

“프리메이슨은 비밀로 해줘.”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가벼운 미소와 함께 다시 몸을 돌려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게 우리의 첫 대화였다. 이야기를 더 나눠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는 그 누구와도 대화를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지 않았다. 친구들과의 일문일답도 한몫했다. 그건 어쩌면 그에게 꼭 필요한 작업인지도 몰랐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소문을 황당한 유머로 대체시켜 버렸다. 이제 그를 따라온 소문들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는 이 작업을 끝내자 마치 오랫동안 계획해 온 것처럼 이상한 일들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는 언제 어디서나 책을 손에 쥐고 다녔다. 등하굣길은 물론이었고, 체육시간 운동장에서도, 복도를 거닐거나 화장실을 갈 때도, 심지어 조회시간에도 그는 언제나 책을 들고 있었다. 틈만 나면 책 속에 얼굴을 묻었다. 그가 들고 있는 책은 마치 그의 신체 일부분처럼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는 친구들이 말을 걸면 잠시 책 속에서 빠져나와 그들을 미소로 맞이했지만, 필요 이상으로 대화를 이어 나가진 않았다. 나는 독서에 몰두하는 그가 불편할 정도로 신경 쓰였다. 내 영역을 침범해 오는 것처럼 느껴져서였다.

나도 그처럼 매일 책을 갖고 다니고 있었다. 읽는 건 아니었고 목적은 따로 있었다. 겨울방학에 참석했던 선배들의 졸업식에서였다. 조회대에 올라가 상을 받는 졸업생들의 모습이 어딘가 부러웠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졸업할 때 상 하나라도 받을 수 있을까. 한데 나는 특출나게 잘하는 것이 없었다. 성적도 엉망이었다. 이미 지각을 밥 먹듯이 했었기에 개근상은 물 건너간 일이었다. 그러던 중 이거다 싶은 상이 눈에 띄었다. 바로 ‘독서왕’이라는 상이었다. 도서관에서 가장 많은 책을 대출한 학생에게 주는 상이라고 했다. 나는 그 뒤로 도서관에서 매일 책을 빌렸다. 독서왕이 되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책을 소지하는 건 나만의 영역이라 여기고 있었다. 사실 나는 책과 함께한다는 사실에 이상한 안정감과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권위 있는 제목들로부터 지적 허영심을 채웠고, 대출 기록으로 학창 시절의 유일한 업적을 쌓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상민이와 어울리지 못하는 소외감도, 돌아오지 않은 물건들에 대한 불안도 이것들로 상당 부분 해소하고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갑자기 전학생이 내 영역을 침범해 왔다. 그는 책을 소지하는 것 이상으로 탐독까지 하고 있었다.

그에게 불편함을 느낀 건 독서왕을 빼앗길까 봐서가 아니었다. 그와의 대조로 인해 내가 붙잡고 있던 유의미한 행위의 본질이 허영으로 드러나는 것만 같아서였다.

“기윤아, 데미안 다 읽었어?”

어느 날, 민재가 내게 불쑥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응? 데미안?”

나는 불편한 존재가 다가와 잔뜩 경계를 한 채 대답했다.

“도서관에선 네가 갖고 있다 하더라고.”

“아, 그 데미안. 마침 다 읽었지.”

“도서부 애들한테 들었어. 너도 책 좋아한다며?”

그는 자연스레 맞은편 책상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뭐 그냥 가볍게 즐기는 정도?”

책을 대출한 이래 책장도 펼쳐본 적 없던 나는 적잖이 당황하며 말했다.

“데미안은 어땠어? 헤세의 다른 작품은 읽어봤지만 데미안은 아직이거든.”

맑게 빛나는 그의 눈빛이 부담스러웠다. 책에 대해 이야기해서 그런가 기쁨에 가득 차 있었다. 한편으로는 그의 시선이 진실을 파헤치는 것만 같아 어딘가 부담스럽기까지 했다. 책을 읽지 않은 게 드러날까 식은땀도 났다. 어떻게든 읽어본 척을 하려고 책을 세로로 부드럽게 구부려 천천히 책장을 넘겼다. 오래된 종이 냄새가 은은하게 풍겨왔다.

“음, 헤세의 책은 처음이긴 한데. 뭐랄까, 난해하긴 하지만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 같았어.”

나는 책에 대한 감상을 음미하듯 천천히 말했다. 그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했는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곤 입을 열었다.

“이 책 나한테 줄래? 내가 도서관에 반납하고 대출할게.”

“잘됐다. 마침 반납하려던 참이었거든.”

나는 그에게 책을 건네주었다.

“참, 헤세를 좋아한다면 황야의 이리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도 한번 읽어봐. ”

책을 받아든 그는 도서관으로 향했다.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읽은 것처럼 능청스레 거짓말을 한 나 자신이 놀랍기도 했다. 어쩌면 가짜라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던 건지도 몰랐다. 내 삶에 진짜였던 건 있기나 했던가. 좋아했지만 고등학교 입시 때문에 접게 되었던 그림, 축하받지 못했던 입학, 회복할 수 없는 우정, 집안을 맴도는 아버지의 헛기침, 바닥을 향해 가는 성적, 우편함에 몰래 꽂아놓는 가짜 성적표, 학원비로 사는 멋, 내 손을 떠나간 에어맥스, 쌓여가고 있는 도서관 대출 기록. 도대체 나는 무얼하는 건지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에 반해 민재는 단단해 보였다. 늘 확신에 가득 차 책을 읽고 있었다. 그는 어떤 비밀을 알고 있는 것만 같았고, 나를 이해해 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친해지고 싶어서였을까, 책을 빌린 이래 처음으로 책장을 펼쳤다. 내 삶에 난데없는 독서가 시작되었다. 학업에는 관심도 없었기에 그럴 시간이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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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가을 밤의 멜로디 NEW 10시간 전 2 0 26쪽
8 손에 쥔 코르크 24.09.18 4 0 28쪽
7 상처 깊은 밤 24.09.17 5 0 20쪽
6 심연의 우물 24.09.16 6 0 14쪽
5 불온사상 24.09.15 7 0 16쪽
4 데미안 24.09.14 6 0 21쪽
» 전학생 24.09.13 10 0 20쪽
2 인정의 결핍 24.09.12 8 0 20쪽
1 바리케이드 24.09.11 16 0 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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