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한기 - 상처입은 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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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클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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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5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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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6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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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한 수사(1)

역사적 사실에서 모티브를 따왔으나 실제 역사와는 지명, 인물 등은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DUMMY

성천력 1092년 11월 초순. 마한 최북단 상외국(桑外國)


겨울로 접어드는 북방의 거리는 을씨년스러웠다. 골목을 따라 펼쳐졌던 좌판은 모두 걷혔고 오가도 사람은 없었다. 저 멀리 천궁의 종소리만 은은하게 울리는 가운데 야경꾼들의 횃불만 점멸하듯 어둠속에서 사라졌다.


상외국 치안별감 조수아연은 볼품없는 회반죽으로 쌓아올린 3층 건물과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 사이에 서 있었다. 칠흙같은 긴 머리카락을 늘어트린체 검은 망토로 몸을 가린 상태였다. 허리에 맨 장권총을 손가락으로 더듬으며 건너편 5층 기와집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규모가 크기는 하지만 평범한 기와집이다. 튼튼한 오동나무 기둥이 커다란 대문을 지탱하는 가운데 안쪽으로는 꽤 넓은 정원도 있다. 낮은 돌담 너머로 소나무의 그림자가 연못에 길쭉한 선을 내는 것이 선명하다.


그녀는 초조한 듯 품속에서 담배 하나를 꺼내 물었다. 뭔가 잘못됐나? 그러나 더 기다려 볼 필요는 있다. 아스라한 담배 연기가 시야를 가릴 무렵이었다.


"몸이라도 팔아보려고?"


바로 그때 한 노파가 나타났다. 그녀는 잠시 주변을 두리번 거리더니 아연이 응시하던 기와집 옆 낮은 계단에 앉아 초가 든 커다란 바구니를 내려놨다. 주름진 얼굴에 구부러진 등. 스쳐가는 달빛에 노파의 탁한 눈동자가 어스름한 안광을 낸다. 오래전부터 여기서 양초를 팔던 노파. 너무나 헤져 원래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웠지만 고급스러운 천으로 짠 검은색 옷을 입고 있다. 노파는 몇개 남아있지 않은 이빨을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돈 벌어보려고 여기에 찾아오는 색시들을 많이 봤지. 10년도 전에 전쟁이 끝나고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지만 어째 달라진 것이 없단 말이야"

"그 초들은 얼마에 팔지?"


아연은 담배불을 끄며 낮게 말했다. 온 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 같다. 노파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다시 웃었다.


"이건 파는게 아니야. 저승으로 향하는 이들을 비추는 불빛이지"

"저승이라"

"총 여섯 명이야"


노파는 클클대는 기분나쁜 웃음소리와 함께 바구니에서 양초를 주루룩 꺼내놨다. 아연은 그 깡마른 손이 차례로 초에 불을 붙이는 것을 바라본 후 낮게 말했다.


"야경꾼들이 보면 경을 칠텐데"

"무슨 상관이야. 이제 여기는 큰 불이 날텐데. 나처럼 미친 노파 하나가 초에 불 좀 붙인다고 무슨 일이나 있겠어"


노파는 총 다섯개의 초에 불을 붙이고는 마치 이를 감상이라도 하려는 듯 지긋이 웃었다. 불빛이 바람에 흔들릴때마다 노파의 얼굴에 수십개의 그림자가 퍼진다. 매캐한 연기가 솟아오르더니 겨울밤의 공기속으로 힘없이 사라졌다.


아연은 크게 숨을 골랐다. 뒷못이 뻣뻣해지며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그 쩌릿한 감각을 그녀는 사랑했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뜬 그녀는 냅다 기와집의 낮은 돌담을 훌쩍 넘었다. 잘 가꿔진 정원이 한 눈에 들어온다. 작은 연못을 중심으로 사이사이 박혀있는 관상용 소나무와 적당한 수풀.


덕분에 몸을 숨기기에는 제격이다. 아연은 바람처럼 소나무와 수풀 사이를 지나쳐 불로장생을 위해 세워둔 불로문의 그림자에 문을 숨겼다. 다행히 두터운 돌문은 그녀의 몸을 완벽하게 숨기에 충분했다. 남은 것은 안쪽으로의 진입. 장총을 꺼내든 그녀는 천천히 본관쪽을 바라봤다.


짙은 어둠속에서도 상외국 3대가문인 사택가문의 별장 본관은 위풍당당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화려하게 장식된 3층까지의 내부가 훤히 보일 정도다. 그러나 아연은 이질감도 동시에 느꼈다.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별장의 외곽돌담에 보초를 세워두지 않는것은 이해가 된다. 오늘은 어찌되었든 은밀한 회합이니까 굳이 티를 낼 필요는 없겠지. 그러나 정원도, 심지어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대청마루에도 아무도 없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심지어 이렇게 불을 환하게 피워놓고 안쪽에 아무도 없다는 것은 더더욱 이상하지 않은가.


아연은 슬그머니 돌문의 그림자에서 나와 본관 정면을 응시했다. 1층 벽에 걸린 커다란 풍경화와 2층의 작은방을 장식한 보석의 색감이 손에 잡힐것 같다. 그러나 역시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아니, 움직임 자체가 없다. 마치 커다란 별장의 본관 자체가 죽어 자빠진 거인의 시체같다.


코에 익숙한 피냄새가 흘러들어온 것은 그녀가 천천히 1층 대청마루쪽으로 접근했을 무렵이었다. 훌쩍 마루로 올라온 그녀는 반쯤 열린 문 앞으로 다가가 밖에서는 보이지 않던 안쪽을 들여다봤다. 그리고는 자신도 모르게 눈쌀을 찌푸렸다.


"빌어먹을"


검붉은 피가 바닥에 흥건했다. 그 위로 서너명의 사내들이 죽어 쓰러져 있다. 아연은 재빨리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은 후 한 놈의 시신을 살폈다. 일격필살. 단 일격에 목이 꿰뚫렸다. 아마 본인이 언제 죽었는지도 몰랐으리라. 그런데 좀 이상한 것도 있었다. 목이 꿰뚫린 근처에 묻은 검은 그을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연은 손가락으로 덜렁거리는 시체의 목 주변을 슥슥 문질렀다. 화약 자국이다. 그렇다면 역시 총일까? 그러나 당한 상처는 분명 검상이다. 일반적인 검상보다는 잘려진 단면이 형편없이 일그러지기는 했지만.


아연은 굳은 얼굴로 작은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갔다. 내실로 향하는 문을 힘껏 열자 다섯 명의 사내들이 정갈하게 차려진 상 위에 고개를 처박고 죽어있는 것이 보였다. 산해진미가 차려진 넓은 상에서 막 식사를 하려다 순식간에 당한 것 같았다. 허리에 찬 검과 총이 그대로인 것을 보니 반항할새도 없었다.


아연은 사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세 사람은 사택가문의 주요가신이고 그 중에 한사람은 아연도 아는 자였다. 사택가문의 가주를 지근거리서 보좌하는 시종장. 두 눈을 부릅뜬 체 죽어있는 그는 그나마 맨 마지막에 당했는지 허리춤에 찬 단검 손잡이에 손을 뻗기는 했다. 물론 잡지는 못했지만. 그리고 나머지 두명은 처음보는 자들이다.


보통 일이 아니다. 일이 어그러진 것이나 다름없다. 아연은 망토속에 감추고 있던 작은 활을 꺼내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난간으로 가 신호용 화살을 날렸다.


쎄엑! 고요한 밤을 가르는 소리가 멀어지자 아연은 허리를 숙여 바닥에 고인 핏자국을 확인했다. 순간 그녀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아직 굳지 않았다. 뜨거웠다!


잔잔했던 공기가 일순간 어디론가 빨려지더니 폭발하듯 아연의 몸을 덮쳐왔다. 말 그대로 찰라의 순간 벌어진 공격. 그녀는 동물같은 반사속도로 장권총의 총신을 대각선으로 세웠다. 쩌엉! 어둠속에서 날아온 검이 그녀의 총신에 박혔다. 그 엄청난 힘에 어깨가 빠질 것 같은 고통을 느끼며 뒤로 몇바퀴나 굴렀다.


"누구야!"


아연은 그러나 정신을 놓지 않았다. 몇바퀴나 굴렀으나 재빨리 중심을 잡은 그녀는 놈의 공격을 막아낸 장권총의 총구를 정면으로 들이댔다.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파사삭! 그녀의 장권총이 순간 뜨거워지더니 맥없이 바스라졌기 때문이다. 총신은 물론 외장 대부분을 강철로 뒤덮은 육중한 장권총이 검날에 박살난 셈이다.


"이럴수가..."


아연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조각나 땅에 떨어진 장총의 잔해들을 바라봤다. 무거운만큼 근접전에서 둔기로 쓸 정도의 장권총이다. 그런데 이렇게 한번의 공격에 박살나다니.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아연은 재빨리 등에서 작은 단검 두개를 집어든 후 어둠속을 노려봤다.


놈의 얼굴은 물론 몸, 심지어 체형조차 보이지 않는다. 다만 어둠속에서 내뿜는 원초적인 살기는 30대 중후반으로 향하며 숱한 전투와 전쟁을 겪은 아연도 질리게 만들 정도로 강렬했다. 아니, 살기라는 표현만으로 이를 설명할 수 없다. 그보다는 더욱 원색적인 그 무언가. 더 근원적인 감정이다.


"너놈이 사택가문의 별장에 침범해 가신들을 죽인 자인가?"


아연은 마른침을 삼키며 뻔한 말을 했다. 당연히 저놈이 범인이겠지. 그러나 시간을 벌어야 한다. 조금있으면 치안대가 들이닥칠 것이다. 아연은 온 몸이 비틀릴것같은 살기를 애써 떨쳐내며 말을 이었다.


"나는 상외국의 치안별감이다. 사실 이 자들을 추포하러 왔지. 사택가문이 허락받지 못한 무기들을 다량으로 들여 온다는 단서를 잡았거든. 마침 오늘 사택가문이 옥저의 불법 무기상들을 만난다는 첩보를 듣고 왔다. 그렇게 증좌를 잡고 일을 해결하려고 했는데"


아연은 두 개의 단검을 위협적으로 잡았다.


"너놈 때문에 다 망했네? 도대체 어디서 온 누구냐? 그리고...얼마나 많이 죽인거야"


허튼말은 아니었다. 어둠속에 스며든 놈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지독한 피냄새가 들끓었기 때문이다. 당장 창문이라도 열고싶은 마음. 거기에 생전 처음 맡아보는 무언가 썪는 냄새까지. 그리도 당연하지만 보초와 하인들도 보이지 않는다. 아연은 호흡을 골랐다.


"별장의 보초들과 하인들도 다 죽였겠지? 더러운 살인마로구나"


아연은 슬금슬금 어둠속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커다란 천조각이 그림자속에서 슬쩍 흔들리는 것이 보인다. 태양문양이 수 놓아진 지나치게 화려한 옷감. 아연은 식은땀을 흘리며 씩 웃었다.


"옷입는 취향 한번 고약하군. 나와라. 상대해주마"


바로 그때 1층쪽에서 우당탕 무언가 올라오는 소리가 들린다. 치안대. 생각보다 늦었지만 그나마 다행이다. 기세가 오른 아연은 단검을 위세당당하게 치켜든 후 힘주어 말했다.


"너놈은 포위됐다. 밝은곳으로 나와"

"치안별감! 괜찮으십니까!"


부관인 석성준로가 10여명의 치안대 병사들을 데리고 2층으로 올라왔다. 모두들 급하게 달려온 듯 거친 숨을 몰아쉰다. 아연은 한대 패버리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고는 턱으로 어둠속을 가리켰다.


"범인이 눈앞에 있다! 긴장풀지 마!"


아연의 말에 준로가 다급하게 검을 뽑았다. 너무 급하게 뽑느라 자기 손등을 베고 말았지만. 20대 초반으로 향하는 온실 속 화초 귀족 나부랭이 청년에게 역시 치안대는 어울리지 않아. 아연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드는 사이 준로는 한 손으로 피나는 손등을 에워싼 후 이를 으드득 거렸다.


"너놈이 감히..!"

"물러나!"


어둠속의 이 괴물은 순간적인 기분으로 대항할 수 없다. 그런데 이 미친 귀족 나부랭이는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 보였다. 가만히 보니 부끄러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다만 그런 얄팍한 기분을 풀기에 상대가 너무 나쁘다. 아연은 평소 죽이고 싶었으나 그래도 죽으면 상당히 골치가 아파질 수 있는 준로의 팔목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준로가 더 빨랐다. 그의 손에 들린 검이 어둠속으로 날아가 벽에 둔탁한 소리와 함께 콱 박혔다.


"....박혀?"


침묵이 흘렀다. 그저 벽에 힘있게 박힌 준로의 검신만 요란하게 떨릴뿐이다. 병사들이 모두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는 사이 아연은 냅다 준로의 검이 박힌 벽쪽으로 달려가 손으러 휘휘 저어봤다.


아무도 없었다. 그저 준로의 검에 길게 늘어트러진 천으로 된 가리개만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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