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 필요악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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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필
작품등록일 :
2024.09.16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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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3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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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8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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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연 재판 (2)

DUMMY

세닐다는 본론에 들어가는 대신 잠시 숨돌리는 시간을 가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안프리드의 입가에 맺혀 있던 미소가 머릿속 깊숙이 박혀 빠져나오지 않았으니까.

마음 같아선 욕이라도 내뱉으며 의도를 묻고 싶었지만.


‘일부러 태연한 척하는 거야. 흔들리면 안 돼······.’


결코 감정적으로 굴어선 안 되는 순간임을 알았기에 견뎌냈다.

구석을 향해 있던 고개가 다시금 방청석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의 표정은 이전의 냉철함을 띠고 있었다.


“안프리드 윈 데헬란트는 지난 1학기 동안 동급생인 알렌을 대상으로 지속적인 괴롭힘을 가해 왔습니다.”


세닐다는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가해 학생은 자신의 무리에 속한 학생들을 동원, 피해 학생을 첼 등위에서 고립시켰고 그와 친해지려는 자들 또한 배척하는 분위기를 부추겼습니다. 성장기 청소년에게 있어 인간관계의 고립이 얼마나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는진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가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과하지 않게 미묘한 자신감이 묻어나는 목소리.

말을 이으려다 말고 세닐다의 시선이 어딘가로 향했다.

한 교수가 손을 들고 있었다.


“이의 있네만.”


세닐다는 입을 다물었지만, 당황하진 않았다.

이곳에 모인 교수들은 가만히 앉아만 있으라고 불려 온 이들이 아니었다.

교권을 지닌 아카데미의 적법한 관계자로서, 회의에 간섭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위원장이 발언을 승낙하자 나이 든 교수가 입을 뗐다.


“이곳은 아카데미요. 우리의 목적은 미성숙한 마법사를 성숙한 마법사로 만드는 것이지, 냉정히 말하면 어린아이들의 양육 따위가 아니오. 선생도 알겠지만, 아슬론이라는 하나의 지붕 아래 수많은 제국의 샛별들이 함께 공부하고 더 나은 마법 구현을 위해 실력을 갈고닦고 있소.

제국 최고의 인재들로서 자부심을 자립해 나가며 상호 간에 충돌이 발생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라고 생각이 드네만. 아니, 오히려 없어선 안 될 요소라고 여겨지는데. 이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오?”


나이 든 교수의 논리정연한 반박에 위원장이 고개를 틀었다.

방청석의 시선도 함께 움직였다.

보이지 않는 무게가 세닐다에게 쏠렸으나 그녀는 망설임 없이 받아쳤다.


“선의의 경쟁을 말씀하시는군요. 저도 뛰어난 마법사를 양성하는 데 경쟁 구도가 필수불가결한 요소임에는 동의합니다. 만약, 이번 사건이 자랑스러운 아슬론 학생들 사이에서 학구열을 불태우다가 일어난 사소한 다툼이었다면 저도 이 자리에 서지 않았을 겁니다.”


세닐다는 물 흐르듯 말을 이었다.


“하지만, 가해 학생이 행한 행동엔 선의 대신 노골적인 악의가 담겨 있었습니다. 개중에는 경쟁으로 봐주려야 봐줄 수 없는 추한 훼방도 있었죠. 어떤 의도든 타인의 배움을 방해하는 순간 건강한 경쟁을 대입할 순 없는 겁니다. 동의하지 않으신다면, 아슬론 아카데미의 교칙인 ‘만인에게 평등한 교육’ 항목을 짚고 싶습니다.”


이견을 냈던 교수는 조용해졌다.

그런데 다른 객석에서 말이 튀어나왔다.


“난 뭐 대단한 일이라고.”


4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교수였다.

중년 교수는 미간을 한껏 찌푸리더니 발언했다.


“뭐, 아까부터 그럴싸한 말로 포장하는데. 내 질문 하나 하지. 선생은 여기 모여있는 우리들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요?”

“네······?”


한숨을 푹 내쉬며 그는 말했다.


“우리가 그쪽처럼 시간이 남아도는 줄 아나 본데······ 여기 있는 이들 모두 제국에서 손에 꼽게 바쁜 몸이란 걸 인지했으면 좋겠군. 시간을 돈으로 환산하면 보석으로도 부족하단 얘기지. 학술지에 제출하기 위한 연구 자료 조사만으로도 바빠 죽겠는데, 겨우 이런 이야기나 들으며 시간을 축내고 있어야 한다니 참.”


시답잖다는 듯 혀까지 찬 다음에야 그는 본론을 꺼냈다.


“솔직히 말해서 선의고 악의고 나발이고, 내 눈엔 별것도 아닌 일에 지나치게 감정 이입하는 거 같소. 애들끼리 지내다 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 것을······. 곧 개강 기간이오. 내가 보기엔 더 들을 가치도 없는 사안인 것 같은데, 이만하고 선생은 신입이면 그답게 새 학기나 충실히 하는 게─”


비논리적인 이견에 대한 세닐다의 대응은 즉각적이었다.


촤르르르륵!


세닐다가 허공에 대고 손을 젓자 책상에 준비돼 있던 서류 뭉치가 날아올랐다.

신속하게 흩어진 종이들은 각 교수가 앉은 자리 앞으로 한 묶음씩 안착했다.


“가해 학생은 피해 학생에게 정식적 해악을 끼쳤을 뿐 아니라 학업에도 실질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세닐다의 검지가 책상을 툭 찍었다.


“눈으로 확인해 보시면 알겠지만 안프리드의 잘못은 ‘이런 일 저런 일’로 퉁치기엔 도를 넘어섰죠. 실습평가의 준비물을 상습적으로 절도하는 것은 물론, 완성된 과제를 실수를 가장하여 손상입힌 게 다섯 차례, 기말고사 때 답을 수록한 시험지를 훼손시키는 중대한 부정행위까지 저질렀습니다.”


세닐다는 한 문장씩 끊어 말하며 교수들에게 각각의 증거물을 보였다.

그리고 그것에는 이것이 단순 피해 학생만의 주장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한 목격자들의 증인 서명서까지 달려 있었다.


이에 조금 전까지 중년 교수의 비꼼에 은근히 동조하던 몇몇 면면들이 표정을 바꾸었다.

구체적인 물증을 들이밀자 마냥 외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변해가는 분위기를 살피던 세닐다는 숨을 한번 들이쉬더니 눈을 감았다.

이윽고 눈꺼풀이 뜨였을 때, 그녀의 동공은 서늘한 기세를 내비치고 있었다.

여느 때보다 결연한 목소리로 그녀는 말했다.


"무엇보다 용서받지 못할 짓은, 안프리드가 마정석에 손을 댔다는 겁니다."


그 순간, 방 안의 소음이 사라졌다.

종이를 넘기던 손짓, 나지막이 의견을 주고받던 교수들의 입이 멈추고 실내에는 쥐 죽은 듯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모두의 시선이 홀로 서 있는 세닐다에게 꽂혔다.


“방금 뭐라···했소?”

“마정, 뭐?”

“잘못 말한 것 아닌가······?”


경직된 공기 속 떠듬떠듬 흘러나오는 의문성.

세닐다는 답하지 않았다.

다만,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좌중을 응시할 뿐이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리 없는 교수들은 몇 초간 자신들끼리 눈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일제히 약속이라도 한 듯.

각기 다른 방식으로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세닐다에게 질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정말, 마정석에 손을 댔다고?”

“말은 즉 성질에 개입을 시도했다는 겁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설마 우리 학교 학생이 그런 몰상식한 짓을 할 리가······.”


세닐다는 일일이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저은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냥 시도만 한 게 아닙니다. 안프리드는 학생의 신분으로 마정석에 개입했고, 운 좋게도 성질을 바꾸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 여파로 시험을 위한 재료가 불량품이 된 피해 학생은 평가에서 평소보다 현저히 낮은 성적을 기록했고요.”


입술 아래 손가락을 가져다 댄 그녀가 고개를 까딱이며 말했다.


“그래도 다행이죠? 만약 가해 학생의 운이 좋지 않았다면, 그래서 마정석의 성질에 균열이라도 발생했다면 그 자리에서 강력한 폭발이 일어났을 테니까요. 교실에 있던 학생 수십 명이 상해를 입고 인근에 있던 학생 몇몇은 중상을 입었을 겁니다. 최악의 경우엔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겠죠. 유명을 달리하기엔 너무 어린 나이에 말이에요.”


세닐다의 말이 끝날 때쯤엔 이미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술렁임이 교수진에 일고 있었다.

그럴 만도 한 게 마정석 개입이다.


까다로운 공정 단계와 한정된 공급량으로 인해 귀품으로 취급받는 마정석.

불안정한 성질을 품고 있는 마석을 온순하게 정제하여 가공품으로 만들어 냈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가치 있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온순하게 ‘정제’하였다는 말의 실상이 불순물의 제거가 아닌 ‘억제’에 가깝다는 사실을 마법사라면 모두가 알고 있었으므로.


본교인 제국 제1마법상등학교인 아슬론 아카데미의 교칙뿐 아니라 전국 아카데미의 교칙에는 예외 없이 해당 문구가 포함되기 마련이었다.


<어떠한 경우에도 학생은 마정석을 비롯한 마력 자재의 성질에 간섭해선 안 된다.>


마력 자재를 다루는 학생에게 허락된 건 마법 구현의 성공 혹은 실패뿐.

결코, 성질을 건드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 행위가 폭발물에 불씨를 갖다 대는 것과 같음을 마법을 배우는 학도라면 모를 수 없기에.

제국 제일의 유망주만 모인다는 아슬론 아카데미에서 그런 행위를 시도하는 얼간이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안 했기에.


교수들의 눈이 당혹스러움에서 점차 불신으로 바뀌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증거가 없다면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얘기군요.”


자리에 모인 이들 중 가장 직급이 높은 수석교수 라일리히가 좌중을 대신해 그리 말하자 세닐다는 싱긋 웃어 보였다.

다음 순간, 실내의 불이 꺼졌다.


“음?”

“정전······?”


모여있는 이들이 이들인 만큼 본능적으로 마나를 감응시키며 빛을 발현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곧 행동을 멈췄다.

세닐다로부터 퍼져 나오는 마력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이 마정석의 정체를 아십니까?”


세닐다의 손바닥 위에 빛을 품은 마정석이 떠 있었다.

교수들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교수직에 오르기까지 수백 번 실험을 하며 각양각색의 마정석을 봐온 그들에게, 해당 질문은 수학자에게 연산자를 아느냐 묻는 것과 같았다.


그럼에도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않은 것은 장내의 가장 외진 자리에 앉아있는 남자를 의식했기 때문이었다.

세닐다는 남자가 먼저 말을 꺼내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기에 콕 집어 물었다.


“시놈 교수님?”


그러자 쥐 죽은 듯 잠잠했던 뒤편에서 한 교수의 입이 떨어졌다.


“······어둠 속성 마정석, 흑석비류. 1학기 기말고사 평가에서 내가 시험 재료로 사용한 물건이군.”

“맞아요. 이 물건이 왜 이곳에 있는지, 어떤 명목으로 가져온 건지 시놈 교수님 입장에선 당혹스럽고 불쾌하실 수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앞으로의 이야기를 위해 직접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는 점 부디 양해해주세요.”


장중을 가르는 두 사람의 미묘한 시선.

그 사이로 라일리히의 묵직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그렇다면 저 물건이 바로······.”

“네, 이것은 시놈 교수님의 시험에서 피해 학생이 사용했던 마정석입니다. 지금부터 여러분에게 보여드릴 것은 해당 마정석을 분석하며 제가 발견해 낸 흔적들입니다.”


다음 순간, 마정석이 번뜩이더니 빛줄기를 뿜어냈다.

먼저 마정석의 겉면에서 떨어져 나온 것은 황금빛 마나.

마나의 움직임이 빳빳하고 드셌다.


두 달이란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날것처럼 살아있다는 뜻이었다.

희소한 광경에 짐짓 놀라는 교수들도 있었지만, 지금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황색 마나가 벗겨져 나간 마정석의 표면에 전혀 다른 색인 잿빛 마나가 번들거리고 있었다.

세닐다는 가벼운 손짓만으로 그것을 마정석에서 분리해 내 모두가 잘 볼 수 있는 위치에 두었다.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새로운 마정석이 떠올랐다.

이어서 해당 마정석에서도 마나가 추출됐고, 허공에 떠오른 두 다른 마정석에서 나온 마나가 서로를 향해 맞닿았다.

같은 회색깔의 두 무리는 아무 저항 없이 하나로 합쳐졌다.


“두 번째 마정석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더 이상 말을 꺼내는 이는 없었다.

교수들은 이미 저 공중에서 합일된 마나 덩어리의 기운이 안프리드에게서 느껴지는 것과 다름없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번 사건을 평민 출신 학생들의 피해망상으로 치부하던 교수들도, 시간을 할애하는 것을 아깝게 여기던 교수들도 한 사람을 향해 시선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저지른 건지. 답을 촉구하듯 모든 이들의 시선이 모여드는 가운데.

쏟아지는 눈빛을 정면으로 받아내고 있는 안프리드─ 아니.


‘하하, 미친놈······.’


나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1장 빌런을 상대하는 주인공 시점에선 당연하게 여긴 빈틈들이었지만, 내 입장이 되고 나니 머저리도 이런 머저리가 없었다.

열여섯이나 처먹은 놈이 두 눈 뜨고 봐주기 힘든 유치찬란한 짓거리에 사리 분별 못하고, 객기만 부리고.


'증오하게 된 이유도 그래.'


안프리드의 알렌 혐오는 입학 첫날 대련 평가에서 알렌에게 패배한 것에 기인한다.

얼마나 참패를 당했는지는 모른다.

대결이 끝난 직후부터가 게임의 시작이었으니까.


중요한 건 그렇게 시작된 악연은 무슨 짓을 해도 떨쳐낼 수 없다는 거였다.

애초에 선택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안프리드와의 관계는 항상 극단으로 치달았다.


간단하지 않나?

안프리드의 동기엔 어떤 합당한 명분도 없었다.

안프리드는 알렌의 존재 자체를 증오했고.

감정을 느끼는 데서 멈추지 않고 행동으로 옮겼다.

어린 나이의 치기 어림으로 포장하기에는 선을 넘는 행위들로.


아무리 이곳에 모인 교수들의 절대다수가 귀족이고, 그로 인해 귀족 신분인 내게 유리한 부분이 작용한다지만.

마력 자재에 손댄 건 도무지 옹호의 여지가 없었다.

만약 시험 도중 알렌의 부주의로 사고라도 터졌다면 안프리드는 진즉 마나 부검 당하고 철창에 처박혔겠지.


'실로 미친 새끼.'


그런 의미에서 콩밥 스타트로 시작 안 하게 된 걸 백번 감사해야 할지도 모르겠으나······.

역시 [악연 재판] 챕터의 가장 핵심적인 증거인 마정석이 등판한 상황 자체에 대해 원망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후.'


마정석만 아니었어도 빠져나갈 구멍은 많았을 텐데······.


“안프리드 윈 데헬란트, 할 말 있나?”


묵직하면서도 싸늘한 음성이 물었다.

이대로 입을 열지 않으면 볼 것도 없이 퇴학이다.

그리고 그렇게 퇴학당한 안프리드는 올해를 넘기기 전에 죽는다.


이유는 알지 못한다.

나름 1장의 최종 빌런이라지만, 전체 서사로 따지면 악역 축에도 못 끼는 극초반부 난관용 잔챙이에 불과했으므로.

지나가듯 언급만 나올 뿐이었다.


‘의문사 내지 돌연사였던 것 같은데······.’


도움이 되는 정보는 아니었다.

어찌 됐든 지금 내가 유추할 수 있는 건 아카데미에서의 퇴학이 가까운 미래의 생존과 적지 않은 확률로 연관돼 있지 않을까 하는 정도.

그걸 배제한다 쳐도 이대로 퇴출된다면 등장인물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장을 놓치게 된다.


“침묵은 본 증언에 모두 수긍하는 것으로 간주하겠다. 두 번 묻지 않겠다. 이의를 제기할 건가?”


고개를 들어 객석을 바라보았다.

회의 내내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놈.

몰라볼 수가 없는 놈.

알렌.

이 세계의 최고 핵심 인물이자, 앞으로의 시나리오를 책임지고 견인할 주인공.


앞으로도 저 흔들림 없는 태도로 세상의 온갖 불의와 위협에 맞서 싸울 것이다.

그리고 그런 가시밭길을 걷는 알렌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금도 앞으로도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줄 마리.

알렌의 옆자리에 앉아있는 그녀까지 확인한 나는 결심을 내렸다.

두 사람을 보는 순간, 어떤 힘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럼 이상 수긍한 것으로 납득하고 판결을······.”


라일리히가 말하다 말고 흘긋 나를 쳐다본다.

그뿐만 아니라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나를 향해, 정확히는 들려 있는 내 손을 향해서였다.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내 행동이 뜻하는 바는 명확했으니까.


“자네······.”


선도위가 진행되는 동안 신세 한탄만 하고 있지 않았다.

재구현.

숱한 게임 플레이를 통해 쌓은 무수한 경험들이 머릿속에서 해체되고 구성되길 반복했다.

그렇게 재탄생한 전개 속, 더 이상 알렌이 아닌 안프리드 윈 데헬란트로서 나는 마침내 떠올릴 수 있었다.


어떻게 하면 허점을 파고들어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지.

그 방법을 위해서 앞으로 내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음에도 입을 열었다.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이의 있습니다.”


라일리히는 말하라는 듯 고갯짓했다.

긴말은 필요하지 않다.

지금 내게 절실한 건 변론이 아닌, 시간.


“저는 세닐다 교수님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 말은······.”

“실습 평가의 준비물을 상습적으로 절도했다는 것. 완성된 과제를 실수를 가장하여 손상입혔다는 것. 중간고사에 답을 수록한 시험지를 훼손시켰다는 것. 그리고, 마력 자재에 간섭했다는 의혹까지─”


내 무미건조한 사건의 나열에 라일리히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것만으로 장내의 공기가 일순 수축하는 것 같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내가 가야 할 방향은 이미 정했으니까.


“지금까지 나온 주장들 전부를 부인합니다.”

“······안프리드. 두 마정석에서 추출한 마나의 성질이 일치함을 보여주는 증거물이 눈앞에 있다. 이건 어떻게 반박할 테지?”

“수석교수님께선 저 물건이 정말 온전한 효력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라일리히의 이맛살이 구겨졌다.

무슨 의미인지 선뜻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

다른 이들도 별반 다를 바 없었다.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은 이미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린 듯했다.

이제 와서 의견을 개진한다 한들 한번 넘어간 분위기를 다시 뒤엎기는 어렵다.


“그게 무슨 말이지······?”

“세닐다 교수님이 제시한 마정석이 정말 실습평가 때 제가 사용한 것이 맞는지, 설령 그것이 맞다 한들 저 두 마정석이 교묘하게 조작된 건 아닌지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툭 정적이 내려앉았다.

찰나의 시간이 흐른 직후, 전에 없던 술렁임이 터져 나왔다.

한쪽으로 치우친 저울이 더욱 가파르게 기울어 간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라일리히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슬론 아카데미의 일원이자 선도위의 당사자로서 위원장님께 청합니다. 본 선도위를 공개 형태로 전환해 주십쇼.”


회의 내내 감정의 동요 없이 일관된 태도를 유지하던 라일리히도 그 순간만큼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객석에서 격한 반발이 터져 나왔다.


“공개 선도위로의 전환이라니 이, 이 무슨 주제넘는······!”

“우리를 못 믿는다는 게냐?”

“그런 사례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없었거늘! 어딜 뚫린 입이라고 공개된 자리에서 망언을 하느냐 네 이놈!”


조금 전까지는 세닐다를 향하던 매서운 시선들이 이젠 나를 향해 쏟아지고 있었다.

신분 혜택은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물론, 알 바는 아니었다.


“저도 세닐다 교수님이 의도적으로 조작을 가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지 전 결백한데 교수님께서 자꾸 몰아가시니, 불신이 들 수밖에 없는 겁니다.”


다시 교수들의 입이 열리기 전에 라일리히를 보며 덧붙였다.


"이 건에 대해선 차후 더 정밀한 분석을 요구하는 바입니다. 또한, 제가 의도적으로 동급생을 괴롭혔다는 것도 증거물의 조작 가능성과 증인 서명을 받을 때 전후 사정을 제대로 이해시켰는지, 질문이 공정했는지 등의 여부에 의심이 갑니다. 공개선도위를 하자는 건 그 이유에서입니다. 강의실을 함께 사용했던 학생들의 의견을 들을 수 있으니까요.”

“증인의 개념으로서······?”

“네. 양측 당사자가 있는 자리에서 상황을 설명하고 의견을 듣는 편이 훨씬 공정하지 않겠습니까?”


라일리히의 얼굴이 사뭇 진지해졌다.

내가 펼칠 수 있는 논리는 여기까지다.

그리고 만에 하나의 가능성도 없애기 위해 한마디 붙였다.


“만약 이대로 쫓겨난다면,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가문의 이름을 걸어서라도 총리님께 서한을 보내겠습니다.”


교수들은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이내 내 얼굴을 보고 허투루 말한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는지, 제각각 끝내주는 표정 변화를 보여줬다.

가히 미친놈이라도 보는 듯한 표정.


그도 그럴 것이 총장도 아니고 총리다.

겨우 선도위 하나 때문에 교수들도 함부로 언급할 수 없는 높디높은 분을 들먹였다고 생각할 터······.


하지만 당신들은 모른다.

이건 한낱 선도위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여기서 내가 방출되냐 안 되냐에 따라 이 세계가 초토화될지 황무지에서 그칠지가 결정된단 말이다.

필요하다면 황제의 이름이라도 못 들먹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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