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 필요악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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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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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6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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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0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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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락 (1)

DUMMY

“허, 이게 무슨······ 교수를 얼마나 우습게 보면 이런 장난질이오!”

“그런 게 아니라 하지 않소.”

“장난질이 아니라고? 선도위를 두 차례나 열게 해놓곤 마지막 순간 다된 밥상 뒤엎는데, 그게 장난질이 아니라면 뭐요?!”

“맞습니다. 제가 늘상 얘기하지 않았습니까? 요새 교권이 너무 추락한 것 같다고. 이게 다 우리 교수들의 권위를 학생들이 우습게 본다는 방증입니다!”


선도위를 나서는 교수들은 하나같이 분개심을 숨기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기껏 귀한 시간을 할애해 줬더니만, 그 결과가 피해 학생의 번복에 의한 위원회 공중분해라니!


천생 귀족에다가 사회에서도 높은 대우를 받는 아슬론 아카데미 교수들은 이번 일을 모욕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상대가 자신들이 가르치는 학생이라는 점에서 더더욱 괘씸했다.


“결국 얼렌인가 일렌인가 하는 그 평민 놈이 이 사태를 벌인 것 아닙니까? 엄한 귀족 학생에게 누명까지 씌우고! 무고죄로 그 아이에 대한 선도위를 다시 열어야 합니다!”


누군가 그렇게 말했다.

비슷한 의견을 지닌 교수들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막상 실행하기엔 여의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듣지 않았습니까? 착각할 만한 요인이 있었다는 걸요. 괴롭힘은 본인이 최근에 앓고 있는 신경과민 때문이었던 것 같다 했고, 핵심 쟁점이던 마정석은 바로 옆자리에 앉아 실습을 진행하던 안프리드 학생과 도중에 의도치 않은 마력적 충돌이 있었던 것 같다고요.

물론, 그런 식으로 개입한 불순물이 아까와 같은 형태를 띠고 있을 가능성은 매우 적긴 하나 뭐어, 불가능한 것은 또 아니니······.”


거기까지 이야기가 흐르자 일순 교수들 사이에서도 미묘한 기류가 흘렀다.

사회에서 닳고 닳은 그들이었기에 내심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선도위가 밀린 3일 동안 뒤에서 어떤 '접촉'이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그 생각을 구태여 입 밖으로 꺼내는 이는 없었기에 그들은 그저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이래서 평민이란······.”

“천한 것들이 하는 짓이 다 거기서 거기 아니겠나.”

“쯧. 이름은 똑똑히 기억했습니다.”


그렇게 교수들이 흩어지고 학생들 또한 웅성거리며 퇴장한 실내.

육중한 공기 속, 몇 사람이 남아 있었다.

후폭풍을 그대로 받아내야만 하는 이 사건의 당사자들이었다.


“······알렌. 잠깐 이야기 좀 해.”


선도위 내내 한마디도 없던 마리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렌은 고개를 한번 끄덕이곤 순순히 마리를 따라 밖으로 나섰다.

그렇게 혼자 남은 안프리드는······.

적적한 고요 속에서 감상에 잠길 따름이었다.

어젯밤 있었던 알렌과의 거래를 떠올리며.




* * *




개학식을 마무리하고 저택으로 돌아온 나는 휴식 대신 3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늘 성공적인 사건 해결이 하나 있었다지만, 이걸로 기뻐하기엔 티끌 하나 해치운 것에 불과하다.

이 정도도 통과 못 한다면 그냥 죽어야지.


“산 넘어 산인데 백두산 넘으니 히말라야가 있네.”


그렇다고 포기할쏘냐?

아니, 절대 그럴 순 없다.

지난 며칠 동안 정말 많이 생각했다.

김유한으로서 살아온 29년.

이렇다 할 목표 없이 하루하루 먹고사는 데 초점을 두며 살아온 인생이었다.


아무런 감흥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일상 속 그나마 열정을 갖고 했던 게 히든 셰이드였는데.

이게 웬걸?

트럭에 치이고 눈 떠보니 수천 번이 넘게 들락거린 세계에 와 있었다.


빙의한 인물이 누구고 자시고.

뭐가 마음에 들었든 아니든.

그냥 이 상황 자체로 가슴이 뛰었다.

그러니까, 살면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심장의 박동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살아갈 이유는 충분하지."


분명 살 떨리게 위태롭고 삐끗하면 나락으로 처박히는 열차에 오른 건 맞다.

단순 표현이 아니라 이 세계의 실상이 그랬다.

지옥으로 향하는, 아니 어쩌면 이미 지옥을 달리고 있는 중인 열차.

탑승한 승객들만 모를 뿐······.


하지만, 그럼에도 자포자기의 심정은 털끝만큼도 들지 않았다.

세계가 뒤틀리고 몸이 바뀌며 생긴 변화.

그중 가장 큰 건 생존욕이었다.

이전 생에선 유야무야 내일 죽어도 게임 클리어 못 한 거 빼고는 아쉬울 게 없다며 살았는데.


지금은 그냥 가만히 있어도 생존 욕구가 샘솟는다.

첫째론 내가 죽기 싫고.

둘째로 다 함께 죽는 것도 사절이다.


나머지 다 손절치고 나 혼자 도망쳐 산다?

애정하는 캐릭터들에겐 미안한 얘기지만, 생각 안 해본 건 아니다.

1분 만에 접어서 그렇지.

엔딩까지 달려본 나로서 절대 불가능하단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있는 방법 없는 방법 다 끌어다 박은 결과가 그 꼴이었는데.

도주해서 어디 꽁 박혀 있는다라······.


“지상 최대의 아지트를 짓든 방공호를 파든 내가 딛고 있는 땅 자체가 초토화될 텐데 무슨 의미가 있냐고.”


결국, 돌고 돌아 남은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다.

나도 살고 너도 살고 우리 모두 사는 거.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내가 만들어야 할 미래는 가능한 모든 인물들을 한데 뭉쳐 돌파구를 찾는 거였다.

선역, 악역 그딴 거 구분 없이.


“말은 쉽지. 말만 쉬워.”


푸념을 흘리며 복도를 걷자니 금세 목적지에 다다랐다.

앞서 저택을 둘러보며 들른 적이 있는 방.

문을 열고 내부로 들어갔다.

책상과 서가가 어우러져 업무하기 좋은 환경이 갖춰져 있는 방을 30분가량 뒤진 끝에 책 한 권을 발견했다.

귀족 집안에 없어선 안 되는 서적.

내용을 얼핏 확인한 다음 품에 안고 내 방으로 돌아왔다.


끼익- 탁.


서랍에서 종이 뭉치를 꺼냈다.

일전에 작성해 뒀던 앞으로 발생할 일들을 정리한 노트였다.

아직 미완성인 것은, 다가올 사건들에서 내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대입하던 중 막힌 대목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나에 대해 아는 게 없다는 것.


아이러니하게도 이 세계에서 가장 정보가 부족한 존재가 나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고.

적들에 대해선 꿰고 있으니 이제 날 알아봐야겠지.

한 손엔 펜을 쥐어 빈 종이 위에 두고 다른 한 손으론 집무실에서 가져온 가계서를 펼쳤다.


사락-


책에는 단순 가계도뿐 아니라 가문이 설립된 이래 거쳐온 연혁이 세세히 기록돼 있었다.


"흠."


한 글자도 놓치지 않고 꼼꼼히 읽었다.

처음에는 의무감이었지만, 흥미로운 내용에 자연스레 몰입도가 올라갔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가계서의 막바지에 다다른 나는 한 가지 특이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바로 데헬란트 가의 역사가 4년 전에 끊겼다는 것.

비어있는 마지막 장엔 편지 한 장이 대신 끼어 있었다.



『혹여나 이 글을 읽을 안프리드에게.


어떤 생각을 하며 이 책을 펼쳤을지, 행여 이 편지를 발견한 지금 어떤 절망을 품고 있진 않을지 두렵구나.

네가 이 글을 보고 있을 때라면 아비는 이미 세상에 없겠지.


네게 영웅이라 불리며 살아온 지난 십여 년의 세월은 인생에서 어느 때보다 행복한 순간이었단다.

하지만 그런 기쁨을 누릴수록 마음 한켠은 날로 무거워져 갔다.

아빠는 아들이 생각하는 영웅이 아니었으니까.


부디 이해해 줄 수 있겠니?

아빠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었다는 걸. 설령 실패했다 한들 후회하지 않는다는 걸 말이다.


안프리드 네게 한 가지만 부탁하마.

부디 세상을 원망하지 말아다오.

그럴 바엔 이 못난 아비의 위선을 탓해다오.

너를 위해서 이 말밖에 할 수 없구나.

언젠가 네 얼굴을 보며 진실을 말할 수 있는 날이 오면 좋으련만...


아들을 누구보다 자랑스러워하는 아버지가』



"흠······."


안프리드의 양친에 대해선 앞장에서 이미 접했다.

아버지는 식민지에서 객사하고 어머니는 그보다 더 전에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편지를 읽으니 의미심장한 부분이 눈에 띄었다.


[너를 위해서 이 말밖에 할 수 없구나]

[네 얼굴을 보며 진실을 말할 수 있는 날이 오면 좋으련만...]


말은 즉 숨겨진 진실이 있다는 거였다.

쉬이 알려줄 수 없는, 혹은 알아선 안 된다 판단한 내용이······.

앞으로 있을 사건들과 연관된 게 있을까 생각해 봤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건 없었다.

일단 알아만 두는 걸로 하고 노트에 기입했다.


“그나저나 안프리드 이놈도 어렸을 땐 정상이었나 보네.”


편지의 내용을 보면 안프리드의 성격이 지금처럼 된 건 홀로 남게 된 이후부터인 것 같다.

친족 또한 외가를 제외하곤 전무.


세상의 풍파를 견뎌내기엔 너무 어린 나이에 덜컥 혼자 남겨졌다.

유서 깊은 군인 명문가 타이틀이 버티고 있어 먹고사는 덴 지장 없는 듯하나 어디 인성이란 게 재산만으로 좌우되는 부분인가?


마음 단단히 먹을 틈도 없이 순식간에 세상의 전부라 생각한 두 쪽을 잃었으니 애 정신이 이상해진 것도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였기에 그 심정만큼은 십분 공감이 갔지만······.


적어도 김유한은 집에 박혀 살았을지언정 타인에게로 분노를 돌리진 않았다.

그게 내가 안프리드를 동정하기보다 한심하게 여기는 이유였고.


“똥은 남이 쌌는데 치우는 건 나지. 내가 이 세계에 애정만 없었어도······.”


중얼거리며 편지를 떼서 옮기려는데, 무언가가 삐죽 딸려 나왔다.

편지지 뒤에 웬 봉투가 붙어 있었다.

단단히 동봉된 입구를 열자 툭 튀어나온 건 펜던트.

비싼 물건인가 싶어 이리저리 살폈지만, 특출나 보이는 외관은 없었다.

펜던트 뚜껑을 여니 사진 한 장이 담겨있다.


5살 정도 돼 보이는 아이의 사진.


무너진 돌담을 배경으로 서 있는 얼굴을 빤히 들여다봤지만, 알아보긴 어려웠다.

단순히 기억 상실증을 앓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동일 인물을 눈앞에 데려놓아도 매치시킬 수 없을 거라는 데 확신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사진 속 아이는 거지꼴이었으니까.


"이 정도면 거지 중에서도 상거진데."


군데군데 찢어진 누더기옷, 보풀이 잔뜩 인 털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어디 화산 폭발 현장에라도 있었는지 전신이 잿더미로 덮여 있다.


"······넌 누구냐."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무수한 게임 속 인물들을 떠올리며 때려 맞추는 것뿐인데.


"일단 보관만 해두자."


깔끔하게 후일로 미뤘다.

근거 없는 추리는 판단을 흐리게 만들 뿐이니.

유의미한 수확에 만족하며 뒷정리하고 있는데 문득 펜던트를 뺀 봉투에서 무게감이 느껴졌다.

아래로 털자 내용물이 툭 떨어져 내렸다.

핑그르르-

동전이었다.

가만히 내려다보길 몇 초.


“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라, 라이피온 금화!"


50년 전 제국에 정복된 라이피온 왕국에서 사용했다는 화폐.

국가 합병 과정에서 제국군이 라이피온에 통용되던 주화를 건물 크기의 냄비에 끌어모아 녹여 대포를 만들었다는 설화가 있다.


그 소동에서 살아남아 지금까지 전해지는 라이피온 동전들은 전부 장식용으로 사용됐는데, 동화가 수십 만 델론─한국과 통화 단위가 비슷하다─에 거래되는 것에 반해 귀족층이 주로 사용했다는 은화의 가격은 3천만 델론을 호가했다.


그런데 금화라니!

엄격한 신분 제도를 가진 라이피온 왕국에서 왕의 신임을 받은 이들에게만 수여했다는, 사실상 훈장 개념의 금화가 내 손에 들어와 있었다.

특유의 랜덤 배치 특성으로 인해 1만 시간을 넘게 플레이하면서도 5번밖에 못 발견했었는데······.


“그래, 운빨이라도 있어야지!”


스타팅이 이따군데 아무렴 이 정도 횡재는 얻는 게 맞다.

몇 차례 검증을 통해 확인을 끝낸 나는 금화를 편지와 함께 서랍장에 고이 집어넣었다.

나에 대한 조사를 그렇게 대성공리에 마무리 짓고, 미래 계획표 수정까지 마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 드디어 끝났다."


지긋한 정리는 일단락이다.

이제부터 중요한 건 실행이었다.

미래를 위해 내 스스로에게 온전히 집중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

방에서 나와 계단을 내려갔다.

1층 홀에선 집사 가일이 가사 현황표를 점검하고 있었다.


“가일, 나 뒷마당에 좀 갔다 올게.”

“······.”


요 며칠 사이 가일이 멀뚱히 쳐다보는 시간이 늘어났다.


“왜 그래. 어디 아파?”

“···건강합니다. 혹시 도와드릴 거라도 있을까요?”


선선히 고개를 저었다.


“없어. 그나저나 안 잊었지? 저번에 말한 거 오늘 밤이야.”

“물론입니다. 차질 없이 수행하겠습니다.”

“그래. 그 귀한 물건이 우리 가문에 남아 있었던 게 다행이네······. 가일은 내가 누구한테 주는 건지 안 궁금해? 저택에 몇 안 남은 귀중품이잖아.”


넌지시 던진 질문에 가일은 담담히 답했다.


“선대 가주님께선 늘 검소하셨지만, 필요한 일엔 돈을 아끼지 않으셨죠. 제가 지켜봐 온 안프리드 도련님도 그분과 다르지 않으시리라 믿기에 그저 따를 뿐입니다.”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믿는다라······. 안 궁금하다고 하진 않네.”


나는 손을 흔들며 문밖으로 나왔다.

마지막 순간 가일의 미묘하게 변하던 표정을 떠올렸다.

며칠밖에 안 봤지만 이 집 가솔들은 어딘가 남달랐다.

집사 1명, 하녀 3명, 경비원 1명에 불과한데도 각자 뚜렷한 개성을 띠었다.


개성 있는 동료를 둔다는 건 좋게 보면 특별한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거지만··· 반대로 보면 척을 지게 될 시 그만큼 까다로운 상대가 없다는 얘기기도 했다.


점차 바뀌어 가는 나를 두고 어떻게 반응하는지, 유심히 관찰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들의 반응에 따라 함께 갈지, 그러지 못할지가 결정되겠지.


"하아."


숨을 내뱉으며 시선을 옮겼다.

저택 앞마당엔 작은 정원과 티타임을 즐길 수 있는 테이블이 마련돼 있다.

바깥에서 담소를 나눌 수 있도록 아름답게 꾸며진 풍경.

하지만 뒷마당으로 가면 정반대의 분위기가 방문자를 맞이한다.


사그락-


높은 장벽들로 둘러싸인 뒷마당.

그곳에 조성된 으슥한 수풀 사이로 나는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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