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의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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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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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04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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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04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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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2.27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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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술국치(庚戌國恥) (1)_이토에 관한 잘못된 내용을 수정하였습니다.

DUMMY

러시아에서 이범진 공사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 후에 이위종과 헤어진 이상설이 혼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것은 1909년 7월 14일이었다. 그리고 이상설은 도착한 이후에 들은 뜻밖의 비보에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바로 서전서숙이 폐교하였단 소식이었다.


자신이 헤이그 특사로 떠난 뒤, 1년쯤 뒤에 재정이나 일본의 압박 등으로 인해서 결국 문을 닫았다는 소식이었다. 이상설은 자신이 처음으로 만든 성과물이 그렇게 사라졌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플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계속 낙담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서전서숙이 문을 닫게 된 것은 아쉬웠지만, 그래도 시작의 씨앗이 되었으리라 기대를 접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이 미국에서 얻은 결과물을 이제는 연해주에서도 연계해서 꽃을 피워야만 했다.

그래야 앞으로 일본의 침략에서 조국을 지켜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일단은 몸집을 불리는 것이 중요했다. 연해주와 만주로 피난을 온 한인들은 너무 넓은 장소에 뿔뿔이 흩어져 있어서 힘을 모으는데 한계가 있었다. 비록 연해주의 몇 개의 도시와 만주의 용정 등에 제법 많은 한인들이 모여 산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그 세력이 미약했다.


자유로운 미국에서도 힘을 모으기 위해서 단체를 하나로 합치고 있는 바, 이곳 만주나 연해주에서도 제대로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힘을 합쳐야만 한다고 이상설은 생각했다.


이상설은 우선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미국에서 있었던 국민회의 창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는 전 세계적인 한인들의 연대를 통한 제 목소리를 내기 위한 방법을 위해 연해주와 만주에서도 힘을 모을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그곳의 민족지도자들을 설득하고 의견을 모아서 결국 독립 운동 기지 건설을 추진하게 되었는데, 우선 러시아와 만주의 접경지대에 자리 잡은 홍개호 주변의 중국령 밀산부의 토지를 매입하여 이곳으로 한인들을 이주시키고 마을을 만들기로 하였다.


또한 이를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이상설을 통해서 미국과의 연대도 진행하였는데, 미국의 국민회는 이상설의 편지를 받고는 밀산부 한흥동 부근의 미개간지를 구입하기 위한 모금하기 위한 모금 운동도 전개하였다.

동시에 그런 움직임을 알아차린 중국에 망명중인 신민회 간부들은 1910년 4월에 칭다오(靑島, 청도)에서 회의를 개최하여 한흥동 부근의 미간지 10만 평을 사들여 독립 운동 기지를 세울 것을 결의하기도 한 것이 결정적으로 사업에 탄력을 붙게 하였다.


이상설을 위주로 하는 민족운동활동가들은 밀산의 토지 개척을 이승희에게 맡겼는데, 1909년 가을에 이승희는 밀산부 봉밀산 아래 홍개호반에 45방의 비옥한 토지를 사들여 처음으로 한인 100호를 집단 이주시켜서 정착시키고, 마을이름을 대한제국을 부흥한다는 의미에서 한흥동(韓興洞)이라고 지었다.

또한 한민학교라는 학교도 세웠으며, 이승희는 직접 4년 동안 한흥동에 거주하면서 <동국사략(東國史略)>을 저술하여 학생들에게 조선역사를 가르치고 <민약(民約)>을 제정하여 한인들의 단결을 도모하는 등 한흥동을 한국독립기지로 건설하기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다.


하지만 이후 지원을 약속하던 신민회의 이러한 결의는 번복되고 지원을 철회하게 되는데, 표면적인 이유는 자금은 러시아의 한인들의 교육과 계몽 사업에 사용하자는 것이었지만, 속내는 러시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독립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의도라고 볼 수 있었다. 이는 이 결정이 신민회의 공식적인 결정상항을 토론도 없이 번복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즉 근왕파인 의병 계와 이강, 김성무, 정재관의 국민회(공화파)간의 내부 갈등이 원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심지어는 러시아내 신망이 높았던 한 인물을 국민회와 연계해서 활동을 한다는 의미로 총으로 쏘아죽인 일도 있었다. 그만큼 주도권 다툼이 심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1911년 7월이 되어서야 미국의 대한인국민회 모금액 5만 달러만으로 이상설과 정재관이 대리인으로 밀산 토지 약 300만평을 공동으로 구매하였다. 그리고 이후 한인들을 이주시켜서 총 500가구에 2,000명 정도의 한인들이 집결하게 되고, 이후 연해주의 독립운동의 바탕이 되게 된다.


1909년 여름, 이상설이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온 후에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어릴 적 친구인 이회영이 만주와 연해주를 둘러보러 왔다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과 만나게 되었다.


“이보게, 우당(友堂, 이회영의 호). 이게 얼마 만인가?”

“살아있으니 이렇게 만나게 되는구먼. 보재(溥齋, 이상설의 호). 그동안 잘 있었는가?”


반갑게 인사를 나눈 두 사람은 자리에 앉았다.


“그래, 내 보재가 특사로 헤이그에 갔다는 이야기는 들었네. 그래, 어떤가?”


이회영의 말에 이상설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특사로 다녀왔지만, 기대한 만큼 성과를 얻지 못해서 면목이 없을 뿐이라네. 더욱이 이 일로 황제폐하께서 양위까지 하게 되지 않았나.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함이야.”


한탄을 하는 이상설을 보며, 이회영이 위로의 말을 건넸다.


“황제폐하도 자네를 원망하고 계시지는 않으실 걸세. 비록 실패하기는 했지만, 자네가 그처럼 활동을 해준 덕에 그래도 대한제국이 아직 살아있음을 알리지 않았는가? 그것만으로도 큰 소득일 걸세. 너무 자책하지 말게나.”

“하지만 그것으로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났어. 이준 부사도 헤이그에서 죽음을 당했고, 황제폐하의 양위와 그로 인한 친일 매국노들의 득세, 그리고 일본의 노골적인 침략행위..... 이 모든 것의 시발점이 특사 때문인 것 같아서 마음이 무겁다네.”


이상설의 말에 이회영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그래, 내가 국내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도 일본이 궐석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되어 귀국하고 싶어도 돌아갈 수가 없는 게지. 그렇게 들어가는 것은 개죽음이나 다름없으니까 말이야.”


이상설의 말에 이회영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자네는 이 먼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어쩐 일인가?”


이회영은 한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대답했다.


“국내 사정도 갈수록 안 좋아지고 있어. 일본을 등에 업은 친일단체의 일진회는 갈수록 날뛰고 있고, 이완용을 비롯한 친일 내각도 그 무능함이 점점 심해지고 있다네. 일설에 의하면 송병준은 합병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다닌다고도 하니.... 도대체 나라가 어찌 되려고 이러는지 모르겠네.”

“뭐라고? 그자가? 어허....”

“그래서 지금 일부 깨어있는 대신들 사이에서도 말들이 무성하다고 하네. 더욱이 이에 자극을 받은 이완용 총리대신도 움직일 듯해서 정말 이러다가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는 것은 아닐까 다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닐세.”

“이런~ 이런~ 정말 큰일이구만....”


두 사람은 깊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사실 두 사람의 시름은 점점 사실로써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탄만 하고 있기보다는 두 사람은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논의 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 다 자신의 삶보다는 조국의 독립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두 사람의 힘으로 그들 친일파들의 행동을 직접적으로 막을 수는 없지만, 앞으로의 사태에 대비하여 준비를 하며 대비를 해야만 한다는 사실은 두 사람 다 깊이 공감을 하고 있었다.

이대로 내버려 둘 수만은 없기 때문이었다.


이후 두사람은 이상설이 미국에서 보고 온 동포들의 이야기와 연해주에서 벌이는 사업, 그리고 이회영은 국내 사정에 대해서 허심탄회(虛心坦懷)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몇 가지 뜻을 같이 하면서 4가지 항목을 결정하였는데, 지사들을 규합하여 국민교육을 장려할 것, 만주에서 광복군을 양성할 것, 비밀결사를 조직할 것, 운동자금을 준비할 것을 결의 하였다.


이상설이 이회영의 손을 붙잡고는 말했다.


“나는 헤이그 사건으로 고국 강산에는 한 발자국도 들어가지 못하게 되어 이후로 구미 등지를 돌며 몸이 부서지도록 외교에 전력을 다하여 나라를 일으키는 일을 돕겠으니, 그대는 국내의 일을 담당하고 정성을 다하고 부지런히 애써 우리 광복의 큰 뜻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해 주기를 바라네.”


이에 이회영이 이상설의 손을 맞잡으며 대답했다.


“내, 귀중한 가르침을 명심하여 잊지 않겠네. 부디 서로 좋은 성과를 내기 위해 노력해 보세나.”


두 사람은 그렇게 두 손을 굳게 마주 잡으며 독립에 대한 열망을 서로 나누었다. 그렇게 한동안 이상설과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며 함께 하던 이회영은 틈틈이 연해주와 만주를 둘러보면서 서로의 계획을 보다 구체적으로 가다듬었다.


그렇게 대망의 1910년의 역사적인 해가 밝아왔다. 이회영은 3월초까지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렀다. 그렇다가 국내에서 전해져오는 심상찮은 소식들에 급하게 귀국을 결정하였다.


“내 우선 빨리 국내로 들어가서 이야기를 알아보고 연락을 전해 주겠네.”

“그래주게. 안 그래도 요즘 들려오는 소식들이 모두 좋지 않아. 가장 근래에 전해진 소식은 송병준이 보다 오히려 이완용이가 더 설치려한다는 소문이야. 국내에 도착하자마자 소식을 좀 전해주시게. 부탁함세.”


급하게 이회영이 귀국길에 오르고 그를 배웅하던 이상설은 어두워져가는 하늘을 바라보며 간절히 기도했다.


‘제발 이 모든 이들이 한낱 거짓된 소문이기를....’


이런 이상설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소문들은 대부분 사실이었다.


이미 일본은 1909년 7월6일 내각회의에서 대한제국에 대한 병탄을 결정한 상태였다. 평소에 강제 합병에 반대하는 것으로 알려졌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도 이 자리에서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동의를 함으로써 본격적으로 병탄 작업에 착수하게 되었다.


일본은 병탄에 따른 부작용의 최소화와 국제적인 명분을 얻기 위해서 시기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몰래 일진회의 고문을 맡고 있는 스기야마 시게마루(杉山茂丸)를 통해서 일진회를 이용해서 미리 병합청원을 준비하도록 지시까지 해 놓은 상태였다.


그 와중에 일진회를 이끄는 송병준은 “지금처럼 보호국으로 이도저도 아닌 어설픈 현상 보단, 합병을 하면 한국의 행정 정책이 성공적으로 이뤄질 것이다.”라고 주장하면서, 몰래 1909년 2월부터 대한제국의 일본합병을 두고 일본과 이미 매국협상을 진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은 자체 병탄 계획을 가지고 있기에 그의 뜻에 응하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일어난 일이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암살 사건이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1909년 10월에 러시아의 재무장관 블라디미르 코콥초프(Vladimir Kokovtsov)와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으로 가게 되었다. 안중근,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등은 이토 히로부미가 코콥초프를 만나기 위해 만철열차 편으로 뤼순과 하얼빈을 경유한다는 정보를 듣고는 암살을 기획하는데, 안중근이 자원을 하였다.


1909년 10월21일 대동공보사 기자 이강(李剛)의 지원을 받아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난 안중근은 우덕순, 조도선, 유동화 등과 하얼빈에 도착했다. 처음의 계획과는 달리 자금과 인력에 문제가 발생하여 도착지인 차이자거우(蔡家溝)과 그 다음 역인 하얼빈에 집중하기로 하고는 우덕순과 조도선은 차이자거우역으로 향하고, 안중근은 하얼빈에서 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차이자거우역에 있던 우덕순과 조도선은 그들의 행동을 수상하다고 여긴 러시아 경찰에 의해서 집중 감시를 받게 되면서 객사를 벗어나지 못하여 실패하였다. 이제 남은 사람은 하얼빈의 안중근 뿐이었다.


1909년 10월26일 오전 9시, 이토 히로부미가 탄 열차가 하얼빈에 도착하고, 코콥초프와 열차 안에서 회담을 진행한 이후에 러시아군의 사열을 받기 위해서 9시30분경에 열차에서 하차하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안중근은 열차로 돌아가던 이토 히로부미를 브라우닝제 반자동권총 M1900으로 저격했다. 안중근이 쏜 일곱 발 중 세발이 이토에 맞았고, 나머지 네 발 중 세 발은 그 곁의 수행비서관,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 만주철도 이사를 맞혔다.


총에 맞은 이토 히로부미는 즉시 하얼빈의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출혈과다로 10월26일 오전 11시경에 사망하였다. 그의 나이 69세였다.


차이차거우 역의 객사에 있던 우덕순과 조도선은 안중근의 거사 성공 이후에 러시아군 헌병대에 체포되어 압송되었다.


이토 히로부미의 저격에 성공한 안중근은 그 자리에서 러시아 헌병대와 청나라 경찰에 체포 된 후 청나라 수도인 베이징이 아니라 일본의 점령지인 뤼순으로 이송되어 수감되다가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후, 1910년 3월 26일 순국했다.


이렇게 이토 히로부미가 죽은 후,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던 병합에 대한 진행은 1910년 7월 제 3대 총독인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 正毅)가 부임하면서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그 와중에도 송병준은 자신이 주장한 합병에 대한 통감부의 반응이 시원치 않자,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직접 일본에 건너가서 일본 정객들과 합병에 대한 흥정을 시도 하였다.


부임하자마자 이완용과 농상공대신 조중응을 불러 조선 병합에 대한 의사를 넌지시 띄운 데라우치는 그런 송병준의 행적을 놓치지 않았다. 아니 그는 오히려 그 사실을 이용했는데, 비밀리에 이완용에게 송병준의 행적을 흘렸다.

이완용은 처음에는 병합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던 이완용은 그런 송병준의 소식을 듣게 되자 마음이 불안해 졌다. 더불어 이완용은 1910년 초부터 본격적으로 흘러나오기 시작한 이완용 내각의 와해설로 인해 마음이 불안한 차에 송병준의 행적을 듣게 되자, 더욱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같은 친일 매국노였지만, 둘의 사이가 그렇게 좋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이완용은 서자로 낮은 출신은 그를 깔보고 있었다. 더불어 같은 친일이지만, 서로 생각하는 것도 같지 않았다. 현재로는 그저 이익을 위해서 생각이 다르지만, 함께 하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이런 이완용의 생각을 모를 리가 없는 송병준이었다. 이완용은 만약에 자신이 권력을 잃은 사이에 송병준이 정권을 잡게 된다면, 자신에게 뭔가 보복을 해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완용은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다.


결국 고심을 하던 일본말을 하지 못했던 이완용은 직접 일본에 유학했던 비서 이인직을 심복으로 삼아서 통감부(統監府) 외사국장 고마쓰 미도리(小松緑)에게 자신의 내각의 와해설의 진위 여부와 함께 병합에 대해서도 다시 상의를 해보자고 넌지시 문의를 하였다.


하지만 미도리는 내각 와해설에 대해서는 소문을 부정하면서도 병합에 대해서는 어정쩡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면서 오히려 송병준의 행동에 대해서 더욱 자세한 내용을 흘렸다.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된 이완용은 애가 타서 안절부절못하였다.


이는 미도리가 송병준을 이용해서 이완용을 자극해서 충성경쟁을 하게 만들려는 자연스러운 의도였다. 그리고 이런 둘의 충성경쟁을 통해서 병합의 속도를 높이려 하였다.


뭔가 하나도 제대로 확답을 듣지 못한 이완용은 오히려 송병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미도리를 보고는 망설이다가는 합병의 주역을 빼앗길 뿐만 아니라 권력도 잃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이완용은 “현 내각이 붕괴 되어도 이보다 더 친일적인 내각이 나올 수 없다.”라고 단정하며 배수진을 치고는 자기 휘하의 내각이 조선 합방 조약을 맺을 수 있음을 통감부에 직접 알렸다. 그리고 그 소식을 미도리를 통해서 들은 데라우치 통감은 어이없는 미소를 지었다.


“하하.... 이렇게 어리석은 사람이 한 나라의 총리대신이라니....”


그런 데라우치의 표정에 미도리가 공감을 표하며 비웃음을 날렸다.


“원래부터 그런 족속들이 아닙니까. 특히나 송병준이 그렇게 설쳐준 덕에, 오히려 이완용을 이용하기가 더욱 쉽게 되었습니다.”


데라우치는 비록 자신의 나라에 유리한 일이었지만, 이런 매국노들이 정권을 잡고 있음에 허탈한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토록 하기 힘들다고 생각했던 병탄 작업이 오히려 두 사람을 충성경쟁을 통해서 이렇게 쉽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솔직히 믿겨지지 않을 정도였다.


“하아~ 하긴 저런 이들이 있는 나라였으니, 이 나라가 이 꼴이었겠지.”

“뭐~ 우리로써는 잘된 일이 아니겠습니다. 우리가 공작을 할 필요도 없이 먼저 나서주니 말입니다.”


미도리의 말에 데라우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2년 전, 아니 그 이전부터 준비를 해왔던 일이 이제야 결실을 맺을 때가 오고 있었다.


“그럼 이제 시작하는 겁니까?”


미도의 질문에 데라우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냉큼 받아먹기에는 아직 빠르지 않겠나. 좀 더 뜸을 뜰이도록 하지.”

“뜸 말이군요. 큭큭~~”


이완용은 자신의 조선 합방을 할 수 있다는 말에도 통감부에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더욱 초조해 졌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송병준을 통해서 다른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이에 이완용은 좀 더 자신의 내각의 친일성을 부각시키면서 통감부에 거듭 합병 조약의 성사 가능성에 대해서 어필을 했다.


더욱 조바심을 내는 이완용을 보고 이제야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고 생각한 일본은 일진회의 고문 시게마루를 통해서 이완용과 송병준이 서로 합방청원서를 만들도록 부추겼다.


그리고 그 조약의 내용이 알려져서 조약에 반대하는 소요 등이 일어날 것에 대비하여, 나남, 청진, 함흥, 대구 등지에 주둔한 일본군들을 밤을 틈타서 서울에 이동시켰다. 동시에 조약 체결일인 8월22일에는 응원병력과 함께 용산에 주둔하여 서울 전체에 대한 혹시 모를 소요에 대한 경비를 섰다.


일진회와 이완용, 송병준이 모두 합방청원서를 내도록 준비한다는 사실을 들은 이완용은 이대로 병합에 대한 주도권을 넘길 수 없다는 생각에 시게마루를 통해서 입수한 일본의 준비한 조약내용보다 더욱 나쁜 조약안을 자신의 안으로 내걸고 통감부에 전한다.


그리고 이 소식을 미도리를 통해서 들은 데라우치 통감은 이완용의 안에 어이없어 하면서도 반색하였다. 일본에게 무척이나 유리한 안이었기 때문이었다. 데라우치 통감은 이대로 조약 체결을 진행하라는 말을 전하였다.


미도를 통해서 조약을 진행하라는 이야기를 들은 이완용은 결국 자신이 승자가 되어 합병을 주도할 수 있음에 기뻐하고는 본격적으로 조선 병합을 위한 일에 착수를 하게 된다.


제일 먼저 한 일은 순종을 만나는 일이었다.


작가의말

검토를 하는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습니다. 이토가 1909년에 이미 안중근 의사에 의해서 제거 된 것을 무심결에 놓치고 말았네요. ㅜㅜ

결국 제가 존경하는 안중근의사의 이야기도 놓치고 말았습니다.  재임의 이야기 시선을 따라가다가 놓치고 말았다는 변명을 해보지만, 그저 변명일 테지요.  에고~


아무튼 이토와 관련되어 잘못된 부분을 데라우치 통감으로 바꾸고 안중근 의사에 관한 일을 간략하게 넣었습니다.

 

제대로 언급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 아쉬움이 큽니다. 


다만, 언젠가 기회가 되면 안중근 의사에 대해서는 다시 언급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바래봅니다. 더불어서 앞으로 로 좀더 확인하고 주의를 기울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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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3

  • 작성자
    Lv.39 Nahus
    작성일
    17.01.19 18:19
    No. 1

    이완용같은 매국노들만 없었어도 뭔가 해볼게 있었을까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42 종이향
    작성일
    17.01.23 15:30
    No. 2

    그러게 말입니다. 하지만 자료를 찾아볼 수록 매국노들도 문제지만, 가장 큰 문제는 세상에 너무 무지했다는 점이 아닐가 싶습니다.
    지도자들도 백성들도 말이죠. 그렇기에 너무 힘없이 당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아마도 조선 후기 붕당정치를 시작으로 자신의 당과 가족, 가문, 그리고 자신의 안위만을 찾던 이들이 늘었던 것이 가장 문제였겠지요. 나라보다 말입니다.

    정말이지 알면 알수록 슬플 수밖에 없는 우리의 역사가 아닐까 싶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2 똘이똘이
    작성일
    18.03.15 12:26
    No. 3

    이완용은 서자로 낮은 출신은 그를 깔보고 있었다. -> 이완용은 서자 출신인 그를 낮게 깔보고 있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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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약국 (6) 17.02.06 2,558 35 15쪽
104 약국 (5) +6 17.02.03 2,791 37 17쪽
103 약국 (4) +1 17.02.02 2,678 32 16쪽
102 약국 (3) +3 17.02.01 2,762 36 15쪽
101 약국 (2) +6 17.01.31 3,083 37 14쪽
100 약국 (1) +8 17.01.26 3,186 45 13쪽
99 보상 (8) +4 17.01.25 2,935 47 12쪽
98 보상 (7) +8 17.01.24 2,672 42 13쪽
97 보상 (6) +4 17.01.23 2,848 38 14쪽
96 보상 (5) +4 17.01.20 2,966 41 13쪽
95 보상 (4) +6 17.01.19 2,853 40 13쪽
94 보상 (3) +6 17.01.18 2,886 39 13쪽
93 보상 (2) 17.01.17 2,872 32 14쪽
92 보상 (1) 17.01.16 2,901 31 12쪽
91 사고 (6) +1 17.01.13 2,946 28 16쪽
90 사고 (5) +1 17.01.12 2,691 31 12쪽
89 사고 (4) +1 17.01.11 2,829 32 18쪽
88 사고 (3) +1 17.01.10 2,745 33 13쪽
87 사고 (2) +1 17.01.09 2,725 35 13쪽
86 사고 (1) +1 17.01.06 2,976 35 14쪽
85 트라이앵글 셔츠웨이스트 (5) 17.01.05 2,902 38 15쪽
84 트라이앵글 셔츠웨이스트 (4) +1 17.01.04 2,925 36 13쪽
83 트라이앵글 셔츠웨이스트 (3) +5 17.01.03 2,814 34 15쪽
82 트라이앵글 셔츠웨이스트 (2) +7 17.01.02 3,228 40 13쪽
81 트라이앵글 셔츠웨이스트 (1) +1 16.12.30 3,016 41 14쪽
80 경술국치(庚戌國恥) (3) +2 16.12.29 2,724 37 13쪽
79 경술국치(庚戌國恥) (2) +1 16.12.28 2,797 36 13쪽
» 경술국치(庚戌國恥) (1)_이토에 관한 잘못된 내용을 수정하였습니다. +3 16.12.27 3,151 32 19쪽
77 새로운 선택 (6) +4 16.12.26 3,020 36 16쪽
76 새로운 선택 (5) +1 16.12.23 2,809 44 15쪽
75 새로운 선택 (4) +1 16.12.22 2,805 44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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