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당의 딜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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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llita
작품등록일 :
2013.05.23 22:23
최근연재일 :
2013.11.12 23:57
연재수 :
17 회
조회수 :
9,673
추천수 :
478
글자수 :
51,694

작성
13.06.10 19:58
조회
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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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글자
7쪽

(007. 개구멍은 막지 않는 게 예의입니다

DUMMY

"룩셀러, 이제부터 사용할 이름... 지어야지요?"


피오니는 제 턱을 꼬집으며 입술을 비죽였다. 뭔가 깊이 생각할 때 나오는 버릇인 것 같았다. 칼라디아는 고민하는 피오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역시, 부드럽다. 피오니가 꽤나 오랫동안 고민할 것 같아 칼라디아는 눈을 감았다. 도망치는 내내 잠시도 여유를 가질 수가 없었다. 그나마 지금 이런 잠깐의 틈이 얼마나 소중한 건지 모른다.

턱 끝이 발개지도록 꼬집던 피오니는 이내 마음을 정했다. 오랜 고민 끝의 결과물을 알려주려 고개를 들자 칼라디아는 눈을 감고 있었다. 자신과 함께 다니던 동안 그가 잠을 자는 것은 처음 본다. 피오니는 호기심에 손을 올려 칼라디아의 눈 앞에 대고 흔들었다.

사실, 칼라디아는 잠이 든 건 아니었다. 잠시 눈을 감고 피로를 풀고 있었을 뿐. 그 와중에 피오니가 제 눈 앞에 대고 손을 흔들며 잠이 들었는지를 확인하자, 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어디에 숨어있었는지도 모를 장난기가 솟아났다.

칼라디아는 계속 눈을 감고 있었다. 칼라디아의 눈 앞에 대고 손을 흔들던 피오니는 칼라디아가 정말 자는 거라고 확신을 했는지 손을 내렸다. 피오니가 숨을 죽여 웃는 것이 느껴졌다. 칼라디아도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피오니는 별다른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저, 조금 더 편안하게, 조금 더 익숙하게 칼라디아에게 몸을 기댔을 뿐. 제가 깨어있을 때와 잠들어있을 때 대하는 자세가 다른 것을 보고, 칼라디아는 앞으로도 가끔 자는 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름... 지었어요."


칼라디아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로 피오니가 작게 중얼거렸다.


"...데르옌.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어. 나한텐, 굉장히 소중한 의미니까..."


피오니는 그 말을 뱉고선 움직이지 않았다. 숨소리가 늘어지더니, 일정해지고, 피오니의 팔이 느슨해졌다. 원래 지금은 떠나야 할 시간이지만, 이렇게 제대로 숨겨진 곳이라면 조금이나마 더 숨어있을 수 있겠지. 칼라디아는 피오니의 어깨를 조금 더 힘주어 안고선 머리를 벽에 기댔다.


잠시 눈을 붙인 그들은 곧장 칼라디아, 즉 '데르옌' 이 알고 있던 곳으로 향했다. 데르옌은 마녀를 잡기 위해 흔적을 수색할 무렵 국경인데도 불구하고 레인저도 국경 수비대도 찾지 않는 길을 발견한 적이 있었다. 그들이 택한 길은 조금 돌아가는 방향이긴 하지만, 그만큼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방법이었다.

국경을 넘기 직전 데르옌은 피오니를 남겨두고 사흘 간 사라졌다 돌아와 맥주 한 통을 내밀었다. 데르옌은 의아한 표정을 짓는 피오니를 눕히고 피오니의 머리칼을 전부 그 속에 담궜다. 머리 쪽의 피부가 싸해지는 느낌에 피오니가 인상을 찡그렸지만 데르옌은 그 상태로 피오니를 붙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데르옌이 놓아주고서야 간신히 머리를 빼내고 근처의 개울에 맥주를 씻어버린 피오니는 제 머리가 붉게 탈색이 된 것을 볼 수 있었다.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이 아닌, 붉은 머리와 파란 눈.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들은 국경을 넘었고, 그 후로도 한참을 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다녔다. 그들이 가진 돈은 데르옌이 지니고 있던 대륙 공통 금화 몇 개와 피오니에게 주려 했던 작은 브로치 하나뿐이었다. 금화가 적은 돈은 아니었으나 귀족 집안에서 살아온 데르옌과 생전 돈이라고는 만져본 적도, 심지어 본 적도 없는 피오니에게는 막연하기만 할 뿐이었다.


다행히도 그들이 도망친 슬라이체 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로브레타 왕국은 신분증 제도가 존재하지 않는 나라였다. 그만큼 도망자들과 범죄자들이 많이 모여들 법도 하나 치안이 다른 나라들에 비해 아주 확실해서 범죄자의 유입은 다른 나라들과 비슷하게 고만고만한 편이었다.



국경을 넘어 확실하게 '슬라이체' 가 아닌 '로브레타' 의 영역으로 들어왔다고 느낀 그들은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이제부터는 천천히 이동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안 그래도 피오니의 체력이 한계에 부딪혀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제... 이제, 쉴, 수 있는... 거예요?"

"힘듭니까? 더 못 걷겠어요?"


피오니는 대답 대신 불툭 솟아오른 나무 뿌리에 주저앉았다. 산맥을 넘어 로브레타로 진입하면서 체력과 함께 자신을 억눌러놓고 있던 것마저 소진해버렸는지 피오니는 조금 더 솔직해져 있었다.

로브레타의 산림은 거대 나무들과 지독하도록 빽빽히 늘어진 덩굴들로 대륙에서도 꽤나 유명했다. 그만큼 바닥에 쌓여 썩어가는 나뭇잎도 많고, 군데군데에 늪도 상당히 많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맹수들이 사람들을 피한다는 것 뿐일까. 그것 외에는 지형이 험난하고 공기가 습해 사람들이 별로 찾지 않는 장소 중 하나였다.

정말로 지쳤는지 피오니는 나무 뿌리에 앉은 채로 둥치에 몸을 기댔다. 데르옌은 그 옆에 앉아 피오니의 어깨를 끌어안고 도닥였다. 피오니는 힘이 풀린 혀로 무어라 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술에 취해 주사를 부리는 것 마냥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피오니는 곧 잠이 들었다.

맹수가 사람을 피하는 곳이라지만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라 밤이 되기 전에 마땅한 장소를 찾아 불을 피워야했지만, 데르옌은 피오니를 품에 안은 채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은 귀가 밝다. 이대로 품에 피오니를 안고 잠이 든다 해도 맹수가 그들을 덮치기 전에 잠에서 깨어 반격할 수 있었다.

그 난리통에 피오니가 깨어나도 사실 걱정할 것은 없다. 체력이 조금 부족하긴 하지만 피오니는 대륙을 공포에 밀어넣었던 마녀이다. 아무리 싫어하는 힘이라도 생명이 위협당하면 쓸 수밖에 없을 것을 데르옌은 알고 있었다. 데르옌은 곤히 잠든 피오니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잡니까?"


데르옌이 피오니의 이마에 다시, 조금 더 길게 입을 맞췄다. 나뭇잎들로 빽빽히 하늘이 덮인 숲은 해가 지기 전임에도 불구하고 벌써 어두워져가고 있었다. 데르옌은 어둠 속에 까맣게 녹아들어간 피오니의 머리칼을 매만졌다.


"당신은... 내가, 왜 당신을 구했는지 알까."


언젠가 피오니가 말했다. 사랑받는 건 행복하다고. 그래서, 자신은 지금 행복하다고. 그러나 데르옌이 느끼기에 피오니가 데르옌에게서 '받고 있다' 고 생각하는 것은 연인으로써의 사랑이 아닌 가족으로써의 사랑이었다. 몇 번이고 그 생각을 고쳐주고 싶었지만 데르옌으로써는 피오니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지 알 수 없었다.


"도망 가면 곤란해요..."


데르옌은 피오니를 끌어안은 채로 눈을 감았다. 꽤 먼 곳에서부터 맹수의 포효가 들려온다. 자신들을 향한 것이 아님을 알기에 데르옌은 긴장하지 않았다.


작가의말

오늘 참 마무리가 흐지부지... 데르옌. 이 글자는 ‘사어’ 입니다. 마녀들의 문자. 마녀들은 피오니를 남겨놓고 전부 죽어버렸으니 더 이상 사용되지 않을 언어입니다. 피오니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언어이기도 합니다. 뜻은 차차 나올 겁니다.

 

슬슬 제목을 바꿔야할까봐요... 사실 저 제목을 지었을 때는 프롤로그만 쓴 상태였거든요. 그 뒤로 이을 생각도 없었고 결심도 없었습니다만, 마녀와 영웅의 과거를 생각해보다보니 쭉쭉 뻗어나가게 되어버렸습니다. 음... 이제 문제는 그건데. 이 뒤의 이야기가 전혀 제목에 맞지 않을 것 같거든요. 물론 끊임없이 마녀를 찾고자 하는 제국의 움직임은 있을테지마는 연관이 없을 것 같아서요...

혹시 좋은 아이디어 있으면 추천해주세요. 읽는 분들도 별로 안 계시지만 그래도 좋은 의견 부탁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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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4

  • 작성자
    Lv.73 지나가는
    작성일
    13.06.25 22:15
    No. 1

    흠... 가족으로써의 사랑이었군요. 그러게요 데르옌은 왜 피오니를 구한거지?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Gellita
    작성일
    13.06.25 23:31
    No. 2

    설명이 부족했나;; 컴 키면 좀 수정을 해야겠습니다... 데르옌은 피오니에게 연인으로서의 사랑을 느끼고 있지만 피오니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3 지나가는
    작성일
    13.06.25 23:45
    No. 3

    아 피오니가 받고 있다고 느낀건 가족으로써의 사랑이지만 데르옌이 주고 있는건 연인으로써의 사랑인건가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Gellita
    작성일
    13.06.26 00:19
    No. 4

    그렇습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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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016. 선택이라 해서 언제나 행운이 되는 법은 없는 걸까요 +2 13.11.12 310 7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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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011. 이유 없이 화를 내는 사람은 흔하지 않아요 +4 13.07.02 764 30 8쪽
11 (010. 그냥 주어지는 건 너무 믿으면 안된다는데 +2 13.06.25 581 62 7쪽
10 (009. 경고는 이유없이 나타나지 않지요 +2 13.06.21 1,225 48 7쪽
9 (008. 사람이 제일 믿을 게 못 되는 거 아닌가요 +2 13.06.15 442 30 7쪽
» (007. 개구멍은 막지 않는 게 예의입니다 +4 13.06.10 568 9 7쪽
7 (006. 정말로 이름을 불러주면 살아나게 될까요 +2 13.06.05 424 17 7쪽
6 (005. 영웅은 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거예요 +2 13.06.03 434 26 8쪽
5 (004. 대가 없이 주어지는 것이 있긴 하던가요 +2 13.05.29 520 47 7쪽
4 (003. 원래 그렇게 태어나면 끝까지 그렇다고들 하던데 +2 13.05.28 468 28 7쪽
3 (002. 부모 잃은 계집애는 개만도 못하다데요 +2 13.05.25 515 11 7쪽
2 (001. 어디서부터 써야할까요 +2 13.05.23 560 35 7쪽
1 (000. 시작합니다 +8 13.05.23 796 44 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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