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장. 퍼스트 클래스(1)
“그래서 결국 미국으로 가실 생각인가요?”
루 사장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전체적으로 뿌옇고 윤곽이 불확실한 재능 스토어의 풍경을 둘러보았다.
“네. 김 대표님과 한참 상의했는데······.”
외무부를 통해 정식으로 들어온 요청을 거절한다는 것은, 말하자면 미국 정부와 미국 대통령에게 거침없이 중지 손가락을 치켜드는 짓이나 다름없다.
그것은 단순히 내 개인적 평판을 떨어뜨리는 문제를 넘어, 대한민국의 국가적 외교에까지 심각한 피해를 끼치는 일이다.
“······라고 김 대표님이 설명했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맞는 말 같고요.”
“그렇군요. 저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건이 씨의 판단을 존중합니다. 그럼 고객님의 첫 미국 본토행을 위해 오늘도 스토어를 열어볼까요?”
루 사장은 신이 난 듯 멋들어진 포즈를 취했다. 나는 그녀의 오른편에 나타난 상품 리스트를 보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행운의 재능(레벨4) -카르마 2,000]
[회복의 재능(레벨4) -카르마 12,000]
[격투의 재능(레벨4,5) -카르마 800, 1,800]
[오러의 재능(레벨3,4) -카르마 12,000, 22,000]
[존 적응의 재능(레벨3) - 2,000]
[잠입의 재능(레벨1,2,3) - 카르마 400, 900, 2,200]
[연애의 재능(레벨1,2,3) - 카르마 300, 700, 1,500]
“루 사장님?”
“네, 고객님.”
“어째 오늘도 상품에 변화가 없는데요?”
마지막으로 2레벨짜리 존 적응의 재능과 4레벨까지의 충격흡수의 재능을 구입한 이후, 오늘까지 총 나흘 동안 리스트의 상품 목록이 똑같다.
“죄송합니다. 고객님.”
루 사장은 안타까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전에도 계속해서 말했듯이, 저는 고객님의 장래에 벌어질 사건의 ‘가능성’만을 염두로 해서 상품을 준비합니다. 거기에 지난 사흘 동안 추가로 상품을 구입하지도 않으셔서 리스트에 변화를 주기가 어려웠습니다.”
실제로 지난 사흘간은 스토어에서 아무것도 구입하지 않았다.
애초에 카르마도 부족했지만, 그보다 요환의 저택에서 안전하게 생활하느라 당장 추가적인 재능이 절실하지 않았다.
나는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지난 사흘간은 그렇다고 쳐요. 실제로 아무 일도 안 일어났으니까. 하지만 당장 내일이나 모래 중에 미국으로 떠나야 한다니까요? 그런데도 그 ‘가능성’에 아무 변화도 없는 건가요?”
“고객님, 저는 단지 하루나 이틀을 내다보고 상품을 준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루 사장은 양손을 모으며 공손한 자세로 말했다.
“저는 고객님의 ‘다양한’ 미래에 발생할 여러 가능성을 고려해서 상품을 준비합니다. 그것은 당장 내일의 가능성일 수도 있고, 어쩌면 한 달 후의 가능성일 수도 있습니다.”
“음······.”
“제가 보여드리는 상품들은 고객님의 미래를 예언하는 예언 리스트가 아닙니다. 물론 그중에 한 가지는 예언 비슷하게 준비한 거긴 하지만요.”
“그게 뭔가요?”
“물론 이겁니다.”
루 사장은 리스트의 가장 아래 있는 재능을 가리켰다.
[연애의 재능]
루 사장은 억울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째서 고객님은 이 재능을 구입하시지 않은 겁니까!”
“제가 왜 그 재능을 구입해야 하는 겁니까!”
나는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대꾸했다.
“대체 이 상황에서 연애의 재능이 왜 필요한데요? 당장 테러리스트의 습격이 언제 벌어질지, 미국 대통령이 대체 날 불러다가 무슨 이야기를 할지 모르는 급박한 상황에!”
“······나흘 전에 말입니다.”
루 사장은 갑자기 목소리를 낮췄다. 나는 흥분을 가라앉히며 같이 목소리를 낮췄다.
“네? 나흘 전에요?”
“나흘 전에 처음 이 상품을 준비했을 때가 기회였습니다. 그때 상품을 구입하셨으면 며칠 동안은 아름다운 여성분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실 수 있었을 텐데요!”
마지막에 갑자기 목소리가 올라갔다. 나는 황당한 기분을 느끼며 반문했다.
“네? 뭐라고요?”
“켈리 브라운 양 말입니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조금 흥분했네요. 개인적으로 너무 아쉬워서 그만.”
“아니 잠깐······.”
나는 금발 벽안을 가진, 아름다운 할리우드의 여배우를 떠올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이 재능을 준비했던 이유가······. 설마 제가 켈리 브라운과 뭔가 잘되게 하기 위해서였던 건가요?”
“그렇습니다. 이미 지난 일이라서 말씀드리는 거지만요.”
루 사장은 토라진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사실 엄청난 기회였습니다. 고객님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주셨다면, 브라운 양은 분명 그 호텔에 사흘은 더 머물렀을 겁니다.”
“하지만 그때는······.”
“네. 압니다. 김 요환 씨가 도청기를 설치했었죠.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서로에게 호감이 있는 젊은 남녀가 좀 더 가까워지겠다는데 그 정도 리스크쯤은 감수할 수 있지 않나요?”
그러고는 안타깝다는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루 사장에겐 일종의 ‘뚜쟁이’ 같은 속성이 있는 모양이다.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 그런데 정신 팔릴 때가 아니에요. 당장 내일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그것도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유명한 사람과 어떻게 연애를 하고 앉아 있겠어요?”
“어차피 모든 인간은 내일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루 사장은 체념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불확실한 미래와 상관없이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며 원하죠. 저는 그저 고객님께서 눈앞의 현실을 즐기시길 바랐을 뿐입니다. 고객님의 기쁨은 즉 저의 기쁨이기도 하니까요.”
“······말씀은 감사합니다. 아무튼 그런 건 주변이 좀 정리된 다음에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정중하게 필요 없다고 못을 박아 놓은 다음, 나는 한숨 돌리며 리스트의 상품들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계속 똑같은 상품이긴 한데······ 그래도 오늘은 미국행을 대비해서 하나쯤 사 두는 게 좋지 않을까?’
비싼 상품을 왕창 구입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최근 며칠 동안 괄목할 만한 카르마의 상승이 있었다.
1257 -> 2357
2357 -> 3390
3390 -> 4515
이것이 최근 사흘 동안 벌어진 선한 카르마의 변화다.
하나의 사건으로 오를 수 있는 카르마의 수치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하와이에서 사람들을 구한 일로는 더 이상 카르마가 오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이후에 한 일들이 긍정적인 영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리라. 나는 인천공항에서 사람들을 구한 일을 떠올리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와이에서 터진 사건 만큼 전 세계적으로 알려지진 않았지만······ 오히려 직접 구한 사람의 숫자만 보면 인천 공항 쪽이 더 많아. 정신 차린 사람들이 계속해서 내 이야기를 하고 있기도 하고.’
나로선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비록 세상에 진실을 밝힐 수 없다 해도, 심건이 그 상황에서 ‘아무튼 뭔가 했다’라는 이야기가 사람들 사이에 도시전설처럼 퍼지고 있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오늘도 아이쇼핑으로 만족하고 그냥 넘어가실 건가요?”
루 사장이 가볍게 재촉했다. 나는 헛기침을 하고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뭔가 사고 싶긴 한데······ 아, 다른 스토어의 상품들도 여전히 그대로죠?”
“네. 고객님.”
루 사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또 다른 리스트를 열었다.
[타임 스토어 특별 상품]
[1시간 회귀 풍선(하급, 재고2)-카르마 1,200]
[10분 회귀 풍선(중급, 재고1)-카르마 3,600]
[컨트롤 스토어 특별 상품]
[10분 광역 담배(하급, 재고1)-카르마 4,000]
‘이제 저 담배를 살 카르마도 모였긴 한데······.’
비록 10분 동안이라 해도, 사람을 마음대로 컨트롤 할 수 있다는 건 실로 사기적인 능력이다.
만약 미국 대통령을 만났을 때 이 담배를 사용한다면, 나는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진 남자에게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요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진짜 그런 짓을 하면 난리가 나겠지. 내가 무슨 최면술이라도 쓰는지 의심할 거야. 그것도 미국 대통령을 상대로 일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자칫하면 테러리스트로 몰려 잡혀 들어갈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이 담배는 ‘진짜 테러리스트’의 공격으로부터 유용하게 쓰기도 어려울 것 같고(멀리서 총부터 쏴댈 테니까), 아직까지는 또 하나의 문제인 ‘존’의 해체에도 도움이 될지 확신할 수 없었다.
‘존에 빠진 노예들에게 컨트롤이 통하면 그야말로 금상첨화겠지. 담배 한 방에 코어가 있는 곳까지 직통으로 달릴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정말 통할까?
알 수 없다. 그리고 진짜 담배를 살 생각을 하자 또 하나의 의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담배는 예외 없이 통한다고 했지? 그런데 만약 상대가 컨트롤 스토어의 고객이라면?’
나는 루 사장을 보며 곧바로 질문했다.
“사장님. 컨트롤 담배가 존에 빠진 인간들에게도 똑같이 통하나요? 그리고 상대가 담배의 원래 고객인 컨트롤 스토어의 고객일 경우라도 통하나요?”
“그 정보는 ‘스토어 룰’에 따라 공개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앗! 치사하게!”
“참고로 처음 질문은 컨트롤 담배를 구입하시면 곧바로 해금됩니다. 두 번째 질문은 또 다른 해금 조건이 필요하지만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4천 카르마에 ‘10분 광역 담배’를 구입하시겠습니까?”
어쩐지 사무적인 말투였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당장은 좀 더 여러 가지 문제에 도움이 되는 능력이 필요할 것 같아요. 그러니까 예를 들면······.”
“연애의 재능 말씀이신가요?”
“아니요!”
나는 즉시 고개를 저으며 리스트의 첫 번째를 가리켰다.
“행운이 오르면 다른 대부분의 일에 도움이 되겠죠? 정했습니다. 레벨 4짜리 행운의 재능을 구입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고객님!”
루 사장은 활짝 웃으며 소리쳤다.
파밧!
동시에 온 사방에 화려한 폭죽이 터지기 시작했다.
퍼벙!
팡! 파바바바방!
탓! 탓! 탓!
‘폭죽? 그러고 보니 전에도······.’
“축하합니다! 고객님!”
루 사장은 직접 작은 폭죽을 손으로 터뜨리며 소리쳤다.
“고객님의 상품 구입 횟수가 또 한 번 정해진 수치를 돌파하셨습니다! 이건 저희 스토어가 고객님의 성원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준비한 보너스 상품입니다!”
동시에 눈앞에 탁구공 크기의 하늘색 사탕이 나타났다. 나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탄성을 질렀다.
“아! 이번에도 쿠폰 다 모은 건가요?”
“그렇습니다, 고객님. 저번 보너스 상품은 ‘재능 알람’이었죠? 이번 보너스 상품은 바로 ‘카르마 리스트’입니다.”
순간 눈앞에 내가 보유한 카르마가 나타났다.
선한 카르마 : 2515
악한 카르마 : 914
“여기까지는 지금까지 자주 보셨던 카르마 비전과 동일하죠?”
“네. 똑같네요.”
“그럼 여기서 ‘카르마 리스트!’라고 외쳐 보시겠습니까?”
“카르마 리스트?”
그러자 리스트가 아래로 쭉 늘어나며 확장됐다.
[선한 카르마 : 2515]
[하와이 비행기 테러사건으로부터 사람들을 구함 -> 354]
[하와이 병원에서 테러리스트를 제거함 -> 91]
[인천 공항에서 존을 해체하고 사람들을 구함 -> 1920]
[기타 - 150]
“보셨죠? 이제부터 고객님의 카르마가 정확히 어떤 원인에 의해 얼마만큼 들어왔는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루 사장은 방긋 웃으며 계속 설명했다.
“주의점이 있다면 ‘현재 보유한’ 카르마의 통계만 보실 수 있다는 겁니다. 해당 원인으로 획득한 총 카르마라던가, 상품을 구매하실 때 어떻게 얻은 카르마가 사라졌는지 같은 건 확인하실 수 없습니다.”
“아······ 그래도 아무튼 좋네요. 이제부턴 직관적으로 카르마가 높아진 원인을 알 수 있게 됐으니까.”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눈앞에 떠 있는 커다란 사탕을 가리켰다.
“바로 먹어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고객님.”
나는 뜸 들이지 않고 사탕을 집어 입안에 집어넣었다. 턱이 살짝 아플 정도의 크기였지만, 신기하게도 입안에 넣자마자 살얼음처럼 녹아버렸다.
루 사장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어떤가요? 설탕처럼 살살 녹죠?”
“네. 살살 녹네요. 설탕처럼 달진 않지만.”
“상품의 맛을 개량하기 위해서는 아직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보너스 상품의 설명이 아직 남아 있네요.”
루 사장은 자신이 띄워 놓은 리스트를 지우며 말을 이었다.
“방금 리스트에 악한 카르마는 안 나왔죠? 카르마 리스트로 확인 가능한 카르마는 고객님이 사용하시는 ‘기축’ 카르마뿐이기 때문입니다.”
“기축 카르마? 기축 통화 같은 건가요?”
“네. 저희 스토어는 선한 카르마만 취급하니까요. 고객님이 확인하실 수 있는 것도 선한 카르마뿐입니다.”
“음······ 그럼 다른 스토어 고객은 악한 카르마의 리스트만 볼 수 있겠네요? 그쪽도 저처럼 상품을 여러 개 사면 똑같은 보너스 상품을 얻게 되는 거죠?”
“그렇습니다. 고객님.”
루 사장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자신의 ‘악행 리스트’를 보며 미소 짓고 있을 타임 스토어의 고객을 상상하며 몸을 떨었다.
“으, 생각하니까 소름 끼치네요. 그쪽 고객은 무슨 사이코패스 같은 건가요? 아니면 원래 정상적인 인간이었는데 스토어의 상품을 구입하기 위해 억지로 테러 같은 악행을 저지르고 있다던가?”
“죄송합니다. 다른 스토어의 고객에 대해서는 제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예상했던 대답이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그것도 스토어 룰이죠?”
“그렇습니다. 고객님. 그래도 제가 한 가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인간은 그렇게 간단히 이분법으로 나눌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겁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한 편으론 생각해볼 문제였다. 나는 문제의 테러리스트 조직인 ‘마스크’를 떠올리며 반론했다.
“그래도 사람들을 죽이고, 나를 죽이려고 하는 인간들은 무조건 나쁜 놈이겠죠? 나중에 미국 대통령을 만나면 테러조직 소탕에 좀 더 신경을 써달라고 부탁해 봐야겠어요. 아, 그러고 보니 그런 부탁을 할 줄 알았으면······ 그냥 눈 딱 감고 담배를 살 걸 그랬나?”
루 사장은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한 발 뒤로 물러났다.
Comment '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