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 11막 3장 - 백룡의 길 (3) | Isaac
"으음."
피어오르는 불길 옆에 누운 글린다가 중얼거린다. 무슨 꿈이라도 꾸는 걸까?
한숨을 쉬고 모닥불을 바라본다. 불길은 아름답게 타오른다. 옆에 둔 배낭에서 장작을 꺼내 불 속에 던져 넣는다.
불꽃은 장작을 집어삼킨다. 슬쩍 동굴 입구를 바라본다. 폭풍은 아직도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이 동굴에 들어온 지 열 시간 정도 지났다. 얼어 죽을 뻔한 밤을 겨우 넘기고, 아침이 밝아온다.
"으으. 추워."
글린다가 침낭을 끌어안으며 몸을 떤다. 불 옆에 있으면서 춥다고 하면 어떻게 하라는 거지.
몇 번 몸을 뒤척인 글린다가 눈을 뜬다. 아직 잠이 덜 깼는지 멍한 표정이다.
"깼으면 일어나세요. 계속 누워 계실 건가요?"
"더 자면 안 돼요?"
"해 떴습니다. 일어나세요."
글린다가 볼을 부풀리고 몸을 일으킨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눈을 비빈다.
"추워서 죽는 줄 알았어요."
"그런 것치고는 잘 자던데요?"
내 대답에 글린다가 혀를 찬다. 살짝 코웃음을 치고 모닥불을 바라본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예요?"
완전히 정신을 차렸는지 또렷한 목소리다.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오. 두 가지나 되나요?"
그 부분이 놀라운 건가.
"첫 번째 방법은 여기서 기다리는 겁니다. 누군가 우리를 찾을 때 까지요."
글린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두 번째 방법은 계속 올라가는 겁니다."
이번에는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버린다.
"정말 그 방법이 필요할까요?"
"네. 필요합니다. 저는 두 번째 방법을 추천할 겁니다."
글린다가 깊은 한숨을 내쉰다.
"왜요?"
"여기 있다가는 아무것도 안 될 거 같거든요."
감이 팍 온다. 백룡 기사라는 인간들이 우리를 구하려면 보름은 걸릴 거라는 게. 구체적인 숫자를 아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 인간들. 분명 백룡을 만난 다음에야 실종자 수색을 할 테니까. 내가 보아온 백룡 기사는 그런 조직이다.
글린다는 한숨을 쉬고 나를 바라본다. 표정에는 짜증이 섞여 있지만, 의문은 없다.
"이유는 안 물어봐요?"
"백룡 기사가 실종자 탐사를 하려면 한참 남았을 테니까?"
알고 있네. 하긴 나랑 비슷하게 백룡 기사를 보아왔을 테니.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고 한숨을 내쉰다.
"움직일 준비나 하죠. 가만히 있다고 폭풍이 멈추지도 않을 테고."
글린다는 벗어두었던 옷을 입기 시작한다. 망토 일곱 개를 전부 벗었고, 여섯의 상의 중 둘도 벗었기에 입는 것에 시간이 좀 걸린다.
"다 입었어요."
"저도 준비할게요."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침낭을 정리한다. 글린다의 침낭도 같이. 그러는 동안 글린다는 모닥불을 밟아 꺼트린다.
각자 배낭을 짊어진다. 밧줄로 서로의 몸을 묶는다. 침을 삼키고 동굴 입구를 바라본다. 쏟아져 내리는 눈송이가 보인다.
"어제보다 폭풍이 강해 보이는데."
글린다가 중얼거린다. 나도 동감한다. 눈송이가 땅과 수평으로 휘날린다. 얼마나 바람이 강한 거지.
"내일 갈까요?"
"그렇게 했다가는 평생 여기 있게 될 겁니다."
"그렇겠죠."
글린다가 깊은 한숨을 내쉰다. 정말 싫어하는 표정이다. 그렇다고 어쩌겠는가. 그냥 걸어가야지.
앞으로 한 발을 내디딘다. 또 한숨을 쉰 글린다가 내 뒤를 따라온다. 두 사람의 발소리가 동굴 안에 울려 퍼진다. 금방 바람 소리에 묻혔지만.
"으으. 역시 밖은 추워요."
나오자마자 글린다가 불만을 토로한다. 차라리 이 상태가 났다. 곧 추위에 입을 다물어 버릴 테니까.
폭풍을 뚫고 앞으로 걸어나간다. 얼음에 가까운 눈을 밟으며 움직인다. 배낭을 멘 어깨가 너무 무겁다.
두 시간 정도 걸었다. 눈보라가 점차 심해진다. 그래도 걸음을 멈출 수 없다.
"글린다 양. 괜찮나요?"
"네."
짧은 대답만이 돌아온다. 상당히 지쳤구나. 휴식처를 찾아야겠다. 이번에는 쓰러지기 전에 찾았으면 좋겠는데.
다행인 건. 왠지 이제 휴식처를 찾는 방법을 찾았다는 느낌이 든다는 거지. 에스나와 함께 인테아를 올랐던 경험이 도움된다.
"저쪽입니다."
직감을 따라 방향을 잡는다. 여태까지 나는 감이 좋았던 편이고, 지금도 그 감을 믿는다.
글린다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나를 따라온다. 물어보기 힘들어한다는 게 느껴진다. 평소라면 근거 없는 주장에 화를 냈을 테니까.
방향을 잡고 폭풍을 뚫고 간다. 멀리 흐릿하게 절벽 같은 것이 보인다. 푸르게 보이는 것이 얼음 절벽으로 보인다.
"우와."
나도 모르게 감탄이 새어 나온다. 누군가 깎아서 만든 듯한 얼음 절벽. 얼마나 높은지 꼭대기가 보이지 않는다. 눈보라가 그치면 보일 거 같기도 하고.
절벽을 따라 걸음을 옮긴다. 큰 벽이 옆에 있으니 바람도 약해진다. 바람이 약해지니 글린다의 거친 숨소리도 잘 들리기 시작한다.
슬슬 정말 위험해졌다. 글린다의 발소리가 무겁다. 호흡은 더 무겁고. 휴식처가 필요하다.
"마법사님. 제가 죽으면 맥한테 미안했다고 전해주세요."
다행히 이번에는 쓰러지지 않는다. 그냥 저 말이 입에 붙은 모양이다. 핀잔을 줄 힘도 없다. 그냥 다리를 움직인다.
"휴식처 찾았으니까 그냥 조용히 계세요."
"에? 진짜요?"
그럼 진짜지. 설마 가짜겠어? 저 앞에 얼음 절벽 중간에 작은 동굴이 보인다. 조금만 더 걸으면 된다.
"자. 빨리 걸읍시다."
다리에 힘을 주고 앞으로 걸어간다. 글린다도 기운을 좀 차렸는지 호흡이 안정된다. 역시 희망이란 것은 좋은 것이다.
"얼음 동굴이네요."
"그래도 바람은 막을 수 있으니까요."
얼음 절벽의 얼음 동굴은 그리 깊지 않다. 사람 셋 정도가 겨우 들어갈 크기. 오래 쉬기에는 좋지 않다.
글린다는 동굴 깊숙이 들어가 주저앉는다. 바닥이 불편한지 계속 뒤척인다. 나도 동굴의 입구 쪽에 자리를 잡는다.
"조금만 쉬었다가 다시 움직일게요."
"우우."
불만이 있는지 글린다가 볼을 부풀린다. 그래도 소용없다. 여기서 잠을 잘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동굴의 입구로 들어오는 바람이 기이한 소리를 낸다. 겨울의 울음소리라고 해도 믿을만한 소리다.
"불은 안 피우나요?"
추운 건가. 글린다가 코를 훌쩍이며 질문을 던진다. 살짝 주변을 둘러본다.
동굴은 내가 똑바로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작다. 이런 곳에서 불을 피우면 천장이 녹아내릴 거다.
"너무 작고 얼음 동굴이라 위험합니다."
"어쩔 수 없네요."
글린다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자기 몸을 끌어안는다. 춥긴 추운가 보군. 좀 더 제대로 된 휴식처를 찾아야겠다.
"이제 슬슬 다시 움직입시다."
"벌써요?"
"30분 쉬었거든요?"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밧줄을 잡아당긴다. 글린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쉰다. 정말 나가기 싫은지 행동이 느려터졌다.
"얼른!"
"알았어요."
내 재촉에 동작을 빠르게 한다. 글린다가 자리에서 일어난 걸 확인하고 동굴 밖으로 걸어나간다.
들어오기 전보다 폭풍이 약해져 있다. 그렇다고 해도 역시 바람은 강하다. 눈의 장막을 뚫으며 걸음을 옮긴다.
그런 식으로 이틀을 걸었다. 폭풍을 뚫고 걷다가 휴식처에서 쉬고. 다시 얼음을 밟으며 걷다가 휴식처에서 자고.
글린다는 점점 말이 없어지고, 나도 말이 없어지고. 힘들어서 죽을 거 같으면서, 계속 걸어가는 그런 날의 반복.
힘들고, 짜증 나고, 다 때려치우고 싶고, 그냥 앉아서 쉬고 싶은 그런 일들의 반복. 진짜 싫다.
"으아! 이제 더는 못 걸어!"
그렇게 사흘째 밤. 모닥불 옆에 글린다가 드러눕는다.
"일단 오늘은 자고 내일 생각하세요."
"내일도 안 돼요! 절대 안 움직일 거야!"
왜 저렇게 떼를 쓰는 걸까. 애도 아니고. 한숨을 쉬고 모닥불을 바라본다. 바깥의 폭풍과 달리 따뜻한 기운을 내뿜는 불길. 솔직히 나도 그냥 이러고 있으면 좋겠다.
"배고파요."
글린다가 누운 채로 나를 바라본다. 진짜 너무하다. 내가 하인도 아니고. 한숨을 쉬고 배낭에서 육포를 꺼낸다. 이 동굴에는 식량이 놓여 있지 않다.
"또 육포에요?"
"그럼 뭘 더 바래요? 그냥 먹어요."
불만 따위는 접수하지 않는다. 육포를 글린다에게 던져준다. 글린다는 누운 채로 손만 뻗어 육포를 낚아챈다.
"우리 얼마나 더 움직여야 해요?"
글린다는 육포를 질겅이며 질문을 던진다.
"나흘 정도?"
"으에. 싫다."
육포를 삼킨 글린다가 중얼거린다. 나도 더 움직이기 싫다. 그런데 이러고 있을 수가 없단 말이지. 계속 움직여서 정상에 가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
"그냥 여기서 기다리면 안 돼요?"
"그럼 누가 구하러 온답니까?"
"예. 제가 구하러 왔습니다."
어?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가 들려온 입구 쪽을 바라본다. 하얀 갑옷을 입은 기사가 동굴 안에 들어와 있다.
"에스나?"
"네. 에스나입니다."
에스나다. 왜 여기 있지? 놀라서 말을 잇지도 못하겠다. 글린다도 비슷한 심경인지 누운 상태로 움직이지 않는다.
"왜 그런 표정입니까? 구하러 왔는데 좀 더 기뻐해야 하지 않습니까?"
내 옆으로 다가온 에스나는 불가에 자리를 잡는다.
"아니. 좀 놀라서. 구하러 올 줄 몰랐거든."
"여러분이 낙오된 순간부터 찾아 헤맸습니다."
진짜로?
"그런데 낙오된 건 성채 부근인데 왜 여기서 발견되십니까?"
에스나가 투구를 벗는다. 얼굴에는 짜증이 약간 섞여 있다.
"솔직히 구하러 올 줄 몰랐거든."
"백룡을 만난 다음에 수색할 줄 알았지."
어느세 몸을 일으킨 글린다가 내 말을 보충해준다.
"원래는 그 방법이 맞습니다."
역시나. 백룡 기사라면 그럴 줄 알았지.
"하지만 그 방법은 낙오자가 백룡 기사일 때입니다."
"그럼 다른 사람들은?"
글린다의 질문에 에스나가 입을 다문다. 슬쩍 고개를 돌려 모닥불을 바라본다.
"백룡 만나러 올라갔지?"
"예. 저 혼자 여러분을 찾고 있었습니다."
진짜 너무한 집단이다. 손님을 찾는 일에도 적극적이지 않다니. 에스나도 우리를 알고 있으니 찾으러 다닌 거다.
"중요한 건 아니니 깊게 생각하지 맙시다."
에스나가 말을 돌린다. 뭐. 더 알고 싶지도 않고. 중요한 게 아닌 것도 사실이니 넘어가자.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일단 여기서 잘 겁니다. 여러분을 찾느라 며칠간 잠을 설쳤습니다."
고생했네. 칭찬해주지는 않을 거지만.
"그다음은?"
"어떡하겠습니까. 백룡의 길을 올라야 합니다."
"아. 싫다."
글린다는 다시 뒤로 드러눕는다. 에스나는 그런 글린다를 바라보며 한숨을 쉰다.
"뭐. 왜 그렇게 봐."
"아무것도 아닙니다."
에스나는 고개를 돌려 모닥불을 바라본다.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못 하다니. 불쌍한 에스나. 맥 다음으로 불쌍한 사람이다.
뭐. 그건 에스나가 알아서 할 일이지.
"일단 우리도 자자. 내일 움직여야 하잖아."
"알겠습니다."
말을 마친 에스나가 그대로 뒤로 쓰러진다. 바로 자는 거야? 진짜로?
에스나의 얼굴 앞에서 손을 살짝 흔들어 본다. 반응이 돌아오지 않는다. 순식간에 잠들어 버렸다.
며칠간 잠을 설쳤다고 했지. 진짜 고생이 많았다. 그래도 칭찬은 안 해줄 거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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