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5. 5막 4장 - 즐거운 야영 (1) | Isaac
푸른 풀밭을 베개 삼고
불어오는 바람을 이불 삼아
저 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은 수면등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는 나를 위한 자장가
- 시, `즐거운 야영` 中 발췌 -
"오늘은 뭐 할 거야?"
"재료 보고 정하려고."
마구간에 해골 말과 에스나의 말을 묶고 식당으로 왔다. 맥은 자연스럽게 냉장고를 향해 다가간다. 사용에 익숙해진 모습이 왠지 불쌍하게 보인다.
글린다는 식탁에 앉자마자 앞으로 엎어진다. 표정에 생기라고는 없다. 배가 고프면 저렇게 되는구나.
"오늘은 무슨 요리입니까?"
"아직 안 정했어요."
방에 먼저 들러 옷을 갈아입은 에스나가 나타난다. 간단한 바지와 웃옷. 에스나는 그대로 글린다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글린다. 평원을 달리는 건 괜찮았습니까?"
글린다는 엎드린 채로 고개만 돌린다.
"나쁘지는 않았어요. 해골 말이란 거 타고 다니기 편하더라고요."
마법 덕분이지. 평범한 말을 탔다면 내 허리는 진작에 박살 났을 거다. 안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맥도 괜찮았지?"
"허리도 안 아프고 좋더라."
냉장고에서 재료를 꺼내던 맥이 대답한다. 꺼내는 것은 고기와 각종 채소. 치즈와 우유도 꺼내고 있다. 뭘 만들 생각이지?
맥의 요리가 시작된다. 불을 사용하고, 칼을 사용한다. 요리에는 큰 관심이 없기에 집중해서 보지 않았다. 나는 음식이 좋은 거지 요리가 좋은 게 아니다.
"오늘은 크림 스튜."
고소한 냄새가 나는 스튜가 각자의 앞에 놓인다. 스푼으로 살짝 뒤적거려보니 고기도 들어가 있다.
에스나도 글린다도 자기 앞에 놓인 그릇을 보며 입맛을 다신다. 확실히 맛있어 보인다. 맥이 내 옆의 의자에 앉자 식사가 시작된다.
"맛있네. 예전보다 실력이 더 는 거 같다?"
한 숟갈 떠먹은 글린다의 말에 맥은 멋쩍게 웃는다.
"그냥 재료가 좋아서 그래."
재료가 좋긴 하지. 냉장고에는 항상 최고의 재료가 나타난다. 끊기지 않고. 원리는 모른다. 그냥 원래 그랬다.
그래도 맥의 요리실력이 좋긴 하다. 요리의 요자도 모르는 내가 만든다면 탄 고기 정도가 전부겠지.
맥의 요리실력에 마음속으로 감탄하며 숟가락을 움직인다.
"식사 끝."
배가 불러 기분이 좋아진 글린다가 소리친다. 글린다는 홀로 다섯 그릇을 먹어치웠다. 참고로 에스나는 세 그릇이다.
글린다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무너져 내린다. 표정이 반쯤 풀려있다. 다음에 글린다가 화를 내면 먹을 거로 달래보자. 단 거 좋아하겠지?
맥은 자연스럽게 그릇들을 치우고 있다. 설거지까지는 필요 없지만, 싱크대에 담아는 둬야 마법이 발동하거든.
"맥. 디저트는 없어?"
그렇게 먹어놓고 디저트를 찾다니. 놀라운 식욕이다.
글린다는 의자에 늘어진 채 맥을 바라본다. 맥은 살짝 웃으며 나를 바라본다. 여기 주인은 나였구나.
"찾아보면 과일 정도는 있을 거야."
내 말을 듣고 냉장고를 열어보는 맥. 안쪽을 뒤적이더니 양손 가득 과일을 꺼내온다.
사과, 사과, 사과, 사과. 전부 다 사과네. 맥은 품에 안고 있는 사과를 식탁 위에 올려놓는다. 사과가 산더미처럼 쌓인다.
"사과밖에 없는 겁니까?"
에스나가 표정을 찌푸리며 질문한다. 사과 별로 안 좋아하나?
"글린다가 좋아해서요."
맥이 웃으며 머리를 긁적인다. 양 볼이 빨개지고 있다. 글린다는 그런 것 따위 신경 쓰지 않지만.
글린다는 깎지도 않은 사과를 입에 물고 있다. 들고 있는 사과를 순식간에 해치운다. 사과를 좋아하긴 하나보다.
"왜요?"
내 시선을 느꼈는지 다음 희생과를 정하려는 손을 멈춘다.
"아닙니다. 얼른 드십시오."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다시 사과를 집는다. 나를 노려보면서고 사과를 씹는 입은 멈추지 않는다.
"두 분도 얼른 드세요."
글린다의 식욕을 구경하는 동안 맥인 그 많던 사과를 전부 먹기 좋게 잘라놨다. 칼이랑 접시는 언제 가져온 걸까.
에스나는 사과를 뜯어 먹는 글린다를 보고 한숨을 쉰다. 글린다는 그런 에스나를 노려보고.
"그렇게 예의 없게 먹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그냥 맛있게 먹으면 되는 거 아닌가요?"
"귀족이라면 나름의 예법을 준수해야 합니다."
"저 이제 귀족 아닌데요?"
왜 싸우는 거냐. 나랑은 별 상관없지만. 두 사람이 싸우든 말든 나는 사과나 집어먹자.
맥도 두 사람의 눈치를 보며 사과를 먹기 시작한다. 예전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 텐데. 이 생활에 조금 익숙해진 모양이다.
"최소한 잘린 사과를 드십시오."
"자르든 자르지 않든 똑같은 거 아닌가요?"
"주변 사람이 보기에 좋지 않습니다."
"제가 맛있게 먹으면 되지. 주변 사람 시선을 왜 신경 쓰나요?"
에스나는 글린다가 사과를 들고 먹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거 같다. 그것과 별개로 나와 맥은 잘린 사과를 잘 먹고 있다.
"그냥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왜 그러시는데요."
글린다의 말에 에스나가 호흡을 가다듬는다. 진정하려는 듯 가슴에 손을 올린다. 눈을 감고 집중한다. 글린다는 묵묵히 에스나를 바라본다.
그것과 별개로 나와 맥은 계속 사과를 먹고 있다. 맥은 조금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다. 가끔 에스나와 글린다를 곁눈질한다.
심호흡한 에스나가 입을 연다. 다시 닫는다. 아직 어떤 말을 할지 못 정한 건가. 참고로 사과는 달고 맛있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이게 뭡니까! 야영이 아니라 탑을 만들어서 쉬다니!"
왜 그게 불만인 거지. 편하게 쉬면 좋잖아. 입에 있는 사과를 삼킨다. 다음에 먹을 조각을 손가락으로 집는다.
"아이작. 대답해보십시오. 이게 정상적인 여정이라고 보십니까?"
"나?"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킨다. 나는 갑자기 왜 끼는 건데?
"자고로 여행이라 하는 것은 비박이나 야영을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글린다도 맥도 멍한 표정으로 에스나를 바라본다. 그 둘도 지금의 에스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제 로망이! 제 로망이 산산이 깨져버렸단 말입니다!"
그게 문제였군.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발언이다. 에스나는 그대로 책상에 엎어진다.
"으아아! 처음 나온 여행이었는데! 제가 계획한 게 다 망가졌습니다!"
음. 내 잘못인 거지? 그런 건가? 잘 모르겠다. 그저 머리를 긁적일 뿐이다.
식탁에 엎어진 에스나에게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설마 울고 있는 거야?
"어떻게 좀 해봐요."
글린다가 작게 말을 걸어온다. 손가락으로는 에스나를 가리킨다.
"저보고 어떻게 하란 말씀이세요."
전혀 감이 안 잡힌다. 어떻게 하란 말인가. 내가 누굴 위로해봤어야 알지. 내 질문에 글린다도 약간 곤란한 표정을 짓는다. 별다른 생각이 없는 건 마찬가지구나.
에스나는 계속 훌쩍거린다. 확실히 어떻게 하긴 해야 한다. 에스나는 우리 일행의 길잡이. 길잡이가 저 모양이면 여행 자체에 무리가 생긴다.
"바라는 걸 들어주는 건 어떨까요?"
맥이 의견을 내놓는다. 나쁜 생각은 아닌 거 같다. 그런데 에스나가 바라는 게 뭐지? 거기서 막혀 버리네.
조금 전에 시끄럽게 외쳤던 말을 떠올리자. 모든 정답은 그곳에 있다. 있겠지?
에스나는 로망을 입 밖에 꺼냈다. 계획한 게 있다고 했다. 비박을 원하는 것처럼 말했다. 마법사의 탑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가?
"조금 생각난 게 있는데."
글린다에게 손짓을 보내 가까이 다가오라고 한다. 글린다는 옆에서 울고 있는 에스나를 바라보다 내 곁으로 다가온다.
"뭔가요?"
에스나를 살짝 바라본다. 식탁에 엎드려서 일어날 생각을 안 한다. 들리지는 않겠네. 들려도 별 상관은 없지만.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문제는 이 방법을 쓰면 글린다 양과 맥이 희생해야 합니다."
"희생이요?"
맥은 희생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들지 않나 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맥보다는 에스나가 더 중요한 사람이니 맥이 희생하는 수밖에.
글린다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고민을 한다. 눈썹을 꿈틀거리며 곰곰이 생각에 빠진다.
"어떤 방법인지 먼저 들어보죠."
좋은 생각이다. 뭔가를 약속하기 전에는 자세한 내용을 알아야지. 유리카쨩이 계약서를 잘 읽지 않아서 출판사와 노예계약을 했다는 기억이 떠오른다.
"에스나는 여행에 로망이 있는 거 같습니다."
"그런 말을 했죠."
"그리고 지금 이런 방식의 여행에 불만이 있는 것 같습니다."
글린다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맥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
"마법을 사용하는 편안한 여행 말입니다."
"편한 건 좋은 거 아니에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기는 하는데···."
아직도 엎어져 있는 에스나를 바라보며 한숨을 쉰다. 맥도 글린다도 에스나를 바라본다.
"에스나는 야영에 로망을 품고 있는 모양입니다."
"귀찮네요."
"그러게요."
"정말 이게 뭐하는 짓인지."
셋이 동시에 한숨을 내쉰다.
"마법사님의 생각은 야영하자는 거죠?"
"최대한 마법을 쓰지 않고요."
"되게 불편할 거 같네요."
"마법이 없으면 불편하기야 하겠지."
그래도 에스나가 저 상태로 있는 것보다는 나을 거다. 나름 우리 일행의 주요 전력이기도 하니.
"저는 찬성. 사실 야영도 좀 해보고 싶었어요."
여자들은 다 야영에 로망을 품고 있는 건가. 글린다의 눈이 기대로 빛난다.
맥의 표정은 별로 좋지 않다. 야영하고 싶지 않은가 보다. 사실 나도 야영은 좀. 편한 마법이 있는데 웬 야영.
나와 맥이 눈을 잠시 마주친다. 둘 다 같은 생각일 게 뻔하다.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우리가 좀 희생하자.
"그럼 야영을 하는 거로 하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좋아! 야영이다!"
힘이 없는 맥의 목소리. 그것과는 다르게 글린다는 손까지 들어 올리며 즐거워한다.
그럼 이제 에스나를 깨워볼까? 흑흑 소리를 내는 에스나에게 다가간다. 옆에 서서 가볍게 어깨를 두드린다.
"에스나?"
에스나가 고개를 들어 올린다. 눈이 부어있다. 진짜 울었어? 나는 소리만 내는 줄 알았는데.
"무슨 일입니까."
에스나는 뺨에 남아있는 눈물을 닦는다. 그냥 에스나에서 눈물을 흘리는 에스나로 레벨 업 했다. 갑자기 난이도가 올라가 버렸다. 우는 여자는 불편한데.
"음···. 야영할래?"
"야영이요?"
훌쩍거리면서도 대답은 잘도 하고 있다. 에스나는 아직 눈가에 남아있는 눈물을 닦아낸다.
"정말 야영 하는 겁니까?"
"원한다면 마법사의 탑은 안 쓸게. 정말 필요할 때는 빼고."
"정말입니까?"
"응. 정말이야. 맥이랑 글린다도 동의했어."
에스나가 두 사람을 바라본다. 글린다는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준다. 맥은 어색하게 웃어 보인다.
"야영입니까."
이걸로는 부족한가. 에스나는 엎어진 식탁에서 일어나긴 했지만, 뭔가 기운이 없어 보인다. 어떻게 하지?
맥과 글린다와 시선을 맞춘다. 눈빛으로 열심히 대화를 나눈다. 뭔가 말하고 싶은 건지 글린다가 손을 이리저리 휘젓는다. 뭐라고 하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다. 대충 생각나는 대로 행동하자.
"야영이야. 야영! 여행의 로망!"
에스나의 어깨가 움찔거린다. 좋아 반응이 있다.
"푸른 풀밭에 누워서 별을 바라보는 야영! 사냥한 고기를 동료들과 나눠 먹는 야영!"
"야영."
좋아. 눈빛이 돌아왔다.
"그래! 야영이야!"
"그렇군요! 야영입니다!"
에스나에게 불이 붙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팔을 위로 뻗는다.
"야영입니다! 재미난 야영입니다!"
이런 걸 저세상 텐션이라고 부른다지. 따라가기 힘들다.
어찌 되었든 잔뜩 신이 난 에스나와 잔뜩 기대 중인 글린다와 한숨을 축축 내쉬는 맥과의 야영이 시작된다. 인원부터 제대로 된 야영을 하기 글렀다.
- 작가의말
푸른 풀밭을 베개 삼고
불어오는 바람을 이불 삼아
저 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은 수면등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는 나를 위한 자장가
숨을 들이쉬고
숨을 내쉰다
신선한 공기가 폐를 가득 채우고
몸을 두둥실 띄어 올리지
이불과 침대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이곳으로
오늘의 꿈나라는
저 하늘 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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