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학교에 관심 받고 싶은 변태 한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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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신
작품등록일 :
2014.01.09 0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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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25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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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4.26 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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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쪽

26화 - 2

DUMMY

그 뒤로 며칠, 바쁜 삶이 이어졌다.

“흥흥! 전혀 모르겠는걸!”

“아니…… 좀 대본대로 대사를 말해야지. 즉흥으로 하면 어떡해.”

“진짜 모르겠는걸!”

“아하하하하하!”

리유는 약간 얼굴을 붉히며 새초롬하게 고개를 홱 돌리며 말한다. 이것이 새침한 소녀를 연기하는 것이라면 참 잘한 것이겠지만, 그게 아니니 문제지. 방금 전 대목의 대사는 분명 ‘저와 도련님은 이루어질 수 없는 운명입니다’ 였는데. 너무 엄청나게 현대적이어서 무실점으로 절로 말문이 막히잖아. 끓어오르는 분노를 누르고 얌전한 말투로 말하니 리유는 부끄러워서 얼굴이 빨개져선 톡 쏘듯 말하고 TV 구석에 숨는다. 그 귀여운 모습에 연극을 보고 있던 다른 여자애들이 깔깔 웃는다. 무슨 강아지냐, 장난 치고 숨어 버리게! 귀엽긴 하지만 진행이 전혀 안 되니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뭐, 이런 식이다. 리유, 조금의 예상으로도 연기 같은 건 전혀 못할 것 같다 생각했는데 정말 못한다. 엑스트라이거나, 소품 담당이거나 해서 구경하고 있는 여자애들의 시선만으로 절로 얼굴을 붉히고 의식해버린다. 뭐, 사람들 앞에 잘 서 버릇 해보지 못 했으니까, 그도 그럴 것 같다. 그래도 이건 좀 심하잖아. 낯가림 심한 어린애도 아니고. 고등학생인데.

“나↗는↘ 그런 것을 원↗치↘않→소↘, 춘향.”

“아하하핳하하핳하하!!”

“X나 못해!! 캬하하하하하!!”

“……죄송합니다.”

물론 내가 누구를 뭐라고 할 처지는 아니다. TV에 나오는 아이돌 발연기에 비할 바가 아닌 화려한 내 연기실력. 아이돌은 외모라도 예쁘니까 볼만이라도 하지. 나의 심금을 울리는 엄청난 연기 실력에 여자애들은 배를 잡고 웃으며 자지러진다. 정희는 미친 듯이 웃다 아예 고꾸라져 넘어진다. 그래도 좋다고 깔깔 웃는다. 얼굴이 확확 달아오른다. 그 정도야, 나?! 엄청 창피해!! ……음, 핑크색이네. 아니, 그냥 그렇다고.

연극은 대략 그런 식으로 연습이 진행됐다. 우선은 리유가 워낙 춘향이에 안 어울리는 배우다보니 작가 겸 연출 겸 감독인 채영이가 연극 각본을 조금 고쳤다. 그 결과, 우리 연극의 춘향의 이미지는 상당히 바뀌었다. 내가 아는 성춘향의 모습은 교양있고, 기품있고, 아가씨 같고, 엄청 예쁘고, 미래를 약속한 남자를 기다리고 수청을 하지 않는 지고지순한 아가씨 같은 느낌이었다. ……엄마도 퇴기고 춘향이도 기생이라 이미지랑 현실이랑 안 맞는 것 같은 건 기분 탓이겠지.

뭐, 이미지로 놓고 보자면 성빈이가 하면 가장 적절할 것 같은 느낌? 좀 기가 센 느낌이지만, 미모가 출중하니 희세도 나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미래는…… 좀 아니지. 4차원 변태 부녀자 춘향이(?) 만들 일 있어. 리유는 어떻게 해도 아이 같은 이미지니까, 채영이는 대본 상의 춘향이를 좀 멍하고 순수하고 귀여운 느낌으로 바뀌었다. 적어도 대본으로 읽을 때의 느낌은. 고쳤다는 대본을 슥 읽어 봤을 때,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 이 정도라면 리유도 충분히 살릴 수 있겠어, 하고. 하지만…….

“그, 그럼, 서, 서, 서방님, 저, 저, 저랑 어, 어, 어, 언약을……!”

“……언어장애?”

“아, 아니야!! 떠, 떨리는 춘향이의 마음을 극적으로 표현한 거야! 연기거든!!”

“누가 봐도 긴장해서 그런 것 같은데.”

“아, 아니……!! 아니야!!”

리유는 내 눈도 못 마주치고 엄청 더듬거리며 말한다. 주위 애들의 시선을 잔뜩 의식하고 있으니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잘 안 되겠지. 나도 창피하지만, 리유는 정말 심각한 수준이다. 도대체 진행이 되지를 않는다. 대놓고 지적을 하니 리유는 평소 잘 부리지 않는 자존심까지 세우며 새침하게 말한다. 피식 웃음이 나올 만큼 귀엽다. 힐끔 채영이를 보니 채영이는 고개를 내저으며 한숨을 푹 쉬고 있다. 음. 충분히 이해가 가. 이 정도 연기 실력이라면. 나라도 잘 해야 어떻게 리드할 수 있을텐데.

“리유야, 다른 애들 보지 말고, 신경 쓰지 말고 나만 봐. 사람 없는 거야, 나만 보고 말해? 알았지?”

“으, 응…….”

“오~~ 정웅도 멋~있~다~!! 방금 대사 겁내 멋있었어! ‘다른 사람 보지 말고 나만 봐.’ 꺄아아~~~!!”

“시끄러, 방자년아.”

“아이구, 도련님 말씀이 너무 심하신 거 아닙니까!”

‘나라도 잘 해야지’ 하는 마음에 리유에게 다가가 양 손을 리유 양 어깨에 놓고 리유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리유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다른 여자애들이 ‘우우~~’ 하는 괴상한 소리를 내며 나를 쳐다본다. 정희는 신이 나서 잔뜩 놀린다. 연극 연습 하며, 정희의 이런 장난을 많이 맞닥뜨릴 때가 많다. 정희가 방자라서. 지나치게 활달하고 산만한 정희라 충분히 배역을 잘 소화하는 느낌이다.

“그, 그럼 소녀…… …………!! 아아아아~~!!”

“뭐, 뭐야, 왜.”

“에에에에~~~”

“아주 둘이 참기름 공장 취직하겠네, 하겠어!”

“했네, 했어!”

“뭘!! 무슨 개소리야!!”

문제의 키스신이 있는 부분. 물론 정말 키스를 하는 건 아니고, 고개를 확 젖혀 적절하게 키스 하는 시늉만 하는 부분이다. 조선시대에 왜 이몽룡이 화끈하게 서양식으로 키스를 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뭐,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아니, 애초에 아이 같은 리유에게 뭘 기대하거나 상상할 건 아니잖아. 리유의 대사가 끝나면, 내가 ‘춘향……!’ 하고 늑대처럼 달려들어 입술을 훔치는 장면이 이어진다.

하지만 리유는 수줍어하는 소녀같이 눈을 피하며 잘 연기하다 힐끔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더니 얼굴이 화아악 달아오르며 팔을 휘저으며 다시금 TV에 숨는다. 무언가 상상한 모양이다. 남이 봐도 저렇게 동요하는 게 다 읽힐 정도라니, 리유는 역시 생각이 너무 쉽게 읽히는 타입이다. 리유가 그렇게 반응하니 나까지 살짝 얼굴이 빨개질 정도. 보고 있던 여자애들에게 이만큼 좋은 먹잇감이 없다. 정희를 주축으로 수군대며 나에게 야유하듯 말한다. 정희는 수위가 꽤나 쎈 섹드립까지 친다. 나는 잔뜩 화를 내며 그렇게 하는 여자애들에게 신경질을낸다.

“네 이년! 수청을 들지 않겠다는 말이냐?!”

“소, 소녀…… 이미 지아비가 있는 몸이옵니다!”

“어허! 발칙한 년, 천한 기생 주제에 어느 안전이라고 정조를 논하는가! 기생의 정조가 정조라 할 수 있는가!”

이어지는 장면은 문제의 변 사또의 수청 요구 장면. 희세는 머리를 단정하게 한데 묶고 앞머리와 옆머리는 조금 늘어뜨린 체 연기하고 있다. 공부도, 운동도 잘하는 희세인데 연기도 잘한다. 위협적으로 눈을 부릅뜨고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는 게 능숙하고 자연스럽다. 리유처럼 애들을 의식해서 잔뜩 부끄러워 하거나 나처럼 이상한 음색으로 말하거나 하지도 않는다. 다만…… 변 사또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수려한 희세의 외모가 무언가 이상한 느낌을 받게 한다.

변학도라기보단 예쁘게 생긴 미소년이잖아, 아무리 봐도. 물론 지금은 단순히 머리를 묶기만 해서 그냥 예쁜 미소녀지만. 암만 분장을 해도, 너무 예쁘니까 변학도같이는 안 나올 것 같다. 게다가, 중년 남성이 화내는 꼬장꼬장한 느낌이 아니라, 사극에서 표독스러운 첩이 역정을 내는 것 같은 무서운 느낌이 오히려 강하다. 악역은 악역인데, 뭔가 무서워.

“……그럼 전 걸레년인가요?”

“……! 무슨 소리야, 갑자기!”

“그, 그치만! 춘향이 불쌍하잖아, 춘향이가 얼마나 귀한 년인데! 그렇게 막 대주고 다니는 년 아니야!”

“그, 그만해 멍청아! 쬐끄만 게 못하는 말이 없어!”

“……아하하.”

리유는 감정이입을 너무 많이 했는지 약간 서글픈 눈망울로 희세를 보며 말한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단어 선정에 희세는 깜짝 놀라 얼굴을 붉히며 당황한다. 그러더니 힐끔 나를 보고 더욱 얼굴을 붉히며 리유에게 쏘아 붙인다. 리유는 전혀 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 큰 소리로 우긴다. 희세는 더욱 큰 소리로 말했다. 아하하, 최악인데. 잘 하랄 때엔 애들 의식하면서 전혀 대사도 못 하던 애가, 이번엔 쓸데없는 데에서 감정이입해서 그러네.

“이 년이, 그래, 너하고 어미하고 같이 죽자. 어디 동네방네 다 떠들고 다녀봐!! 이 미친년아!”

“으앙아아아!!”

성빈이는 얼굴이 빨개져서 정말 화난 아줌마처럼 실감나게 소리친다. 아줌마 특유의 자식을 혼내는 듯한 목소리와 모습을 너무 잘 살렸다. 성빈이는 월매, 춘향이 엄마다. 춘향이가 이몽룡과 언약을 했다는 말에 저렇게 화를 내는 대목. 희세 못지않게 명연기를 보여주는 성빈이다. 다만 희세와 마찬가지로 월매라고 하기엔 비주얼이 너무 뛰어난 게 흠이지만. 뭐, 희세보다는 낫다. 성별이 다른 캐릭터는 아니잖아. 월매는 퇴기니까, 혹시 또 몰라? 엄청난 동안에 미녀일지도. 좀 무리수인가.

“어휴, 저런 거지새끼.”

“어디 일도 안 하고 밥을 빌어, 밥을! 훠이, 꺼져라!”

지나가는 아낙 1을 연기하는 미래. 나하고 별다를 게 없는 발연기다. 하지만 뭐, 말 그대로 지나가는 조연이니까 괜찮으려나.

“……!”

“아하하. 끝!”

“…….”

마지막 암행어사 출두야! 하는 장면까지 어떻게든 해 보고 끝이 났다. 몇 시간이나 걸린 것 같다. 채영이는 묵묵히 애들을 쳐다보며 한숨을 쉰다.

“다들 잘 했어.”

“……정말?”

“연습하면 되겠지, 한 번 해본 거니까 이건.”

“응.”

“으응.”

채영이의 말에 나는 신뢰가 가지 않아 삐딱하게 물어봤다. 채영이는 어두운 표정으로 답한다. 답답하겠지, 감독으로서. 이 정도 연기력에 이 정도 진행력을 가진 집단으로 한 연극을 펴는 건, 참 신경 쓰이는 일이겠지. 채영이가 상상하고 쓴 각본은 이런 연극이 아니었을텐데.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지금은 다들 대사도 다 못 외우고, 뭐가 뭔지 전혀 모르지만 그냥 한 번 처음부터 끝까지 해 봤다. 나 역시 초반부만 조금 대본을 안 보고 외워서 했지, 중반부 이후론 전혀 몰라서 대본을 보고서 했다. 리유는 말할 것도 없고. 채영이는 사후강평으로 ‘조금만 다듬으면 될 것 같아. 집에서 연습해왔으면 좋겠어, 주말 같은 때에 시간 많으니까 학교 나와서 같이 연습하고 그러자.’ 하고 말한다.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응~’ 하고 말한다.


“아후, 지옥이다 지옥. 언제 다 외우지?”

“외우는 게 문제가 아니라 넌 연기가 문제야, 연기.”

“아하하…… 기분 탓이겠지.”

저녁시간, 간만에 나가서 먹는다. 밥 패밀리 다섯 명이서 나란히 걷고 있다. 고개를 내저으며 뱉는 내 말에 희세는 씨익 비웃음을 머금고 나에게 말한다. 나는 애써 그 대답을 외면하며 대답한다.

“추↘운↗향→!! 내↘가→왔↗소↗↗!!”

“내가 언제 그랬다고!!”

“아하하하하! 아주 눈을 까뒤집고 하더라? 키히히히!”

희세는 과장된 말투로 내 연기톤을 흉내내며 말했다. 왈칵 기분이 나빠진 나는 불쾌한 얼굴로 답했다. 저 정도는 아니었어, 저 정도는! 리유는 그런 나를 올려다보며 쓸쓸하게 웃는다.

“나, 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잘 하고 있는데, 애들 의식만 안 하면 괜찮아.”

“아니야, 전혀…… 엄청 못하고 있는걸…….”

내 위로에 리유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대답한다. 고민 많은 수줍은 소녀의 모습에 나는 엄청난 위화감을 느꼈다. 항상 나사 하나 빠진 것처럼 어린아이 같은 모습만 보이던 리유가, 이런 표정으로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 벌써 성장한건가, 리유?! 내 계략이 이렇게나 빨리 맞아들어가고 있어?! 잘은 모르겠지만 위화감 장난 아니다. 리유가 리유가 아니게 될 것 같다.

“그래도, 애들이 다 좋아하는 것 같아서 다행이야. 리유.”

“에, 에?! 그, 그래?”

“응, 아까도 지선이랑 선미가 ‘리유 엄청 귀엽지 않아?’ 하면서 얘기했었어.”

“에, 에에…….”

성빈이는 전혀 다른 방면으로, 연기에 대한 얘기가 아닌 애들의 반응에 대해 얘기한다. 리유는 깜짝 놀라며 엄청 얼굴이 빨개져서 제대로 대답도 못 한다. 하여간, 뭐만 하면 엄청 창피해한다니까. 그게 매력 포인트긴 하지만. 귀엽잖아.

그래, 그것도 내가 의도한 바이긴 하다. 연극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애들하고 친해지겠지─ 하고. 성빈이 말대로, 애들에게 리유의 이미지가 긍정적으로 박힌다면 확실히 좋은 거니까. 그리고 내가 볼 때도, 이 상황한 굉장히 긍정적이다. 눈치 없이 민폐를 끼치는 게 아니라, 연극 여주인공 역할을 하면 누구라도 창피할 테니까. 리유의 단점인 눈치 없음은 부각되지 않고 장점인 극강의 귀여움만 드러나니 이보다 더 좋은 친목의 장이 또 있을까. 아이들이 리유를 귀엽게 본다.

“너는 연기는 잘 하는데 뭔가 이미지가 너무 안 맞아. 역시, 변학도는 좀 그렇지.”

“그렇다니까!? 내가 봐도 이상한데, 다른 애들이 볼 때엔 얼마나 이상하겠어! 어휴, 차라리 내가 춘향이를 할 걸.”

나는 정중하게 희세의 연기에 대해 말했다. 희세는 답답한 곳을 찔렸는지 마구 내뱉듯이 말한다. 그 말에 리유는 단번에 울상이 돼 희세를 올려다보며 ‘역시 나, 그만 둘까? 히이가 하면 훨씬 예쁘고 능숙하게 잘 할 것 같으니까……’ 하며 우는 소리를 낸다. 희세는 당황해서 손을 내저으며 ‘아,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렇게 단번에 포기하면 어떡해! 여자애는 끈기 있게 맡은 바 일을 다 해야돼! 그렇게 쉽게 포기하지 마!’ 하며 말한다. ……근데 그게 여자애하고 연관이 있는 거야? 여자애면 포기를 잘해? 그런 상관관계는 또 처음 들어보는데.

“……? 왜, 뭐 할 말이라도 있어?”

“아! 아, 아니에요.”

한바탕 떠들고 있는 리유와 희세 두 사람을 보며 어이 없는 웃음을 짓다 누군가의 시선에 힐끔 고개를 돌렸다. 성빈이 옆 맨 구석에서 조용히 걷고 있는 미래. 평소라면 신이 나게 떠들며 리유든 희세든 누군가의 말에 끼어들며 개드립을 쳤을 미래인데, 오늘따라 조용하다. 거기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고 날 쳐다보고 있잖아. 의아한 눈빛으로 보고 말하니 미래는 살짝 당황한 눈초리로 얼른 내 시선을 피하며 대답한다. 이상한데.

“음? 쳐다보고 있지 않았어?”

“저, 저는 연극에서 아무것도 안 하니까~ 말에 끼어들 수가 없어서 너무 슬퍼요~ 하하하.”

“아, 그렇긴 하지. 지나가는 아낙1이니까. 근데 그것조차 연기 못해.”

“에에, 너무해요!!”

미래는 얼굴이 빨개져서 말한다. 아, 그것 때문에 뭔가 시무룩하고 기운 없어 보이는 느낌이었구나. 내 말에 미래는 눈을 질끈 감고 내 쪽으로 와 가슴팍을 투닥투닥 주먹으로 때리며 말한다. 앙탈……? 뭐, 귀여우니 넘어갑시다. 적당히 저녁을 먹고 돌아왔다.


“아니, 아니오, 나는 그런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아오!”

어두운 밤. 야간자율학습이 끝나고, 기숙사로 돌아와 점호까지 모두 마친 늦은 밤. 나는 4층 열람실 밖 휴게실에서 혼자 연극 대본을 외우며 연습하고 있다. 학기 초에 시험기간도 아닌데다 축제 준비 기간이라 흥청망청한 분위기인지라 열람실엔 고3 누나들 빼고는 사람이 별로 없다. 고3 누나들에겐 지금이 가장 긴박한 시기겠지. 축제고 뭐고 안 보이겠지. 여튼 그래도 비교적 사람이 없다보니까 연습하기가 한결 괜찮다. 밤이라 시원하고, 혼자 있으니 운치 있기도 하고.

하지만 영 외워지질 않는다. 머리가 바보여서 그런가. 하다 못해 상대역이라도 있어서 주거니 받거니 하면 훨씬 잘 외워질 것 같은데. 주입식 교육의 폐혜가 여기서도 드러나네. 난 이런 암기 같은 건 잘 못한다고. 그러니까 주입식 교육인 한국 교육 체제에서도 빛을 발하지 못하는 거지. 아아, 참 아름다운 자기합리화다.

“다시다시. 춘향! 난 그대를…… 그대를 잊지 않았소!”

“…….”

“하하. 거지같네.”

홀로 애절한 목소리로 말하다 뭔가 처량해져서 기분이 안 좋아졌다. 피식 웃으며 고개를 내젓는다.

사실, 축제 같은 거 대충 하려는 마음이었다. 근데 어쩌다보니 이렇게 대본까지 열심히 외우고 연기 연습을 하고 있는 거냐면. 리유가 안쓰러워서 그렇다. 배역 상이지만, 내가 이몽룡이잖아. 리유가 잘 하지 못하고 쩔쩔 매고 있는 걸 보면 절로 안쓰러워서, 나라도 잘 해서 이끌어 나가야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있다. 내가 잘 해서, 리유도 잘 할 수 있게 해야지. 내가 못해서 허둥대면, 리유는 얼마나 더 당황하겠어.

“연습하는 거야?”

“어, 어! 어, 어쩐 일이야?”

“으흥흥. 계단까지 쩌렁쩌렁 소리 나던데? ‘춘향!’ 하고.”

“아아, 좀 작게 해야 겠네.”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수수한 옷차림의 성빈이. 나는 못 볼 꼴이라도 보여준 것처럼 당황했다. 아니, 지금 내 옷차림이─ 위는 민소매에 아래는 축구 유니폼 바지. 집에서처럼 엄청 편한 옷차림이다. 그도 그럴게, 달리 여자애들하고 마주칠 일이 없을거라 생각했으니까! 근데 성빈이하고 마주치다니! 뭔가 좀 창피하다.

“영어 단어라도 외우려고 했는데. 이 쪽이 더 재밌어 보이는데?”

“음…… 그냥 네 갈 길을 가. 난 혼자 연습할게.”

“헤헷, 창피해서?”

“아, 아니! 창피할 게 뭐 있어, 그냥 하는 건데.”

성빈이는 피식 웃으며 말한다. 예전 같으면 되게 잔잔하고 곱게 말할 성빈이지만, 요즘 성빈이는 되게 솔직하고 담백한 느낌이라, 이렇게 적당히 나를 골리는 말도 하고 그런다. 나 역시 짐짓 아닌 척 허세를 부리며 대답했다. 성빈이는 내 대답에 말없이 미소 지으며 내 옆 테이블에 앉는다.

“상대역 해줄게. 그냥 암기하는 것보다는, 주고 받고 하는 게 훨씬 낫잖아?”

“어, 고마워. 대본 여기.”

“응.”

성빈이의 말에 나는 조금 어색하게 대답했다. 사실 그 생각, 하고 있었는데. 성빈이 쪽에서 먼저 상대역 해주겠다고 하면 물론 나야 고맙다. 본격적으로 연습을 시작했다.

“서방님!”

“춘향!”

성빈이는 단지 대본을 보고 내 상대역을 해 주는 것일 뿐인데 원래 주인공인 리유보다 훨씬 대단하게 춘향이 역할을 잘 해낸다. 그 기세에 이끌려 나도 뭔가 수월하게 대사를 마무리하고 연기할 수 있었다. 어쩌면 내가 발몽룡(?)이 되는 건 리유의 어색하고 수줍은 반응에 영향을 받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빈이의 도움 덕에 훨씬 수월하게 대사를 암기할 수 있었다.

“네가 훨씬 잘하는데?! 그냥 네가 춘향이 해라!”

“에이, 그냥 대본 보고 읽는건데 뭐.”

“그게 그냥 읽는 거면 리유는 뭐가 되. 여튼 너랑 하니까 되게 잘 맞아서 좋다.”

“응…… 히히.”

성빈이는 내 말에 잔잔하게 웃는다. 기분 좋아 하는 것 같아 나는 더욱 요란하게 미사여구로 성빈이를 칭찬한다. 빈말인 걸 알아도, 칭찬을 들으면 기분 좋잖아. 게다가 좀 과장했다 뿐이지 정말 빈말은 아니니까.

“내가 춘향이면…… 어울려?”

“응, 응, 어울리지! 솔직히 딱 춘향이라고 하면 반에서 너가 떠오르지.”

“에이…… 그건 아니지.”

“정말이야!”

성빈이는 내 말에 부끄러운 듯 살짝 얼굴을 붉히며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나는 더욱 확신을 가진 표정이 돼 떠벌리듯 입을 열었다.

“희세는 너무 성숙하고 표독스러운 느낌이라 좀 그렇고, 리유는 보시다시피 어린애 같은 느낌이라. 미래는 너무 4차원이고. 그에 비하면 성빈이 너는, 제일 잘 어울리지. 정숙한 아가씨 같은 느낌으로.”

“에에─ 너무 띄워주는 거 아니야?! 진짜, 카사노바야 카사노바?!”

“아하하. 과분합니다, 카사노바라니.”

성빈이는 내 말에 볼이 더욱 발그레 해져서 주먹으로 내 팔뚝을 약하게 친다. 그래도 기분은 좋은지 활짝 미소가 걸려 있다. 성빈이가 그렇게 웃는 모습을 보니 나 역시 기분이 좋아져 맞받아쳤다. 분위기가 굉장히 화기애애해졌다. 아아, 인간은 이렇게 성장하는 동물이구나. 처음엔 어떻게 여자애들하고 얘기도 못 하던 상남자 정웅도가, 이젠 이렇게 능숙하게 분위기를 이끌고 카사노바 소리도 듣다니. 스스로의 성장을 느끼고 절로 어깨가 으쓱하다. 성빈이와 좀 더 연습하다 나머지는 수다로 전환됐다. 자정이 넘도록 떠들다 내려가 잤다.


작가의말

안녕하세요. 좀 늦은 것 같지만 기분 탓이겠죠. 요즘은 스타 2를 하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게임 하면 글 안 쓰는데...


원래 대화 사이에 문단을 엔터로 내렸는데, 요즘은 그걸 안 하고 있습니다. 보기 불편한가요? 아니면 괜찮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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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21화. 힘내세요, 선생님 - 1 +13 14.03.06 2,228 52 18쪽
82 20화 - 4 +15 14.03.04 2,832 61 17쪽
81 20화 - 3 +17 14.03.02 3,033 52 20쪽
80 20화 - 2 +19 14.03.01 2,587 52 19쪽
79 20화. 큰 일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 1 +13 14.02.28 2,449 53 18쪽
78 19화 - 4 +27 14.02.26 2,894 118 24쪽
77 19화 - 3 +24 14.02.25 3,569 118 23쪽
76 19화 - 2 +31 14.02.25 3,486 102 21쪽
75 19화. 뒷풀이! - 1 +15 14.02.24 2,333 57 20쪽
74 18화 - 4 +15 14.02.23 2,149 58 17쪽
73 18화 - 3 +21 14.02.23 2,179 58 19쪽
72 18화 - 2 +19 14.02.22 2,251 49 20쪽
71 18화. 시험공부를 여자애랑 하면 과연 집중이 되나? - 1 +31 14.02.22 2,446 54 18쪽
70 17화 - 4 +19 14.02.21 2,379 52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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