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학교에 관심 받고 싶은 변태 한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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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신
작품등록일 :
2014.01.09 05:53
최근연재일 :
2021.11.25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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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2.31 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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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쪽

16화 - 2

DUMMY

“……하하.”



혼자 웃는다. 변태와도 같은 웃음소리. 바깥의 여자애들 소리를 듣고 웃음짓다니, 충분히 음험하고 훌륭한 변태와도 같은 모습이다. 그건 나니까, 가능한 거겠지. 나는 변태니까. 이 학교 유일의. 갑자기 무슨 어이없는 변태부심(?)을 부리는 건데.


두 평 남짓한 작은 방. 혼자 침대에 누워 허허 하릴없이 있는 나. 바깥은 시끄럽고 지붕 위에서도 울림이 느껴진다. 아파트였으면 분명 층간소음으로 굉장하게 다퉜을 텐데. 이제는 이 윗칸의 울림마저 감회가 새롭게 느껴질 정도다. 오늘이 바로, 여자애들이 기숙사에 들어오는 날이거든.


정확하게 말하자면 뭐, 여자애들이 기숙사에 들어오는 날이 원래 기숙사 입사 날이고 내가 곁다리로 끼고 있는 거겠지만. 남녀혼숙 기숙사라니, 그런 거 일본 애니메이션에서만 나오는 얘기잖아. 벚꽃장이라던가…… 아니 뭐, 실제로도 있으려나. 층만 다르게 해서. 그런 식이면 나도 안전범위네. 나는 1층, 다른 애들은 2·3층이니.


자취방이 아니라 기숙사다. 개인이 가지고 올 수 있는 짐은 엄격하게 한정돼 있는, 대한민국의 기숙사. 기껏해봐야 옷가지나 책 정도만 가지고 들어온다. 그런 게 기숙사니까. 대학교라면, 노트북이라던비 PC라던지 가져올 수 있겠지만. 여긴 고등학교니까. 그런 고로, 내가 도와줄 일은 없다. 그럴 의리도 기력도 없어.


여자라고 책을 못 들어, 옷을 못 들어?! 으이, 예전에는 여자도 다~ 밭일도 하고 애 낳고 바로 다음날 김 메러 가구, 응? 요즘 여자애들은 하여튼 정신력이 다 빠져가지고 말야! TV만 보고 다 배려가지고! ……드립입니다. 이번엔 정말이라구요. 정말 마초라도 이런 생각은 안 할 거에요. 50대 정도 아저씨가 아닌 담에야.



‘덜컹!’

“우, 웅도야!?”

“으헉! 따, 딱히 야한 생각을 하거나 그러지 않았어! 왜, 왜. 노크 정도는 해 주지.”

“아, 미안, 그게……! 자, 잠깐만 밖에…….”



예고도 없이 열리는 문. 이 방문을 노크 없이 열만한 사람은 선생님 뿐인데. 충분히 가능성 있다, 딱히 짐 들어오는데 선생님이 관여할만한 일은 없으니까. 사감실에서 일하고 계실 것 같은데, 심심해서 또 분탕질 치러 평화로운 내 방을 습격하시는 것일까.


하고 얼른 일어나 문 앞의 인물을 빠르게 캐치. 성빈이. 얼른 되도 않는 드립을 친다. 그만큼 친하니까 가능한 농담. 성빈이는 ‘야한 생각 하지 않았어!’ 하는 내 드립에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얼른 미안하다는 말부터 먼저 한다. 이제는 너무 당연한 게 된 것일까, 섹드립 치는 나는. 그보다 성빈이는 무언가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으로 바깥을 쳐다보며 말을 잇는다. 어기적 자리에서 일어나 방 밖으로 나섰다.



“오. 마침 잘 왔네. 캐리어 좀 들어줘. 짐이 많아서.”

“뭐…… 라고!? 네가 여길, 왜??”

“기숙사 들어왔으니까.”



막 큰 가방을 메고 캐리어를 들고 낑낑대며 계단을 오르려던 희세. 눈을 빛내며 나를 보고 말한다. 더듬거리며 대답. 당황스럽잖아, 아무 언질도 없이 갑자기 기숙사를 들어온다니. 희세는 아무렇지도 않게 천연덕스럽게 대답한다.



“아니…… 무슨 말도 없이 기숙사를……?”

“네 말 듣고, 나도 열심히 공부해야겠다, 싶어서. 부모님한테 말씀 드리고, 허락 맡고 기숙사 들어오기로 했지.”

“그, 그래도 애들한테는 말은 해주지! 나도 너랑 성빈이한테는 말 해줬잖아!”

“그건 어디까지나 권장사항이고. 딱히, 애들에게 보고해야 할 의무가 있어? 윗사람? 상관? 아니잖아.”

“그, 그야 그렇지만.”



희세의 날카로운 말투에 나는 대답할 말이 없다. 아니 그보다 왜 묘하게 말다툼 같은 구도로 대화가 돌아가는데. 난 딱히 희세랑 싸울 의향이 없는데. 희세도 뭐, 대놓고 틱틱대는 건 아니고 싱긋 웃으며 대답하는 게 숫제 놀릴려는 의도 같다.



“자, 잔말말고 들어. 옷 많이 들어있어서 무거우니까.”

“아, 어, 응. 들어야지. 나는 응당 짐을 들어야만 하는 운명이니까.”

“흐흥, 말은 많아. 따라와.”



주어진 짐에 자연스럽게 반응하는 나. ‘자동 수리’가 켜진 SCV 같은 모습이다. 여고에서 2년 가까이 있다보니 자연스럽게 몸이 먼저 일거리를 찾는 노예근성에 젖어 버려서. 어차피 미루고 있어 봐야 유일한 남자인 내가 할 테니. 희세는 앞서 걸으며 힐끔, 그런 내 모습을 뒤로 곁눈질하며 만족스러운 눈으로 쳐다본다. 싱긋 웃으며 말한다. 어기적 캐리어를 들고 계단을 오르는데 문득, 뒤에 걸린 성빈이의 애매모호한 얼굴. 음…… 일단은, 짐은 들어줘야 하니까. 희세를 따라 나섰다.




“그래서, 기숙사 들어왔다고?”

“응. 왜, 넌 내가 기숙사 들어온 게 불만이야?”

“아니, 그냥. 너무 갑작스러우니까.”



점심시간. 희세, 나, 성빈이 그리고 선생님. 네 명이서 밥을 먹는다. 선생님까지 낀 건 조금 의외지만. 밥이라고 해봐야 도시락이지만.


내 질문에 답하는 희세. 계속되는 질문에 짜증스럽게 답변한다. 화내는 희세는 무서우므로, 얼른 꼬리를 내리며 공손하게 대답한다.



“공부하려고 기숙사 들어오는 건 너만 있는 건 아니고. 딱히 집이 엄청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도, 공부하고자 하면 기숙사는 다 들어올 수 있는 거고. 아무 문제도 없는데?”

“그, 그렇지요. 쇤내는 그저 따를 뿐이지요. 높으신 분들이 하시는 일에 미천한 제가 어찌 왈가왈부 하겠습니까. 소인이 그저 경솔하고 무식한 잘못이지요.”

“뭐라는 거야.”



희세는 아예 내 변명에 못을 박으려는 건지 길게길게 늘여 말한다. 이런 식으로 하나하나 따지듯이 말하는 희세의 기세는 상당히 무섭다. 해서, 평소에 잘 안 쓰는 조선시대 하인 같은 말투로 분위기를 환기하고자 한다.


……환기는커녕 더 정색하는 것 같은데, 희세. 썰렁한 개그에는 가차 없는 희세니까. 선생님은 그런 나와 희세를 마음에 드는 미소를 띈 얼굴로 보신다. 강 건너 불구경이려나.



“공부 때문이 아니라, 다른 것 때문에 들어온 거 아니야?”

“어머. 성빈이가 생각하는 ‘다른 것’이 뭔데?”



성빈이답지 않게 살짝 날카로운 눈으로 희세를 보며 돌직구. 바보가 아닌 담에야 그 ‘다른 것’이 무엇인지는 익히 알 수 있으리라. 여기 있는 나, 희세, 선생님 셋 다. 희세는 싱긋 웃으며 가볍게 받아낸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희세니까.



“공부는 원래 잘 하잖아, 희세 넌. 집에서 하고, 야자 때도 하고. 주말에 도서관 같은데도 얼마든지 갈 수 있고. 뭣하러 힘든 기숙사에 들어오려고?”

“우리나라는, 민주주의 공화국인데? 거주 이전의 자유는 오롯이 나한테 있는 거 아니야? 누가 강요하거나 그럴만한 건 아닌 것 같은데. 중세 농노도 아니고.”



여전히 성빈이답지 않은, 조금 화가 난듯한 목소리. 분위기도 꽤나 심각해 보인다. 이에 맞서는 희세도 정상은 아닌데. 약간 비꼬는 듯한, 쾌활하면서 슬쩍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태도. 놀리는 것 같기도 하고. 희세의 말에 성빈이늘 살짝 표정이 굳는다.



“그래도, 억지로 기숙사까지 들어올 건 아닌 것 같아.”

“어머, 되게 그렇다. 웅도 들어온다고 할 땐 ‘잘 생각했어, 기숙사에서 같이 공부하자!’ 이런 식으로 말해놓고. 정작 나는 들어온다니까 들어오자마자 존재부정이야? 나, 성빈이랑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거기에 룸메이트인데. 오늘부터 이렇게 텃세 부리는 거야?”

“……그, 그런 게 아니라.”



뭐, 굳이 논리를 따지자면 명분은 희세 쪽에 있지. 그래도 성빈이는 꿋꿋이 자신의 의견을 내세운다. 피식 웃으며 비꼬는 투로 말하는 희세. 성빈이는 살짝 당황한 태도로 대답한다. 그런 식으로 말하면 성빈이 쪽이 되게 속 좁은 여자애가 되잖아.


희세, 이 무서운 아이. 꽤나 오래 전 일이라 잊혀져가고 있지만, 사실 희세도 악역 출신(?)이니까. 세월이 약인지라, 잘 기억은 안 나지만 희세도 분명 나를 왕따시켰던 그런 애였으니까. 저런 식으로 비꼬듯이 말하면 어떻게 보면 흑화 시의 유진이만큼이나 무섭게 보인다.



“후흫. 역시, 너희들 노는 거 보면 참, 재미있다니까. 남자애 두고 대놓고 사랑 싸움이라니. 좋을 때구나 싶네.”

“선생님은 차였잖아요.”

“……너, 정말 죽고 싶은가보구나. 1년동안 눈치는 하나도 성장 안 했니?”

“죄, 죄송합니다! 소인이 미련하기 짝이 없어 실언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폐하!”



알면서도 어그로를 끊을 수가 없다. 이런 말을 하면 선생님이 어떤 반응을 보이고, 어떤 폭력을 가하실 지도 뻔이 알고 있음에도 이런 저급 어그로를 대놓고 하는 나. 천성이 그렇게 생겨먹은 걸 어떡합니까.


……아니면 혹시 M 성향이라던가. 본인이 맞을 걸 알면서도 매를 버는 것이니.






--






다음날의 학교. 2학기의 시작. 바뀐 것은 없다. 애초에 진정한 방학이 일주일 남짓이었으니. 내내 보충수업 나오다 일주일 쉬고 2학기로 넘어간 것. 별달리 감회가 새롭거나 그럴 것도 없다. 게다가 2번째 겪는 고등학교의 여름방학 후폭풍이니.


마찬가지로, 기숙사에 들어왔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그냥, 학교 가는 게 좀 더 편해졌다는 것 정도일까. 학교 안에 살고 있으니. 희세와의 등굣길은 더 이상 없는 것일까.


……라고 해도, 그 희세가 기숙사에 들어와 있는 걸. 기숙사─학교의 그 짧은 동선마저, 희세는 굳이 내 방에 들려 같이 등교한다. 성빈이가 그것에 빠질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애초에 희세랑 성빈이랑 룸메이트이기도 하고.



“와, 그럼 웅이랑 히이 둘 다 동시에 기숙사 들어간 거야? 그럼 비니까지 셋 다 기숙사야?”

“응, 그렇지.”



아침 남는 시간. 학기 초라 아직 보충수업이 시작되지 않아 조례와 보충수업 시간 사이가 붕 떠서, 애들은 시끄럽게 떠들어대고 있는 중이다. 그야말로 완벽에 가까운 난장판. 이런 건 남자애나 여자애나 다를 게 없구나.


리유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본다. 심드렁한 내 대답에 ‘우와, 신기해!’ 하고 귀여운 투로 말한다. 후후, 리유는 귀엽지. 나도 좋아해.


방학이 끝나고 정식으로 학교로 돌아온 리유. 간단하게 우리 반으로 배정됐다. 이제 리유는 아무 걱정이 없다. 호주 다녀온 뒤로는 내 서포트 없이도 아무하고나 잘 얘기하는 쾌활한 애가 되었으니. 거기에, 이 나이 또래 여자애들에게 상당한 메리트인 ‘외국’, 그것도 선진국인 호주에 다녀온 점이 큰 메리트가 되고 있다. 리유와 별로 안 친하던 녀석들도 리유에게 ‘호주는 어땠어? 외국인들 말 걸면 무섭지 않아?’ 하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물어보곤 하니까. 1학년 때 처음 만났을 때와 대비하면 참, 감회가 새로울 정도다.



“그럼 이제, 진검승부네요. 서양의 나희세와 동양의 임성빈의. 사무라이와 나이트의 대결이랄까요?! 두근두근!”

“……어떤 기준으로 서양과 동양이 나뉘는지, 그리고 왜 하필 동양의 대표가 사무라이인지 궁금하네.”



이런 대화에 끼어들지 않으면 섭섭한 미래. 이 조미료 같은 년. 낄 데 안 낄 데 가리지 않고 다 끼지, 고춧가루처럼. 또 얼토당토 않은 비유를 내세우는 미래에게, 눈을 반쯤 뜨고 비판적인 태도로 물어본다. 뭐, 대답은 충분히 예상이 가지만. 근미래 특유의 섹드립 + 일빠끼 정도겠지.



“가슴이요 가슴! 당연한 거 아니에요!?”

“어휴.”

“사무라이는, 당연히 제가 일빠니까! 오우! 쉐무뤠에아이! 뎃추 원더풀!”

“에휴.”



어떻게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게냐, 미래 이 녀석은. 세월이 지나면 지날수록, 사골처럼 진하게 우러나오는 게 아니라 이제는 내 손바닥 안에 패턴이 전부 읽히는 미래의 행동거지다.



“왜 그렇게 한숨 쉬는데요!? 알량한 국민감정 따위에 제 취향이 타격을 받아야 하나요?! 저는 그냥, 순수한 의미로 일본문화를 즐기는 건전한 소☆녀라구요!”

“그래그래, 그래라. 취향이니까 존중받아야겠지.”

“흐흐흥!”



미래와 얘기하면 약간 정신이 나갈 것 같다. 이런 게 일상이니까. 새삼 학기가 시작되었다는 걸 깨닫게 해주는구나, 미래의 산만한 대화가. 분명히 대화 주제가 기숙사였는데, 어느 순간 1999 일본문화개방으로 바뀌어 버렸어. ……그 때 개방하면 안 됐어. 저런 괴물을 키워버렸잖아.



“힘들겠네.”

“뭐가.”

“흐흐흥.”



턱에 손을 괴고 나를 쳐다보며 베시시 웃는 유진이. 희세가 무서운들 유진이만큼 은근히 무서울까. 저런 사악한 미소를 보고 있자면 유진이는 너무 흑막 같은 느낌이 물씬 풍긴다. 단지 웃기만 했을 뿐인데.



“이런 고사가 떠올라서. 6·25때, 처와 첩을 둘 다 둔 아저씨가 있었는데. 일제 때야 부자였으니 상관없었겠지만, 전쟁통에 피난을 가니 어쩔 수 없이 한 방에서 같이 자게 되었거든. 그래서 힘들여서 이쪽 처와 한바탕 치루니 이번엔 첩이 등을 꾹 지르면서 나 좀 죽여주소, 그러니 남편이 죽어날 수밖에. 전쟁 다 치르기 전에 이쪽 초상 먼저 치르겠다고, 그런 내용을 신문에서 봤었거든.”

“무,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얘기를 신문에서 본 건데?! 그거 어디 신문사야! 게다가 갑자기 그런 얘기는 왜!?”

“흐흐흥─ 글쎄, 누군가의 사정과 비슷하지 않나─ 싶어서.”

“……저, 저는 아닙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섹드립을 치는 유진이. 미래의 직접적이고 저질 섹드립과는 급이 틀리다. 비유해서 말하자면, 희세와 성빈이 사이에 있는 나를 말하는 거겠지. 그걸 굉장히, 고급스런 섹드립(?)으로 놀리고 있다. 괜히 헛기침을 하며 대답했다.



“첩이 남편한테 죽여달라고 해? 전쟁이니까, 미쳐버리기 전에 먼저 죽여달라는 거야?”

“응…… 그런 게 있어. 그렇게 비장하게 생각해준다면, 고마운 일이고. 전쟁은 없어야할 일이지. 내가 미안하네, 괜히 전쟁 때 얘기를 하고.”



민서의 순수하기 짝이 없는 표정에 유진이는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돌리는 유진이. 민서는 여전히 의아한 표정이다.





“음…….”



오늘은 얌전히, 하루종일 공부에 매진해보려 노력했다. ─‘노력’만 했다. 실제론 전혀 집중이 안 되는 하루인데. 그래도, 딴 생각 안 하고 수업을 듣는다거나 문제를 풀어본다거나 노력은 해봤으니까. 그런 노력이 중요한 게지. 아프리카 청춘이다. 노력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말야. 근본적으로 봤을 때, 기숙사가 문제가 아닌 것 같아.”

“응? 무슨 얘기야?”

“…….”



야자가 끝나고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 어차피 걸어서 3분도 안 걸리는 가까운 거리지만, 희세와 성빈이와 같이 간다. 양 옆에 꽃 같은 여자애를 둘 끼고 가는 하굣길이라니, 이 얼마나 사치스러운가! 하하! ……뭐라 병X이.


가만히, 아까 전부터 생각하던 것을 말하기 위해 운을 떼니 성빈이가 바로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며 묻는다. 희세는 말없이 묵묵히 내 옆에서 걷고 있다.



“굳이 기숙사가 아니어도, 학교에서 주는 자습시간, 야자시간에 제대로 집중 안 하고 공부도 안 하는 내가. 기숙사 자취 핑계를 댈 게 있나, 싶어서.”

“아…… 그, 한 번에 바로 바뀔 수는 없으니까! 그래도, 장소가 바뀌면!”

“용케 자기자신을 냉정하게 잘 돌아보네. 정웅도 주제에 제법인데?”



진리를 깨달은 나의 대답. 그렇잖아. 굳이 기숙사생이 아니어도, 학교에서 충분히 14시간의 공부할 기회를 준다. 정규수업을 뺀다고 해도,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은 최소 4시간 이상. 괜히 8시부터 10시까지 학교에 붙들어 놓는 게 아니잖아, 대한민국은. 그 놈의 공부하라고. 그렇게 따져보면 굳이, 자취 탓은 아니잖아, 내 공부 안 하는 건. 어차피 그 자취방에 있는 시간이 학교에 있는 시간보다 더 적은걸.


극명하게 상반되는, 두 여자애의 대답. 이건 뭐, 흑백대비냐. 긍정 가득한 성빈이의 반짝반짝 대답과, 심연으로 떨어지는 듯한 희세의 돌직구. 둘의 대비야, 예전부터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간단히 대조되는 대화는 오래간만이네.



“……그, 그치만! 장소가 바뀌면 의지도 다져지니까! 지금은, 오늘은 첫날이니까 아직 준비가 덜 돼서 그런 거겠지만!”

“전혀. 애초에 할 놈은 어디서든 해. 정신이 썩어빠졌으니 안 되는 거지. 그런 고로, 오늘부터 강제로. 웅도 너 열람실 올라와.”

“에엑. 왜요.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희세의 말에 질색을 하는 나. 애초에 내가 왜 저런 말을 한 건데. 기숙사로 옮겨도 소용없다고, 나는 안 될 놈이라고 선언하는 건데. 희세는 악마처럼 웃는다. 어쩌면 내가 공부하는 건 별로 중요치 않고 그냥 날 괴롭히고자 하는 S 본성의 발현이 아닐까. ……잘 어울리는 커플이겠네, 남자애는 M이고 여자애는 S. WIN-WIN이네.




“우으으.”

“열심히 하자.”



기숙사에 도착해서, 교복을 벗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여자애들이 다 씻기를 기다렸다가 씻고, 이제 자면 되는데. 문을 열고 들이닥친 희세와 성빈이 때문에, 강제로 4층의 열람실에 올라갔다. 정말, 정~말 하기 싫은데. 벌써부터 영혼이 빠지는 기분이다. 성빈이의 파이팅 넘치는 말에도 기운이 생기지 않는다.



“억지로 떠먹인다고 애가 먹나. 먹기 싫어하는데.”

“시끄럽고. 목표를 줄 테니까. ……여기까지 풀어.”

“미, 미치셨나요. 그거 풀려면 내 계산능력으론 족히 2시간은 걸릴 텐ㄷ…… 아뇨, 응당 그렇게 해야지요. 사나이가 결심을 했다면. 새벽 2시가 되어도 3시가 되어도 무슨 상관이겠어요.”



내 푸념에 희세는 간단하게 속삭인다. 내 가방에서 임의로 아무거나 가져온 수학책을 꺼내더니 범위를 지정해준다. 몇십 페이지나 되는 어려운 수학 문제에 나는 대경실색하며 말을 꺼내려 했지만 이내 희세의 도끼눈에 얼른 몸을 숙인다. 그, 그래. 해야지.



“…….”

“…….”

“……후으.”



열람실은 우리만 있는 게 아니다. 기숙사생이면 누구나 공부하러 올라올 수 있는, 독서실 같은 개념. 그런 고로, 1학년부터 3학년까지 전부 있다. 3학년 누나들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지만. 당연하잖아, 이제 수능 2개월도 채 안 남았는데. 그 누나들 눈치 보여서라도 참, 이 분위기는 못 견딜 어떤 것이다. 그래서 원래 도서관 같은 데 가는 거 싫어하는데.


절로 한숨이 나온다. 모두 열중하는 공기에 압도돼, 정숙한 분위기에 질려 될 공부도 저절로 안 된다. 무엇보다 가장 큰 영향은, 공부하기 싫어하는 나 자신이지만. 억지로 음악을 들으며 수학문제를 풀어보려 노력한다. 그나마 다행인 건, 수학은 꾸준히 공책에 끄적이며 풀면 어떻게든 풀린다는 것. 이렇게 말하면 수학 잘하는 것 같지만 나, 문과니까. 그저 수학만 보면 기가 죽어버리는 건 어쩔 수 없지.



“……응헝.”

“졸지 마.”

“……하아.”



문득 퍼뜩 놀라게 된다. 내 옆구리를 꾸욱 찌르는 희세. 나도 모르게 괴상한 신음을 내 주위 여자애들이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상당히 부끄럽다. 벌써 졸고 있었구나.

아니, 벌써 아니거든?! 야자 10시에 끝나고, 씻고 점호하고 어쩌고 하면 얼렁뚱땅 11시, 그리고 지금 12시 다 돼 가는데! 물론 자취할 때엔 게임하느라 새벽 1시까지 안 잤지만, 지금은 지루한 공부를 하고 있잖아! 이런 공부를 시키는 희세가 잘못된 거야!




멍하니, 공부하는 희세를 쳐다본다. 희세는, 정말 어른스럽구나. 나처럼 딴청피우거나 그러지 않고,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스스로 공부하고 있고. 반대편 옆자리의 성빈이도 본다. 마찬가지로 성실하게 공부하고 있는 성빈이. 늘 노력하고 열심히 하는 성빈이의 모습은 정말 보기 좋지.


다시금 시선을 돌려 주위를 본다. 누군들 그러겠지. 공부하는 게 정말 좋은 애들이 어디 있겠어. 정말 취향 이상한 변태라면, 공부하는 걸 좋아하겠지만. 보통은, 하기 싫은 거 억지로 붙들고 하는 거겠지. 놀고 싶은 거, 얘기하고 싶은 거, 자고 싶은 거, 그런 욕구들, 욕망들. 사소하면서도 충분한 기본권에 속하는 그런 것을, 억지로 억누르며, 청춘을 공부에 불사르고 있는 여자애들.


보고 있자니, 괜히 내가 부끄럽다. 가슴에 불이 붙는 것 같다. 그래, 나라고 못할 게 있나. 남자라던가 여자라던가, 그런 게 지금 중요한 게 아니지. 사실 공부는 여자애들이 더 잘 해. 수능이던, 공무원 시험이던, 임용고시던 여자가 더 성적이 잘 나온데잖아. 근데 그럼에도 여자가 취업이 안 되는 걸, 소위 ‘유리천장’이라는 차별이라 하는 거지. 아, 이게 아니라 어쨌든.


나도 해야겠다. 압박감에서 나온 공부던, 스스로 찾아서 하는 공부던, 어쨌든 공부는 공부다. 내가 기숙사에 들어온 이유가 무엇인데. 이렇게 공부를 하기 위함이 아닌가. 분위기에 휩쓸리는 건 내 특기, 이 분위기에 휩쓸려 공부를 하자. 으아아아아! 기력이 샘솟는다! 나는 할 수 있다, 사나이 정웅도, 이딴 공부를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고3돌파 정웅도다!!


작가의말

1시간 30분 뒤면 새해네요. 우학변 덕분에 저는 훈훈하게 한 해 보낸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내년에도 좋은 한 해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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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 15화 - 3 +6 15.12.14 1,086 25 20쪽
210 15화 - 2 +4 15.12.12 986 17 19쪽
209 15화. 여름이고 방학이면 어딜 가야겠어요?! +4 15.12.10 982 17 19쪽
208 14화.4 - 2 +4 15.12.07 1,040 19 20쪽
207 14화.4 그런 일은 없어요. +4 15.12.05 959 21 20쪽
206 14화.3 - 2 +2 15.12.04 965 13 21쪽
205 14화.3 깜짝 멘붕이야 +6 15.12.01 790 25 20쪽
204 14화.2 - 2 +8 15.11.29 979 15 19쪽
203 14화.2 여제의 귀환 +9 15.11.27 861 17 21쪽
202 14화.1 - 2 +4 15.11.25 936 18 22쪽
201 14화.1 저랑, 사귀어요! +8 15.11.24 1,000 14 20쪽
200 13화 - 4 +8 15.11.23 829 14 22쪽
199 13화 - 3 +2 15.11.21 724 21 21쪽
198 13화 - 2 +2 15.11.20 794 17 20쪽
197 13화. 기말고사 치고는 너무 밝은 거 아닙니까?! +9 15.11.19 873 19 20쪽
196 촬영은 다시. +8 15.11.17 708 13 15쪽
195 촬영이 끝나고 난 뒤 ----- 휴재 +10 15.10.17 921 17 19쪽
194 -동결- +8 15.10.15 856 12 1쪽
193 12화 - 4 +10 15.10.14 988 18 25쪽
192 12화 - 3 +8 15.10.13 869 17 18쪽
191 12화 - 2 +10 15.10.12 847 17 20쪽
190 12화. 먹어 줘! +12 15.10.10 1,003 24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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