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등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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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구석4평
그림/삽화
lovendpeace
작품등록일 :
2019.12.26 00:03
최근연재일 :
2022.08.09 01:45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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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6 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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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Episode149_묻어둔 것을 파낸다는 것(6)

DUMMY

사라는 아까부터 계속 베르윈의 냉기 갑옷을 창으로 막아내고만 있었다. 철과 철을 맞대며 이를 악물고 떨쳐낸다.


극도로 차가운 표면에 부딪힌 서슬은 불꽃조차도 일으키지 못한다. 그저 끼긱하고, 소름끼치는 마찰음만 남긴 채 튕겨나갈 뿐.


타고난 괴력을 발휘해 그 무거운 적을 멀찍이까지 밀어내기도 했지만, 그럴때마다 적은 금방 태세를 재정비하고 내달려와 또 바싹 달라붙어온다. 저 갑갑하고 육중한 갑옷을 껴입고 어찌 이리도 날랠 수 있나 싶다.


반면 사라의 몸은 갈수록 둔해지고 있다. 어깨에서 흘러나오는 피와 고통이 머리를 어지럽혔고, 팔 한쪽을 쓸 수가 없기에 계속 혹사시킨 남은 왼팔도 이젠 너무 저리고 피로해져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몸이 스쳤다간 돌이킬 수 없는 살벌한 혈투 속. 그 과정에서 창에는 차곡차곡 냉기가 쌓여갔지만, 사라로써는 마땅히 그걸 쓸만한 곳도 없었다. 베르윈은 애초부터 그 저온에 둘러싸인 인간이니, 얼음이 아니라 액체질소를 갖다부어도 끄떡 안할 것이다.


손에 그 막대한 힘을 쥐고도 안절부절 못하는 사이, 싸움은 계속 늘어지기만 한다. 아마 이제는 본격적으로 머리를 굴려야 할 때인 듯 싶어 사라는 가만히 생각이란 걸 해 보았다. 오랜만에 피가 돌기 시작한 뇌에 순간 스치는 이미지가 하나 있었다.


잠깐, 그러고보니 이 자리에서 계속 지지부진하게 시간을 끌 필요가 없었다. 굳이 이런 쌈박질이 아니더라도 사라에게는 나아갈 길이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놀랍게도 사라의 성찰은 효과가 있었다. 미리 ‘봐두었던 것’이 하나 떠오른 것이다. 그래, 그거라면 분명···!


그래서 사라는 갑자기 발의 방향을 휙 바꾸더니, 적에게 등을 돌리고는 쌩 앞으로 달려갔다.


갑작스레 전법을 바꾼 그녀를 바라보며 베르윈은 당황했다. 여지껏 들은대로 힘이 센 만큼 단순무식한줄 알았더니, 이젠 본격적으로 생각이란걸 하기 시작한 모양이다. 제길, 이래선 안되는데···.


물론 지금도 사라의 괴력을 정면으로 받아내는데 버거워 갑옷 너머로도 온 몸이 얼얼하긴 했으나, 그렇다고 이렇게 방생해버리면 일이 더 복잡해진다.


이를테면, 이대로 도망쳐서 하온을 찾아갔다간 큰일이다. 사라의 가장 큰 천적인 벨크가 당해버린 이 시점에서 반역자 두 명이 뭉쳤다간 그 합은 감당할 수가 없다.


망할, 일이 이렇게 될 수가 있나? 자신이 없어도 벨크의 재생능력만 남아있다면 사라를 쓰러트리는건 시간문제인데, 하필 그 힘이 자신의 냉기로 먼저 무력화될 줄 상상이나 했을까!


이판사판, 베르윈은 온 힘을 끌어모아 앞으로 도약하며 사라의 뒤를 쫓았다. 무쇠 갑옷이 철그렁대며 묵직하게 흔들린다.


자신을 힘겹게 따라오는 베르윈을 여유롭게 돌아보며, 사라는 절반은 그를 도발할 목적으로—나머지 반은 그냥 쌤통이라서—크게 소리쳐 모욕한다.


“와하하, 멍청아! 너같이 육중하고 무거운 둔탱이를 내가 계속 상대해줄줄 알았냐!!”


아마도 사라는 아까 들은 ‘멍청이’란 말을 은근히 속에 담아뒀었나보다. 마치 말싸움하는 애들마냥 적에게 되돌려주며 저토록 신나서 펄펄 뛰지 않는가.


하지만 그의 커다란 떡대가 품은 근육은 장식이 아니었다. 예상과는 다소 다르게, 온 몸에 무거운 철판을 두른 그의 추격은 웬만한 지각생보다 빨랐다. 실컷 놀려댄 사라가 되려 무안해질 정도로.


‘새, 생각해보면 여지껏 저 무거운걸 입고서도 멀쩡히 싸웠지. 어쩌면 신체강화쪽 능력을 함께 가졌을지도 몰라···.’


도발도 조금 지나쳤을지 모른다고 느끼면서 사라는 다급히 몸을 피했다. 꼴에 유인이라고 적당히 봐주면서 달리려고 했는데, 조금 겁을 먹어 속도를 내기 시작하면서 결과적으로 그녀의 움직임은 전혀 유인작전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실제로 쫄은 것이 다 눈에 보였으니까 말이다.


쾅 쾅 울리는 베르윈의 발걸음은 갑옷의 무게를 싣고 더 크고 웅장하게 울려퍼진다. 극에 달한 집중력으로 신체능력을 강화하여 그 힘 전부를 속도로 전환시킨다.


그렇기에 당초의 예상과는 달리 사라와 베르윈의 거리는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큰일이었다. 베르윈이 생각보다 빠르기도 빨랐지만, 무엇보다 어깨의 지속적인 출혈과 이로 인한 어지럼증이 갈수록 그녀의 발을 무겁게 하고 있었다.


말 할 것도 없이 위기상황, 뻘뻘 흘리는 땀방울이 볼을 가로질러 뒤쪽으로 흩어진다. 다가오는 재난, 피해야 한다. 하지만 언제까지? 설마, 이대로 하온을 만날 때까지?


아니야, 하지만 최소한··· 저 건물 뒤의 코너를 지날 때 까지만이라도···!


그리고 사라는 그대로 사라졌다. 순식간에 몸을 튕겨 벽 뒤로 쏙 숨어들어간 것인데, 지켜보던 베르윈 입장에서는 기가 찬다.


그도 그럴 것이, 제 딴에는 아마 몸을 숨기면서 몰래 목표까지 도달할 심산이었던 듯 하지만 기본 전제부터가 틀려먹었다.


사라 본인이야 앞만 보고 달렸으니 몰랐을테지만, 그녀의 뒤에는 어깨에서 흘러나온 피가 땅에 떨어져 그 궤적을 적나라하게 표시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헨젤과 그레텔도 아니고, 아주 빵조각이 직접 자길 먹어달라며 친절하게 흔적을 남겨준 꼴이다.


영민하게 포착된 그 잔상을 따라 베르윈은 코너를 돌았다. 핏자국은 그 블록을 지나 또다른 건물 뒤로 이어졌다. 이번에야말로 그는 자신의 적과 대면하리라.


다시한번 코너를 돈다. 그리고 보이는 것은 푸른색. 크고, 원통형의, 푸르고 퉁퉁한 물탱크 하나.


그 자리를 지나는 순간 급습해오는 은빛 막대. 온 힘을 다해 후려친 사라의 창이 그의 가슴을 강타했다.


통렬하게 전해지는 충격, 그리고 창은 그대로 원을 그리며 베르윈의 몸뚱이를 밀쳐내다가 그대로 물탱크의 한복판에 때려박았다.


갑작스런 급습. 베르윈은 이를 갈았다. 그러나 순간 느껴지는 차디찬 감각에 그는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끼며 뒤를 돌아보았다.


당연하게도 물탱크에는 농사에 쓰기 위한 물이 한가득 들어있었고, 막대한 수량은 곧 몸 전체에 쏟아져나와 그를 덮쳤다. 냉기를 품은 갑옷 사이사이에 밀려든 물이 점차 얼어붙으며 움직임을 둔하게 한다.


서둘러 빠져나오려는 전사의 치켜뜬 눈 앞에, 붉은 머리칼의 여인이 몸을 드러낸다. 아픈 머리를 움켜쥐고서도, 그 얼굴엔 미소를 잃지 않은 채.


“한번 더 말해준다, 멍청아!”


나는 도망친 게 아니다. 널 여기로 유인한거다.


선언을 마친 후, 사라는 남은 온 힘을 다해 창을 들어 겨눈다. 목표는 단 하나, 그리고 해야 할 일도 단 하나.


그동안 당해온 모든 것을 모조리 다 되돌려주는 일.


“섬광파-!!!”


그와의 맹렬한 싸움 속에서 창에 축적된 상당한 충격과, 무엇보다도 극렬한 냉기. 그 순수한 한파의 바람이 물살을 뚫고 몰아닥친다.


그 힘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비록 이전처럼 강렬한 파괴도, 화려한 불꽃도 튀지 않았지만, 변화는 그 어느때보다도 명확히 일어났다.


물탱크에서 콸콸 흘러나오는 물이 일순간 뒤로 밀린다. 역으로 형성된 급류가 베르윈을 삼키더니 곧이어 불투명해지다가 점차 굳어진다.


어떤 그릇에도 담아지던 유연함은 점차 결정화되어 단단히 굳어가더니 가지각색의 현란한 형태를 띠며 하나의 거대한 고체를 형성한다. 마치 유리공예품을 만들듯이, 파도는 한순간의 형상을 간직한 채 그대로 침묵하게 되었다.


적을 휘감은 물이 극도의 저온을 만나, 단번에 얼음이 되어 그 자리를 메워버린 것이다.


두껍고 투명한 천연 유리 안에 갇혀 베르윈은 그렇게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게 되었다. 되려 목구멍까지 얼음에 막혀서 숨조차 쉴 수 없는 지경이다.


사라는 자비를 베풀어, 그의 얼굴이 든 얼음을 세게 후려쳐 머리를 바깥으로 꺼내주었다. 그 얼얼한 충격에 놀랐는지, 숨 쉴 자유를 얻은 베르윈은 바로 공기를 터트리듯이 폭발적인 호흡을 시작했다.


처절하게 헉헉대는, 그렇게 패배해버린 적의 얼굴에 손가락을 대더니, 사라는 분명하고도 또박또박 자신의 의사를 전했다.


“너. 여기서 꼼짝마.”


두꺼운 얼음에 갇혀서 움직일 수 있는 놈이 세상에 얼마나 되는가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확실히 해둬서 나쁠건 없지 않은가. 더 이상 이 놈에게 쓸 기력도 없고 하니 더는 귀찮게 하지 말라는 의지표명이다.


“크...으으...”


“걱정 마셔. 암만 날이 쌀쌀해도 언젠간 녹겠지. 어차피 넌 저체온증도 상관없잖아. 맞지?”


적의 헐떡임에 사라는 그저 발악이겠거니 하고 넘기려 했지만, 베르윈은 무언가 할 말이 있는가보다. 꽉 껴서 호흡도 답답한 몸을 끙끙대며 굳이 뭔가를 말하려고 쩔쩔맨다.


“뭔데, 설마 감기는 걸리냐?”


의아하게 쳐다보는 사라. 하도 갑갑해하길래 마지막 자비로 들어주기로 했다. 귀를 가까이 기울여 그의 입가에 가져다댔다. 가쁜 숨으로 기어코 말을 꺼내는데 성공한 베르윈. 그가 하고픈 말은 이것 뿐이었다.


“서...”


“?”


“섬광이 안나왔는데 섬광파라고 부르는거냐...”


“아 얌전히 기절이나 하세요!”


그리고 자비를 철회한 사라가 창자루를 투구 위로 후려치면서, 베르윈은 그대로 입을 다물 수 있게 되었다.


드디어 사방이 조용해졌다. 깊은 안도감이 밀려오며 스스로에게 크나큰 대견함을 느꼈다. 본인도 깜짝 놀랐다. 설마 그 급박한 시간에 이곳을 떠올리고 그런 계책을 짜낼줄이야.


응? 그런데 내가 이 물탱크를 봤던 기억이 있었나? 잠시 의문이 든 사라였지만, 그마저도 금방 떠오른 당장의 위기에 밀려 금세 뇌리에서 잊혀졌다.


그래, 여기서 그런 느긋한 의문으로 시간을 허비할 때가 아니다. 어서 한시라도 빨리 하온을 도와주러 가야만 한다. 그 놈 아마 지금쯤 상당히 괴로울 타이밍 같은데···!


그렇게 발을 돌리려던 순간, 뒤돌아본 곳에 보이는 사람의 실루엣 하나. 사라의 입에서는 어쩔 수 없이 탄식이 흘러나온다.


“야, 이건 좀 너무하지 않냐···?”


놀랍게도, 실로 놀랍기 그지없게도 그림자를 드리운 것은 이미 질릴대로 봐온 얼굴. 그새 몸을 녹여온 벨크가 눈 앞에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빈혈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또다시 부여잡고 사라는 불만을 토로하듯이 이 지긋지긋한 인간에게 물었다. 대체 뭐 하는 놈이냐고.


“대체 어떻게 했길래 그새 온몸이 다 해동된거야? 누가 난로라도 쬐어줬대?”


그녀의 의문에 벨크는 꽤나 친절하게도 답해준다. 아마 여지껏 뛰어오느라 본인에게도 숨을 고를 시간이 조금 필요했겠지. 다만···.


“아니, 못 녹였다. 기껏해야 팔만 조금 움직이길래.”


이후 이어지는 말은 사라로 하여금 눈 앞의 불사신이 정말 단단히 정신나간 놈임을 실감케 했다.


“내 목을 직접 자른 뒤 그로부터 새 몸을 재생시켜서 왔지.”


아하. 그랬냐, 미친 놈아···.


그 뒤 사라가 곧바로 등을 돌려 뛰쳐나간 것은, 결코 그 말을 듣고 쫄아서가 아니다. 아무튼, 결코.


갑자기 꽁무니를 빼는 그녀를 쫓아 벨크도 내달렸다. 이제와서 또다른 추격전이 벌어지기 시작했고, 사라의 목적지는 아주 명확했다.


작가의말

다음 화도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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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 Episode154_묻어둔 것을 파낸다는 것(11) +2 20.12.05 64 3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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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 Episode150_묻어둔 것을 파낸다는 것(7) +3 20.11.19 49 3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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