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압하다 -3
18화.
"그러는 네 놈은 선한 드래곤이더냐."
- 허허 이 어린것이. 유유상종이라더니 끼리끼리 잘 만났구나. 저승길 외롭지는 않겠군. 둘 다 재가 되어라.
"염라 할아버지도 안 만나본 게 저승길 타령하네?"
레드 드래곤은 더 이상의 대화를 하지 않기로 했는지 입에서 브레스를 내뿜었다.
근처에 있기만 해도 녹아버릴만큼 뜨거운 불꽃의 브레스가 앞에 있는 존재 자체를 지우려는 듯 거침없이 나아갔다.
쿠와아악.
"벨하프! 안돼! 으아아!!!"
화이트 드래곤이 울부짖으며 포효했다.
나는 양손을 교차하며 마기와 선기로 거대한 원의 형태를 가진 기의 거울을 만들었다.
음양의 조화를 이루는 태극권을 바탕으로 내 왼쪽 몸의 마기와 선기를 조화롭게 하는 마선태극권을 만들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이 세계에서 선보이게 되었다.
태극마선경 이라고 불리는 거울을 살짝 기울여 브레스를 튕겨내었다.
"이것이 바로 반사다. 임마!"
좀 더 약한 공격은 적에게 튕겨낼 수도 있는데 레드드래곤의 브레스가 너무 강하여 튕겨서 흘리는 것이 전부였다.
튕겨진 브레스는 뒷산의 중턱으로 날아갔다.
퍼엉! 우르르. 쿵. 화르륵!
"아놔, 저기에 봄 되면 진달래 피는데... 감히!!"
내 기억을 되짚어 봤을 때, 몇달 뒤에 볼 수 있는 자연이 만들어주는 산수화의 노란색 부분이 까맣게 변했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반뇽아, 날자."
"알았어!"
반뇽이와 백년도 전부터 함께했던 전투로 인해 한 몸인 듯 손발이 잘 맞았다.
나는 펄쩍 뛰어서 반뇽이 머리 위에 사뿐히 착지했다.
- 이런 미친 드래곤을 봤나. 감히 머리 위에 마족을 태워?
"언제는 나한테 드래곤 아니라매?"
- 크아악, 이 와이번새끼가...
그래그래, 우리 반뇽이 대답 한번 잘했다!
저 빨갱이 드래곤 놈이 말을 지 맘대로 이랬다 저랬다 하네!
내 손으로부터 몸서리 쳐지는 마기가 응집되었다가 펼쳐지더니 거대한 손바닥이 되었다.
이것은 천마와 함께 고심해서 창안한 날뛰는 내 마기로도 펼칠 수 있는 마공이자 장법이었다.
나는 긴 이름 자체를 싫어하여 대마장이라고 지었다.
라디스칸은 내 작은 손을 만만하게 봤는지 그대로 공격을 허용했다.
찰싹.
내 거대한 손이 레드 드래곤의 뺨을 후려쳤다.
직접 손으로 때린 것은 아니지만 타격감은 그대로 내 몸에 전해졌다.
손 맛 쥑이네. 한번 더.
찰싹.
다시 한번 후려치자, 레드 드래곤의 입에서 이빨이 3개 날아가서 나무에 박혔다.
오? 저 이빨 3개는 이따가 꼭 챙겨야겠다.
레드 드래곤은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수치심에 정신이 붕괴되기 직전이었다.
항상 남 위에 서있던 놈이 저렇게 맞아본 적이 처음일테니 저럴 만도 하지.
"반뇽아, 더 올라가자."
"알았어!"
분노한 탓에 몸을 기지개 펴는 듯 '나 지금 화났다' 제스처만을 취하고 있는 레드드래곤이 눈깔을 뒤집고 있는 동안 나는 반뇽이에게 더 높이 올라가라고 했다.
더 높은 하늘 위로 날아간 반뇽이 머리 위에서 레드 드래곤의 머리 앞으로 점프를 뛰었다.
사부가 그 옛날 손오공이 당했던 무공이라며 가르쳐준 무공을 내가 마기와 선기로 쓸 수 있게 창안한건데, 이름이 뭐였는지 생각 안 난다.
에잇, 모르겠다.
"미륵불 뭐시기 태극대마선장!"
하늘에 부처님 손바닥이라고 착각이 들 만큼 거대하고 손이 생성되었다. 손등은 하얗고 손바닥은 칠흑 같은 검은색이었다.
나는 반뇽이 머리 위에서 가차없이 점프를 뛰었다.
땅으로 떨어지며 손을 아래로 내리자, 레드 드래곤의 머리에 퍽 소리가 나며 그대로 땅바닥에 곤두박질 쳐졌다.
그 후, 땅에 떨어지는 나를 반뇽이가 재빠르게 날아와 받아서 등에 안착시켰다.
"나이스 캐치~"
반뇽이는 기분이 좋은 듯 자화자찬했다.
사실 이제는 안 받아줘도 무사히 잘 착지할 수 있지만, 반뇽이는 옛날처럼 이렇게 받아주니 좋나 보다.
나는 지상에 발을 딛자 마자 엎어져 있는 레드 드래곤을 발로 툭툭 찼다.
이 정도로 죽진 않았을 텐데, 기절 한 것 맞나?
"빨간맛 용가리, 확 목을 따버릴라."
아무런 대답을 안 하는 것 보니 기절했나 보다.
"진짜 따게??"
반뇽이가 물었다.
"내가 미쳤냐, 그랬다가 용족들 우르르 몰려오면 골치 아파.
"다행이다. 라디스칸님이 나 새끼 때 살려줬거든. 그럼 어쩌게?"
"방금 너 죽이려... 에휴, 아니다. 그냥 가자."
이 녀석은 멍청한 건지, 착한 건지... 방금 지 죽이려던 것은 생각 안하고 어릴 적에 살려준 것만 생각하냐?! 아무튼 나는 이렇게 착하고 순진한 네가 좋다. 하하.
"집 냅두고 어딜 가?"
"머리도 식힐 겸 여행이나 가자."
"그래, 좋아!"
"반뇽아, 그리고 이제부터 벨리프라고 불러줘."
"아, 맞다! 아까 급해서 깜빡했어. 알았어!"
"그리고 다시 애들 좀 모으자. 이렇게 우리 만만하게 보고 아무나 쳐들어오지 못하게 말이야."
그 시각.
벨리프의 저택에 숨어 있던 사람들과 2마리의 몬스터는 벨리프와 레드드래곤의 전투를 모두 보았다.
마계에서 이름난 강력한 대악마도 아니고 조그만 산성 하나 다스리는 반인반마가 이렇게나 강하다니...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대체 왜 쓰러진 드래곤의 숨통을 마저 끊지 않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로서는 가까이 다가갈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그 때 시젤라가 가신들과 하인들을 향해 나지막히 말했다.
"저희 실베르트 가문은 더 이상 재고 따지고 할 것도 없이 벨리프님을 모실 거에요. 겉으로만 모신다고 하는 게 아니고 진심으로요."
그러자 시젤라의 오빠의 충신인 기사 하나가 물었다.
"데니프님께서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는데, 그렇게 바로 결정해도 됩니까?"
"그렇게 어영부영하다가는 죽도 밥도 안돼요. 저는 지금 일생일대의 기회라고 생각해요. 기회는 왔을 때 잡아야죠. 우리가 대륙 최고의 가문이 되는 기회요. 오빠가 복귀하면 제가 어떻게든 설득할거에요."
방금 충격적인 장면으로 인해 아무도 아무런 대답을 못하고 있었는데, 한 명의 기사가 반발했다.
"그래도 그렇지, 갑자기 악마를 따르는 것은..."
그러자 그를 따르는 병사들이 수군거렸다.
"맞아, 맞아."
"그러게, 악마를 믿고 따랐다가 신께 벌이라도 받으면 어떡해."
"저 악마, 기분 내키는 대로 우리 죽이는 거 아냐?"
시젤라는 사람들끼리 수군대는 것을 더는 지켜보지 않았다.
"악마가 아니에요. 반인이죠. 반은 인간이라고요."
"흠..."
"그럼, 정 싫으신 분들은 빠지세요. 부와 명예를 얻기 싫은 사람은 지금 빠지세요. 안 잡을게요."
시젤라가 강하게 나오자, 서로 눈치만 보다가 잠잠해졌다.
그러자 랄프 기사단장이 시젤라가 걱정되어 한마디 했다.
"아가씨, 아가씨의 패밀리어인 거대 사자 리오를 죽인 자입니다. 그리고 아가씨의 소꿉친구인... 그 녀석 또한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런데도 괜찮으십니까?"
"랄프 기사단장님, 아니 랄프 아저씨. 저희 영지 로만에서 도망쳐 나올 때... 몇 명이나 죽었을까요?"
"..."
"수십 명? 아니에요. 수백 명이 죽었어요. 저는 반드시 복수할 거에요. 리오와 테드를 위한 눈물은 지난 밤에 다 흘렸어요. 더는 눈물 흘리거나 약한 모습 보이지 않을 거에요. 그리고 생각해보면 벨리프님이 우리를 먼저 공격한 적은 없어요. 리오도 먼저 달려들었고, 카로드 경 역시 먼저 검을 뽑았죠. 20년 전까지 그 누구도 어느 왕국도 이 산성을 토벌하지 못했고, 몬스터 병사들의 무력이 왕국마저 넘볼 정도였다면, 그 분은 강력한 군주가 될 거라는 증거에요. 저희가 그분의 최측근이 되는 것이 목표에요."
어렸을 때부터 테드의 경쟁자였던 기사 콜린이 한마디 거들었다.
"여러분, 감히 제가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방금 레드드래곤을 쓰러뜨린 것을 못 보셨습니까? 지금 아스트리아 대륙에서 드래곤과 일대일로 겨뤄 이길 수 있는 존재가 있다고 보십니까? 아니, 천계, 마계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습니까? 이 정도면 목숨 걸 가치가 있습니다. 아가씨, 제가 앞장서서 따르겠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산 속에서 썩어가면서 목숨만 연명하지 맙시다. 저는 제 명예와 목숨을 걸겠습니다."
기사들 뒤에 있던 병사 중 한명의 목소리가 들렸다. 병사들 중 최고참인 브레드였다. 그는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던 벨리프를 공격하러 갔다가 살아남은 8명의 병사 중 한 명이었다.
"카로드 경한테 억지로 이끌려서 그분을 공격하러 갔지. 헌데 그 분은 목숨을 위협 받았음에도, 우리를 살려주셨습니다. 게다가 그럼에도 우리 모두에게 수하가 되라고 한 것을 보면 어느 정도 호의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네? 대인배시네, 대인배여, 대인배.
"휴우, 브레드. 내 멘토였던 자네 따라 했기에 망정이지."
벨리프의 대저택에서 귀족, 기사, 병사 신분을 막론하고 열띤 토론을 하고 있을 때였다.
반뇽이가 벨리프를 태우고 날아왔다.
쿵.
화이트앤본 드래곤의 등 뒤에는 축 늘어진 벨리프가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세워 말했다.
"야, 다들 짐 챙겨. 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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