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에 핵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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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작품등록일 :
2020.05.16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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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28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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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23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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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과 제자(1)

DUMMY

그렇다.


백색룡 알렉시오스는 흑색의 마법사 유논의 스승이었다.

반대로 말하면 흑색의 마법사 유논은 최후룡 알렉시오스의 제자였다는 뜻이다.


세계를 경악하게 했던 최연소이자 역대 최고의 인간 대마법사의 출연에는 그러한 속사정이 있었던 것.


그러나 단순히 용에게 사사한 덕에 훗날의 대마법사가 되었다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물론 적잖게 기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결국 지금의 그를 만든 것은 독문의 흑색마법이고 백색룡 알렉시오스의 영역은 빛의 백색마법이지, 공간의 흑색마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은 그가 해낸 일이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다른 누군가가 백룡에게 배웠다면 전혀 다른, 훨씬 형편없는 결과를 낳았을 것이다.


그가 백룡에게 배워 이뤄낸 결과물,


타고난 자질과 용에게서 전수받은 지식을 합쳐 만들어낸, 이전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마법. 전설상으로만 존재하던 색의 마법.


흑색마법.


그가 바로 흑색마법의 시조였다.


흑색마나를, 공간마력을 처음 발견한 것이 바로 그였고, 그것으로 하나의 마법 체계를 만들고 대마법사의 경지에 오른 것이 그였다.


고작 10년도 되지 않는 세월 동안, 백룡설산 깊은 곳의 둥지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 * *




[그래. 인간이여.]


오래 전, 백룡설산 최심부 백룡의 둥지.


젊을 적의 기사, 제국을 부수기로 서약한 유논은 심드렁하니 말하는 백룡, 그 자연스럽게 뿜어내는 기세에 압도되어 몸을 떨고 있었다.

오러를 극한까지 뿜어내야지만 가까스로 감당할 수 있는 존재감. 앞에 선 것만으로도 숨이 막혀 질식할 것 같다.


[이루고 싶은 소원이 있다고?]


세계를 집어삼키는 멸망의 뱀을 보는 듯한 저 새하얀 빛의 비늘들, 영혼까지 꿰뚫어보는 푸른 눈길, 위압되는 눈높이.

손발이 얼어붙는 것 같은 기분으로 이를 떨며 간신히 말한다.


“일단, 말부터, 좀, 제대로···할, 수 있게···.”


겨우 그 몇 마디 내뱉는데도 얼굴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일그러졌다.

개미 기는 듯한 목소리에 용이 제자리에서 거대한 푸른 동공을 움직였다. 미묘하게 일렁이는 흥미로움.


[아, 그래. 지상의 종족들을 직접 만나는 것이 하도 오랜만이다 보니, 잊고 있었군. 이러면 되었나?]


동시에 씻은 듯이 압박감이 사라졌다. 저 거대한 파충류의 육체에서 느껴지는 위압은 여전했으나, 영혼 자체가 짓눌려 압사당하는 감각만큼은 더는 느껴지지 않는다.


이제야 조금 살 것 같다. 차가운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몸을 축 늘어뜨렸다.


유논은 숨을 헐떡이며 눈물콧물 흘러내리는 안면으로 소원을 말했다.


솔직히 크게 고민이 되지만···어쩔 수 없다.


약속은 약속이었다.


설산 마을을 구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의 개인적인 목표, 그러나 가장 어려운 꿈···은 일단 나중에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입을 크게 열고 말하려던 때, 문득.


“···혹시나 싶어서 물어보는데.”

[···?]

“소원을 두 개 빌어도 되겠···습니까?”

[······.]


기가 차다는 듯한 백룡의 눈빛에 오금이 저린다. ‘하하, 역시 안 되겠지요? 농담이었습니다, 농담···.’ 라 말하며 애써 수습하려던 순간이었다.


[어떤 소원이냐에 따라 다르겠지. 하···과연 재미있구나.]

“어떤 점이 재밌다 하시는 것인지?”

[그대는 아는가?]


순간 백룡의 바다같이 깊은 눈동자에 비치는 것은 수많은 전사들의 환영이다. 북부를 하나로 결집시킨 전설 속의 용사들, 과장 하나 없이 도끼로 산을 벨 줄 알았던 괴물 같은 작자들.

전부 용을 만난 이들이었다. 아흔아홉 가지의 과업을 달성하고 용에게 소원을 빌러 찾아온, 말하자면 그의 아득한 선배들.


[전부 마스터의 경지에 달한 이들이었지. 전부 나름의 특색이 있었지만···그대만은 아니었어. 고작 엑스퍼트의 경지에서 날 만난 것은 그대가 유일하다. 엑스퍼트의 경지로 정상에 도달한 이들이라면 몇 있었어도···마지막 과업까지 성공시킨 건 정말로, 특별해.]

“칭찬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그대가 받아들이는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 그대는 나에게 큰 흥미를 주었네. 신수에게 지지 않을 것을 명하는 과제를, 밤의 절벽에서 함께 떨어져 내리는 것으로 해결하는 도전자는 처음 보았으니. 재미가 있었네. 간만에.]

“영광입니다.”

[영광이라. 그대는 재미와 흥미를 긍정적인 개념으로 느끼는군. 그쪽 세상과의 공통분모라 봐야 하는가? 아니면 이쪽에서 후천적으로 습득한 논리인가?]

“···.”


‘그쪽 세상,’ 순간 그의 뇌리를 채우는 것은 경악과 감탄, 그리고 기대와 희망의 빛이다.

역시, 과연 저 용은 그의 출신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가 어째서 이곳으로 넘어왔는지, 돌아갈 방법이 있는지, 그 모든 것의 진실을 알고 있을 터였다···.


[결론을 말하자면, 내용에 따라 달라질 것이네. 다만 그대는 내게 큰 흥미를 주었으니, 꽤나 관대하게 기준을 적용함을 알아두라.]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첫 번째 소원을 말해보라.]


유논은 심호흡 끝에 말했다. 백룡 본인이 직접 관대하게 기준을 적용하겠다고 했으니, 거리낄 것도 없다.


“설산 아래의 마을을 도와주십시오. 그들은 현재 제국의 병사들에 포위되어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다만 그들을 몰아내더라도, 후속 군대가 또 찾아올 것이니···.”

[되었다.]

“···그들에 대한 소식이 본대에 전해지지 않도록···예?”

[되었다고, 그대의 소원이 이루어졌다고 말하였다.]


친절하게 다시 설명해주는 백룡의 모습에 두 눈을 껌뻑인다.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듯한 모습에, 용은 혀를 차며 정신파로 세세히 이야기했다.


[설산의 마을에 위협이 되었던 카라얀 제국 3군단 소속의 제 14백인대는 오늘부로 사라졌다. 단순히 존재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들에 얽힌 기억과 흔적 모두가. 이제 아무도 14백인대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요, 그들과 관련된 그 무엇도 설산 마을에 해를 끼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렇, 군요.”

[거기에 더불어, 북방 지역을 조사하고 다니는 제국군의 인지에서 북방 마을이 자취를 감추게 만들었다. 이제부터 그들은 결코 내가 가호하는 마을에 발을 들이밀 수 없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솔직히 어안이 벙벙했다.

그 짧은 사이에 백인대와 그들에 관련된 기억, 흔적을 통째로 지워 버리고, 또 마을을 제국으로부터 완전히 보호했다고?


아무런 낌새도, 아주 자그마한 마력이 움직이는 것조차 느끼지 못했기에 의심이 드는 것은 사실이었으나, 어쩌겠는가.

백룡 본인이 직접 소원이 이루어졌다 말하는데, 믿는 수밖에. 괜히 의심하는 것보다야 그게 나았다. 북방의 신쯤 되는 존재가 일개 인간을 속여서 얻을 것도 없지 않겠는가.


[무얼. 이런 것을 소원이라 받기도 민망하군. 본래 하려던 일에 약간 신경을 더한 것에 불과하니. 마당을 어지럽히는 잡것들의 청소는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만하면 두 번째 소원을 들어줄 법도 하겠군.]

“그렇다면.”


밝게 빛나는 검은 눈동자에 백룡이 거대한 머리를 위아래로 살짝 흔든다. 동의의 표시.


[첫째는 이루어졌으니, 그대 둘째 소원을 말하라.]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설산 마을은 냉정히 말하자면, 결국은 남의 일이었다.

마을의 촌장, 사냥꾼, 그 밖의 다른 사람들···니샤르···결국은 일 년도 되지 않는 짧은 세월 동안 쌓은 인연이었다.


그의 가슴 속에 뿌리박힌 한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옅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유논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국의 멸망.”

[호오?]

“그것이 나의 소원입니다. 부디 이루어 주십시오, 백룡이시여. 오직 그것만을 위해 아흔아홉가지 과업을 달성하고, 혹독한 설산의 절벽을 넘어 이 자리까지 왔습니다.”


훗날 제국의 적이라 불릴 남자가 잘근잘근 씹어 먹듯 내뱉은 말이었다. 잠시 침묵한 백룡이 침음과 함께 답했다.


[그건 조금 어렵겠군. 다른 소원은 없나?]

“······.”

[첫눈에 봐도 없는 모양이야. 이거 골치 아픈데. 그대의 소원 두 가지를 들어 주겠다 약속하기는 하였으나, 그것 또한 내용에 갈린 일인지라···설사 두 가지가 아니라 한 가지로 집중된 소원이라 해도 제국의 멸망을 내가 직접 나서 일으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불가능하다 말씀하셨습니까?”


그럴 리가 없었다. 제국이 어떤지는 긴 시간 동안 황실 기사단의 일원으로 일해 왔던 그가 제일 잘 알았다.

단단하고 거대해 보이지만, 실상 내부는 요란하게 흔들리며 쇠락해 가는 것이 현재의 제국이었다.


백룡쯤 되는 초월적인 존재가 나선다면, 무너뜨리지 못할 리가 없었다. 적어도 그의 생각에는 그러했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군. 그대의 말이 맞다. 제국 그 자체는 약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뒤에 있는 자는 그렇지 않지. 초월적인 존재가 있다면, 초월적인 존재들의 세상도 있기 마련 아니겠는가.]


순간 낯빛이 어두워진다. 저 말인즉슨, 제국의 뒷배에 백룡과 비슷한 급의 초월적인 존재가 있다는 뜻이었다.

천년 제국이 천년 제국인 데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인가. 그가 아무리 노력해도 애초에 제국을 무너뜨리는 것은 불가능했다는 것인가.


[아, 물론 그대가 신경 써야 할 일은 아니다. 그는 머나먼 천공의 세계에 있고, 그대는 이곳 지상에 머물러 있으니. 불가침의 계약 탓에, 그대가 제국에 아무리 해를 가한다 한들 그는 결코 그대를 해치지 못하네.

다만 이 내가 직접 나섰을 때에 문제가 된다는 이야기이지. 그와 다른 이들과 맺은 계약 탓에, 나는 결코 직접 나서서 그들이 세상에 남긴 유산을 해할 수가 없어. 그랬다가는 고삐 풀린 승천자들이 전부 지상으로 강림해 쑥대밭을 만들 걸세. 전부 엉망이 되어서 창세를 한 번 더 해야 하겠지. 이젠 그럴 힘도 없는데 말이야.]


전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들뿐이었다. 유논은 그럼에도 귀담아 듣다가, 그나마 유추할 수 있는 부분을 집어 물었다.


“혹시 ‘그와 다른 이들’이라 함은 다른 용들을 뜻하시는 겁니까?”

[말이 잘 통하는군. 하필이면 그가 지상에 제국을 남기고 떠난 바람에 나로서도 골치가 아파졌지. 그래도 이젠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지만···.]


퍼뜩 떠오르는 생각. 제국에서 칭송하는 초대 황제, ‘태양.’ 신처럼 떠받들어지는 승천한 해의 전설, 멜로디우스 마그누스 폰 카라얀의 이야기가 설마 거짓이 아니었나.


[옳다. 본래는 인간에게 이야기해서는 안 될 비밀이지만···. 직접 대놓고 말한 것은 아니니 상관없겠지. 남들 앞에서 입 가볍게 떠들고 다니지는 않을 것이라 믿는다, 그대여.]

“···물론이지요.”


순간 미묘하게 서늘해지는 기온. 유논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어찌하겠는가? 그래봐야 위태로운 인간들의 국가, 기다려둬도 수백 년이면 자연히 쇠락하여 없어지게 될 것인데. 기다리는 것은 어떠한가.]

“제 수명이 그때까지 이어진다면 모르겠으나, 그러지 않을 것 같아 문제입니다.”


적어도 죽기 전에 제국이 망해 무너지는 꼴을 두 눈으로 보기는 해야 하지 않겠는가. 쓴웃음 지으며 하는 말에, 백룡이 흠칫했다.


[그러한가. 역시 인간은 인간인가. 수명은 별반 차이가 없는 모양이군.]

“예. 그래서 말입니다.”


이제는 슬슬 저 마음을 읽는다시피 하는 거대한 존재와 대화하는 것도 익숙해졌다. 큰 무례를 저지르지 않는다면 웬만큼 대답해주는 모양이고, 생각보다 이쪽에 호의적인 듯하니, 이 정도는 꺼내 봐도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말문을 열려던 때였다.


[그것도 안 되겠네. 아슬아슬했지만···안 돼.]


백룡이 텔레파시로 말했다. 그러나 젊은 사내는 거절에 좌절하기보다는 오히려 눈을 빛내며 달려든다.


“어째서입니까? 방금은 직접 나섰을 때에 문제가 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제국에 산적한 문제들을 간접적으로 건드려서 망하게 만드는 것은 괜찮지 않을까 싶었습니다만.”


제국에는 적이 많았다. 왕국연맹, 노예제로 생산수단을 잃은 자유농들, 땅과 돈으로 배 불리는 귀족들, 그 귀족들의 최고봉에서 모든 토지를 탐욕스럽게 긁어모으는 황가···.

그 자연스레 멸망으로 향하는 수레바퀴를 간접적으로 조금씩 밀어준다면, 천천히 일어나는 반란의 세력을 몰래 지원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비록 백룡이 직접 나서는 것에 비하면 시간은 더 많이 걸리겠지만, 훨씬 은밀하고 또 간접적으로 제국을 멸망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그가 떠올려 백룡에게 말하려던 제안이었다.


작가의말

이어서 세 편이 더 올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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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5 신의 청사진(1) 22.03.25 202 1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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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1 흑과 백(Black & White)(1) +1 22.03.24 199 9 15쪽
270 스승과 제자(4) +6 22.03.23 218 12 15쪽
269 스승과 제자(3) 22.03.23 190 13 13쪽
268 스승과 제자(2) +3 22.03.23 193 1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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