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에 핵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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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생각.
작품등록일 :
2020.05.16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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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28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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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23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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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사냥(7)

DUMMY

당연히, 용의 본신은 아니었다.


꿈에서조차, 최후의 백색룡은 인간의 형태를 취할 수 없다. 인간뿐 아니라 오크, 엘프, 드워프 등등 그 어떤 종족으로도.


영혼 자체가 스스로가 건 제약에 의해 저 거대한 파충류 신의 형태에 속박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른 종족에 지나치게 가까워져, 친해지고 사랑하게 되는, 그리하여 특정한 이들을 편애하고 다른 이들을 미워하게 되는 불운한 결말을 낳지 않기 위함이라고.


무언가 빠진 듯한 애매모호한 이야기였으나, 적어도 본인에게 들은 바로는 그러했다.


그러니 고대의 일을 모르는 인간으로서는 감히 추측만 해볼 수밖에.


‘고대에 전해져 내려오는 신의 전설은 많고 또 다양하다. 여러 대륙에 골고루 분포해 있다. 개중 거짓된 소문도 상당하고, 한 용이 여러 신의 행세를 한 경우도 많겠지만···그것을 감안하고서라도, 태초에 만들어진 용들의 수가 적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수십 이상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전부 사라지고, 백색룡 알렉시오스만 남아 최후의 드래곤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는가.

세계의 균형을 유지하고 신에 가까운 능력을 지닌, 수명으로 그 어떤 종족보다도 우월한 저들이 죽을 일이 있는가? 사라질 일이 있는가? 세계를 떠날 이유가 있는가?


‘끝없는 노동에 지쳐서 집단으로 파업이라도 한 게 아니라면···용들이 서로를 죽인 것이겠지. 용들 사이의 전쟁일 거다.’


그것이 그가 한참 전의 과거에 추리하여 내놓은 결론이었다.


그리고 전쟁의 이유가, 특정 종족의 모습을 하고 다니던 용들이 그 종족에게 애착을 가졌기 때문이라면.

그들을 지키고자 하고, 그들을 부흥시키고자 하는 욕망을, 세계의 수호자가 아닌 단일 종족의 수호신으로서의 개성을 지니게 되었기 때문이라면.


자기 종족을 보다 번창시키려는 욕심이 서로 부딪혀 신들 사이의 분쟁과 다툼을 낳았다면.

오래된 고문서에 흐릿하게 남아있던 종족 간의 대전쟁이 실은 신들 사이의 전쟁이었고, 그 결과 용들의 수가 현저히 줄게 되었고, 그나마 남은 용들은 스스로의 영혼을 파충류의 육신에 속박하는 제약을 걸게 되었다면.


끼워 맞추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이리 가정한다면 모든 아귀가 딱 맞아떨어졌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지?”


촌장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새파란 동공이 기계의 그것처럼 차갑다.


그렇다. 인간이 아니었다. 인간과 유사한 모습을 하고 있을 뿐, 심장도 뛰지 않고, 피가 흐르지도 않는다.


세상은 저것을 호문쿨루스, 인조 생명체라 불렀다. 그렇기에 용의 자그마한 의식이라도 담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것도. 그보다···일단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은데.”

“지금 이렇게 얼굴을 마주보고 말하고 있지 않나.”

“너 말고.”


피식 웃으며 하는 말에 내기가 실린다. 유논은 촌장의 집을 통째로 날려 버리며 소리쳤다.


【네 본신과. 일대일로, 허심탄회하게. 설마 이딴 쭉정이 같은 영혼의 일부 따위로 흑색의 마법사를 맞이하려 했나? 천하의 백색룡도 겁쟁이가 다 됐군 그래.】


그 찍어 누르는 기세에 인조 생명체에 불과함에도 촌장의 낯빛이 허옇게 질린다. 지팡이를 움켜쥐는 손에는 핏줄이 돋아났다.


“···싫다면?”

“싫다면 강제로라도 찾아가야지. 애초에 그러려고 온 것이었으니. 여기 온 것은 일을 보다 편하게 만들려는 것일 뿐, 네 조력이 정말로 필요한 것은 아니야.”


그 말 대로였다. 설산마을의 촌장이 백룡의 영혼 일부가 담긴 호문쿨루스인 것이, 마을에서 오직 그만이 아흔아홉 가지 과업의 전부를 알고 있었던 이유, 그가 백룡을 만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키, 열쇠인 이유가 무엇일까.


바로 그가 백룡의 거처를 지키는 수문장이기 때문이다. 굳이 따지자면 빛의 신수 다음 격의 하수인, 가디언이라고 봐야 할 터.

그러니만큼 그의 협조를 얻거나, 혹은 그를 제압해 둔다면 백룡에게로 향하는 길이 훨씬 수월해질 수밖에 없었다.


유논 입장에서는 그저 사실을 읊은 것뿐이었다. 그러나 듣는 호문쿨루스, 수문장, 용의 극소수격 영혼, 촌장 입장에서는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흑색의 마법사라···네가 이곳에서도 현실과 같은 위용을 펼칠 수 있을 거라 보는 게냐? 네가 나인 서클의 대마법사라면, 나는 백마법의 시조로부터 태어났다.

이곳은 백룡의 영지이고, 나는 영지를 통제하는 열쇠 일부를 쥐고 있지. 꽁꽁 잠가 놓은 꿈의 세계에 멋대로 침입해 하는 말이, 나의 본신이 겁쟁이라고? 강제로라도 그를 대면하겠다고? 하!”


분명 아무런 마력도 움직이지 않는데도, 촌장의 주위에서 놀랍도록 위험한 낌새가 느껴졌다.

필시 용에게서 넘겨받은 꿈을 조작하는 능력일 터. 일종의 자각몽, 스스로의 정신을 통제하는 의식의 영역이기에 마력이나 마나와는 연관이 크지 않은 것이다.


[네가 그리 말할 자격이 있는지 확인하겠다!]


그리 말하며 손을 뻗자, 순식간에 팔이 거인의 그것처럼 부풀어 오른다.

바위 거인의 주먹, 설산의 냉기와 거암의 단단함을 품은 거대한 암석의 망치가 마법사의 정수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그러는 와중에도, 흑색의 마법사 유논은 재밌는 구경을 한다는 듯 멀뚱히 올려다볼 뿐이었다. 스스로가 결코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모종의 확신이라도 있는 것 같다.


[마법도 쓰지 못할 것이, 허세를 부리는구나!]


그러나 촌장도 촌장 나름대로 자신이 있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결국 용의 꿈속이다. 그리고 그는 용의 일부였다.


이 작은 세상에 걸린 제약은 그가 만든 것이요, 제약의 굴레 안에서는 그 누구도 마력을 바깥으로 방출할 수 없다.

마법도, 오러도 전부 마력을 몸 밖으로 뿜어내는 성질의 능력임을 생각해 본다면 흑색의 마법사라 한들 별 수 없을 터.


신체를 마력 회로로 개조했고, 또 타고난 전투 능력까지 있으니 어느 정도는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꿈의 봉쇄를 뚫는 것까지는 불가능하다. 본신을 만날 수는 없다.


제아무리 흑색의 마법사라도, 불세출의 천재, 이계에서 온 괴물 같은 존재라도 안 되는 일이 있는 법이었다.


[네가 왔던 곳으로 돌아가라!]


콰─아아아아아앙────!


둔중한 충격, 으깨지고 부서지는 소리. 파장이 육안으로 보일만큼 멀리 뻗어나가 설산을 두들긴다. 압력이 마을을 폭삭 무너뜨려 버렸다.


그리고 거인의 돌주먹에서는 흙더미가 쏟아졌다.


못 위로 망치가 떨어졌건만, 못은 그대로다. 오히려 망치만 부서져 버렸다.


[······!]


우수수 가루로 변해 떨어지는 주먹 아래, 별빛 옷자락을 흘리는 검은 머리의 사내가 있었다. 전신에 이질적인 광채를 두르고 있어,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은 듯 멀쩡하다.


촌장은 놀라 뒷걸음질을 치면서 다른 한쪽 손을 뻗었다. 동시에 멈춰 있던 꿈속의 시간이 뒤틀리며 모든 것이 슬로우 모션으로 흘러간다.

다가오지 말라고 소리치는 듯 적잖게 당황한 모습.


그러나 엷은 발돋움 한 번에 내면의 기운이 물결친다. 지면을 물렁한 젤리처럼 튕겨내는 파동을 뿜고선, 마법사의 몸이 느린 흐름을 찢어내며 쏜살같이 다가왔다.


이쯤 되면 싫어도 눈치 챌 수밖에 없다. 저 흑색의 마법사가 무언가 새로운 수단을 준비했다는 것을, 마법이나 오러가 아닌 새로운 능력, 마력을 외부에 방출하지 않고서도 사용할 수 있는 초인적인 권능을 손에 넣었다는 것을.


그러나 상대도 용의 일부였다. 그렇다 한들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숨을 흡 들이키고 뱉어내자, 분명 인간의 안면과 구강일 것인데 시퍼런 초고열의 불길이 쏟아졌다.


화르르르르륵─


세상 그 무엇이라도 단숨에 녹여 버릴, 땅과 눈, 얼음 모두를 정체불명의 액체로 만들어 버리는 숨결이 새카만 눈에 들어온다.


유논의 대처는 단순했다. 바위 거인의 주먹을 막을 때와 다를 것도 없다.


그는 여전히, 변함없이 별빛 강기가 흘러 짜인 우산을 들어 올릴 뿐이다.


마력이 없다 해도 용의 파편이 뿜어내는 불길이다. 태고의 열기를 담은 위력일진대, 반짝이는 장막 앞에 무참히 갈라져 나갔다. 가벼운 불똥처럼 튕겨 나가, 이내 마법사가 죽 뻗은 손에 무언가 턱 하고 잡힌다.


“커헉─”


안면을 벌겋게 물들이며 용암 토해내던 목이 한 손 안에 들어온다. 다시금 희끗희끗한 노인의 얼굴로 돌아온 촌장이 끝까지 반항하려는 듯 허공에 발길질했다.


그러나 목을 쥐어짜는 압력은 도무지 약해지질 않는다. 점차 더욱 강해져서, 제아무리 튼튼한 인조생명체의 목줄이라도, 바위와 강철조차도 단숨에 짓이길 듯한 악력으로 누른다.


푸른 눈이 빛을 잃고 식어가던 때에.


갑자기 축 늘어진 육신이 뻣뻣하게 일어섰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이, 입 없이 움직이는 정신파가 움직인다.

그 자체로 위압적인 거대한 영혼, 착시로 유발되는 새하얀 섬광, 자연스레 떠오르는 백색 최후룡의 장엄한 모습.


그였다.


이 세계의 주인, 죽음조차 속이고 꿈속으로 도망친 신. 시드의 가슴 속 씨앗을 만들어낸 창조자. 그의 친우.


알렉시오스.


=그래. 내가 맞다. 덕분에 참 번거로워졌어. 결국 여기까지 찾아왔으니, 마력을 차단해 두어도 소용이 없는 듯하니···하. 그래. 네 고집을 누가 말리겠나. 무슨 말을 하려고 왔는지 들어는 봐야겠지.=

“역시 듣고 있었군.”

=내 일부인데, 듣지 않을 수도 있나? 됐다. 어차피 소용없을 테니···마력을 풀어주지. 결계나 방호 마법도. 내 직접 너를 부르기에는 번거로우니, 알아서 찾아와라. 어디인지 정도는 기억하고 있겠지.=


그리고는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더는 알렉시오스의 영혼이 느껴지지 않는다. 호문쿨루스에서조차. 그 짧은 찰나에 자신의 자그마한 영혼 조각, 수문장의 의식을 회수해 돌아간 것이다.


“···.”


과연 쉽지 않은 상대였다. 무엇이든 이루어질 수 있는 꿈 속 홈그라운드, 자신의 견고한 레어에 위치한 백색룡이라.

한마디로 전성기 시절로 되돌아간, 심지어 자신의 성지에 굳건히 자리 잡고 있는 창조신이었다.


반면 그 상대로 나서야 하는 그는, 불완전하고 또 불안정한 상태이다. 대마법사의 나인 서클 중 오직 원 서클만을 해금한 상태의, 그 원 서클마저 죄책감에 온전하지 못하고 흔들리는 나약한 마법사 하나.


세상을 흔들기에는 충분한 능력이나, 진정으로 세상을 바꾸기에는 언제나 부족했다. 세상을 망하게 만들 수는 있어도, 세상을 고치거나 재생시킬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지금 이 자리에서조차, 그는 세상을 망치고자 한다. 세상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용의 안식을 방해하고자 한다. 창조를 멈추고 멸망을 방조하고자 한다.

제자 하나 구하려고.


유논은 눈을 감았다.


다시금 바깥에 나도는 흑색마나와 공간마력을 느끼며, 허공에 원을 그린다.


서클 원一, 구멍 다리.


새카만 구멍이 눈앞에서 서서히 다가와 제 주인을 집어삼킨다. 익숙한 공간 이동의 감각이 발끝부터 머리까지 휘감고,


눈을 떴을 때엔 빛의 결정체가 그를 마주보고 있었다.


먼 옛날 그 순간처럼, 백룡이 그의 눈앞에 있었다.


=오랜만이군, 친우여, 그리고···.=


=제자여.=


해야 하는 일이다. 하고 싶은 일이기도 했다.


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해낼 것이다.


그러기 위해 수없는 세월을 거쳐 여기까지 왔다.



흑색의 마법사 유논은 대답했다.


“그래, 오랜만이다. 나의 친우여···.”


나의 스승, 최후의 백룡 알렉시오스여.


작가의말

드래곤 사냥(7)을 빼놓고 안 올렸더군요.

이어서 다음 소제목인 스승과 제자가 올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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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5 신의 청사진(1) 22.03.25 202 11 13쪽
274 흑과 백(Black & White)(4) +2 22.03.24 209 14 15쪽
273 흑과 백(Black & White)(3) 22.03.24 183 11 13쪽
272 흑과 백(Black & White)(2) 22.03.24 182 13 13쪽
271 흑과 백(Black & White)(1) +1 22.03.24 199 9 15쪽
270 스승과 제자(4) +6 22.03.23 218 12 15쪽
269 스승과 제자(3) 22.03.23 190 13 13쪽
268 스승과 제자(2) +3 22.03.23 192 11 13쪽
267 스승과 제자(1) 22.03.23 189 11 13쪽
» 드래곤 사냥(7) 22.03.23 202 10 12쪽
265 드래곤 사냥(6) +2 22.03.22 196 15 14쪽
264 드래곤 사냥(5) 22.03.22 185 11 15쪽
263 드래곤 사냥(4) +2 22.03.22 191 12 14쪽
262 드래곤 사냥(3) 22.03.22 198 8 14쪽
261 드래곤 사냥(2) 22.03.22 190 1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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