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에 핵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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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생각.
작품등록일 :
2020.05.16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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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28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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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27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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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에필로그(完)

DUMMY

깨어났을 땐 병실이었다.


낯선 천장, 흰색 이불, 특유의 약 냄새.


뭐지? 잠을 너무 오래 자서 병원으로 이송되기라도 했나? 알고 보니 지난 몇 년간 식물인간 상태였다거나, 그런 설정인가?

마법사에, 외계여행에, 운석 낙하에···병신 같은 꿈을 꾼 데에 이유가 있었던 건가? 나 죽을병에 걸리거나, 교통사고라도 당했던 건가?


그리 찝찝해하며 몸을 일으키자마자 알아차린 사실이 있었다.


이곳. 병실, 병원, 혹은 그 무엇이 되었건. 내가 살던 곳의 시설은 아니었다.


침대는 목제다. 링거 따위는 없다. 입고 있는 옷은···합성섬유의 환자복이 아니라, 비단옷이다.

비단, 실크. 이 묘한 감촉은 그것 말고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도대체.”


벌떡 침대에서 일어나, 옆면의 창을 가리는 커튼을 걷었다. 그러자 밝은 햇살이 방안을 비췄다.


부신 눈을 뜨고 바라본 바깥은···하얀색이었다. 새하얀 서양식의 신전, 청사, 쭉 늘어진 건물들. 그리고 그 주위의 녹색 풀들과 정원.

묘하게 익숙한 광경이었다. 어디서 봤나 생각했더니, 곧바로 떠오르는 은빛 도시의 모습.


정화교 쉘터.


혹시 싶어 눈을 집중하니, 주위 건물들에 새겨진 글자가 보였다.


‘정화’, ‘성전’, ‘심문청’, ‘수도원’···.


“아, 젠장. 안 돼.”


그걸 보자마자 얼굴을 쓸어내렸다. 또, 또 꿈이라고. 꿈속의 꿈? 진짜 지랄 맞다.

아니 어떻게 아직도 안 깨어났을 수가 있지? 그렇게 심하게 떨어졌는데─.


벌컥.


갑작스레 병실 문이 열렸다. 민감하게 반응하며 뒤로 돌아 주먹을 들고 엉거주춤 자세를 취했다. 이번엔 또 뭔데.


“···.”


이내 나타난 것은 푸른 머리의 여인이었다. 기이한 문양들이 그려져 있는 검은색 복장을 갖춘 그녀는, 내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기라도 한 듯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깨어났구나.”

“예, 깨어나긴 했는데요. 그래서 당신은─.”


무어라 말할 틈도 없었다. 여인은 곧바로 내게 달려들었다. 그 속도가 원체 빠른지라 제대로 반응하지도 못하고 당해버렸다.


그녀의 포옹을.


와락 끌어안자 향긋한 포도 냄새가 났다. 내게 형제자매는 없지만, 만약 언니가 있다면, 언니가 나를 이렇게 안아주면 이런 느낌이지 않았을까···.


그 부드럽고 따뜻한 품에서 한참을 버둥거리고 나서야 벗어날 수 있었다.


“피오네?”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말이었다. 나조차도 어디서 그 말이 나왔는지 알 수 없을 의문스러운 단어.

그러나 여인은 그 정체불명의 명칭에 만족스러워했다.


“멍해 보여서 걱정했는데, 기억은 멀쩡한가 보구나.”


아니요, 안 멀쩡한데요. 그렇게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여인이 하도 기뻐 보여서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굉장히 차갑고 딱딱하게 생긴 여자인데, 나를 바라볼 때의 표정만은 몹시 부드러웠다.


“유논 님이 옳았어. 다행이다.”


나도 모르게 함께 웃고 있던 것이, 그 말을 듣자마자 싹 달아나 버렸다. 그 이름은 왜 또 나오는 건데. 짐작하긴 했지만, 세계관이 연동되는 꿈이야?


내 복잡한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푸른 머리에 하늘빛 눈을 지닌 여인-아마도 피오네가 이름인 듯한 그녀는 품에 손을 집어넣었다.

아까와는 달리 꽤나 무겁고 진지한 표정이다. 어딘가 슬픈 기색마저 묻어나왔다. 정확히 유논이라는 이름을 언급하고 나서부터 그리 되었다.


“그분께서 네게 이걸···전하라 하시더구나.”


주저하며 꺼내든 그것은 자그마한 검은색 펜이었다. 고풍스럽고 유려한 선의 만년필, 어딘가 익숙한 기운이 느껴지지만, 필기도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폭탄이라도 튀어나올 줄 알고 긴장하고 있었다가, 생각보다 훨씬 평범한 물건이 등장해서 한시름 놓았다.


색깔이 수상쩍을 정도로 영롱하게 새카만 것이 신기하긴 하네. 흑요석이나 블랙 다이아몬드 뭐 그런 걸로 만든 건가?


피오네는 펜을 내 앞 책상에 내려놓았다. 매우 조심스럽게 양쪽 끝을 잡고 살포시 두는 것이 정말 폭탄이라도 다루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이제 필요 없다고, 네게 더 쓸모 있는 물건일 거라고, 이것이 너를 많이 도와줄 거라고 말하더구나.”


만년필이? 도대체 얼마나 훌륭한 만년필이기에 날 많이 도와주기까지 한다는 거지?

내가 한창 공부할 나이의 고등학생이긴 하지만, 요즘 대세는 만년필이 아닌데 말이지. 볼펜이나 샤프, 형광펜을 쓰지 누가 이런 걸 들고 다녀.


더군다나 겉모습이 어딜 봐도 실생활에서 쓰는 펜보다는 장식용으로 걸어 두어야 하는 고급 예술품이었다.

하나에 천만 원씩 하는 장인의 수제 만년필, 그런 거. 부담스러워서 학교에 가져갈 수 있을 리가.


혹시 팔아서 돈을 벌면 그 돈이 날 도와줄 거라는 이야기인가? 그런 거라면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는데···.


“이제는 네 물건이니, 살펴봐.”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펜을 들어올렸다. 그 서늘하면서 매끄러운 감촉, 펜이 아니라 구름을 쥐고 있는 듯한 느낌.

분명 들고 있는데도, 공기밖에 없는 것처럼 아무런 무게감이 느껴지질 않는다.


스스스슥···.


피부에 닿자마자 펜의 중심부가 묘하게 갈라지며 은빛 글자가 새겨졌다.



‘시드에게 For Seed.’



시드···?


미래의 씨앗을 위해. 뭐 그런 건가.


어쩐지 그 이상의 의미가 담긴 것 같은, 이대로 넘어가서는 안 될 것 같은, 맹세코 분명 들어본 적 있는 명칭이었으나···그냥 넘어갔다.

더 생각했다가는 또 두통을 앓을 것 같았다. 벌써부터 누군가 뇌를 바늘로 찌르는 듯 콕콕 아프다.


그나저나, 분명 아까는 아무것도 없는 표면이었는데. 당황해서 고개 들어 피오네를 바라보았으나, 그녀는 어딘가 슬픈 눈으로 만년필을 담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 뭐 생체인식 시스템 그쯤 되는 거라고 생각하자. 지문인식 홍채인식 같은 게 보편화된 세상인데, 꿈에서도 비슷한 게 얼마든지 나올 수 있겠지.

가슴으로는 그런 과학기술 따위가 아님을 알고 있었지만, 머리로 그렇게 합리화하며 펜을 손에 쥐어 보았다.


츠즈즈즈─


“···신기하네.”


만년필이 자동으로 형태를 바꾸며 내가 쥐는 방식에 맞춰서 적용되는 모습. 확실히 대단했다. 과학기술이 얼마나 발달해야 이런 펜이 나올까?


그런데···뭔가 찝찝했다.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듯한 기분. 유논이라는 작자가 내게 전한 물건이 이 정도에서 끝날 리 없다 강렬히 울리는 직감.


고개를 갸웃하자,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피오네가 입을 열었다.


“뚜껑.”

“예?”


그리 툭 내뱉고는 자신의 역할은 여기까지라는 듯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그대로 몇 초가 지나고 나서야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 만년필 뚜껑. 하도 펜이랑 일체된 것처럼 가볍고 작게 생겨서 뚜껑이 있는지도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 내가 만년필을 만져본 적이 있어야 알지.


머쓱한 기분에 손을 뻗어서 뚜껑을 붙잡았다가, 어쩐지 엄숙하고 긴장되는 분위기 속에서 펜을 열었다.

그래, 고작 만년펜 뚜껑 하나 연다고 무슨 별일이야 있겠어.


철컥─.


그러자 이제까지와는 다른 묵직한 소리와 함께, 펜이 움직인다.


“어?”


손에 최적화된 형태로 변모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변화다.

만년필의 경계를 뛰어넘어서, 내 손을 강제로 붙든 채 훨씬 길고 커다란 동체가 작은 펜 속에서 튀어나왔다.


지이이잉.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주위 모든 빛을 흡수하는 듯한 새카만 스태프를 들고 있었다.

존재만으로도 중압감을 내뿜는 쿼터스태프, 마법과 신비로 가득한 예술적 형태의 봉이자 지팡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빨려 들어갈 것 같다. 새카만 표면 위에는 우주를 담은 듯 별빛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그 묵직한 존재감이 내 손을 타고 전해진다. 피오네가 말하길, 이것이 유논이 내게 전한, 내 물건이었다.


“이름 없는 지팡이···.”


저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저절로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은빛의 지팡이.

마법의 매개로, 마탄의 총기로, 부러지지 않는 검으로 만변하는 제일의 무구.


흑색의 마법사 유논의 애병.


홀린 듯 물었다.


“원래는, 은색이지 않았나.”

“네가 깨어났을 때, 검은색으로 변했다. 때가 되면 지팡이가 직접 알려줄 거라더니, 그게 정말이었어.”


본래 은빛이었던,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신의 금속 특유의 지팡이가 새카맣게 물든 이유라면 한 가지밖에 없었다.


흑색마나. 흑색의 마법사를 상징하는 근원적인 힘.


유논은 나에게 자신의 지팡이를, 그리고 그 지팡이 속에 자신의 힘을 남긴 것이다···.

이상하게 코끝이 시큰거렸다. 내가 왜, 이런 지식들을 알고 있는 것일까. 이 검은 지팡이는 도대체 뭐기에 바라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쥐어 짜이는 기분일까.


멍하니 지팡이를 쥔 채 원인 모를 감정의 격류에 휩싸여 있을 때였다.


“그 지팡이의 이름은 이름 없는 지팡이가 아니다.”


피오네가 문득 말했다. 지팡이를 향해 턱짓하면서.


“오는 길에 본 것이지만···새 이름이 생겼더군.”

“···.”


손잡이 부분을 쓸어내리자 또다시 은빛 유려한 글씨가 음각되었다. 서서히 드러난 문장이 동공을 사로잡는다.



‘뒤늦게 생긴 지팡이의 이름은 가이드Guide.

우주로 떠나고자 하는 어린 여행자를 위한 안내서라 하라.’



‘···우주여행하면, 그때 같이 따라가 주긴 해야 해요? 관광 가이드 역할쯤은 해줄 수 있잖아!’



얼굴이 축축했다. 손을 대어보니 물기가 만연했다. 입가까지 흘러내려 짰다.

메마른 채 떨리는 입술. 도저히 진정되지 않는 떨림. 머리가 찢어질 듯 아팠다.


손가락이 턱 하고 걸린다. 무언가. 아래에 이어진 글씨가 더 있었다. 물기 때문에 흐릿하게 번진 시야를 닦아내며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이 물건, 가이드라는 이름의 지팡이는 본디 흑색의 마법사 유논의 소유물로, 흑색의 마법사 본인에 의지에 근거해 그의 직전제자, 현 소유주인 엘리자베스 시드 카라얀에게 증여되었음.


위의 내용을 이전 소유주, 마법사의 이름으로 증명하여 서명함. 유논.’



그 매끄러운 서명을 매만지고 있노라면 떠오르는 사실.


이름에는 힘이 있다.


그렇기에 과거, 이제는 까마득할 정도로 머나먼 과거.

처음 소녀를 만났을 때, 마법사는 그녀의 이름을 묻지 않았다. 서로 이름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인연이 엮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그리고 그렇기에, 소녀를 제자로 받아들일 때에는 오래된 서약에 따라 소녀의 이름을 물었다.

자유도시, 푸른 불의 비가 내리던 날의 새벽. 소녀는 스승의 이름이 유논임을 알게 되었고,


유논은 제자의 이름이 시드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황실의 기록 보관소에서 제자의 진정한 이름을 되찾았다.


엘리자베스 시드 카라얀.


카라얀 황가의 직계 혈통, 마지막 황녀.

선택받은 용의 자손, 금색마나의 적성자.


그리고 흑색의 마법사 유논의 제자.


“엘리자베스, 시드···카라얀.”


이름에는 힘이 있다.


꿈에서 깨어나게 만드는 힘이.


기억을 재생하는 힘이, 오랜 꿈속에서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자기 자신을 되찾게 하는 힘이.


이제야, 그녀는 지금 그녀가 경험하는 이 순간이 결코 꿈이 아님을, 사실 그녀는 진즉에 잠에서 깨어났으며, 이 모든 것이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임을 깨달았다.


그렇기에 기억을 되찾자마자 그녀는 오열할 수밖에 없었다.


안개에 가려져 있던 머릿속이 돌연 맑게 갠다.


이제는 감정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신성을 타고난 금색 눈이 극성으로 발동되어 과거에 있었던 일을, 제 자신이 멀쩡한 모습으로 잠에서 깨어나기 위해 전제되었던 수많은 사건들을 보여준다.


유논, 나의 스승 유논. 흑색의 마법사 유논···그가 날 살리기 위해.


돌연 몸이 휘청였다.

가이드를 쥔 손끝에서 땀이, 소름이, 떨림이 흘렀다.

지팡이의 무게가 너무도 무겁게 느껴졌다. 이대로라면 놓아 버릴 것 같았다.


피오네가 그런 나를 붙잡았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몸을 부축하고 침대 위에 앉힌다.

그녀는 자신의 어깨 위에 내 머리를 얹었다.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하다.


검은 옷감을 눈물, 콧물, 침으로 적시며 갈라진 소리를 질렀다.


이래서 꿈같은 현실, 현실 같은 꿈이었나. 이래서 내가 꿈을 꾸고 있었나, 현실로부터 도피하려고.

도대체 무슨 염치가 있어서,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


그것도 심지어 그의 고향을. 그가 평생을 애증하던 지구의 한국을 배경으로 한, 그 평화롭고 일상적이기 그지없는 꿈을.


아직까지도 뇌리에 이미지들이 선명했다. 내가 쓰러지고 괴로워하는 유논의 모습이.

그렇게나 싫어하던 방사능의 아이들-지구숭배자들-죽지 않은 자들의 군세 사이에, 싫어하다 못해 증오해 마지않던 전쟁을 일으키는 그의 모습이.


오직 나를 살리기 위해서, 오직 내게 정해진 운명을 바꾸기 위해서.


그것만을 위해서 용과 싸웠다. 과거의 스승이자 친우를 죽이고 용언을 강탈했다. 세계수의 씨앗을 가져와 나의 가슴 속에 심었다···.


그리고 갈 곳 없어진 용의 씨앗을, 한낱 인간으로서는 결코 감당할 수 없을 그 신성을 통으로 삼켜 버렸다.

그게 세상을 구하고, 제자도 구할 유일한 방법임을 알고 있었기에. 여전히 세상에 갚을 빚이 있다 여겼기에.


그런데 나는 그동안 꿈속에서 나를 위해 희생한 스승의 고향 세상이나 탐방하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하는 건데. 신, 그까짓 거. 나도 할 수 있었는데···.


그런데 이제 내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내 스승이, 너무나도 위대하고 대단한 내 스승 유논이, 내가 할 일들을 모두 빼앗아서 대신 해 버렸다.


날 살리고 세상까지 구해 버렸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이렇게 아무 짝에도 쓸모없이 울고불고 절규하는 것뿐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할 수···.



‘다음에 만날 때엔 네가 날 찾아와라.’



쿵.

가슴이 내려앉은 한 마디 말. 어디서 들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모든 꿈이 그렇듯, 스승과 함께한 여정 또한 깨어나자마자 흐릿한 안개 속으로 감춰졌기에.



‘그럼 다음에 보자, 시드.’



하지만 그 지워진 기억 속에서도 알 수 있는 사실 하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직 하나 남아있었다. 내가 해야만 하는 것이 하나 있었다.


부들대는 팔로 지팡이를 짚고 일어섰다. 부축해주는 피오네에게 의지해 다시금 두 발로 섰다.


“가야 해.”


그것은 일종의 정언 명령이었다. 내 두뇌에 새겨진 하나의 법칙.

나는 그를 만나야 했다. 그를 찾아가야 했다.


피오네가 방을 나가려 움직이는 날 붙잡으며 말했다.


“어딜 간다는 거야. 넌 더 쉬어야 해. 몇 달 만에 막 일어난 거라고.”

“유논.”


그 말 한 마디에 침묵이 감돈다.


“아저씨한테, 제 스승한테요.”


피오네는 내 어깨를 붙잡고,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정말 꺼내기 힘든, 꺼내기 싫은 말을 억지로 뱉는 표정이다.


“네 심정은 이해한다. 하지만 그분은, 그는···가 버렸다. 이젠 찾을 수 없어.”

“아뇨, 난 찾을 수 있어요.”

“시드!”


시드, 시드. 그래, 그게 내 이름이었다. 다들 나를 그렇게 불렀다.


피오네, 그녀가 화를 낸다. 붉어진 눈시울이 억지로 슬픔을 삼키고 있었다. 하지만 할 말은 해야 했다.


“죽지 않았어.”

“그건···하지만, 유논 님은.”

“언니가 왜 그러는지는 나도 알아. 하지만, 꿈을 꿨어. 그리고 느꼈어. 지금 이 지팡이에서도 느껴져.”


몹시 미약하지만, 분명히 연결되어 있는 유논의 기운이. 스승의 흔적이.


“바로 저기.”


지팡이를 뻗어 지평선 너머 머나먼 어딘가를 가리킨다.

지팡이 속 흑색마나를 통해 접촉한 공간의 감각이 알리길, 이 방향으로 쭉 나아가면, 아주 멀리 나아가면···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이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과거의 기운을 되찾은 영산이. 온갖 마법적인 힘과 자연의 신비를 품은 재생한 세계의 중심이.


그곳에 유논이 있었다. 분명했다.


“죽었던 세상이 살아났어. 언니도 알고 있을 거야.”

“···그건.”

“스승님이 성공한 거야. 정말로 신이 되어 버린 거야. 신의 탄생은 곧 인간으로서의 죽음이라고는 하지만···.”


나는 분명 꿈을 꿨다. 그리 신이 되고서도, 인간 유논이 어딘가에 남아 내게 말을 건 흐릿한 기억이 있었다.


분명 그는 내게 찾아오라 말했었다.


그러니까, 그는 분명 살아있었다. 어떻게든 살아있는 것이 분명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흑색의 마법사가 그리 쉽게 사라질 리 없었다.


“그러니까 찾아갈 거야. 이번엔 내가 스승님을 찾을 거야.”


언제나 그가 먼저 날 찾았었다. 시라센 요새에서도, 자유도시 갈란에서도, 신의 알 속에서도···. 항상 그가 날 구했다. 모든 때에, 모든 곳에서.


이번에는 다르다. 달라야만 했다.


이번에는 내가 스승을, 유논을 찾아간다.


“그러니까···도와줘.”


한쪽 손으로는 지팡이를 잡고, 다른 한쪽 손을 피오네에게 내밀었다. 내가 유일하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언니에게.

저 물빛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는 스승의 동료에게.


피오네 갈란은 잠시 침묵하다 엘리자베스 시드 카라얀의 손을 붙잡으며 대답했다.


“그 말, 진짜여야 할 거야.”

“걱정하지 마. 괜한 희망은 아닐 거니까.”


굳은 눈동자로 마주보며 답하자, 그제야 피오네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인다.


“이상한 소문이 돌긴 했지. 세상을 살리고 기적을 일으킨 신이 나타났다는, 그 신은 성산 위에 자리를 잡았다는···. 관련된 종교가 무섭도록 빠르게 세를 펼치고 있다던데.”

“바로 그거야. 그 성산이라는 곳에 아저씨가 있어. 그 종교도 분명 뭔가 연관이 있을 거야.”


흐릿하던 목적지가 밝혀졌다. 눈에 보이는 목표가 생겼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속으로 외쳤다.


‘곧 만나러 가, 스승님.’


신이건 괴물이건, 검이건 마법이건. 무엇이 길을 막고 있건, 스승이 무엇으로 변했건 상관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단 하나.


내가 유논의 제자이며, 유논을 만나러 갈 것이라는 사실.


제자와 스승, 사제관계의 약속.

스승도 깨뜨릴 수 없으며, 제자도 깨뜨릴 수 없는, 혈연보다도 더 짙은 운명.


그렇기에 울음과 웃음 섞인 목소리로 당당히 말할 수 있다.


“어디를 가든, 함께하기로 약속했으니까.”


어떻게 해서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약속을 지키고야 말겠다는 사실 단 하나.


내가 찾아갈 것이라는, 어떤 고난과 역경이 있을지라도 결국에는 나의 스승과 함께할 것이라는 운명적인 확신 단 하나.


그거면 충분했다.


나는 흑색의 마법사 유논의 제자, 금색의 마법사 엘리자베스 시드 카라얀이니까.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마법사, 신을 창조한 마법사에게서 직접 배운 내가 해내지 못할 일이라곤 존재하지 않으니까.


시드는 젖은 얼굴로 웃었다.


오직 한 사람을 찾기 위한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하며.


그녀의 스승이자 친구, 보호자이자 가이드, 동료이자 그리고 아버지인,


유논을 만나러 갈 준비를 하며.



-完-


작가의말

에필로그가 끝났습니다. 이제 정말로 완결이 났군요. 자세한 후기는 내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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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1 흑과 백(Black & White)(1) +1 22.03.24 199 9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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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9 스승과 제자(3) 22.03.23 190 13 13쪽
268 스승과 제자(2) +3 22.03.23 193 1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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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4 드래곤 사냥(5) 22.03.22 187 11 15쪽
263 드래곤 사냥(4) +2 22.03.22 191 12 14쪽
262 드래곤 사냥(3) 22.03.22 198 8 14쪽
261 드래곤 사냥(2) 22.03.22 190 1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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