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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slaa
그림/삽화
리건
작품등록일 :
2020.11.17 09:21
최근연재일 :
2021.02.1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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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20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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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문무를 겸한 선비 (상)

판타지 소설로 송나라 역사를 배우다!




DUMMY

새벽 해가 불쑥 떠오르니

하늘에 붉은 비단이 깔린듯하고

가을바람 스산하게 불어오니

온산에는 노란 잎들로 빈틈이 없네.


하룡촌의 가을 새벽은 짙은 붉은색과 노란색이 서로 교차하고 하늘과 산의 색은 마치 그림과 같았다. 끊임없이 흐르는 마을 밖의 적수 소리에도 어느덧 한기가 서려 있었다.


적수 강변의 공터에서 화살이 날아가는 소리가 쉬익, 하고 울렸다. 긴 화살 하나가 활을 떠나 스무 보 떨어진 곳에 놓인 볏짚 과녁 한가운데에 가서 박혔다.


화살이 날아가는 족족 과녁에 명중하자 온 정신을 집중해 몰두한 한강의 표정에 미소가 어렸다. 활을 잡은 두 손을 아래로 늘어뜨리고 숨을 몇 번 몰아 쉬었다. 한쪽 옆에 서 있던 한운낭이 뛰어오더니 까치발을 들고 초록색 수건으로 한강 이마에 난 땀을 닦아 주었다.


옛날 복식의 저고리는 소매가 넓어서 운낭이 손을 들어 올리자 팔꿈치까지 소매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옥처럼 매끈하고 하얀 팔뚝이 한강의 눈앞에 어른거리자 은은한 살 냄새가 풍겨왔다. 그녀의 키는 한강의 가슴팍 정도여서 어른 머리 크기보다 더 차이가 났다.


팔을 들어 한강의 땀을 닦아 주려니 자연히 몸이 한강에게 밀착될 수밖에 없었다. 몇 겹의 얇은 옷을 사이에 두고 운낭의 몸이 한강의 가슴에 밀착된 바람에 부드러운 온기가 전해왔다. 한강은 약간 흥분되었다. 장난기가 발동해 두 팔에 힘을 주자 한운낭은 아야, 하고 귀여운 비명을 지르며 그의 품 안으로 풀썩 안겼다.


“오라버니 이러지 말······.”


한운낭은 수줍어하며 한강의 팔에서 빠져나오려고 했으나 그의 팔 힘이 워낙 세서 벗어나지 못했다. 가냘프고 부드러운 몸이 품에서 요동치자 한강의 마음은 순식간에 확 달아올랐다. 한층 더 친밀한 동작을 해보려는데 멀리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운낭은 그 소리에 화답하듯 저항이 더욱 거세졌다. 집 밖이었으므로 한강은 더 어쩌지 못하고 팔 힘을 풀었다. 한운낭은 한강을 밀쳐내고 한쪽 옆으로 도망가더니 입을 삐죽이 내밀고 고개를 돌린 채 다시는 가까이 다가오려 하지 않았다.


운낭은 씩씩거리며 숨을 쉬고 있었는데 아침 태양이 그녀의 얼굴에만 비치는 것처럼 볼도 발그레하고 귀까지 새빨갛게 변했다. 한강은 하하, 하고 가볍게 웃고 나서 다시 활을 들어 올렸다. 더 이상 그녀를 놀리지 않았다.


한강이 지금 든 활은 예전 자신이 쓰던, 작은 형이 선물해 준 1석 3두의 강궁이 아니고 아버지 한천육이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7두짜리 사냥용 활이었다. 오랫동안 보관만 해오던 활이라 활이 버티는 힘도 반으로 줄어들어 지금 그의 체력으로도 손쉽게 당길 수 있었다.


요즘은 새벽에 강변으로 나와 활을 당겼다. 자신이 한강이 아니라는 게 탄로 날까 봐 전 주인의 행동을 따라 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하루빨리 건강을 회복하려면 몸을 단련해야 했다.


이 시대는 항생제도 없고 현대의학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으니 병이 나면 목숨을 잃기 쉬웠다. 한강의 몸을 빌려 다시 살게 된 지금, 생명의 소중함을 두 배로 더 크게 느꼈다. 어렵게 얻은 두 번째 목숨이니만큼 튼튼한 몸으로 만들고 싶었다. 비록 신체를 단련한다고 모든 병을 다 물리칠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몇 년은 더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과녁 앞으로 걸어가 앞서 쐈던 화살을 모두 뽑아서 원래 겨냥하던 위치로 돌아와 다시 활을 당겼다. 활시위는 일정한 진동으로 떨었고 화살은 한 발 한 발 목표에 정확히 꽂혔다. 며칠간의 연습으로도 명중률이 많이 증가했다. 몸은 본래 기억하고 있던 상태로 점점 회복되었다. 화살 쏘는 자세나 활시위를 당길 때 손가락 모양이 처음 연습을 시작할 때보다 훨씬 정교해졌다.


해가 대나무 장대 세 개의 높이 만큼 떠오르자 한강의 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아침에 일어나 바로 운동을 시작했으니 이제 마칠 때가 되었다. 마지막 화살을 힘껏 당겼다. 화살이 과녁으로 깊게 파고 들어갔다. 한강과 운낭은 화살을 모두 모아 강변 둑길을 따라 집을 향해 걸었다.


적수 강변의 둑길 위에서 눈을 들어 멀리 바라보았다. 첩첩 산맥들 사이에 파묻힌 진주성은 보잘것없는 미미한 존재처럼 작아 보였다. 그러나 사실 진주성은 높고 두터운 성벽으로 둘러싸인 서북 변경 지역에서 으뜸가는 성이었다. 이 시대로 넘어온 후로 한강은 집 근교를 벗어나 보지 못했지만, 진주에 대해서는 그의 부모보다 훨씬 더 많이 알았다.


진봉로(秦鳳路)는 진주와 봉주를 합친 로(路)의 이름이었고 당연히 진주는 진봉로에 예속된 주였다. 한강은 이전 세계에서 지리에는 비교적 해박했다. 그때는 중국을 동서남북으로 누비고 다녔기 때문에 주요 도시들의 지리적 위치와 대강의 역사는 꿰차고 있었다. 그러나 송나라의 지명은 후세와 많이 달랐기에 생소했다.


진주, 봉주란 지명도 생소해서 자기가 있는 곳이 후세의 어디에 해당하는지 헷갈렸다. (그는 희미하게 기억하기로 후세의 섬서성에도 봉상현이 있고 지금의 진주 동남쪽에도 봉상부란 이름이 있었다) 지금 사람들은 진주를 또 천수군이라고도 부른다. 그리고 애매하게도 그 천수군 안에 또 천수현이 있었다. 천수라는 지명은 삼국지를 많이 읽은 한강에게 익숙했고 뇌리에도 아주 깊이 박혀 있다.


후세의 지리 상식에 따라 주위의 지형을 추정해 보자면 진주성 일대는 하룡촌까지 포함해 적수 강변 골짜기에 있는 게 분명했다. 진주성을 중심으로 남북 양쪽에 놓인 산맥들의 이름을 보면 장산(長山)이라 불리는 산은 후세의 육반(六盤)산맥에 속한 산일 것 같았고, 남쪽에 있는 산맥은 이 시대 사람들도 진령(秦嶺)산맥이라 부르는 것으로 보아 그 산맥의 이름은 천백여 년간 바뀌지 않은 것 같았다.


하방에게 익숙한 이름인 천수현은 (후세에서) 진령산맥의 남쪽에 있는 가릉강(嘉陵江) 상류에 있었다. 그렇다면 천 년 동안 지명이 완전히 달라진 것 같았다. 왜냐하면 지금의 천수현은 진령산맥 북쪽 기슭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마도 송나라 때의 진주성 자리가 바로 21세기 지도에 표기된 천수현인 것 같았다. (한강은 추측했을 뿐인데 사실이 그랬다.)


천수는 21세기엔 감숙 지역에 속하지만 송대의 진주는 진봉로에 속해 있었다. 진주는 진봉로에 예속되어 있었고 또한 경조부(京兆府: 송대의 최고 행정 관할 구역. 현대 중국의 성(省)에 해당)의 섬서로 직할 치소(治所:지방 행정부)에도 예속되어 있었다.


생각할수록 머리가 어지럽지만 진봉로를 통치하는 사람은 경략안무사(經略安撫使:군사와 행정관을 겸임한 장관)로 진주성에 있었고, 섬서로를 관할하는 전운사(轉運使:일로一路 혹은 여러 로의 조세를 관장하고 지방관을 감찰하며 치안과 형옥(刑獄)을 감사하고 인재를 천거하는 등의 일을 했다)는 경조부(섬서로 경조부는 장안이었다)에 있었다. 진봉로나 섬서로나 모두 로라고는 하지만 경략안무사 로와 전운사 로의 차이는 21세기 군(軍區)과 성(省)의 차이만큼 컸다.


동서로 흐르는 횡산(橫山)과 천도산(天都山)은 송나라와 서하 사이의 분계선이었다. 횡산과 천도산은 섬서 변경 지대에서 다시 남북으로 지맥을 뻗었다. 지역이 그렇게 산세로 가로막혀 분할되니 서하 당항족의 기마 부대와 대항할 때 아군끼리 서로 지원하기도 어렵고 통일된 지휘를 받기도 어려웠다.


그리하여 송조정은 남북으로 달리는 분수령을 경계로 섬서 동쪽에서 서쪽까지 부연, 경원, 환경, 진봉 등 네 개 로(路)에 경략안무사를 두어 군사를 담당하도록 하고 지방 행정은 섬서로 직할 전운사가 담당하도록 했다. 전운사가 포괄하는 직무의 범위가 너무 넓어 지방행정 감찰과 군량 조달 책무를 둘로 나누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조정이 동의는 했으나 아직까지 실행은 되지 않았다.


오늘 한천육은 성안에 볼일을 보러 혼자 나갔기에 한아리가 남아서 뜨거운 물을 끓이고 있었다. 한강은 매일 아침 운동을 나가서 땀으로 흠뻑 젖어 돌아왔다. 행여 몸에 다시 한기가 침범할까 싶어 늘 뜨거운 물을 데워두었다가 몸을 씻도록 했다.


한강이 깨어나고 요양한 지 근 한 달이 지났다. 그의 몸은 예전의 모습으로 완전히 돌아가지는 못했으나 마른 장작 같았던 뼈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자 한운낭은 부끄러워하지도 한강을 피하지도 않았다. 한강이 누워 있을 때 했듯이 뜨거운 물에 수건을 적셔 한강의 몸을 서슴없이 닦아주었다. 그리고 마른 수건으로 몸을 닦아준 후 빨아서 잘 말린 옷을 갈아입도록 찬찬히 시중을 들었다. 이제는 집 안이고 부모 앞이라 한강은 운낭에게 장난을 걸지도 못했다.


운동도 했고 따뜻한 물로 몸도 닦았으니 한강은 한층 개운해졌다. 책상 앞 의자에 앉아 운낭이 방안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며 일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한강은 이런 대접받는 생활이 좋아졌다. 천 년 후라면 아무리 지위가 높고 명성을 얻었어도 이렇게 어여쁜 소녀로부터 살뜰한 보살핌을 받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보름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인데 그동안 한강은 매일 책을 읽고 활을 쐈다. 두 번째 삶을 얻고 난 후 점점 모호해지던 학문의 기억을 불러와 공고하게 만드는 한편 다음 행보를 어떻게 할지 기본 계획을 세웠다.


한강이 책을 펼쳐놓고 계획했던 대로 오늘 공부를 시작하려고 할 때 한아리가 양고기국과 취병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한천육이 아침 일찍 외출했으므로 한아리 혼자서는 산으로 나물과 약재를 캐러 갈 수가 없어 남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강의 아침밥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한아리는 책상 가득히 쌓인 책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셋째는 시를 읊고 글 짓는 일을 좋아해 열서너 살 때 벌써 수백 수의 시를 지었는데 병이 다 나은 지금은 그저 책만 읽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셋째야, 요즘은 책 읽고 활쏘기 연습만 하고 시는 전혀 짓지 않는 것 같구나?””


한강은 잠깐 멍하게 있다가 곧바로 웃으며 대답했다.


“그때는 학문이 깊지 않아서 저의 시 짓기 실력이 형편없는 줄 몰랐죠. 횡거 선생 문하에서 공부하다 보니 제가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걸 알게 됐어요. 급우들과 비교하니 저의 시제 재능이 그다지 좋지 못한 걸 알았어요.”


“그래······.”


한아리 목소리에 실망이 묻어났다. 셋째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었고 주변의 이웃과 친지들에게 뽐낼 수 있는 자랑거리였다. 그러니 그 아들이 장차 집안을 빛내 줄 큰 인물이 되길 바라마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외지에 가서 2년간 유학하고 돌아오더니 자기는 다른 사람과 비교해 한참 실력이 떨어진다고 말하지 않는가.


한강은 어머니의 마음을 금방 알아차리고 곧 덧붙여 말했다.


“하지만 경서를 읽고 논할 때는 제가 두각을 나타냈어요. 스승님도 여러 번 칭찬해 주셨고요. 경서야말로 진짜 학문이거든요. 시나 부와 비교할 게 아닙니다.”


한강이 하는 말을 듣자 한아리는 눈을 반짝이며 기뻐했다.


“장 선생님 같은 대단하신 분이 한 말씀이니 틀릴 리가 없겠지. 셋째야 장 선생님 말씀을 잘 듣고 열심히 공부해라. 그래야 나중에 진사가 돼서 가문과 조상을 빛낼 수가 있지.”


한강은 알겠다고 대답하고 한아리가 웃으며 방을 나가는 모습을 바라봤다. 자식이 자기 자랑을 하는데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기뻐하기만 하니 부모의 마음이란 게 그런 것이구나 싶었다. 한아리의 당부는 몸의 옛 주인이 바라마지 않던 소원이기도 했다.


그러나 옛 주인이 바랐기 때문에 글을 읽고 관리가 돼야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제는 한강 스스로가 권력과 부귀에 대한 내적 욕망이 강렬해졌다. 지금 한강은 이 시대의 학문과 상식에 더해 천 년 후의 지식까지 겸비했으니 이전 주인보다 훨씬 더 야망이 컸고 그걸 이룰 자신도 있었다.


한강은 다시 출세의 방법을 생각했다. 비록 두 시대에 걸친 학식을 가졌지만, 진사가 되는 일은 물속에서 달을 건져 올리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진사과 시험에서 경전에 관한 문제는 비중이 아주 작았고 시가와 부를 잘 짓는 게 관건이었다. 본래 전 주인의 시적 재능도 형편없었는데 자기가 물려받은 이후에는 더 형편없어져 버렸으므로 과거를 보고 진사가 된다는 건 불가능했다. 진사 시험은 고사하고 주에서 보는 해시 통과도 쉽지 않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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