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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slaa
그림/삽화
리건
작품등록일 :
2020.11.17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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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1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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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2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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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를 겸비한 선비 (하)

판타지 소설로 송나라 역사를 배우다!




DUMMY

해시에 합격한 사람을 공생이나 거인으로 불렀으나 후세에서 말하는 거인과는 다른 개념이었다. 송대에서 거인은 일종의 통과 자격 같은 것으로 일회성 호칭이었을 뿐이었다, 명, 청 시대처럼 평생에 걸쳐 남들의 존경을 받으며 불려지던 이름이 아니었다. 한번 해시에 합격한다 해도 경성에 가 진사 시험에 붙지 못하면, 3년 후에 다시 해시를 치르고 다시 거인이 되어야 그 후에 진사 시험을 볼 수가 있었다.


조정이 진사 시험 과목을 시, 부 짓기에서 경전에 관한 것으로 대체하지 않는 이상, 한강이 시험을 보고 진사가 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렇다고 한강은 후세의 시와 부를 베낄 생각은 없었다. 잠시는 세상을 속이더라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는 법이니까. 어디서 한두 구절 베껴 넣었다고 뛰어난 시와 부가 나오는 게 아니었다.


이 시대에 아직 등장하지는 않았으나 후세까지 널리 알려진 남의 시를 베끼면 당연히 이름을 날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유명해진 다음에는 어떻게 하나? 누군가는 자신을 연회에 초청할 것인데. 이때의 연회는 시를 지어 흥을 돋우는 자리였다. 표절자 주제에 그 술자리에 맞는 시구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이 당시 문인들의 사교 활동은 시회(詩會)에서 이루어졌다. 한강의 기억에서도 예닐곱 번 참가해본 경험이 있었다. 시회에서 시를 지을 때는 주어진 운율에 맞게 사물을 시로 승화시킬 수 있어야 했다. 풍경이나 정서에 부합하지 못하는 단어를 대충 쓴다고 시가 되지 않았다.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서로 돌아가며 압운에 맞춰 너 한 수, 나 한 수를 읊기 일쑤였고 그게 모여 연작시가 되기도 했다. 이런 연작 시 짓기는 한강의 기억에서만이 아니라 홍루몽 등 옛날의 소설에서도 많이 등장하지 않던가.


시 한두 수가 뛰어나 시회에 불려갔다고 하자, 그런데 나머지 시작 수준이 그저 그렇다면 사람들은 그 뛰어난 시가 그 사람 본인이 창작한 게 맞는지 의심하게 될 것이다. 본래 80점 맞던 사람이 단번에 만점을 맞았다고 하면 실력이 늘었다고 하겠지만 본래 2~30점이었던 사람이 백 점을 맞았다고 하면 누가 믿을 것인가?


한강의 전생이 남긴 기억 중에 명문장가 문집이 무척 많았다. 세부 묘사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목록은 기억났다. 그중 시는 극히 적었고 표, 장, 전, 기, 논, 부, 장, 책 등의 문체가 많았다. 이 당시 선비가 배워야 하는 문체는 시에만 국한돼 있지 않았다. 대가들을 표절하려면 여러 가지 문체도 두루 섭렵해야 하는데 시 한두 구절만 지을 수 있고 부도 못 쓰고 표나 전기도 쓸 줄 모른다면 어쩔 것인가?


시 짓기를 못한다고 인정하고 무슨 핑계를 대든 시회에서 용케 빠져나올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타 문체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언젠가는 누군가 행장(行狀:죽은 사람이 평생 살아온 일을 적은 글)이나 묘비나 사기(事記:사건의 기록)를 써달라고 할 때가 있을 텐데 모르는 사람의 부탁은 거절할 수 있다고 쳐도 친구가 부탁하면 어떻게 거절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럴 땐 또 어떻게 속여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 진짜 실력이 없다면 잠시라면 몰라도 수십 년을 속이며 살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 인심이 각박하다지만 문인 사이에서는 특히 더 심했다. 옛날 남조 시대 때 강엄(江淹:정치가 문장가)은 문장이 조금 퇴보하는 듯했더니 재능이 다한 것 아니냐고 비웃음을 샀다. 시작 수준이 고만고만한 사이에서 시 몇 수가 눈에 띄게 좋다면, 누구라도 표절을 의심하게 마련이었다.


다행이라면 시 짓기가 곧 관원의 능력을 가늠하는 것은 아니란 점이었다. 역대 중신(重臣)들 중에 명문장가였던 이는 극히 적었다. 시를 그렇게 잘 지었던 이백, 두보 등도 평생을 벼슬길에서 밀려나 살았다. 그런데도 그 시 짓기에 목멜 필요가 있을까?


벼슬에 오르는 통로가 진사가 되는 길 하나뿐인 것도 아니다. 섬서 지역은 진사가 아주 적었으나 벼슬길에 오른 사람은 적지 않았다. 그러니 진사 시험에만 매달릴 필요가 없었다.


진사 과목 외에 조정은 명경과(明经科) 등과(等科)도 열어 인재를 선발했다. 한강의 경전 수준은 괜찮은 편이었고 명경과의 시험 난도도 높지 않았다. ‘30세 노명경 50세 소진사’라는 말이 유행했다. 곧 서른 살에 명경과에 합격하면 늦게 합격했다는 뜻이고 50세에 진사가 되는 일은 그렇게 늦은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 전 주인이 남긴 자산이 아직 있으니 한강은 몇 년만 노력하면 명경과에는 아마 합격할 수 있을 것이다.


한강이 진사 시험을 치르지 않으려는 건 누군가의 추천을 받아 벼슬길에 오를 수도 있다는 믿음도 한몫했다. 서북 지방은 서하와 전쟁이 빈번했고 인재를 갈구하는 정도가 다른 지방과 비교해 월등히 높았다. 한강이 궁술을 연습하는 것도 이름을 날리기 위해서였다. 무관이면서 문학적 재능도 있는 편이 문인이면서 무관의 역량을 갖춘 것보다 인상적일 것이다. 그 위에 자기의 두뇌와 입담이 더해지면 출세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20년 전 당항족의 이원호가 송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후, 당항족의 기병이 서북 지방을 종횡무진 누비기 시작했을 때 북송은 갑자기 닥친 전쟁에 전전긍긍했다. 당시의 북송은 30여 년간 전쟁이 없었고 특히나 관서 지방에서는 예상도 못 했기 때문에 이원호에 대응에 싸울 태세가 안되었다.


조정은 급하게 당시의 문관이었던 범중엄(范仲淹:송대 사상가, 정치가)과 한기(韓琦:송대 재상) 같은 신하들을 차례로 파견해 난국을 수습하도록 했다. 그들이 섬서 지방을 다스리던 그때 수많은 영재와 병사들이 그들의 추천으로 벼슬길에 올랐다.


한강의 스승인 장재도 본래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당시에 장재는 범중엄에게 토번(티베트) 땅을 수복해 당항족에 대항하는 예비부대로 삼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써서 편지를 보냈다. 범중엄은 그 글을 읽고 난 후 장재에게 공부를 더 해 진사가 되라고 권했다.


나중에 장재는 범중엄의 권고에 따라 무과를 버리고 진사 시험을 쳐서 합격했다. 범중엄의 편지를 받기 전부터 장재는 학생들을 모아 가르쳤는데 학과목에 병법과 전술 책략이 반드시 들어갔다. 송나라 여러 유교 학파 중에 장재의 관중 학파(줄여서 관학)가 병법을 가장 중시했다.


장재는 3년 전 경조부의 군학(군 단위 최고 학부)에서 강의를 했고 2년 전에는 첨서위주군사판관으로 환경로(環慶路)의 경략안무사 채정(蔡挺)을 보좌해 군사를 관리했다. 관직에 있으면서도 시간이 나면 제자를 모아 가르쳤는데 작년에는 무공현 녹야정으로부터 초청을 받아 강연했다. 횡거 선생이 중원에서 명성이 그리 높지 않아도 관서 지방에서는 유명했고, 유생들은 그의 덕망과 인품을 몹시 흠모했다.


한강은 갑자기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돌고 돌아 결론은 결국 스승이었기 때문이었다. 장재를 스승으로 모신 것은 순전히 운이 좋았던 덕분이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좋은 스승을 만나 동문과 서로 배우고 돕다 보면 이름도 얻고 출세도 빨라졌다. 장재는 그가 가장 믿을 만한 의지처였으므로 한강은 장재의 이론을 더 깊이 알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한강은 장재에게 강의를 들을 때 틈틈이 썼던 글을 꺼내고 복습에 들어갔다.


‘태허는 곧 기다(虛空即氣)’


‘기가 모여 만물이 되고 흩어지면 형체를 잃지만 본성은 그대로이다. 기가 모이면 형상이 이루어지지만 그 본성을 잃지는 않는다(氣之爲物,散入無形,適得吾體. 聚爲有象,不失吾常)’


‘태허는 기가 없을 수 없고 기가 모이지 않고는 만물이 될 수 없으며 만물은 흩어져 태허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


장재의 천지자연에 대한 견해에 따르면 기가 세계의 핵심이고 천지 만물은 기로부터 생긴다는 것이었다. 기는 물질로 대체될 수 있고 태허는 우주로 대체될 수 있어서 장재 이론의 근원은 유물론적이라 볼 수 있었다.


‘기는 홀로 태허에 있고 오르락내리락 그칠 줄 모른다.‘


이 말은 ‘운동의 절대성’을 가리키는 또 다른 표현이었다.


‘모여도 본성이고 흩어져도 본성이니, 죽어도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 더 말할 것이 없다.’


이 구절은 만물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뜻으로 살아있든 죽었든 완전히 소멸하지 않는다는 뜻이리라.


이 외에도 한강이 필기한 장재 강의에서 아주 초기적이긴 하지만 ‘양적 변화가 질적 변화를 가져온다’는 이론도 보였다. 그리고 대립과 통일 등, 변증법의 맹아 형태를 나타내는 ‘일물양체(一物兩體)라······. 자연의 이치가 그러하다.’ 같은 구절도 보였다.


장재의 논리는 후대처럼 간단명료하지 않아 읽기가 난해하긴 했다. 한강은 그렇다고 그 이론을 경시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장재의 기학 이론은 한강이 가진 철학 이론과 공통되는 점이 많았다. 화법을 바꾸기만 하면 후대의 원자론, 원소론, 변증법 등 자연과학 이론과도 접목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연 철학 범주에 속하는 이론은 천백 년 동안 수많은 사람의 검증을 거치면서 발달했다. 후세의 이론은 그 엄중함이 기학 이론를 능가하고 실험을 통해 검증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유가의 격물치지(格物致知) 가르침에도 부합했다.


후세의 자연과학을 기학 이론으로 포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아주 흥미로웠다. 한강은 그게 성공할 가능성도 크다고 봤다. 성공하기만 하면 장재는 간단한 네 구절로만 알려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의 기학 이론도 소실되지 않고 후대에 이어져 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그리고 한강이 오래 꿈꾼 지위도 저절로 따라올 것이다.


한강은 며칠간 틈틈이 계획표를 만들었다. 반년 정도 기한을 정하고 기학을 새로운 이론으로 엮어낼 생각이었다. 새로운 이론을 세우는 데 육 개월이란 시간은 너무 짧겠지만 한강에게는 충분했다.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 기학을 대체하려는 게 아니었고 이미 아는 이론으로 기학의 부족함을 메울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점진적 진보를 위해 개선의 여지도 남겨두어야 했다.


시대를 반걸음 앞서가면 천재 소리를 듣지만 한 걸음 앞서가면 미친놈 소리를 듣는다고 했다. 한강은 사회 전체에 도전장을 내미는 미친 짓을 하려는 게 아니었다. 자신과 가족들의 권리를 보호하려는 목표에 충실하기 위해서였다. 돈키호테처럼 나대지 않을 것이고 탐욕을 부리지도 않을 것이다. 그 점에서 그는 절대로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아귀가 맞도록 이론 체계를 세우려면 한 단계씩 천천히 가야지 단번에 달려나갈 수는 없다. 학술적 성취가 알려지면 한강의 이름도 점차 알려지고 또 명망이 높아지면 바라던 권력도 따라올 것이다.


권력이 높아지면 학술 이론을 보급하는 데 아주 유리했다. 학술과 권력 양자는 서로를 끌고 밀며 생명을 오래도록 유지할 것이다. 권력의 도움이 없이 학설을 퍼트리려면 수십 년에서 수백 년이 필요할 수도 있다.


한강은 역사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았지만 이학(理学)이 역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알고 있었다. 이학의 시조인 정호, 정이가 장재의 5촌 조카란 사실은 놀라운 일이었다.


작년에 정이를 한 번 본 적이 있다. 엄숙하고 융통성 없는 표정을 한 밉상스러운 중년의 남자였다. 까탈스럽게 트집을 잡을 것 같은 눈길 때문에 장재의 제자들은 혹시나 스승의 체면을 깎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 남송의 주희 대에 이르면 이학에 관한 큰 인물도 없어지고 정치적 이유로 학술 연구도 금지당하게 되었다.


언젠가 기차 안에서 무료함을 달래려고 주희의 전기를 뒤적인 적이 있었다. 물론 깊이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이학을 논한 부분은 아예 건너뛰었고 주희가 비구니를 꾀고 며느리와 사통했다는 뒷얘기에 더 관심을 가졌다.


돈으로 지식을 살 수 없다는 말이 맞다. 지금 한강은 그때 열심히 읽어두지 않은 걸 후회했다.


한강은 마음을 가라앉힌 다음 머리를 파묻고 세심하게 연구하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성과가 나면 장재에게 편지를 부쳐도 좋고 직접 만나러 가도 될 것이다. 장재의 흥미를 끌기만 한다면, 관중 유림계에 이름을 알리는 첫걸음을 쉽게 내딛게 된다.



저자 주석: 장재는 주희가 정호, 정이, 주돈이, 소옹과 함께 이학의 5대 학자 중 하나로 꼽았던 인물이에요. 단지 장재가 창립한 기학은 유물주의에 가까워서 유심론에 가까웠던 이학과는 상반된 견해를 보였습니다. 그 때문에 북송의 각 학파가 정통성 논쟁을 벌이면서 적대적인 학파는 뿌리째 뽑아버리거나 다른 이론에 접목해서 없애버렸답니다. 북송 시대 때의 학술 논쟁은 전쟁과 다르지 않았어요. 너 죽고 나 살자 식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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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비장군 사당 (상) +3 20.11.23 3,530 6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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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문무를 겸한 선비 (상) +4 20.11.20 3,757 63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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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가족 (상) +5 20.11.19 3,831 62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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