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위대함 - 한울 쥬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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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설련하
그림/삽화
설련하
작품등록일 :
2021.06.28 08:42
최근연재일 :
2022.10.17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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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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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67,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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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9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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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글자
19쪽

10화. 비월족과 검치범

삶의 위대함 - 한울 쥬맥




DUMMY

비월족은 부계사회(父系社會)인데 수명은 백오십 살 정도였고, 열여덟 살이 되면 성인으로 인정되어 결혼을 할 수 있었다.


남자는 결혼할 때 신부 부모님께 큰 짐승 여러 마리를 예물(禮物)로 바쳐야 했다. 신부 몸값으로 지불하는 대가는 아니지만 신부를 낳고 키워 준 부모님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비교적 온순하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비월들이 오늘 천인족의 비거를 뒤쫓고 있으니 이것이 무슨 사연일까?


실은 며칠 전에 비거를 탄 천인족들이 비월족 영역을 맴돌며 관찰하는 중에 비월족 지도자들의 눈에 띄었다.


하늘을 새처럼 날아다니는 종족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에 방심한 탓이다.


비월족도 처음에는 큰 새가 쳐들어온 줄 알고 놀라서 우르르 날아와 살펴보니, 웬 날것에 사람이 타고 앉아서 아래를 보며 무언가를 열심히 그리고 있으니 깜짝 놀랐다.


혹시 다른 종족이 보낸 세작(첩자)이 아닐까? 그래서 붙잡아 족치려고 무리를 지어서 뒤를 쫓아온 것이다.


처음에 뒤쫓을 때만 해도 곧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마침 불어온 강한 바람을 타고 빠르게 도주하니 쉽사리 잡을 수 없게 된 것.


비월족은 몸무게가 있어서 백 리 정도를 날면 잠시 쉬어 가야 하는데, 비거는 바람을 타고 더 오랫동안 날아갈 수 있어서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잡힐 듯하면서도 몇 번을 놓쳤고······.


지금도 악에 받쳐 비거(飛車)를 바짝 뒤쫓으며 뒤에서 큰 소리로 외쳐 댄다.


“야! 거기 서! 잡히면 죽는다 잉!”


“야들아! 느그들 어디서 온 첩자들이여? 말 안 할껴?”


색깔이 다른 비월별로 조금씩 사투리가 섞인 목소리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도망가고 있는 천인족들의 귀에는 마치 새가 지저귀는 듯한 소리로 들리니, 말도 안 통하는데 무슨 대답을 하겠는가?


그렇게 수천 리를 악착같이 뒤쫓아와서 이제는 잡으려니 했는데, 산골짜기를 거슬러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눈앞에서 또다시 잽싸게 내뺀다. 결국 아득히 멀어지는 비거. 이제는 정말 잡는 것이 어렵다고 여겨지자 모두 포기를 하고 말았다.


지친 몸으로 근처의 큰 나무에 내려앉아서 사투리가 섞인 목소리로 쑤군거리는데, 누구는 며칠 동안 잠을 제대로 못 자서 하품을 하고 있었다.


“에잇! 성질 잇빠이! 조것들은 대체 뭐꼬? 어디서 온 기야?”


“다 잡았다가 놓쳐부렀네 이. 지 날개도 없는 것들이 뭔 지랄이여?”


“아~따~ 돌아가면 못 잡았다고 혼나불것네 잉~?”


“아니 시상에 바람을 타고 날다니 듣도 보도 못 한 잡놈들이네. 기분도 안 좋은디 야! 음수월! 멋진 노래나 한 곡조 혀봐라 잉.”


“그~랴. 노래는 우리 음수월이가 왓따 아이가?”


“모두 박슈! 박슈!”


짝짝짝짝!


그러자 음수월이라고 불리는 비월이 어쩔 수 없이 엉거주춤 높은 가지 위로 날아오르더니 목청을 가다듬었다.


“그럼 기분도 착찹~헝께 한 곡조 혀 볼까? 모두 들어 보드라고 잉~”


그러더니 비월족 특유의 영롱한 고음으로 새소리를 섞어 가면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뾰~로롱~ 쪼로롱~ 뾰로롱롱롱~


드넓은 만산에 홍엽이 가득할 제에 님 그리워서 만리 창공을 홀로 높이 날았다네.


천지를 비추는 달빛만 고요한데 보고 싶은 님 그림자는 찾을 길이 없어라.


그대와 달빛 아래 나눈 사랑 어데 가고 나 홀로 그리워 이리 헤메이느뇨?


불꽃처럼 타올랐던 사랑은 재가 되고 이제는 내 가슴에 그리움만 남았구나!


뾰~로롱 쪼로롱~ 뾰로롱롱롱~



꿈같은 세월에 묻혀 살았더니 이팔청춘 바람결에 가는 줄 몰랐구나!


그래도 그대 사랑 마음에 남아 있어 이 힘든 세월을 이리 버텨 내노니.


만리 창공 달빛 아래 홀로 외로워도 사무치는 그리움에 슬픔을 달래노라.


뾰~로롱 쪼로롱~ 뾰로롱롱롱~”



“에구! 괜히 마음만 울적해지는구만. 기분 좋게 밝은 노래를 해야제!”


“야들아! 매도 먼저 맞으면 낫다고 허던디 지천들으러 빨랑 가자 잉~”


이구동성으로 떠들더니 일제히 왔던 곳으로 우르르 날아올랐다.



한편, 비거를 타고 쫓기던 천인족들은 겨우 위기를 벗어나서 한시름 놓았으나, 계곡풍(溪谷風)을 타고 무리한 방향 전환을 하는 바람에 날개의 각도를 조정하는 부분이 망가지고 말았다.


결국 위험을 무릅쓰고 나무가 없는 평지에 비상 착륙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임무는 모두 완수하였으니 이제 먼 거리를 걸어서 천인족의 주거지까지 무사히 가는 일만 남았다. 그러나 그것도 그리 쉽지 않은 문제였다.


비거를 그냥 버리면 다른 종족의 손에 들어가서 천인족을 위협하는 무기가 될 수도 있으니, 부분별로 분해(分解)하여 땅속에 묻었다. 그리고 혹시나 가는 길에 필요할지 모르니 넓은 판자만 두 개를 가지고 길을 나섰다.


유리수의 목재는 매우 가볍고 유연하면서도 강하기 때문에, 혹시 모를 싸움에서 화살 등을 막는 방패로 사용하기에는 아주 제격이었다.


가볍기 때문에 짐도 되지 않았고, 때로는 바닥에 깔고 쉬거나 잠자기에도 안성맞춤이었고 말이다.


비상용 식량, 무기, 지도 제작용 측정기구인 성반(星盤: 나침반처럼 별자리와 방향을 재는 것)과 보천경(망원경) 등을 챙겨서 둘이 길을 나섰지만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이번에 비거를 타고 지도 제작에 나선 사람들은 지도 작성에 전문 지식이 있는 사람과 무술의 일류고수(一流高手)가 조를 이루어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를 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하늘 위에서는 무술을 못 쓰니 또 예외라는 걸 알았지만······.


지금 이곳에 떨어진 두 명은 스물아홉 살 먹은 지도 제작 실무자인 청류하와, 쉰여섯 살 먹은 무술 고수 고을신이다.


청류하는 아직 장가도 못 간 총각이었고 고을신은 아들 여럿과 늦둥이 딸까지 둔 아버지였다. 나이 차이가 제법 있어서 청류하는 고을신을 마치 아버지처럼 대하고 존대하였다.


“저희도 어디 쉴 만한 곳을 찾아서 한숨 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지. 주변에 활엽수림이 울창하니까 쉴 만한 곳이 있을 거야.”


두 사람은 짐을 들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쉴 곳을 찾아 나섰다.


한참을 뒤져서 마침내 찾아낸 곳. 그곳은 둘레가 나무로 둘러싸였는데 제법 높고 널찍한 바위 위였다.


주변에서 보면 눈에 띄지 않는 으슥한 곳인데 나무들이 높아서 푸른 하늘만 아득히 바라다보였다.


“오면서 보니까 바로 아래에 개울이 있던데, 제가 가서 물을 떠올 테니 어르신은 잠깐만 쉬고 계십시오.”


“그래, 수고 좀 하시게.”


고을신은 혼자 남아서 하늘을 바라보며 큰대자로 눕는데, 두고 온 아내와 자식들을 생각하니 절로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懇切)하다.


특히 눈에 넣어도 아플 것 같지 않은 열 살짜리 막내딸을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나오고, 어서 빨리 집으로 돌아가서 안아 보고 싶은데······.


그때 물을 떠오던 청류하가 고을신이 혼자서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을 보더니 무척 궁금한 모양이었다. 아니 어쩌면 짐작이 가는 것이기도 하였고.


“고 어르신! 혼자서 웃고 계신 것을 보니까 또 집 생각을 하시는 거죠?”


그러자 고을신이 청류하를 겸연쩍은 표정으로 슬쩍 바라보았다.


“그래, 막내딸이 어찌나 귀여운지 재롱이 생각나서 웃었다네.”


총각인 청류하는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뭐가 저리도 좋을까?


“가족이 있다는 것이 그렇게도 좋은가요? 저는 잘 모르겠어요.”


“그럼! 그걸 말이라고 하나?”


가족이 있으니 좋다는 말에 청류하는 말을 끊고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도 가족을 만들어야 하나? 혼자 마음대로 하고 사는 것이 편해서 그동안 결혼은 생각지도 않고 살아왔다.


이 나이까지 아직 애절한 사랑 한번 못 해 봤지만, 처자식을 먹여 살리려고 힘들게 살아가는 주변 사람들이나 친구들을 보면 그다지 결혼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부모와 주변의 권유(勸誘)에도 이제껏 미뤄 온 것이다.


가만히 눈치를 보던 고을신이 청류하의 안색(顔色)을 살피면서 물었다.


“왜? 류하 자네는 나하고 생각이 다른 모양이지?”


“저 혼자 먹고살기도 힘든데 가정을 꾸린다고 생각하면 막막해요. 자신도 없고···, 불편하고 너무 힘들 것 같아서 겁도 나고···, 그냥 이렇게 혼자서 편하게 사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에끼, 이 사람! 자네 아버지도 그렇게 생각했다면 자네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못했을 걸세.”


“지금은 시대가 바뀌었잖아요? 무엇보다 능력도 없고······.”


“글쎄, 나도 자네처럼 생각하던 때가 있었지. 그러나 막상 결혼이라는 것을 해서 살아 보니 또 생각이 바뀌더군. 힘들 땐 책임도 못 지면서 왜 했나 싶지만, 그래도 그 짐이 나를 버티게 하더군.”


“짐이요?”


“인생(人生)의 짐 말일세.”


“짐이 없어야 더 홀가분하고 편하지 않나요? 짐이 있으면 무겁잖아요.”


“누가 내게 이런 얘기를 하더군. 인생은 짐이 있어야 휩쓸려서 살아가지 않는다고. 그게 무슨 얘기냐고 물었더니 인생이라는 거센 강물을 건너려면 그만한 무게의 짐이 있어야 한다는 거야. 삶의 중심을 잡아 줄 짐 말일세.


짐도 없이 가벼운 몸으로 그 강을 건너려고 하면 무게가 너무 가벼워서 강물에 그냥 떠내려간다는 거지. 삶이라는 거친 강물에 말이야.


그 짐이 비록 우리의 어깨를 무겁게 하지만 반대로 그것 때문에 이렇게 세상사 힘든 풍파에도 넘어지지 않고 버티며 사는 거라나. 그래서 우리네 삶에는 그 짐이 필요하다는 거야.”


“정말 그럴까요?”


“글쎄, 나도 현자가 아니라서 잘 모르겠지만 가지 않은 길에는 항상 후회가 남는다고 하지 않던가? 그러니 가 보고 후회하는 게 낫지 않을까? 나처럼 후회하지 않는 사람도 있으니까 말이야. 혼자보다는 둘이나 셋이 더 낫지.”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라면 그게 그거잖아요?”


“에라~ 나도 모르겠네. 그래도 쓸쓸하게 가을비가 내리는 날에 혼자서 청승맞게 창가에 서서 비나 바라보는 것보다는, 아내가 해 주는 따끈하고 매콤한 찌개에 같이 술이라도 한잔 하는 것이 나는 훨씬 더 좋더군. 인간미가 있지 않은가? 삶의 재미가······.


불 꺼진 빈집에 혼자 들어가는 것도 싫고, 몸이 아플 때 돌봐 주는 사람도 없어서 혼자 눈물 글썽이며 외롭게 누워 있는 것도 싫어. 나는 그렇네. 자네 인생이니 자네 일은 스스로 결정하게.”


“말씀을 듣고 보니 마음만 더 심란해지네요.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둘은 육포를 씹으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느라고 시간 가는 줄 몰랐는데, 어느새 서쪽 하늘에는 저녁노을이 붉게 깔리고 해가 서산마루에 걸렸다.


하늘에는 이름 모를 새들이 떼 지어 군무를 추며 먼 하늘로 날아간다.


여기저기서 새소리 벌레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두 사람은 하늘이 어두워지는 것을 보더니 쉬고 있던 바위 위에 잠자리를 만들었다.


주변에서 잠자리에 좋은 푹신한 마른 풀과 나뭇잎들을 모아서······.


“차라리 근처에서 적당한 동굴을 하나 찾아볼 걸 그랬나요?”


“오랜만에 이렇게 하늘을 바라보며 자는 것도 괜찮은데.”


“모닥불을 피우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모기떼도 쫓아내고······.”


“괜히 짐승이나 이종족의 표적이 될 수 있으니까 오늘은 그냥 자자구.”


둘은 가만히 누워서 밤하늘에 가득한 별들을 바라보았다. 한 사람은 가족 생각에 한 사람은 결혼 생각에 시간이 흐르는데···, 어느 순간 두 사람은 사방이 너무 조용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들려오던 새소리와 벌레소리가 뚝 끊긴 숲속에는 숨막히는 정적(靜寂)만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자 무술 고수인 고을신이 번개처럼 조용히 움직이며 한 자 정도의 단도를 꺼내어 움켜쥐었다. 그러면서 손으로 신호를 하니 청류하도 조용히 움직여서 단도를 손에 들고 둘이 등을 맞댔다.


긴장감이 감돌며 둘 다 몸을 낮추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방을 살피는데, 고을신 앞에 있는 숲속에서 나뭇잎을 밟는 바스락 소리가 미세하게 들렸다.


“크르르~”


이어서 짐승이 낮게 목 구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둘이 서서히 거리를 확보하며 몸을 뒤로 물리는데······.


사사삭!


뭔가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짐승이 바위 위로 성큼 뛰어올랐다.


대호(大虎)처럼 생겼는데 위턱에는 긴 송곳니 두 개가 밑으로 뻗어 있고, 세 자가 넘는 꼬리가 늘씬하게 밑으로 처져 있었다. 몸통 두께는 세 자에 길이가 여덟 자쯤 되는 사나워 보이는 짐승이다.


이 호랑이처럼 보이는 동물은 나중에 검치범이라고 이름이 붙여진 고양이과 동물이었다. 큰 입을 벌리고 송곳니를 위아래로 흔들며, 목울대로는 계속 크르릉 소리를 내면서 위협을 가한다.


“크르릉~ 크르릉~”


두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혼을 빼 갈 것 같은 노란빛이 번쩍거리니, 무사가 아닌 청류하는 공포(恐怖)와 긴장감으로 점점 몸이 굳었다.


이에 고을신이 청류하를 뒤로 밀면서 앞으로 나섰다. 몸을 낮춰 자세를 잡고 태을신공(太乙神功)을 운기하니, 단검의 날에 푸르스름한 검기(劍氣)가 맺히면서 희미하게 빛을 뿌렸다.


이때 온 산을 울리는 듯한 노호!


“크허엉!!”


포효 소리와 함께 짐승이 비호처럼 도약하며 앞발로 고을신을 후려쳤다.


청류하는 몸이 굳어서 움직이지도 못하건만 고을신은 침착하게 몸을 더 낮추며 밑으로 파고들더니, 단검을 사선(斜線)으로 빠르게 휘둘렀다.


짐승은 도약한 힘 때문에 바위 끝에 가서야 겨우 멈추어 서서, 몸을 홱 돌리더니 다시 덤벼들 태세를 취했다.


짐승의 가슴에는 길게 자상(刺傷)이 생겨서 피가 흐르고, 고을신의 왼쪽 어깨에서도 발톱에 긁힌 상처에서 피가 흘러내리는데······.


그런데도 고을신은 무사답게 침착했다. 짐승의 위협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쉽게 생각했다가 피를 본 짐승이 크게 노하여 하늘을 향해 또 포효(咆哮)하였다.


“크허엉!!”


온 산이 쩌렁쩌렁하게 울리자 바로 잽싸게 도약을 하면서 비호처럼 덮쳐 오니 당한 상처를 미처 돌볼 새가 없다.


저 한 번 내리치는 발톱에 온몸이 짓이겨질 듯한데도 고을신은 칼을 역수로 들고 몸을 낮춰서 공격을 피하며 짐승의 가슴팍으로 뛰어들었다.


그 위기의 순간에도 침착하게 짐승의 심장을 향해서 날카로운 칼날을 깊숙이 찔러 넣었다.


청류하는 벌벌 떨며 꼼짝도 못 하는데 짐승을 겁내지 않고 싸우는 것을 보니 백전노장의 일류고수가 분명했다.


등이 짐승의 발톱에 찢기어 피가 흘러내렸지만 심장을 찔린 짐승도 점점 동작이 느려지더니 드디어 옆으로 천천히 쓰러지고 말았다.


그제야 걱정이 된 청류하가 급히 달려와서 상처를 살피는데, 여기저기 찢긴 곳은 많아도 다행히 근골(筋骨)이 상한 곳은 없어서 한시름 놓았다.


비상약을 꺼내 상처에 바르고 깨끗한 천으로 묶어 주면서도 청류하는 돕지 못한 자신이 너무 미안한 모양이다.


“정말 큰일 날 뻔했습니다. 혼자 싸우게 해서 죄송합니다.”


그러자 고을신이 당연한 것을 왜 그러느냐는 듯이 웃으며 쳐다보았다.


“그러라고 나를 같이 보낸 게 아닌가? 긴 전투용 도검만 있었어도 이렇게 당하지 않고 한 칼에 끝낼 수 있었는데 말이야. 이럴 땐 아쉽군.”


“여긴 짐승도 포악한 것이 많군요. 큰 이빨만 없으면 꼭 호랑이 같습니다. 어쨌든 힘들게 잡았는데 이 멋진 가죽이라도 벗겨 가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자 고을신이 화들짝 놀랐다.


“아니, 이 사람아! 큰일 날 소리 하지 말게. 우리는 어서 빨리 이 자리를 피해야 하네. 피 냄새가 주변으로 퍼지면 곧 다른 짐승들이 몰려들 거야.”


“아~! 그렇군요. 그럼 이 상처만 치료하고 바로 떠나죠.”


둘은 허둥지둥 상처를 싸매고 자리를 떠나 급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어두운 밤이라 동굴을 찾기도 어렵고 멀리 갈 수도 없으니, 결국은 수백 장 정도 떨어진 숲속의 커다란 나무 위에 자리를 잡았다.


줄기와 잎이 무성하여 가지 사이에 나무들을 걸치고, 가지고 온 유리수 판자를 바닥에 깔고 앉으니 그런대로 쉴 만한 잠자리가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곧 여기저기에서 여러 짐승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더니, 짐승과 싸웠던 바위 근처로 몰려가는 것 같았다. 밤새 불안한 마음으로 편히 잠들지 못하다가 새벽녘에야 간신히 잠이 들었다.


아침에 눈을 비비고 일어나 보니 벌써 해가 동산 위로 두둥실 떠올랐다.


바삐 짐을 챙기고 나무에서 내려가 어젯밤에 싸웠던 바위에 가 보니, 고을신의 손에 죽었던 짐승은 살이 모두 뜯어 먹히고 앙상하게 뼈만 남았다.


그 모습을 보는 두 사람은 모골(毛骨)이 송연(悚然)하였고······.


이렇게 두 사람이 이런저런 마음고생과 몸고생을 하면서 다시 천인족의 주거지로 무사히 돌아오기까지는 보름이 넘게 걸렸다.


멀리 천인족 주거지의 울타리가 보이자 고을신의 얼굴은 벌써 예쁜 딸을 볼 생각에 웃음꽃이 피었고, 자신도 모르게 점점 발걸음이 빨라진다.


청류하는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으며 뒤에서 쫓아가기 바빴다.


속으로는 ‘나도 이참에 콱 결혼이나 해 버려?’ 하는 생각을 하면서······.


목책에서 경계를 서는 무사들이 신원을 확인하고 문을 열어 주자 드디어 그리던 시원평원 안으로 들어섰다.


그때 아빠가 올까 봐 날마다 문가를 서성였던 고을신의 막내딸이, 멀리서도 아빠의 모습을 알아보고 작은 발로 부지런히 달려왔다.


“아빠! 우리 아빠 맞지?”


“어이쿠! 우리 공주님! 오랜만에 한 번 안아 볼까요?”


마주 달려가니 예쁜 딸이 아빠의 품에 뛰어들어서 볼에다 얼굴을 정신없이 비비는데······. 반가워하면서도 눈에는 눈물이 방울방울 맺혔다.


애들은 왜 너무 기뻐도 눈물을 흘리는 것일까? 얼굴은 좋아서 웃는데 눈에서는 이슬이 아롱진다.


“아빠! 왜 이제서야 왔어! 너무너무 보고 싶었단 말이야. 나 안 보고 싶었어? 난 아빠가 많이 보고 싶었는데······.”


“아빠도 우리 딸 많이 보고 싶었어.”


“얼만~큼?”


그러자 두 손으로 눈물을 닦아 준 다음 손을 크게 벌리며 과장해 보였다.


“하늘~만크음!”


그 당연하고 평범한 모습을 뒤에서 웃으며 바라보던 청류하는 부러운지 혼자 속으로 중얼거렸다.


‘에구! 진짜 부럽긴 하네. 나도 예쁜 딸이나 하나 낳을까? 결혼은 안 하고 예쁜 딸만 낳는 방법은 없나? 근데 어떻게 키우지?’


그런데 인간사가 어디 마음먹은 대로 다 되던가? 남녀도 다 인연이 있어야 만나고 자식도 팔자에 있어야 낳는다고 하지 않던가?


고을신은 무엇에 정신이 팔렸는지 딸의 손을 잡고 달려가기 바쁘고, 혼자 불 꺼진 빈집으로 돌아가는 청류하는 오늘따라 발걸음이 무겁다.




감사합니다. - 설련하(偰輦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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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2

  • 작성자
    Lv.33 무림존자
    작성일
    21.07.01 14:31
    No. 1

    비월족이 영화처럼 떼 지어 날으면 너무 멋지겠어요. 아 ~ 나도 새처럼 날고 싶네.

    찬성: 36 | 반대: 0

  • 작성자
    Lv.29 철없는사과
    작성일
    21.08.17 12:23
    No. 2

    나는 무게 때문에...ㅎㅎ ;; 그래도 중간에 노래로 달래는 걸 보면 제법 온순하네요.
    계속 머리 속으로 그려보고 있어요. 종족들이 다양하다보니 안되면 손그림으로라도
    그려서 상상을 더해보고 싶네요^^ 근데 보통 지도를 맡아 그리는 사람들은 전문가로
    나이가 있으신 분이고 무사는 젊을 줄 알았는데 의외의 조합이네요.
    제대로 편견을 깨주셔서 너무 좋았던 대목들이에요ㅎㅎ 거기다 이야기 속 이야기처럼
    결혼과 비결혼의 이야기도 살짝 버무려 주시고ㅎㅎ
    오늘은 조금은 가볍게 읽고 갑니다.^^//

    찬성: 7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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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8화. 반인족과의 격돌(激突) +2 21.06.28 1,777 48 19쪽
7 7화. 사건의 발단(發端) +2 21.06.28 1,887 50 19쪽
6 6화. 첫 주거지 +2 21.06.28 2,036 52 18쪽
5 5화. 선인과 거인(巨人) +3 21.06.28 2,196 50 18쪽
4 4화. 거인족과의 조우(遭遇) +2 21.06.28 2,417 53 18쪽
3 3화. 천인족의 대이동(大移動) +3 21.06.28 2,670 55 18쪽
2 2화. 서장(2) 탈출(脫出) +3 21.06.28 2,870 56 19쪽
1 1화. 서장(1) 탄생(誕生) +5 21.06.28 4,709 58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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