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탈출
‘날 돕는 거로 자신을 증명하려 하는구나! 굳이 뭔가를 증명하려 하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야. 안 그래도 너 같은 인재는 끝까지 데리고 갈 생각이거든.’
젖은 옷이 몸에 딱 달라붙어 적나라하게 드러난 예솔의 탄력 넘치는 몸매를 힐끗 보았다.
부드럽고 강인한 근육으로 형성된 유려한 곡선을 따라 물방울이 타고 흘렀다.
흠뻑 물에 젖어 예솔의 예술적인 몸매가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끝내주는 몸이야. 사자이면서도 토끼의 생존법을 여전히 고수하려는 거니? 어찌 보면 예솔이만의 생존법이겠군. 날 잘 이용하면 살아남을 확률이 꽤 오르긴 하겠지!’
과거 이맘때쯤에 남구는 예솔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형편없는 실력을 갖고 있었다.
남들이 패스하는 레슬링이나 태권도 같은 스킬을 주워 먹고 열심히도 연마했었다.
마치 하루살이처럼 당장 오늘을 죽지 않고 살아남는 것만이 지상 최대의 과제이자 궁극적인 목표였다.
꿈도 희망도 없는 암담한 상황에서 강자들의 등 뒤에 쥐도 새도 모르게 빨대를 꽂아서라도 절대 포기하지 않는 것이 최약체 남구의 생존법이었다.
딱딱한 마른 빵만을 이가 부서져라 뜯어먹으며 결코 감정을 내색하지 않은 채 온갖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최선을 다했었다.
자존심 따위 개나 줘버리고 강자들의 가랑이를 기며 호시탐탐 성장의 기회만을 집요하게 노렸었다.
여태 혼자 살아온 예솔은 자신이 얼마나 축복받은 스킬을 가졌는지 어느 정도로 강한지조차 감을 잡지 못했다.
‘삼식이도 널 상대하기 힘들걸? 넌 고트족 노예 중에서 이인자라 해도 전혀 손색이 없어. 네가 모습을 숨긴다면 찾을 수 있는 자가 과연 얼마나 될까? 일 대 일에서는 대부분 선수 필승일 거야.’
엄청난 잠재력을 지닌 예솔의 시무룩한 표정이 어처구니없게 느껴진 남구가 저도 모르게 피식 입꼬리를 비틀었다.
‘여자들을 이끌어야 하는 네가 기운 빠지면 안 되지!’
사기를 북돋우려고 몇 마디 내뱉었다.
“상대를 알고 싸우는 거랑 모르고 싸우는 거랑 천지 차이지! 도움 많이 됐어. 덕분에 고블린이 어떤 스킬을 쓰는지도 알 수 있었고 마나도 많이 잡아먹었을 거야.”
시무룩했던 표정이 금방 해맑아졌다.
“그래?”
남구가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까닥거렸다.
‘칭찬에 약한 편이군.’
예솔이 아까부터 박도에 묻은 물기를 옷에 정성껏 문질러 닦았다.
육체 쟁탈전에서 남구가 가윗날에 묻은 피를 닦아내던 모습과 흡사했다.
장비에 애착을 보이는 모습까지 닮아 있었다.
‘인챈트 된 무기는 처음 봤겠지! 꽤 마음에 드나 보지?’
별이 붙은 명품 아이템의 사양이 메시지 텍스트를 통해 예솔에게 전해졌을 것이다.
자신의 애도를 구석구석 닦으며 남구를 힐끔거리던 예솔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말했다.
“그래도 감자는 먹을 수 있을 거야.”
예솔은 남구의 표정에서 무엇을 근심하는지 단번에 읽어 냈다.
남구의 미소가 조금 더 진해졌다.
남구가 간신히 숨만 붙어 있는 중독된 두 여자를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저기, 쟤하고 쟤! 아직 살아있어. 얘들 데리고 좀 씻겨봐! 가능하면 물도 먹이고.”
깜짝 놀란 예솔이 널브러진 여자들을 돌아보았다.
예솔의 감각에도 걸리지 않을 정도로 호흡이 희미했다.
“의식이 없는데? 물은 넘길 수 있을까?”
“못 넘기면 어쩔 수 없지!”
예솔의 행동은 신속했다.
바로 움직이는 예솔에게 이어 말했다.
“몇몇은 감자 캐게 해! 난 들것 만들어야겠다. 여기서 더 얻을 것도 없고 공기 중에 독소도 퍼져 있어서 빨리 벗어나야겠어.”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던 에솔이 돌아보며 대답했다.
“응! 알았어.”
그리고는 여전히 탕 안에서 눈만 내밀고 있는 여자들을 향해 외쳤다.
“이제 다 나와!”
내키지 않는 듯 조심조심 몸을 일으키는 여자들에게 예솔의 호통이 이어졌다.
“빨리빨리 움직여! 여기 오래 있을수록 몸에 안 좋아!”
곧 첨벙거리는 물소리가 들려 왔다.
‘일소로 난 완전히 활력을 되찾았지만 쟤들은······.’
잠을 못 잔 게 마음에 걸렸다.
‘그래도 이런 독기가 떠다니는 곳에 더 머무를 수는 없지!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야 해!’
이곳 안전지대를 벗어나면 또다시 사활을 건 질주가 시작될 것이다.
어쩌면 거의 끝자락에 도달했는지도 몰랐다.
남구가 들것을 만들며 스타트 포인트에서 지하 터널로 들어가는 입구의 위치를 되새겨 보았다.
50개의 진입로는 넓은 범위에 무작위로 뚫려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분명히 10개씩 인근에 위치해 마치 5개의 그룹으로 묶여 있는 듯했다.
할당된 혼자만의 터널을 지나 하나의 석실을 두 팀이 공유했다.
몬스터를 해치우면 또 제시된 터널을 지나야 한다.
지금까지 지나온 석실이 2곳, 이곳 안전지대를 더하면 3곳이었다.
‘사다리 타기? 아니, 이건 토너먼트 대진표야! 인제 보니 땅속에다가 거대한 대진표 미로를 만들어 놨군. 10 팀씩 묶였다면 총 4번 석실을 거쳐야 해! 부전승이 걸린다면 3번! 벌써 끝났거나 한번 남았어.’
석실에서 조우한 남자들이 힘을 합쳐 뭉쳤다면 10팀씩 다섯 그룹으로 나누어진 다른 조와 준결승에서 만났을 때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었다.
싸울지 힘을 합칠지는 오로지 각자의 몫이었다.
‘포섭할 걸 괜히 다 죽였나?’
여자들에게 걸린 상당한 보상이 욕심나는 자도 있을 테고 그저 대단한 미모의 여자를 한 명이라도 더 얻고 싶은 자가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솔로와 커플이 나누어진 상황에서 솔로로 남게 되면 죽을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기에 남자들이 뭉친다는 것은 참으로 요원한 일이었다.
들것을 완성한 남구가 고블린이 들어온 곳과는 또 다른 석벽에 미세하게 보이는 틈새를 살폈다.
지나왔던 석실들은 몬스터가 죽으면 석문이 저절로 열렸었다.
‘몬스터가 출몰하지 않으니 석문도 자동으로 열릴 일이 없군. 그나마 다행이야!’
빠릿빠릿 움직이며 일행을 몰아붙이는 예솔 덕분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한쪽에서는 의식 없는 여자들을 씻기며 조금이라도 물을 먹여 보려고 용을 써댔고 또 한쪽에서는 쪼그려 앉아 손톱이 빠지도록 감자를 캤다.
‘미인이 많은 어느 나라는 연예인 아무개가 밭일한다고 재미 삼아 농담을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지! 여기서는 실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네!’
탐욕에 사로잡힌 남자들 간에 마찰과 출몰하는 사나운 몬스터와의 접전은 둘째 문제였다.
아홉 명이나 되는 대식구가 한 치 앞도 어찌 될지 모를 이 거대한 지하 미로에서 일단 먹고 살아야 했다.
게다가 세 명은 환자였고 그중 둘은 의식도 없었다.
이들을 돌보려면 더욱 많은 에너지가 소모될 터.
곧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짐작만으로 소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이런 지하 터널에서 언제 또 식량을 얻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식량을 구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배낭에 최대한 식수와 감자를 쓸어 담았다.
내용물을 정리해 당장 필요 없는 것들은 빼 버렸지만 여섯 명은 전부 빵빵한 배낭을 낑낑거리며 짊어졌다.
거동을 못 하는 환자가 세 명이나 되었기에 둘씩 짝을 지어 모두 들것까지 들고 이동해야만 했다.
축 늘어진 여자의 몸무게에 더해 들것의 재료 자체가 원목이라 엄청난 무게였다.
앞뒤로 둘이 든다고 해도 쉽지 않았다.
“하악! 너무 무거워!”
“흐으윽!”
“캭!”
남구만이 가볍고 자유로운 몸으로 앞장서서 가느다랗게 틈새가 보이는 벽면에 손을 얹었다.
손이 닿자 곧바로 반응이 왔다.
[안전지대를 나가시겠습니까? 한번 나가면 다시 입장할 수 없습니다]
‘꼴에 안전지대라고 메시지가 나오네? 잔말 말고 문이나 열어.’
[즐거운 이벤트 되십시오]
‘즐겁기는 개뿔! 멘트 누가 짠 거야?’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석벽이 열리기 시작하자 뿌연 먼지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며 우렁찬 마찰음이 울려 퍼졌다.
쿠구구구구웅-
*
짹- 짹짹- 뽀로롱-
활기찬 새들의 지져귐과 눈부신 아침 햇살을 맞이하며 어두침침한 지하터널에서부터 지상으로 일단의 무리가 줄줄이 올라오고 있었다.
메에에-
무리에는 고트족의 상징과도 같은 염소가 섞여 있었다.
음매-
티베트 태생 야크가 염소의 울음소리에 화답이라도 하는 듯했다.
덩치가 워낙 거대하여 일행의 모든 짐을 실어 놓았음에도 여유가 있었다.
“드, 드디어 나왔어! 포탈은 어디 있지?”
터키 여자가 눈이 부신 지 잔뜩 눈살을 찌푸리고 주변을 정신없이 돌아보았다.
선글라스를 걸치고 선두에서 사방으로 분주하게 눈동자를 휘돌리던 남구가 막 터져 나오려는 여자들의 환호성에 제재를 가했다.
“아직 샴페인을 터트리기엔 일러!”
예솔의 주의가 뒤따랐다.
“남구 얘기 들었잖아! 이제 고작 한 개 조에서 살아남은 거야. 우리같이 각 조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네 팀이나 남아 있다고.”
환희에 찼던 여자들의 얼굴에 다시금 긴장감이 엄습했다.
남구의 일행은 석실 한 곳을 더 들렸었다.
다행히도 행운이 따라 안전지대에서 머물 수 있었다.
편안한 환경에서 환자도 돌볼 수 있었고 잠도 푹 잘 수 있었으며 삼시세끼 배부르게 음식도 섭취할 수 있었다.
불청객이 찾아오지도 않았었다.
길이 갈렸는지 몬스터에게 당했는지 서로 싸우다 공멸했는지 굶어 죽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단지 분명한 사실은 남구의 일행은 지하터널에서 끝까지 살아남아 지상으로 올라왔다는 것이다.
석실은 두 팀이 모두 진입해야 그제야 몬스터가 소환됐었다.
조건을 갖출 때까지 먼저 들어온 팀은 마냥 기다려야 하는 시스템이었다.
따라서 지상으로 통하는 터널의 마지막 석문이 열렸다는 뜻은 남구의 일행이 유일한 생존자라는 방증이었다.
염증을 일으켰던 꿰뚫린 상처가 한결 나아진 러시아 여자는 이제 스스로 걸을 수 있었다.
죽음의 공포에 질려 히스테리를 부리던 때와는 사뭇 다르게 피부에 닿는 햇살을 만끽하는 표정이 매우 밝았다.
중독되어 죽어가던 여자들은 의식을 회복했지만, 아직 거동이 불편했다.
하여 여전히 들것에 실려 있었다.
러시아 여자가 회복한 덕분에 예솔은 들것 대신 무기를 들고 주변을 경계할 수 있었다.
예솔이 울창한 수풀의 틈바구니를 뚫고 광선처럼 내리비치는 햇살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게 얼마 만에 보는 햇살이지?”
아무도 지하터널에서 며칠을 보냈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곳은 시계도 해도 없었다.
“한, 일주일 됐을까?”
터키 여자의 말에 러시아 여자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대꾸했다.
“난 한 달 정도 된 거 같은데?”
터키 여자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뭐? 그렇게나 오래됐다고?”
“내 어깨에 난 상처 많이 아물었어. 일주일 만에 이렇게 빨리 아물 수는 없지!”
“그, 그런가?”
분주히 눈동자를 휘돌리며 탐색에 여념이 없던 남구가 망토를 펄럭이며 살대를 한 움큼 뽑아 들었다.
예솔이 수다를 떠는 터키 여자와 러시아 여자에게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쉿! 조용히 해!”
두 여자가 급히 입을 닫고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느라 고개를 휘적거렸다.
음성은 생생하게 들려왔으나 목소리의 주인을 찾을 수는 없었다.
예솔은 어느샌가 소리소문없이 모습을 감춰 버렸다.
남구가 아무도 없는 허공을 향해 입을 열었다.
“소환된 놈들은 아니야. 이곳에 서식하는 몬스터야!”
허공에서 예솔의 목소리만 튀어나왔다.
“한두 마리가 아닌 거 같은데?”
“무리로 사냥하는 놈들이지! 여기, 정글이 아니라 섬이었군. 저놈들은 아크리 섬에 사는 놈들이거든.”
“공룡처럼 생겼어.”
“속도가 빠르니까 조심해!”
“응!”
[지하 미로에서 탈출한 것을 환영합니다]
모두의 망막에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선작, 추천은 작가의 우울증을 예방할 수 있답니다. 볼만 하셨다면 꾹~ 눌러주세요.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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