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렙 히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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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작품등록일 :
2022.05.11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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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6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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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MMY

벨루디스 측은 지구에서 멀쩡히 잘 살던 용사―― 아서를 멋대로 오엘문리아로 소환한 것에 나름의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야 어떻게 보면 납치이지 않은가?


그렇기에 사는 데에 불편함이 없게 여러모로 신경을 써줬으며, 어지간한 요구들은 전부 수용해줬다.


베르다드로의 입학도 마찬가지였다. 터무니없는 억지가 아니라면 그의 뜻을 존중해주기로 한 것의 결과였다.


물론 선의로만 그런 건 아니었다.


암만 자원이 썩어 넘친다지만 개인에게 나라가 자원봉사나 다름없는 짓을 무조건적으로 하지 않는다. 벨루디스는 이계, 미지의 세계를 알고 있다는 점에서 그에게 가치를 부여했고, 지원을 하는 것이었다.


현재까지는 그다지 수확이 없었으나, 언젠가는 나라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일. 그것이 아쉬워 이따금 대신들 사이에서 괜한 일이 아니냐는 말이 나옴에도 아직 데리고 있는 것이다.


아서도 이러한 속 사정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지구에서는 이세계 전생, 환생, 혹은 전이 같은 소설이 많다. 이에 따라 갈라지는 이야기도 넘치고 찼다. 정말 너무 많아 흔한 클리쉐로 굳어진 것들도 많았으며, 이쪽 장르를 즐겼던 아서는 나름 흐름에 대해서는 빠삭했다.


그래서 아서는 처음 이세계에 왔음을 인식했을 땐 무척이나 안도했다.


본인의 의지는 무시하고 마구 굴려지는―― 노예로서의 이세계 소환이 아니라서.


심한 이야기에서는 소환하는 즉시 노예 계약을 맺어 영문도 모르는 채, 병사로서 한낱 소모품 취급을 당하는 것도 있다. 거기서 용사라는 건 단지 허울 좋은 직책일 뿐, 다뤄지는 방식은 가축과 다를 바 없다.


당시 사정을 설명하며 사과하는 리카드에겐 화를 냈으나, 속으로는 얼마나 식은땀을 흘렸는지 모른다.


이후 그 리카드가 세기의 대마법사라는 것을 들었을 땐 더더욱 그러했다.


용사라고는 하나, 평화로운 세계에서 살던 인간에 불과하다. 갑자기 무기도 없이, 지구인으로서는 정체도 모를 마법사 상대로 이길 리 만무. 혹여 암울한 이세계 소환이었다면 그대로 노예 확정이었다.


더욱이 오엘문리아 라는 세계를 알고 나서, 이곳이 평화롭다는 걸 알고 나선 얼마나 쾌재를 부르짖었는지 모른다.


모처럼 이세계에 왔는데 좀 즐기고 싶었다. 오자마자 그러할 틈도 없이 세계의 위기라는 등의 이야기가 없어서 진심으로 좋았다. 최저한이라지만 벨루디스의 지원도 있어서 금상첨화였다.


역시 자신은 운이 좋다.


남들은 평생 해보지도 못할 이세계 소환에다가, 조건도 그다지 나쁘지만은 않다. 운이 좋다는 건 증명됐다고 봐도 될 것이다.



“아니다. 이 운이야말로 나의 이세계 소환 특전이 아닐까? 검술만 주어진다는 건 역시 야박하고 말이야.”


이세계 소환에는 반드시 필연적으로 따르는 게 있다. 그게 방금 말한 특전―― 치트 능력이다. 그리고 이곳 주민으로는 상상도 못 할, 그 특출난 능력을 바탕으로 영웅담을 그려나가는 게 왕도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그건 바로, 너무 평화롭다는 것이다.


평화로운 건 좋다 이거다. 즐길 시간적 여유가 있으니. 그러나 너무 평화로운 나머지 왜 소환된 건지, 그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


영웅이라는 건 물리칠 상대가 있기에 영웅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이다. 모험을 떠나 명성을 드높이는 것 또한 강대한 적이 있기에 가능하다.


그런데 여태 알아본 바로는 그런 위협적인 존재는 없다.


마왕이 있다고는 하나, 다들 토벌 의욕은 갖고 있지 않다. 불가침 조약을 800여 년 지키고 있는 터라 누구도 위협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넌지시 말해보아도 ‘너는 절대 못 이길뿐더러, 전쟁을 벌여봐야 손해’라는 분위기만을 풍겨댔다.


마왕을 이기는 존재야말로 용사이거늘······.


다들 옹이눈인 우매한 놈들이지만, 일단 지원해주는 건 그들. 의견을 무시하긴 힘들었고, 이쪽도 놀기만 하니 크게 불만은 없었다.


그래서 마왕은 단념하고 모험가 쪽으로 눈을 돌렸는데······ 이쪽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인류를 위협하는 강대한 몬스터 따윈 없었다. 능히 이 세계의 주민들만으로도 토벌이 가능한 녀석들뿐이었다. 그뿐이랴, 언뜻 시찰해본 모험가는 인력 사무소의 느낌이 더 강하게 들었다. 덕분에 모험가란 일용직의―― 인생의 실패자들이 모이는 집단으로 보게 됐다.


요컨대, 용사가 나설 자리 따윈 없다.


초조했다. 적이 없다는 것은 그 대척점인 용사도 필요 없다는 뜻이기도 해서.


곧 등장하겠거니, 용사로서 무대가 차려지겠거니 기다린 게 벌써 1년이 다 되어 간다. 그렇지만 감감무소식. 아서가 나설 상황은 전무했다.


평화가 길어지니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실수―― 간혹 이세계물에 등장하는 ‘의미 없는 소환’이었다.


말 그대로 어떠한 목적도 없이 우연찮게 소환된 케이스.


최악이다. 이래서야 단순히 납치당한 것과 다름없지 않은가. 노예보다는 낫지만, 그 바로 위에 머물 만큼 바라지 않는 상황이다.


물론 기왕 바라는 것 없이 불렸으니 마음대로 살아도 될 것이다. 특전도 있고 하니 그럭저럭 잘 살 테고.


그러나 남자로 태어나지 않았나. 남들은 경험하지 못할 모험과 동료와의 우정, 사랑, 그리고 길이길이 남을 위대한 업적. 이것들을 어찌 바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평범한 인생 따윈 지구에 놓고 왔다.


다행히도 능력은 있다. 남은 건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다.



“그래. 난 그런 용사로서의 이야기를 실현하기 위해 이 세계에 소환된 거야. 실수······일 리가 없어. 나는 주인공이니까.”


무겁게 중얼거린 아서는 넥타이를 졸라맸다.


오늘의 복장은 미묘하게 지구의 정장을 닮은 차림새. 치렁치렁한 귀족들의 복장은 생리적으로 무리기에 그나마 저항감이 덜한 것을 찾다 보니 고르게 됐다.


그렇다고 막 고른 건 아니다. 페네리로가 설명해주기로는 나름 귀족들의 외출복으로도 쓰인다고 하니. 장소에 따른 복장의 예의에는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가자! 페네리로.”

“예. 한데, 실례지만 어디로 가십니까?”

“어디긴. 인디아네야.”

“정탐입니까?”

“대충 그런 거야. 용사와 교회는 뭔가 빠질 수 없는 관계잖아? 사이좋게 지내둬야지.”

“과연. 알겠습니다.”


멍청한 건지, 똑똑한 건지······.


곧이곧대로 냉큼 받아들인 페네리로와 함께 아서는 기숙사를 나왔다.


한껏 차려입고 교내를 활보하니 시선이 모인다. 그러나 그럭저럭에 불과하다. 모인 시선조차도 조금은 껄끄러워하는 기색이다. 초창기 압도적으로 주목을 끌 때와는 상당히 달랐다.



“뭔가, 전과는 보는 시선이 달라진 느낌입니다만······.”

“너――”

“――그래도 앞으로는 다들 아서 님을 우러러보게 될 겁니다. 힘내 보도록 하죠.”

“다, 당연하지. 그러려고 인디아네를 만나러 가는 거 아냐. 괘, 괜한 소리 하지 말라고.”

“예. 실례했습니다.”

“굳이 사과는 하지 않아도 돼.”

“예.”


잠시 멈춰 고개를 숙이는 페네리로.


너무 진지하고 딱딱하다.


‘어쩐지 얘도 조금 변한 느낌이지? 처음에는 아무 감정이 없는 인형 같았는데. 아니면 계속 같이 지내다 보니 조금 알아볼 수 있게 된 건가?’


하긴 1년 가까이 하루 종일 쭉 붙어 다녔는데 아무것도 모를 수가 있겠나.


그런 생각을 하며 아서는 귀빈관에 도착했다.


페네리로는 저번 제국의 황자들을 찾아갔을 때를 담아두고 있었는지, 웬일로 의욕을 보이며 앞장서서 길을 안내하였다. 지난번에도 간 적이 있기에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됐는데······.


똑똑.


듣기 거북하지 않게 페네리로가 성국의 사자들이 있는 방에 노크했다. 다행히 헛걸음할 일은 없어 잠시 후 문이 열렸다.



“무슨 용무이신지······?”


왠지 눈매가 날카로운, 흰 법의의 후드를 눌러 쓴 겁나 무서운 인상의 아저씨가 튀어나왔다. 물론 얼굴의 편차치가 높은 세계답게 더럽게 잘 생기긴 했다만······.


‘이름이 뭐였더라······? 켓트로 머시기였는데. 이쪽 사람들은 이름 외우기가 어렵단 말이지.’


내심 발칙한 몸매의 리블리지가 나올 줄 알았던 아서는 당황했다. 그러나 자신을 위해, 미래를 위해 쪽팔리게 굴 수 없어 당당한 척 입을 열었다.



“인디아 주교를 만나러 왔어.”

“면목이 없으나, 주교님께선 현재 명상에 들어가 계신지라 만나뵐 수 없습니다.”


즉답이었다. 일말의 주저도 없다.


생긴 대로 배려라는 걸 조금도 모른다. 신관 주제에. 하지만 압박감이 굉장했다. 찌릿하달까, 신경을 곤두세우게 하는 무언가가 이 남자에게 있었다.


아서는 잠시 주춤했다. 그렇지만 여기까지 온 거다. 물러날 수는 없었다.



“잠깐이면 돼.”

“안 됩니다.”

“조금만 시간을 내주면 된다니까? 그것도 안 된다고?”

“그럴 분위기가 아닙니다.”

“분위기라니. 누구 초상이라도 치른 것도 아닌데 쩨쩨하게――”

“――맞습니다.”

“굴지 말고―― 아니, 잠깐. 뭐라고?”


놀라 묻는 말에 남자는 담담히, 하지만 내려다보는 짙은 녹빛의 눈동자는 섬뜩한 안광을 뿌리며 대답했다.



“얼마 전에 1급 신관이 순직하셨습니다.”

“자, 잠시만. 1급 신관이라면 몇 명 있지도 않다고 들었는데, 그런 사람이 죽어―― 순직했다고?”


수명이 다 되어 자연사했다는 게 아니다.


순직이란 그런 것이다. 예기치 못한 일로 목숨을 잃었다는 거다. 아서도 지구―― 대한민국에서 자의는 아니지만 군인으로 있어 봤던지라 그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그 순직자가 1급 신관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초유의 사태다. 확실히 면담 같은 걸 할 때가 아니었다.



“말씀하신 대로 1급 신관은 그 수가 적습니다. 다들 면면을 알고 있고, 인디아 주교님의 경우 본인께서 직접 고른 자였습니다. 부디 양해해주시길.”

“어······,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지. 몸조리 잘하라고 전해줘.”

“전해드리겠습니다.”

“땡큐. ――아아. 근데 단장님이랑 덩치 큰 아저씨는 벌써 돌아간 거야? 영 보이질 않던데.”

“길게 체류하실 건 아니셨던지라 현재 이곳에 계시진 않습니다.”

“그래?”


결국 헛걸음이 된 꼴이지만 이번만큼은 아서도 순순히 물러났다.



“때가 안 좋았나 보네. 사실 나는 운이 나쁜 거 아냐? 럭키 치트인 줄 알았는데.”


아무 소득도 없어 귀빈관을 나오자마자 푸념을 늘어놓았는데, 페네리로가 슬쩍 고개를 저었다.



“운이 좋으신 편입니다. 그것도 상당히.”

“음음. 역시 그렇지?”

“예. 그야 아서 님은 이미 목이 몇 번이나 떨어지실 상황을 돌파하셨잖습니까? 살아 계신 것만으로도 기적. 어지간한 운으로는 불가능했을 겁니다.”

“······.”


놀리는 건가 싶었는데 아니었다. 레네리로는 진지했다. 드물게 감명 깊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기까지 하며.


다시 봐도 웃음기는 하나도 없었다.


‘거참, 특이한 녀석일세.’



“잡소리는 됐고, 어서 다음이나 가자.”

“알겠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오늘의 진짜 일정. 인디아들에게 온 건 시간이 남은 김에 들른 덤에 불과했다. 잘 풀리면 좋고, 아니면 말고 정도의 기대만 했기에 순순히 발걸음을 돌린 것이었다.



“이건가?”


마차장에는 한 대의 훌륭한 마차가 서 있었는데, 아서가 다가가니 대기하고 있던 남자가 정중히 머리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알펜리트 님.”

“음. 후작님 쪽 사람이야?”

“예. 저택까지 모시겠습니다.”

“아아. 그래.”


짤막한 대화를 마치고 아서는 한 번의 발돋움만으로 훌쩍 마차에 올라탔다. 몸치였던 지구에서는 감히 엄두도 낼 수 없는 날렵함이었다.


‘마력이라······. 지금이라면 올림픽 신기록 정도는 껌이겠는데?’


엄청난 육체적 능력 상승. 처음과 비교하면 모든 스테이터스가 대략 4~5배 이상은 증가하지 않았을까 싶다.


만약 지구에서 이랬다면 범국민적 스타였을 것이다. 어떠한 종목이든 상관없다. 기술이나 숙련도 따윈 간단히 무시할 수 있다. 압도적인 육체의 능력만으로 압살. 종목을 가리지 않고 그 분야에 최고가 되었을 터다.


하지만 그리 들뜰지는 않았다. 그러긴커녕 한숨만 나왔다.


그 원인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바로 등 뒤, 그곳에는 언제 올라왔는지도 모를 페네리로가 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페네리로조차도 맹한 모습과는 달리 엄청난 육체적 능력을 지녔다.


그렇다고 이 푼수가 특별하다는 건 아니다. 이곳 사람들에겐 이게 보통―― 평균이다. 즉, 이곳 사람들은 누구나가 지구인들은 압살할 신체 능력을 기본적으로 장착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처구니가 없지만 사실이다. 지구의―― 근육이 울긋불긋한 마초남과의 팔씨름 정도는 가볍게 이길 거다. 가녀리고, 여려 보이는 영애조차도 말이다.


일례로, 지금은 뜸해진 영애와의 다과회 때 그녀가 많은 짐을 가져온 적이 있었는데, 폼 좀 잡겠다고 대신 들었다가 그 무게에 식겁하기도 했다. 정작 그 영애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건만.


이러한 세계다. 누구나가 깨뜨릴 올림픽 신기록 따위에 신경이 가겠는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허탈할 뿐이다.


‘이젠 그 정도 무게는 가볍지만, 구긴 체면이 돌아오진 않겠지.’


어쩌면 그날의 일로 실망하여 만나러 오는 게 뜸해졌을 수도 있겠다. 본디 여성은 강한 남자에게 끌리기 마련이니.


내심 안타까워하고 있자 안내역의 남자가 마차로 들어와 맞은편에 앉았다.


이윽고 마차는 출발했고, 잠시 흔들림에 몸을 맡겼던 아서는 남자를 보며 물었다.



“짧은 동행이겠지만 말문이나 트자. 난 아서라고 해. 이계에서 온 용사지.”

“전 후작 각하의 비서인 무르즈라고 합니다.”

“오. 비서나 되는 사람이었어?”

“용사님께서 놀랄 신분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각하께서 용사님과의 만남을 각별히 신경 써 주시고 계신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알고 있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웃는 얼굴로 말하였으나, 본심은 아니었다.


아서도 바보는 아니었다. 지구에서는 평범하지만―― 오히려 밑으로 치우친 쪽이지만, 이 세계의 입장으로 보면 상급 교육을 받은 엘리트 중 한 명이었다. 여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여 방치한 것도, 오늘 부른 것의 목적 정도는 다 알고 있었다.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은 건, 그저 때를 기다린 것. 사냥감을 노리는 짐승처럼 숨을 죽인 것에 불과했다.


‘오늘 이날을 위해서 말이지.’


때는 찾아왔다. 본인의 비서를 보낼 정도로 자신의 가치는 충만해졌다. 이제는 그것을 증명하는 것만이 남았다.


규칙적인 말발굽 소리를 들으며 아서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윽고 오늘의 진짜 목적지인 마르티즈 후작 가의 별장에 도착했다. 그리고 비서, 무르즈가 안내한 곳은 저택의 반대편이었다.



“오오. 왔는가?”


간이로 만든 듯한 피크닉 자리에 오늘 부른 상대, 알렌나시안 발 에딧 마르티즈 후작이 값비싼 차양막의 그늘에서 차를 즐기고 있었다.


아서는 안내되는 대로 후작의 반대편에 자리했다.



“오랜만이야, 후작님. 한 달만인가?”

“벌써 그렇게 됐나? 시간 참 빠르구먼.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

“지내고 말 것도 없었지. 그보다 어쩐 일이야?”

“급하구만. 여유를 갖는 것도 중요하다네.”

“난 저쪽에선 평범한 축이었거든. 공교롭게도 귀족의 예법이라는 게 영~ 익숙해지질 않아.”


이런이런, 이라며, 후작은 곤란하다는 듯이 고개를 젓고는 슬쩍 눈짓했다. 그러자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무르즈가 집사에게서 한 자루의 검을 받아 가져왔다.



“한 번 보게나.”


보고 말 것도 없었다. 가죽 검집에서 꺼낸 검은 아무 특색도 없는 민무늬의 평범한 양날 검이었다.



“이 나라 병사들의 보급형이려나? 하지만 꽤 좋은 느낌인데. 손에 들리는 감각······ 확실히 학원에서 빌려주는 것보단 나아 보여.”

“호오······. 알아보는 건가?”


생각 이상이라며 후작은 감탄했다.



“뭔데 그래, 후작님. 아, 혹시 병사들의 검이 아니야?”

“나이젤 백작의 아들 것이라네. 베르다드에 3학년으로 재학 중이지. 자네와도 한두 번쯤은 교내에서 마주쳤을 거네.”

“남자의 얼굴 같은 건 잘 기억은 안 나지만······. 근데, 좀 수수하지 않아? 백작님의 자제라면 훨씬 멋지고 으리으리한 검쯤은 있을 거 아냐.”

“그렇지. 그의 아들이 지닌 검은 따로 있지. 이건 단지 받았을 뿐이라네.”

“와우. 잘도 백작의 자제에게 이런 후줄근한 검을 줄 생각을 다 했네. 누구야?”

“이스피리아······. 그 뻔뻔한 계집이 만들어 준 것이라더군.”


뜬금없는 이름에 빈정이 상한 아서는 팍 인상을 찌푸렸다.



“아. 왠지 낯이 익더라니. 이거랑 같은 검을 들고 좋아하던 멍청이가 있었어.”

“그래. ‘영웅의 모임’이라는 웃기지도 않는 곳에 정찰 겸, 백작의 아들도 참가했더니 줬다고 하더군.”

“칫. 장난감 같은 걸 주고는 잘난 척하기는······.”

“동감이네. 겨우 준 마도무구 따위를 주고 여간 생색이 아니지.”


준 마도무구 라는 게 뭔지는 모르지만 분명 별것도 아니리라. 선뜻 나눠줬으니 말이다. 그러한 걸 받아 좋다고 실실거리던 놈들이 이상하다.


아서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이와 반대되는 의견이 후작의 입으로부터 나왔다.



“그런데 듣자 하니 조금 생각이 달라졌네. 이 검 말일세······. 사실은 마법으로 만들었다고 하더군.”

“마법으로? 그런 것도 할 수 있어?”

“학원 내에선 유명한 이야기라네만······.”


설마 못 들어봤냐며 후작이 쳐다본다.


그 설마가 맞다. 모른다. 그딴 일은 처음 들어본다.


어쩌겠나. 이스피리아 라는 이름조차 듣기 싫어 주변은커녕, 그 꼬마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올라치면 곧장 자리를 떴는데.


아서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고 미루어 짐작했는지, 후작은 별말 없이 이어 말했다.



“생성 계열의 마법이 있네. 그것으로 제작했다지. 그것도 수백 자루를 단방에.”

“뭐······?”

“나도 믿기지 않지만 진짜라네. 모두가 보는 앞에서 했다니까 무언가의 속임수는 아닐 것이야.”

“그 꼬맹이가 그만한 마법을?”


후작도 무척이나 싫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싫어하면서도 그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대한 마력을 지녔음에는 틀림없겠지. 사룡을―― 그만한 괴물을 물리쳤다는 것도 우연은 아니겠고. 거기다······ 비젠탈을 탔다고 하더군.”


아서는 눈을 부릅떴다.


너무나도 유명한 대마수. 벨루디스의 건국왕의 파트너였다는 비젠탈의 이야기는 당연하게도 아서의 귀에 들어왔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용사와 대마수. 이보다 좋은 조합은 없다고.


베르다드로 온 것도 사실 이 때문이었다. 주인을 잊지 못해 누구에게도 등을 허락하지 않는 대마수에 자신이 타, 전설의 시작임을 알리려 했었다.


용사로서의 화려한 데뷔를 이보다 만천하에 보여줄 기회 없었을 터.


하지만 실패하였다. 올라타기는커녕, 비젠탈이 내뿜는 맹렬한 마력의 파동에 엉거주춤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욱하여 억지로 올라타려고도 했다. 그렇지만 본능적으로 알고야 말았다.


이 이상 강제로 굴면 실력행사를 당할 것이라고······.


온몸을 날카롭게 찔러대는 기분 나쁜 감각이 이를 멋대로 깨닫게 했다. 그래서 포기하고 방으로 돌아왔었다.


그랬건만······.



“하! 역시 이름뿐인 멍청한 말이었네! 용사는 몰라보고 그딴 꼬맹이에게 설설 기기나 하고.”

“부정할 말이 없군. 암만 대마수라도 결국엔 한낱 말이었을뿐인 게야.”


동의하며 분통을 터뜨린 후작. 그러나 직후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나, 세간은 그리 받아들이지 않네. 800여 년의 침묵을 뚫고, 그 등을 허락한 이스피리아야말로 건국왕의 뒤를 잇는 진정한 영웅이라며 치켜세우고 있지.”

“뭣?!”


통탄스럽지만 후작은 그게 현실이라 말했다.



“그래서 제안이 있네. 오늘 자네를 부른 것도 이것 때문이지.”


그렇게 말한 후작은 능글맞은 웃음을 지었다.


뭔가 꾸미고 있는 게 뻔히 보였지만 아서는 말해보라 눈짓했다.



“배알이 꼴리지 않는가? 용사인 자네를 두고 영웅이니 뭐니 떠들어대고.”

“당연하지! 그딴 꼬맹이가 어딜 봐서 영웅이야?!”

“암암. 그렇고말고. 나 또한 어디서 굴러왔는지 모를 멍청한 계집이 설치고 다니는 꼬락서니가 영 아니꼽네. 하물며 다음 국왕이라니 이 어찌 용납하겠는가?”

“국~왕? 멀쩡히 있는 왕자들을 냅두고?!”

“물론 실현 가능성은 한없이 낮네. 그렇지만 일부 어리석은 귀족들이 진심으로 그리 여긴다는 게 문제네. 건국왕의 파트너가 선택한 이스피리아야말로, 진정 벨루디스를 다스리기에 어울리는 자가 아닌가 하고.”

“미친······. 나라를 기울이려고 작정―― 아니, 팔아먹는 거 아냐?”


왕권 사회에서는 무엇보다 중시하는 게 피다. 결혼도 이것의 연장선상이다. 가문 간의 유대를 보다 공고히 하기 위해 서로의 피가 섞이게 하는 것이다.


괜히 소설에서 누구의 피를 이었다느니 떠들어대는 게 아니며, 암살하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하는 게 아니다. 왕권 사회에서는 그만큼 피라는 것이 상상 이상으로 중요한 요소였다.


왕위는 말할 것도 없다. 아무 연도 없는 아무개가 왕위를 차지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쿠데타 같은 찬탈이라도 벌어지지 않는 한은 말이지. ――어? 설마?”


황급히 시선을 옮기니 후작은 무겁게 말했다.



“나의 우려가 바로 그것일세. 비록 지금은 웃어넘기지만, 후에 세력이 커지면 어찌 될지······. 나는 이 나라의 정통 귀족으로서, 벨루디스를 건국한 가문의 일족으로서 그러한 사태만은 막고 싶네.”


나라를 빼앗기는 슬픔을 안다. 아서가 태어난 대한민국이 그랬었으니까.


물론 아서는 애국자라거나 나라를 깊이 사랑한다, 같은 그런 인종은 아니었다. 어느 쪽이냐 하면 헬조선이라 부르며, 이민 가고 싶다 노래를 부르는 쪽에 가까웠다.


하지만 싫으면 싫은 대로 정이 생긴다고 하지 않던가.


아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나름의 애착을 갖고 있었다. 그건 까더라도 한국에서 나고 자란 자신이 깐다는 심보로, 외국인이 근거도 없는 이야기로 한국을 욕하면 눈살을 찌푸리고는 했었다.


그랬기에 완전히 공감은 못 했더라도 심정은 조금 공감했다.



“······나에게 바라는 게 뭐야, 후작님.”

“용사라네. 이스피리아, 그 가증스러운 년에게 뒤지지 않을 이정표가 되어주게.”

“정확히 뭘 하면 돼? 싸워서 이기면 되는 거야?”

“아, 아니, 그러면 좋긴 하겠지만,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네. 정면으로 맞붙는다면 결과가 어찌 됐든 반드시 말이 나올 테니.”

“그럼?”


묻는 말에 후작은 가볍게 손뼉을 쳤다.


신호에 한 사내가 저택의 끝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사내는 이 후작 가에서는 보기 드문 차림새였다. 군데군데 금속이 번뜩이는 경장 갑옷 차림도 그러했지만, 몸동작에서 느껴지는 분위기 같은 게 어쩐지 귀족스럽지 않았다.



“모험가?”

“바로 맞혔구먼. 알아본 대로, 벨루디스의 하나뿐인 A랭크 팀―― 은의 잔에서 전위를 맡고 있는 모험가라네. 발품 팔아 어렵게 모셨지.”

“뭣 때문에?”

“――당신을 단련시키기 위해서지.”


후작 대신 천천히 다가온 사내가 질문에 대답했다.



“귀족님께 어울리는 말투는 아직 서투니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상관없어.”

“나도 괜찮다네.”


그것참 살았다며, 너스레를 떤 사내는 붉게 물들인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참고로 염색인 걸 알아본 이유는 뿌리 부근이 연한 갈색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잘생겼다.


거친 일을 하는 사람답지 않게 시원스레 생긴 얼굴도 그렇지만, 단발인 머리를 쓸어올릴 때 언뜻 보인 근육도 남자다움이 물씬 풍겼다.


분명 여자에게 인기가 좋겠지. 랭크도 A이고.


살짝 혀를 차니, 사내는 상쾌하게 말했다.



“자! 그럼, 정식으로 소개하자면, 이 몸은 은의 잔에서 전위를 맡고 있는 펜사라고 합니다. 오늘은 지명의뢰로 혼자 오게 됐지요.”

“그 의뢰라는 게 나의 단련이라고?”

“예이~”


아서는 장난스러운 대답을 들으며 시선을 후작에게로 옮겼다.



“미리 상의도 없이 미안하게 됐네. 하지만 입 발린 소리나 변명은 하지 않겠네. 우리를 위해서라도 자네는 더 강해져야 해.”

“아니. 그건 상관없어. 모처럼 어렵게 데려왔다니까.”

“고맙네.”

“그래서, 저걸 쓰러뜨리면 되는 거야?”

“어이어이~ 의욕은 좋지만 서두르지 말라고. 일일 스승이지만 최대한 차근차근 기초를 알려줄게.”


끼어들어 가벼운 어조로 말한 사내―― 펜사.


그에게는 절대적인 자신감이 있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A랭크까지 오르며 겪었던 경험들이 자신은 강하다는 것을 알려줬을 테니 말이다.


그걸 무시할 마음은 아서에게는 없었다. 대신 한 가지만 물었다.



“펜사라고 했지? 너는 그리모르라는 멧돼지보다 강해?”

“멧돼지······?”

“아아. 베르다드의 교수라네. 전직 A랭크의 모험가였지.”


후작의 추가 설명에 펜사는 기억해냈는지 작게 손뼉을 쳤다.



“아하! 전 길드 마스터 아저씨! 이야~ 그리운 이름이네. 맨날 폭주하는 폴코라고 불러서 본명 쪽은 잊고 있었어. 은퇴 후엔 유유자적 여자나 끼고 사는 줄 알았는데, 베르다드에 있었구나?”

“그래서?”

“아저씨보다 강하냐고요? 음. 글쎄요······. 그 아재 귀신같이 강했다고들 하는데, 직접 보진 못했던지라 뭐라 단정 짓긴 어렵네요. 하지만 나이도 먹고 감각도 쇠했을 테니 아마 이 몸이 더 강하지 않을까요?”

“그거 좋네. ······후작님, 검 좀 빌릴게.”


필시 이러기 위해 저택의 뒤에서 만난 거겠지.


아까 받은 검을 든 아서는 선뜻 고개를 끄덕인 후작을 지나쳐 공터로 향했다.



“자, 잠깐. 옷은 안 갈아입나요? 그 복장으로는 움직이기도 불편할 텐데.”

“어. 상관없어.”


정말 저래도 괜찮냐며 펜사는 후작에게 눈으로 물었다. 그렇지만 그에게 나올 말은 뻔하였다.



“진짜 의욕이 넘치시네.”


뒷머리를 긁적인 펜사는 의욕 없이, 의뢰이니 마지못해 한다는 분위기를 팍팍 풍기며 마주 섰다.



“너무 가깝지 않아?”

“가르치기엔 이 정도가―― 엥? 설마 바로 대련하려고요?”

“그거 말고 뭘 더해?”

“어······.”


곤란하다는 듯 펜사는 다시금 후작을 보았다. 그리고 이번에도 대답은 마찬가지였다. 원하는 대로 하라고.



“에라이. 나도 모르겠다. 직접 부딪혀서 깨닫는 것도 하나의 방편이기도 하고. ······저기, 후작님, 다쳐도 [치유]의 비용은 이쪽으로 청구하시면 안 됩니다?”

“걱정하지 말게. 이쪽이 알아서 할 테니.”

“그쪽의 사용인 아가씨도. 주인께서 다치더라도 원망하시면 안 됩니다?”


묻는 그에게 페네리로는 대답 대신 가슴께에 모은 주먹을 꽉 쥐고는 조용히 아서를 쳐다봤다. 마치 응원이라도 하듯이.


‘어울리지도 않게 뭐 하는 거야.’


가볍게 콧방귀를 뀐 아서는 살짝 검을 늘어뜨려 잡았다. 이 오엘문리아라는 이상한 세계에 와선 처음으로 진지하게 자세를 취한 것이었다.


다만, 그 모습은 아이러니하게도 아서가 그토록 싫어하는 꼬맹이―― 이스피리아와 닮아있었다.



“기본자세도 모르는 겁니까? 그래서는 금방 당하고 만다고요?”

“아니. 반대야. 자세를 잡는 것 자체가 상대에게 정보를 주는 꼴이거든. 그런 기초적인 것도 모르는 거야?”

“아~ 그렇습니까?”


도발이 제대로 먹혔다. 가늘게 눈을 뜬 펜사는 생각 이상으로 진지하게 등에 멘 롱소드를 뽑아 자세를 잡았다.


‘에이. 기껏 충고해줬는데.’


괜한 소리를 한 게 아니었다. 실제로도 왼팔 위에 롱소드를 얹듯이 취한 펜사의 자세만으로 그의 무수한 전법들이 그려졌다.


이것으로 알아낸 펜사의 유형은 돌파형의 어태커. 단숨에 찔러 들어와 진형을 깨뜨리는 전형적인 전위였다.


‘――라고 오판하게 하는 것이겠지. 우습게 알고 있어.’


저 자세는 페이크. 펜사의 진짜 전법은 방어형의 가드다.


예상하기로 달려들 듯한 움직임을 취해 상대가 경계하도록 하는 것이겠지. 그리고 그 틈에 동료들이 화력을 집중한다.


아마 이게 은의 잔이 자주 써먹는 전법일 것이다.


싸우기도 전에 답이 나왔다. 그렇기에 아서는 팔을 늘어뜨리고는 가만히 서 있기로 했다.



“먼저 덤비셔도 됩니다만?”

“왜? 선공엔 익숙하지 않으신가?”


아주 조금이지만 펜사가 움찔했다.


하지만 거저 A랭크를 따진 않았나 보다. 동요를 감추더니 쏘아지듯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아서는 반걸음 뒤로 물러섰다. 동시에 종이 한 장 차이를 두고 펜사의 롱소드가 스치듯 지나갔다.



“뭣?!”


빗나갈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은―― 다음 수를 정해놓지 않은 펜사의 움직임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어이없다. 자세와 움직임 하나만으로 무슨 공격을 할지 뻔했는데, 그것도 못 피할 거라고 보다니.


지금 자신이 누굴 상대하는 건지 알려줄 필요성을 느낀다.


봐주진 않는다. 방금의 일격은 맞았다면 부상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멍때리면 쓰나. 에비~”


아서는 검을 찔러넣었다.


오른쪽 옆구리를 스치는 그 일격을 펜사는 가까스로 막아냈다.


펜사는 놀란 기색이 가득했다. 본인의 일격보다도 한참이나 느린 것을 겨우 막았으니 이해는 한다. 그러나 우연도, 방심했기 때문도 아니었다. 원래 막기 어려운 일격이었을 뿐이다.


게다가 아직 공격은 끝나지 않았다.


아서는 오른발을 앞으로 나가며, 가로로 벴다.


맞대어진 검에서 기분 나쁜 금속음이 울린다. 하지만 무시하고 쭉 휘둘렀고, 자세가 바뀌어 펜사의 안쪽으로 위치를 옮긴 검은 확실하게 그의 숨통을 끊기 위해 움직였다.


펜사는 황급히 몸을 뒤로 날리듯 달아났다.


과연 A랭크. 판단이 빠르고 신체 능력이 탁월하다. 입만 살진 않았다.



“그래봤자 초심자인 내게 내뺀 사실은 변함없지만.”


주위의 분위기가 급변한 가운데, 아서는 느긋하게 처음의 자세로 돌아왔다.



“방금 그건······.”

“불만이야? 시작한 건 너였는데?”

“하지만 전 죽이려고 들진 않았습니다.”

“결국 비슷하잖아? 쓴맛을 보여주려는 것치고는 꽤 감정이 실렸으면서.”


펜사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이제야 안 것이다. 눈앞에 있는 상대는 초심자도, 단련이 필요한 사람도 아니라는 것을.



“어때? 그만할까?”

“설마요. 가르치는 보람이 있기만 하네요.”

“나는 별로인데. 멧돼지보다 훨씬 약하고.”

“호······. 그 발언, 감당할 수 있습니까?”

“사실인 걸 어쩌냐. 방금의 일합, 그리모르였다면 반격까지 했을걸? 적어도 내빼진 않았을 거야.”

“하하. 나도 우습게 보였나 봐. 햇병아리 새끼가!”


분노에 으르렁거린 펜사가 달려들었다.



“[가속], [완력], [강완], [능력증강].”


동시에 네 개의 투기술을 건 펜사. 그가 왜 A랭크인지 입증하는 장면이기도 했다.


학생이 상대할 수준은 확실하게 벗어났다. 엘리트만 모인다는 베르다드도 동시 발동은 기껏해야 3개가 한계였으니. 신체 능력 면에서도 차이가 있으니 펜사와의 실질적인 차이는 더더욱 극심할 것이다.


투기술을 전혀 쓸 줄 모르는 아서는 논외다. 펜사를 아예 놓쳐 뒤꽁무니의 그림자조차 포착하지 못했다. 속도와 힘 또한 그러했다. 전혀 대적할 수준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서는 용사다.


허울뿐인 명칭이 아니다. 그는 명명백백 용사로서 소환된, 검이라는 분야에 한해서는 치트―― 반칙적인 존재였다.


스릉.


매끄러운 금속음이 나며, 사라졌던 펜사가 발을 끌며 옆으로 밀려났다. 완전히 중심을 잃은 모습이다.



“뭐, 뭘 한 거냐?!”

“그냥 네 검을 쳤는데?”

“웃기지 마라! 친 것만으로 어떻게 힘의 방향을 완벽히 바꾼단 말이냐!”

“지금 했잖아. 몸소 경험해놓고 웬 딴소리야? 거기에, 왜 이리 말이 많아. 난 땀도 안 났는데 벌써 지친 거야?”

“씨X, 애새X가. 그놈의 운이 언제까지 이어지나 보자!”


팡!


공터의 바닥이 파일 정도로 쏘아져 나간 펜사는 맹공을 퍼부었다. 자제는 없다. 하나하나가 모두 전력. 반드시 아서를 죽이겠다는 살의가 담겨있었다.


완전히 이성이 날아갔다. 이후 뒤처리는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다.


‘내가 죽으면 의뢰는 실패잖아. A랭크가 이래서야 원. 딴 놈들의 수준도 뻔하겠네.’


멀리 후작과 그의 비서가 놀라 외치는 소리를 들으며 아서는 쏟아지는 공격을 피했다.


여전히 펜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롱소드도 전혀. 하지만 어렵지 않게, 가볍게 한 걸음씩만 움직여 종이 한 장 차이로 모두 회피하였다.


쉽다.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가 넘쳤다.


그도 그럴 것이, 뻔히 어디로 올지 아는 것이었다.


아서는 한 번의 자세, 한 번의 휘두름을 본 것만으로, 평생을 갈고 닦은 펜사의 검을 모두 이해해버리고 말았다. 어떠한 자세에서, 어떠한 검로로 벨지를 알기에, 그의 일격이 명중할 일 따윈 없는 것이다.


이것이 아서―― 용사로서 부여받은 재능. 사람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선택받은 존재에게 내려진 축복이었다.



“진심을 낼 필요조차 없었네. 시시하니 이만 끝낼게.”

“――[광야]!”


번쩍이는 빛과 함께 온몸을 압박하듯 검게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정면 상단에서 내려치는 일격으로, 묘하게 감각을 자극하는 뭔가가 선뜻 무시하기 힘들게 했다.


느끼기로는 어딘가 도발기와 비스무리한 투기술 같다.


개소리 같이 들리지만 정말 그러했다. 게임에서 도발 당한 몬스터가 이런 기분이겠거니, 왜 바보같이 도발한 놈만 공격했는지 알 것만 같았다.


물론 의미 없는 헛짓이지만.


애초에 보이지도 않았는데, 정면을 압박하든 말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더욱이 맞지 않을 걸 아는 시점에서 저딴 허세 가득한 공격이 통할 리가 없다. 말 그대로 몬스터가 아니고선.


‘뭐, 탱커답기는 하지만.’



“근데 회피 탱도 좋긴 한데, 역시 탱커는 검방이지!”


남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외친 아서는 왼발을 뒤로 빼 몸을 수직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얼굴 옆을 아슬아슬 지나치는 롱소드의 날카로운 날.


잘린 머리카락 몇 가닥을 휘날리며 아서는 아래로 검을 찔러넣었다. 잔뜩 힘이 실린 [광야]를 사용한 뒤라 자세가 무너진 펜사는 대응하지 못했다.


푹.


검 끝이 단단히 뭉친 땅을 파고들었다.



“······안 죽이나?”

“잊었나 본데, 이건 대련이라고? 그럴 이유가 없잖아?”

“그건 그렇군······.”


허탈해한달까, 맥이 빠졌다는 듯이 말한 펜사에겐 저항의 의지가 사라졌다. 애당초 그는 검날과 크로스가드―― 검받이에 목이 끼인 상태다. 완벽히 제압됐고, 여차하면 작두를 내려치듯 누르면 됐다.


‘만화라면 방심한 틈에 찌르겠지만······ 상관없나? 어차피 소용없을 테니.’


아서는 천천히 검을 거둬들였다.


다행이랄지, 펜사도 달려들진 않고 목을 풀며 자리에서 일어나 등의 검집으로 검을 돌려놨다.



“이름을 듣지 못했는데, 알려줄 수 있어?”

“아서 알펜리트. 용사야.”

“용사?! 네가 그? 웬 허영심으로 가득한 놈인가 했더니······, 진짜였나 보네.”

“오~! 나 꽤 유명한 가봐?”

“그럭저럭······? 너도 알겠지만, 드래곤 슬레이어가 등장했잖아. 그래서 좀 묻힌 감이 없잖아 있어.”

“칫. 또 그 꼬맹이냐.”

“아는 사이야?”

“아니. 베르다드에서 몇 번 봤을 뿐이야.”

“아하. 뭐, 기분 풀어. 그 실력이라면 너도 금방 유명해질 거야. 그땐 싫어도 여기저기 들러붙고 난리일걸?”

“그 꼬맹이보다 더?”


펜사는 난처하듯이 웃었다.


아서도 알고 있었다. 이만큼 화려하게 일을 벌인 이스피리아보다 더 눈에 띄기란 어렵다는 것을.


정말 어지간히도 임팩트 있는 사건이 아니고서는 언제나 그 그늘에 가려지리라.



“이봐, 아서.”

“갑자기 이름이여?”

“검을 맞댄 사이잖냐. 어제의 적은 오늘의 동지란 말도 몰라?”

“됐다. 근데 뭐?”

“이제 와 하는 소리인데 말이야. 단련이라며 비싼 돈 주고 왜 사람을 부른 거야? 너 정도의 실력이라면 필요 없잖아.”

“후작님의 노파심 때문이야. 난 별로 믿음직스럽게 보이지 않나 봐.”

“그건 그래.”

“앙?”


째려보니 펜사는 카하핫, 쾌활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듣기엔 싫겠지만 좋게 생각하도록 해. 그건 네 나름의 장점이자 무기니까. 유명해지는 것도 그래. 강한 주제에 어딘가 모자란 구석이 있는 녀석들이 의외로 이름을 떨치는 경우가 많더라.”

“짜증 나는 소리지만······ 확실히 일리가 있긴 해. 그 꼬맹이 그렇고. 갭모에란 말도 있으니.”

“뭔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그거. 그리고 말이야.”

“또 뭐?”

“그 검, 생긴 건 후줄근하지만 이름 높은 도공이 만든 명검이야?”

“그럴 리가. 꼬맹이가 만들었다는 장난감이야. 네 롱소드가 훨씬 좋아.”

“에이~ 내 강격을 받아내놓고 장난감이라니. 흠집도 없는데.”

“기술이니까 그렇지. 제대로 받아내면 나뭇가지로도 똑같아.”

“진짜 그러면 굉장하네. ······근데 궁금하니까 한 번 봐도 돼?”


본심은 이건가 보다. 감탄하는 어조에 감정이 담기지 않기도 했고.


오로지 자신이 든 검만을 쳐다보며 눈을 빛내는 모습에 아서는 한숨과 함께 검을 던져줬다.


내심 방심하게 하고 저 검으로 찌르진 않을까 싶었는데, 그건 괜한 걱정이었다. 이스피리아―― 드래곤 슬레이어가 만들었다는 검이 그렇게나 궁금했는지, 펜사는 허겁지겁 검을 받아 들고는 검 끝부터 손잡이까지 살펴보기 시작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역시 아서 님이십니다.”

“당연한 거지.”


담담한 어조였지만 뿌듯한 기색으로 페네리로가 타올을 공손히 내밀었다.


이런 건 언제 준비했는지······.


하지만 정성이 갸륵하다. 그 점을 참작해, 아서는 땀 한 방울 안 흘렸음에도 받아 대충 얼굴을 닦는 척해줬다.


잠시 그러고 있으니 후작이 손뼉을 치며 다가왔다.



“훌륭하네, 아서 공.”

“고마워. 근데 나에겐 단련은 필요 없다는 걸 알았지?”

“아니. 반대로 더더욱 자네에겐 단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네.”

“A랭크의 모험가를 이겼는데?”

“그렇기 때문이라네. 분명 이기긴 했네. 압도적이었지. 보면서도 난 내 눈을 의심했어. 하지만 그는 결국 인간. 보아하니 자네는 기술로만 이긴 듯싶은데, 몬스터 중에서는 검이 듣지 않는 것들도 있네. 만약 그것들이 상대였으면 방금처럼 손쉽게 이기진 못했을 것이야.”


확실히 그건 그랬다.


암만 단련해도 인간의 피부란 거기서 거기. 강한 놈들은 좀 질기다는 소리가 있다고는 해도, 태어났을 때부터 강철 같은 피부를 지닌 몬스터를 당해낼 재간이 없다.


후작의 말마따나 펜사와의 대련은 기술로 이긴 것. 4~5m가 넘어가는 덩치의 몬스터에게까지 통용될지는 미지수였다. 펜사보다 훨씬 약하더라도, 그 큰 덩치로 무대포 돌진을 한다고 생각하면 어찌 대응해야 할지 막막했다.



“좋은 무구와 더불어, 더욱 강해진 자네라면 어디까지고 올라갈 걸세. 드래곤 따윈 문제도 아닐 터. 아서 알펜리트란 이름은 만천하에 널리 위명을 떨칠 거라네!”


반드시 그리 될 것이라는 양 위세 좋게 떠드는 후작.


뭔가 꿍꿍이속이 있어 보이지만, 좀 더 강해지기 위해 단련을 하는 것도······ 나쁘진 않아 보인다.






아서와 펜사를 돌려보내고, 집무실로 돌아온 알렌나시안 후작은 소파에 깊게 몸을 묻었다.


후우, 숨을 길게 토해낸 후작은 멍하니 위를 쳐다보았다.


그러다――



“크하하핫! 대박―― 실로 엄청난 대박이었어! 크하핫!”

“예상 밖이었습니다. 설마 그토록 강할 줄은······.”


비서이자, 진정한 오른팔인 무르즈의 말에 후작은 더욱 크게 웃어 재꼈다.



“누가 아니라나. A랭크라고? 그 띨빡한 머저리가 은의 잔, 펜사를 압도할 줄 누가 알았나. 그야말로 복권에 당첨된 기분이야. 대충 키워다 써먹으려 했는데! 하하핫!”

“정말 뜻하지 않게 강력한 패를 얻었습니다.”

“얻다마다. 충분하다 못해 넘칠 지경이야. 사람은 역시 착하게 살고 봐야 해. 그렇지 않나, 무르즈?”

“말씀대로. 위기의 순간에 이리 적절히 구호의 손이 내려온 것은 천운이 아니고선 설명이 안 됩니다.”

“여차하면 은의 잔―― 하다못해 펜사를 이쪽으로 끌어들일 수도 있고 말이지.”


너무나도 잘 풀린 상황에 알렌나시안 후작의 웃음은 끊이질 않았다.


정말 막강한 카드를 얻었다. 오히려 파벌이 반으로 쪼개지기 전보다도 더욱 강해진 기분이다. 눈치 볼 것 없이 자신의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는 점에서는 진짜로 그러하였다.


만약―― 가정의 가정이지만, 아서가 지금의 이스피리아를 뛰어넘는 강함과 명성을 손에 넣는다면 그때는 무적이다.


왕권파나, 제1 왕자파 같은 건 모두 상관없다.


타국에 비해선 짧지만 오랜 역사를 지닌 벨루디스다. 마르티즈 후작 가에도 분명하게 왕가의 피는 섞여 있었다. 더더욱 파벌의 힘이 강해진다면 정상을 노리는 것도 가능했다.


――왕위 찬탈을 말이다.


하지만 직후 들뜬 알렌나시안 후작의 마음은 가라앉았다.



“섣불러서는 일을 그르치지. 모든 일엔 순서가 있듯,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가야 할 것이야.”


그렇다. 분명 왕위는 무척이나 탐이 나는 자리다. 그렇지만 욕심에 눈이 멀면 모든 걸 잃고 말 것이다.


서두지 않아도 된다. 지금은 천천히 파벌을 키우는 데에 집중해야만 한다.



“‘공작’의 자리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고 말이야.”


상전에 앉을―― 또 다른 패를 떠올린 알렌나시안 후작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축배를 들었다.


밝게 빛나는 자신을 위해······.


작가의말

그렇습니다! 사실 아서는 용사였습니다!

(매우 놀람...)

근데 대항하는 상대가 조금...


안녕하세요, 라스티아입니다.

후후. 이번 화는 빠르게 완료했습니다.

성실, 근면한 라스티아입지요.

무척이나 뿌듯하무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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