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렙 히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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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작품등록일 :
2022.05.11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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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6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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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18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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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DUMMY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잠시 후 경악한 심정을 가까스로 다스린 라프리트는 기숙사에 가기로 하였다.


안네는 그 뜻을 받들어 먼저 밖으로 나와 다른 사람이 없는지 확인했다. 이윽고 자연스럽게 자신을 이끄는 그녀를 따라 학원 내에 있는 기숙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는 도중 라프리트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머릿속은 수많은 생각들로 가득 들어차 있는 상태였다.


그런 자신을 배려했나, 안네도 입을 다물어 방해하지 않았다.


그렇게 기숙사 내 자국의 귀족이나 타국의 고위 관료 자제들을 위해 준비한 스위트룸이 있는 곳에 왔다.


미리 들었던 자신의 방으로 잘 에스코트한 안네는 작게 묵례하고는 옆에 붙어있는 사용인들의 대기실로 퇴석했다.


조용한 방안에서 라프리트는 널찍한 소파에 앉아 한동안 계속 사색을 이어 나갔다.


30분이 흐르고――


쥐 죽은 듯이 있던 라프리트는 마침내 크게 숨을 토해내고는 아예 몸을 뉘어 소파에 드러누워 버렸다.


귀족인 자, 타인의 모범이 어쩌구 하지만 자신의 방이기도 한데 뭐 어떠랴.


안네나 다른 사용인들이 본다면 분명 주의 줄 것이 뻔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그딴 것보다도 지금 이 문제가 훨씬 중요했다.


도대체, 왜?



“――벌써 이스피리아 양의 머리가 하얗게 된 겁니까?”


한숨과 함께 내뱉은 라프리트의 말은 공허하고, 작게 퍼졌다.



“정말 이유를 모르겠네요. 같이 온 사람들은 또 누구고요.”


방에는 혼자만 있어 이 의문을 해결해줄 사람은 없었다. 물론 안네나 다른 자들이 있어봤자 해결해주지 못하는 건 매한가지겠지만.


라프리트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고위 귀족을 위해 준비한 방답게 후작 가에 있는 자신의 방 못지않게 호화로웠다. 상당한 심혈을 기울였는지, 들이마신 숨에선 은은하게 향기로운 꽃향기도 느껴졌다. 아마 그 외에도 마법으로 무언가 장치해놨을 듯싶다.



“후우······”


일부러 길게 심호흡했다.


그러나 다른 곳에 신경을 돌리려던 이 작전은 실패. 현실을 외면해봤지만, 눈으로 본 것이 바뀌진 않는다.


회피하던 것을 포기한 라프리트는 진홍빛의 테이블 위에 놓인 컵을 들었다.


‘겨우 이런 물건에 불필요하게 힘을 줬네요. 알고는 있었지만······’


만듦새가 좋은 컵과 테이블을 보며 그런 평가를 한 라프리트는 작게 외쳤다.



“[식수생성].”


컵의 밑바닥에서부터 물이 차올랐다.


‘이걸로 만족해야겠죠.’


식수마법으로 만든 물은 미지근하다.


이 정도의 시원함으로는 머리에 나는 열을 잠재울 순 없을 거다. 하지만 얼음을 만든다든가, 이 물 자체를 시원하게 만들 능력은 없다.


아쉬운 대로 마셨지만, 그래도 목을 축이니 답답하기만 하던 속은 편해졌다. 조금은 머리도 개운해진 것 같았다.


그러한 기분을 느끼며 라프리트는 다시 생각해봤다.


이렇게 된 원인은 알 수 없다. 그러면 자신은 무얼 해야 하는가?


답은 정해져 있었다. 머리를 끙끙 싸매고 원인을 밝혀내도 현실은 바뀌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행동에 나설 뿐이지요.’


세린 님이라면 분명 그런 말씀을 하셨을 거 같고, 실제로 비슷한 충고를 듣기도 했었다.


‘좋아! 해보는 거예요!’


쾅!


라프리트는 컵을 테이블에 내려쳤다.


스스로 기운을 북돋기 위한 행동이었는데······ 생각보다 큰 소리가 나 바로 조심스럽게 컵을 살펴봤다.


다행히도 금가거나, 깨진 곳은 없다.


기숙사에 오자마자 컵을 깨다니. 안네에게 한 소리 들을 좋은 먹잇감이었다.


컵도 멀쩡하고, 저도 모르게 살핀 사용인 대기실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라프리트는 크게 안도했다.



“코홈.”


헛기침하여 기분을 새롭게 한 라프리트는 테이블 위에 있는 동그란, 조그마한 부저를 눌렀다.


이 부저는 사용인의 방에 벨을 울리게 하는 마도구였다. 다른 방이었으면 들고 흔드는 평범한 종이었을 텐데, 이곳은 이런 자잘한 곳까지 신경을 썼다.


이 스위트룸은 타국에서 오는 자들을 홀대하지 않는다는, 어필의 차원에서 만들어진 것이니 당연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타국에 과시하려는 의도도 있는 것이다.


별것 아닌 마도구조차도 만들려 하면 이래저래 비용이 상당히 나간다. 초기부터 시작한다면 술식의 개발, 그 술식을 새겨놓을 장인까지 포함되니 금액은 천정부지로 뛰어오른다. 대량 생산할 체계를 갖춘다면 그보단 떨어지겠지만.


그러니 자신이 사용한―― 누르면 조금 떨어진 곳에 신호를 주는 이 간단한 기능밖에 없는 마도구도 엄청난 고가. 일반 시민들은 살 엄두도 못 낼 정도다. 차라리 그 돈으로 먹을거나, 생필품을 구하고 말거다.


솔직히 말하면 낭비였다.


그래도 타국에서 베르다드로 오는 자들은 고위 신분인 자도 많으니 벨루디스의 평판을 위해서라도 필요한 일이긴 했다. 이러한 걸로 벨루디스는 좌시할 수 없는 국가란 인식이 생겨 나라 간 분쟁이 준다면 싼 편이기도 하고.


‘테이블이나 컵은 몰라도, 이 벨 마도구는 솔직히 좀 편하기도 하고 말이죠.’



“아가씨, 부르셨습니까?”


부름을 받고 안네가 다가왔다.



“응. 조금 부탁할 게 있어서.”

“어떤 것입니까?”


라프리트는 최대한 안네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도록 태연함을 가장해 물었다.



“아까 우리가 봤던 일행들 있지? 그분들의 기숙사 방을 알아봐 줘.”

“학원장님과 함께 오신 분들이요?”

“응.”

“······.”


실패했나?


어렸을 때부터 함께 지내던 안네다. 자신의 거동을 눈치채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여 답하는 안네.


라프리트는 머릿속에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사실 아가씨가 말씀하시기 전에, 이미 사람을 보냈습니다.”

“엉?”


그러고 보면······ 확실히 평상시 안네였으면 부저를 누르자마자 이쪽으로 왔을 텐데, 방금은 조금 늦은 듯했다.


하지만 뭐가 됐든 빨리 알아낼 수 있으면 좋았다.


안네의 우수함에 감탄한 라프리트는 기대감에 찬 눈으로 바라봤다.



“결과는?”

“알아냈습니다.”

“으응? 벌써?”


방에 들어오고 조금 생각하고 있었다지만 너무 빠르다. 기대하고는 있었지만 벌써 알아냈을 거란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그런 생각을 알아챈 것인지 안네는 조금 어색하게 말하였다.



“그게······ 사람을 보내려 하자마자 알게 됐습니다.”

“바로?!”

“네······”


라프리트는 벌떡 일어나 안네에게 달려들었다.



“오오! 굉장해! 어디야?! 동쪽 기숙사 몇 호??”

“아뇨, 서쪽 기숙사입니다.”

“응?? 여기?”

“네.”

“에엥?!”


기숙사는 동쪽, 서쪽으로 나뉘어있었다.


처음 학원이 세워질 때는 동쪽에 있는 기숙사 하나뿐이었지만, 차츰 명성을 쌓은 학원으로 타국의 고위인사 자제들이 유학을 오면서 그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이 서쪽 기숙사였다.


그렇게 서쪽 기숙사가 만들어짐에 동쪽에서 머물던 벨루디스의 고위 자제들도 이쪽으로 옮겨오고, 그들이 사용하던 방은 어느 정도 지위가 되는 귀족들이 머무는 방으로 등급이 떨어지게 되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고위 자제들이 썼던 곳이기에 상당히 좋은 방들이다.――


즉 서쪽 기숙사는 여간한 신분이 아니라면 방이 배정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러니까 이스피리아 양은 이쪽으로 올 리가 없지 않습――? 핫. 아니, 잠깐······ 아까 이스피리아 양도 그렇고, 같이 온 일행분들도······ 엄청 귀티 나 보이지 않았나요?’


――뭔가 이상하다.



“안네! 바로 준비하세요!”

“예?! 설마 지금 바로 가신다는 겁니까?”

“맞아. 지금 가봐야 할 거 같아.”


이 대답에 조금 곤란해하던 안네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그리고는 자신의 어깨를 잡고 있던 라프리트의 손을 조용히 떼어냈다.



“아가씨······ 이곳 기숙사에 머문다는 것은, 나름의 지위가 있는 분이실 겁니다. 하물며 저분들은 본 기억이 없으니 타국에서 오신 분들이겠죠. 그런데 아무런 예정을 잡지도 않고 갑자기 방문하신다고요? 귀족분들이 아니라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갑작스러운 방문은 예의에 어긋나는 건 아닐는지요······”

“그, 그건 그렇지만······”


차분히 가라앉은 안네의 말에 라프리트는 당황했다.


안네의 말은 지당했다.


아무런 말도 없는 갑작스러운 방문을 좋아할 사람은 없었다. 고위 귀족이라면 더욱이나.


이스피리아가 그 고위 귀족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지만 여기서 포기할 순 없었다. 아니, 포기라는 말 자체가 용납되지 않았다. 여기서 주춤한다면 분명 세린 님은 실망할 것이다.


그분께선 말씀하셨다.


조금만 더 적극적으로 나가라고. 엉거주춤하고 있으면 아무것도 해내지 못한다고. 그러니 그때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엄청나게 후회했다고.


그 말은 뼈에 사무치는 깊이가 있었다. 실수를 반복할 순 없다.



“후······ 미안해요, 안네. 예의 없다는 건 알고 있지만, 전 지금 그분들과 만나보고 싶습니다.”


라프리트의 강한 의지가 담긴 안광이 빛을 냈다.


그 시선을 받은 안네는 흠칫 몸을 떨고선 치마의 끝을 잡고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가슴께에 손을 대고 공손히 머리를 숙여 신하의 예를 취했다.



“나의 주인께서 바라신다면.”

“미안―― 아니죠. 고마워요, 안네. 내 이기심을 들어줘서.”

“별말씀을······. 다만 방문하시기 전에 제 쪽에서 먼저 의향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네. 맡길게요. 아마······ 제 예상이지만 저희의 방문을 그리 싫어하시지 않을 겁니다.”


이스피리아의 성격상 그리 기분에 거슬리는 말만 하지 않는다면 어지간해서는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습니까. 그럼,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부탁해요.”


일어선 안네는 묵례하고 바로 밖으로 나갔다.


혼자 남게 된 라프리트는 그녀가 돌아오기 전까지 이스피리아와 만나 이야기해볼 내용들을 정리해 봤다.


‘맨 처음은······ 자기소개부터 해야겠군요. 전 그녀와 특별한 면식이 없으니. 당연한 말이지만요······. 그리고 같이 온 분들도 여쭤봐야겠지요. 당연히 혼자 오시리라 생각했는데. 그리고 또――’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응? 벌써 다녀왔나······? 들어오세요.”


안네가 나간 지 2분도 안 된 것 같은데 의아했다.


왜냐하면 서쪽 기숙사는 호화롭게 잘 꾸며놓은 만큼 방도 넓었기 때문이었다.


고위 귀족을 좁다란 곳에서 지내게 할 수 없으니 당연했지만, 그러면 자연스레 기숙사 자체가 넓어진다. 2분 만에 방문의사를 묻고 돌아올 정도로 작진 않은 것이다.


그런데 어찌 된 것인지, 허락을 얻고 방으로 들어온 건 자신의 심복이자, 전속 사용인인 안네였다.



“혹시, 잊고 간 게 있어 돌아온 건가요?”


그런 의문이 들 만큼 안네가 돌아온 시간은 짧았다. 그녀가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물을 정도로.



“아뇨. 제대로 방문의사를 알리고, 답변도 얻고 왔습니다.”

“옷! 이렇게 빨리요?! 대단해요, 안네. 역시 제 사용인이에요.”

“칭찬은 감사합니다만······”

“자, 그렇다면 얼른 가보도록 하죠.”

“그쪽 분들께서 허락하셨는지 듣지도 않으셨잖습니까. 또 언제쯤 방문을 잡았는지도 안 들으셨고요.”

“허락은 하셨을 거라 사료됩니다. 방문 시기도 같이 허락하셨을 테고요.”

“어떻게 그리 확신하시는 건지는 아직도 모르겠습니다만······ 확실히 지금 만나 뵈러 가는 건 허락받았습니다. 그런데 괜찮습니까? 조금······ 그분께선 살짝 언짢아 보이셨는데요.”

“언짢아하셨다고요? 음. 안네, 혹시 예의 없이 거만하게 강요하고 온 건――”


안네가 찌릿 쳐다봐 라프리트는 빠르게 입을 다물었다.



“아가씨 마음대로 하세요. 첫 만남부터 좋지 않게 보인다면 힘드실 텐데 말이에요. 전 아가씨를 위해 최선을 다해 도우려 했는데.”

“에헤헤······ 미, 미안해, 안네. 응? 기분 풀어. 내가 잘못했어.”


무려 후작 가의 장녀가 자신의 사용인에게 쩔쩔매며 사과한다.


다른 이들이 본다면 이 장면은 매우 기이하게 느꼈을 것이다. 세상 어느 후작이나 되는 집안의 자제가 사용인 따위에게 손을 비비며 사과하겠는가.


하지만 이것이 자신과 안네와의 관계였다. 다른 사람들은 끼어들 만한 것이 아니었다.


남들은 남들일 뿐,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물론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이토록 친근하게 대할 순 없고, 단둘이 있을 때뿐이지만.


그러한 마음과 함께 라프리트는 더욱 빌어, 이제는 안네의 두 손을 잡고 가슴께로 끌어와 처량해 보이는 눈망울로 용서를 호소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진심으로 화를 내던 게 아니었던 안네는 예상대로 용서해주었다.



“에휴······ 어서 가도록 하죠. 기껏 방문을 허락해주셨는데, 늦으면 면목이 없지 않겠습니까.”

“응! 빨리 가자. 늦으면 미안하지.”


싱글벙글 활짝 웃은 라프리트는 앞장서는 안네의 등 뒤를 따랐다.



“아! 그러고 보니 그분들의 방은 어디야? 금방 다녀오던데.”


안네가 열어주는 문으로 나가던 라프리트는 때마침 생각나 물었다.



“그게······”


안네는 걸으며 어색하게 대꾸했다.


보통 귀족에게 말을 하는데 걸으며 한다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일부 급한 경우나, 귀족이 허가했을 때는 예외이다――, 안네와의 사이에서는 익숙한 일.


그래서 라프리트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말을 흐리는 안네의 태도가 좀 의아했다.


뭔가 곤란해한달까. 알려주기 껄끄러워한달까······


그녀치고는 드문 모습이다.


하지만 그 의문은 금방 해소되었다.


왜냐하면――



“도착했습니다.”


금방 도착하니까.



“엥······?”


안네가 공손히 손을 뻗어 안내해주는······ 목적지로 여겨지는 곳을 봤다.


라프리트는 놀라움을 가득 담아 확인차 물었다.



“저, 정말 여기야······ 아니지. 여기입니까?”

“네. 제대로 안내했습니다.”

“이래서······ 빨리 돌아왔군요.”

“맞습니다. 계신 곳을 알아보려 했을 때도 이곳에 그분들이 들어가시는 걸 목격하여 바로 알게 되었습니다.”

“하긴, 이렇게 가깝다면. 하지만 설마―― 바로 옆방에 계실 줄이야.”


그렇다.


이제부터 만나러 가는 사람들의 방은 매우 가까운―― 자신의 바로 옆방이었던 거다.


‘후우······ 괜찮아요. 진정해요, 나. 오히려 빨리 만나보고 싶어 했으니 잘된 일이잖아요?’


하지만 다짐과 달리 막상 본다고 하니 긴장된다. 더불어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예상보다 너무 일찍 도착해 잘 진정되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이 긴장은 당연했다.


‘그 이스피리아 양을 만나는 것이니까요.’


도리어 긴장하지 말라고 하는 게 무리다.


한동안 두근두근 떨리는 가슴을 안던 라프리트는 크게 심호흡하고는 안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네, 준비됐습니다. 방문을 알려주세요.”


고개를 숙인 안네는 문 앞에 다가가 정중히 노크했다.



“실례하겠습니다. 말씀드렸던 라프리트 로 디안 리벨리타스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다각다각.


마른침을 삼키고 잠시 기다리니 방안에서 누군가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이윽고 경첩소리하나 나지 않고 깔끔히 문이 열려――


너무나 잘생긴 남성이 나타났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몸소 이곳까지 행사하시어 감사드립니다.”


목소리 또한 외모 못지않게 귓가를 아름답게 울리는 멋진 음성이었다.


‘에엣···?! 이, 이 정도로 잘생긴 분이셨나······?’


정문에서 처음 봤을 때 엄청나게 잘생겼다는 느낌――국내 귀족 누구보다도――은 받았었다. 멀긴 했으나 마도구의 도움을 받기도 하여 선명하게 보였으니.


하지만 자신의 거의 모든 신경이 이스피리아에게 쏠려있었던 터라 그다지 눈여겨보지 않았는데, 막상 바로 앞에서 마주하니 그 외모가 놀라울 정도로 눈부시다. 과장 없이 같은 인간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다.


다만 아쉽게도 무표정인 얼굴이라 조금 무섭게 느껴진다.


그렇게 뻥 져 있으니 내버려 둘 순 없었는지 안네가 살며시 등을 쿡쿡 찔렀다.



“아······ 아. 반갑습니다. 갑작스러운 무례에도 너그러이 허락해주신 점 감사드립니다.”


라프리트는 아직 당황하고 있었지만, 드레스의 양 끝자락을 잡아 언제나처럼 모범적인 귀족의 자세로 인사했다.


솔직히 후작 가의 사람이 기껏 사용인에게 정중히 인사하는 모양새는 별로 안 좋다.


그러나 무례를 범한 건 자신들이고, 이 남성 또한 어딘가의 대귀족은 아닐까 싶을 만큼 기품이 넘쳤다.


분명 평민 출신의 사용인은 아닐 거다. 함부로 무례를 저지르긴 조금 그랬다. 물론 평민출신이라도 함부로 무례를 저지르진 않지만.


참고로 남자를 사용인으로 추측한 건 지금 상황도 그렇지만, 옷차림새가 주요했다. 특이하긴 하지만 어느 정도 사용인이나 집사 같은 느낌의 복장이다.



“감사는 부디 저희 아가씨께.”


남성은 전혀 실례가 되지 않게 예의를 차렸지만, 말투는 싸늘하고 냉랭할 뿐이었다. 아니. 큰 신장으로 내려다보는 눈빛마저도 얼음처럼 차가웠다.


절대 호의적이지 않은 시선에 라프리트는 미세하게 움찔했다.


하지만 이러나저러나 허락은 떨어졌다.


마음을 다진 라프리트는 태연한 척 짧은 묵례와 함께 문에서 비켜주는 남성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안에는 그녀―― 이스피리아가 있었다.


정문에서 봤던 곱상하게 생긴 남자아이와 함께.


‘우와아아!! 진짜! 정말. 진짜로 이스피리아 양이 제 앞에 계셔요!’


잔뜩 흥분한 속마음과 달리 그러한 모습을 일절 내보이지 않으며, 라프리트는 드레스를 잡고 사뿐히 고개를 숙였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실례했습니다. 라프리트 로 디안 리벨리타스입니다.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엣? 아, 저기, 그게······”

“응?”


인사를 하니 이스피리아가 너무 당황한다.


뭔가 매너에 어긋난 점이 있나?


라프리트는 빠르게 생각해보았지만······ 짚이는 게 없었다.


결국 무슨 일이 있나, 물어보려던 찰나―― 이스피리아가 의자에서 내려와 슬며시 다가왔다.


가까워져 옴에 안네가 살짝 긴강하는 것이 느껴져 조용히 손짓으로 말렸다.


안 좋게 보이는 것만큼은 무조건 피해야만 한다.


이윽고 바로 앞까지 다가온 이스피리아는 걱정과 달리 사뿐히 고개를 숙였다.



“잠시 실례했어요. 이스피리아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


너무나도 완벽한 귀족의 인사였다.


살며시 든 치마의 각도부터, 손끝에 이르기까지, 온 신경을 집중하여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인 모습이었다.


‘괴, 굉장하네요. 분명 오랜 시간 귀족으로서의 소양을 갈고 닦아온 것이 분명하겠죠. ······으응? 그런데 그런 것 치곤 의자에 앉아계시던 건······ 성함도 이스피리아 뿐이고.’


방문자가 왔음에도 의자에 앉아 있는 건 명백한 매너위반이었다.


쫀쫀한 귀족이었으면 트집 잡을 좋은 명분이며, 그렇지 않은 귀족이라 할지라도 마음이 상할 무례였다. 물론 자신은 전혀 신경 안 쓰지만.


거기에 성 없이 이름뿐이라는 건 좀 묘했다.


타국에서 왔다면 모종의 이유로, 숨길 경우도 있긴 했다. 실제로 그러한 경우도 종종 있으니까.


하지만 이처럼 아예 성을 대지 않는 건 아니다. 다른 가문이나, 가상의 가문을 대는 게 보통이다.


‘혹시 평민이신 건······?’


자신이 알고 있는 것에 따르면 오히려 이 경우가 더 가능성이 크다. 애당초 이스피리아가 서쪽 기숙사에 온 것이 묘한 일이었다.


그런데다 인사만 연습했다면 지금처럼 다른 매너들이 부족한 상황도 설명이 됐다.



“저기······? 라프리트 씨――가 아니라. 리벨리타스 씨?”

“아, 아뇨! 잠시 이스피리아 양의 멋진 인사에 감동했을 뿐입니다.”

“헤헤. 그런가요? 감사합니다.”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꾸벅 숙인 이스피리아는 귀여웠다.


진심으로······


――그러나 전혀 귀족 같지 않았다. 겉모습만큼은 대귀족의 자제 같지만.


친한 사이라면 모를까, 처음 본 상대에게 저리 웃으며 고개를 숙인다는 건 매너 위반까지는 아니지만, 가문을 얕잡아 보일 수도 있기에 하지 않는다.


또 멋대로 이름을 부른 것도 모자라――바로 바꾸긴 했지만――, 생략하기도 했다.


나 자신도 귀찮다고 생각하는 부분이긴 하다. 그렇지만 함부로 생략했다간 자신을 낮춰본다며 큰 소란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아, 안 돼요! 그렇게 둘 순 없습니다!!’


어찌 고위 귀족이 머무는 이 기숙사에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온갖 트러블에 휘말릴 것이 분명한 그녀를 이대로 내버려 둘 순 없다.


그런 생각이 듦과 동시에 라프리트는 덥석 이스피리아의 손을 잡았다.


무례한 행동에 사용인으로 보이는 남성과 안네가 움찔하는 것이 느껴진다. 더불어 남자아이는 신기한 사람을 보는 눈초리로 쳐다본다.


그러나 아무래도 좋았던 라프리트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손을 잡은 채로 선언하듯 외쳤다.



“이스피리아 양! 지금부터 저와 같이······ 공부를 하죠!”

“어어. 네! ――네에?”

“공부입니다! 입학식이 이틀밖에 남지 않았지만, 할 수 있는 데까진 해보는 거예요! 포기는 용납하지 않습니다. 알겠나요?!”

“네넷! 아, 알겠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모두가 놀라는 가운데, 라프리트는 원래의 목적도 까먹고 이스피리아에게 교양수업을 진행했다.


뜬금없이 시작되었지만, 도중 차도 마시며 행해진 교육은 저녁 늦게까지 이어졌다.



“고마워요, 리벨리타스 씨. 덕분에 많이 알게 됐어요.”


문 앞까지 마중 나와 주는 이스피리아에게 라프리트는 웃으며 말을 받았다.



“리벨리타스 말고, 라프리트로 불러주세요. 이스피리아 양.”

“저, 저도······ 부디 리, 리아로 불러주시면 감사해요. 라프리트 씨.”

“그, 그래도 됩니까?!”

“물론이죠! 꼭 그렇게 불러주셨으면 해요.”

“······알겠어요, 리아 양.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저야말로 잘 부탁해요!”

“후후······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내일도 찾아뵙도록 하죠.”

“오늘은 정말 고마웠어요. 조심히 들어가시고요. 아, 바로 옆이지 참. 그래도 조심히 가세요!”

“고마워요.”


싱글벙글 웃는 리아에게 살짝 고개 숙여 인사한 라프리트는 기분 좋은 미소로 바로 옆인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물론 계속 손을 흔들어주고 있던 리아에게 똑같이 짧게 손을 흔들어주는 것도 잊진 않았다.


그렇게 방에 들어온 라프리트는 곧장 푹신한 소파에 몸을 던졌다.


찌릿 쳐다보는 안네의 시선이 느껴졌으나, 오늘은 마음껏 잔소리를 들어도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다. 전혀 맘 상하지 않을 자신마저 있었다.



“헤헤헤. 이스피리아 양――이 아니지. 리아 양과 친해졌어요! 히히히.”

“그렇게 좋습니까? 저도 처음 보는 굉장한 주접―― 크흠. 모습을 보이실 정도요?”


뭔가 좋지 못한 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지만, 라프리트는 신경 쓰지 않고 당연한 대답을 입에 담았다.



“물론!”

“하아······ 아가씨께 친해진 분이 생겨서 저도 기쁘지만······ 원래 목적이 그것이었나요?”

“아!”


마구 뒹굴고 있던 라프리트는 딱 멈춰 섰다.


그렇다. 안네의 말대로 오늘 리아를 찾아간 이유는 친해지려고만 한 건 아니었다. 차도 함께 마시고, 대화도 잔뜩 하고, 무엇보다 리아라 부를 수 있게 해준 것에 너무 기뻐만 했다.



“어, 어떡하지?”

“뭘 어떡합니까. 내일도 찾아뵙기로 했으니 그때 제대로 하면 되겠죠.”

“그, 그렇지! 내일 만나······ 헤에······.”

“에휴. 걱정되네요. 주변 사람들과 먼저 친해지는 건 좋은 방법이라지만, 본인에게도 잘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으응? 무슨 소리야?”

“아무것도 아닙니다.”

“응. 뭔지 모르겠지만 열심히 해볼게.”


그 후로도 라프리트는 기쁨에 넘쳐 뒹굴거렸고, 안네는 그 모습에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작가의말

안녕하세요. 제법 지친 라스티아입니다.


오... 오늘은 여기까지 입니다.


다들 좋은 하루 되시고, 내일 또 뵈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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