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 두 여자 스파이 >
김혜련씨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남자의 몸을 보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양손에 받쳐 든 속옷을 거울 앞 의자 위에 놓았다.
“속옷 준비해 놨시오. 그럼.”
“...”
나는 놀란 정신에 고맙다는 말도 하지 못했다. 김혜련씨가 놓고 간 속옷을 입고 화장실을 나섰다. 서둘러 옷을 입고 싶었다. 한참 두리번거리고 있으니 김혜련씨가 다가온다.
“왜 그러고 계십니까?”
“아, 옷 좀 입게요. 그런데...”
“아, 저기 준비해 두었습네다. 아침 일찍 세탁할 건 세탁하고 다릴 건 다려놨습네 다. 호호호”
“아, 예. 고맙습니다.”
나는 김혜련씨가 손짓으로 가리키는 가구의 문을 열었다. 드레스 셔츠가 주름 하나 없이 깨끗하게 다려져 있었다. 수트도 바지 주름이 펴져 있었다. 가구 안쪽 서랍장 위에는 양말도 놓여있었다. 나는 서둘러 입기 시작했다.
“야, 홍길동 동무, 정말 신수가 훤하십네다. 호호호”
“아, 뭐...”
내가 서둘러 현관을 향해 걸어가자 김혜련씨가 묻는다.
“홍길동 동무, 지금 어디 가시는 겁네까?”
나는 뒤돌아서서 김혜련씨에게 대답한다.
“아니, 서울 가야지요...”
“아니, 이러는 데가 어디 있습네까?”
“예? 제가 뭘 잘못 했습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아침은 먹고 가셔야지요. 어제 그렇게 술을 많이 드시고 빈속 으로 출근을 하시면... 자, 어서 이리 오시라요.”
김혜련씨가 나를 강제로 끌다시피 식당으로 데리고 갔다. 나는 마다할 특별한 이유를 찾지 못하고 식당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식당으로 간 나는 또 한 번 기함을 할 수밖에 없었다. 김윤대 대표가 앉아 있었다. 그 역시 넋 잃은 표정으로 멍하게 앉아 있다가 들어서는 나를 보고 벌떡 일어났다.
“아니, 길동님”
“어어, 김대표. 김대표도 여기서 잤구나”
“예, 그랬나 봐요.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아무 기억이 안 나요”
“김대표도 그랬구나. 나도 마찬가지야. 앉아, 일단 앉자고. 밥은 먹어야지, 안 그래?”
나와 김윤대 대표는 식탁에 마주 보고 앉았다. 서로 얼굴을 쳐다보다 겸연쩍은 웃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김대표는 어제 북한의 고위급 인사들과 따로 자리를 가졌었다. 모르긴 해도 나처럼 술 공세를 받은 모양이었다.
잠시 후에 김혜련씨와 처음 보는 여성 한 명이 나와 김대표 옆에 각각 앉았다. 우리 둘은 이것은 또 무슨 일인가 하고 두리번거렸다.
“안녕하세요? 김윤대 대표님, 저는 김혜련이라고 합네다. 여기 길동씨의... 네.”
길동씨의 무엇인지는 말끝을 흐렸지만 김윤대 대표는 이해했다. 김윤대 대표 옆자리의 아가씨도 자기 소개를 했다.
“저도 제 소개해 올리갔습네다. 저는 평양에서 온 이설화라고 합네다. 눈 설에 꽃 화 자를 쓰는 흔한 이름입네다. 잘 부탁드리갔습네다”
“아, 예 그러시군요. 반갑습니다. 저는 홍길동이라고 합니다.”
“아, 저야 홍길동 동지를 잘 알죠. 워낙 유명하신 분이니까요. 호호호”
어색하지만 네 사람은 함께 아침 식사를 해야 했다.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정신이 없었다.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안 나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몇 술 뜨다 말고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아니, 왜 그러십네까? 해장국이 맛이 시원찮습네까? 혹시?”
“아닙니다. 입맛이 없어서요. 내가 술을 잘 못하는데 어제 과음을 해서 입맛이 없 나 봅니다.”
“아이, 이러시면 건강 상하는데... 한 술만 더 뜨시라요 네?”
김혜련이 안타까운 듯 식사를 좀 더 하라고 성화를 했지만 나는 그냥 커피를 한 잔 부탁했다.
“알갔습니다, 그라믄. 어이 여기요!”
벽에 등을 붙이고 서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시중드는 남자가 쏜살같이 달려온다.
“여기, 홍선생님께 커피 한 잔 갖다 드리라우. 홍길동 동무, 그런데 커피는 어떤 걸
좋아하시는지요. 아메리카노? 아니면 라떼로 할까요?”
“아, 아메리카노 뜨겁게 좀 부탁합니다.”
“알았지요? 준비되어 있으면 이왕이면 드립으로 내려 오라우”
“알겠습니다.”
남자가 허리를 굽히고 물러났다. 그러고 보니 김혜련씨는 보통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지시하는 목소리에 힘과 권위가 실려있었고 이를 듣는 남자의 자세가 매우 경직되어 있었다.
“김혜련 동지, 지금 보니 조금 무서운 사람 같습니다. 남자 부리는 것 보니까 규율 이 엄정해 보입니다.”
“아니, 홍길동 동지, 왜 이러십네까, 부끄럽게요. 우리 공화국에서는 보통 이렇게 합니다.”
“우리 소좌님이 규율이 엄정하기는 엄정합네다.”
“이설화 대위, 그러기 없기다. 이동무는 어떻고? 호호호”
가만히 이야기하는 걸 들어보니 두 여자가 군인들인 것 같았다. 김윤대 대표도 호기심이 일었다.
“아니, 그러면 두 분은 군인이세요?”
“모르셨습네까? 어젯밤에 다 말씀드렸는데... 호호호. 많이 취하셨나 봅네다. 호호 호”
나는 두 여자가 군인이라는 말에 살짝 긴장이 되었다. 왜 군인들이 나와 김대표를 상대했을까? 혹시 우리에게서 비차 정보를 빼내기 위해 투입한 스파이들일까? 여러 생각들이 떠올랐으나 그뿐, 물어본들 제대로 대답해 줄 리 없었다.
북한의 드립 커피나 남한의 드립 커피나 별다를 건 없었다. 진한 커피 향이 심란한 마음을 조금 편안하게 해 줬다. 나와 김대표는 어느 정도 속이 풀린 것 같았다. 이제 두 여성과 작별을 하고 서울로 가야 했다.
“그럼 어제 환대는 잘 기억해 두겠습니다. 언제 한 번 서울로 초대하겠습니다.”
“정말이죠? 서울로 초대해주신다면야 우리는 한걸음에 달려 가겠습네다.”
집 밖으로 나오니 비차가 둥둥 떠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두 여자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비차에 올랐다. 나는 하늘로 솟아오른 비차의 비행 속도를 줄였다. 서울에 도착하기 전에 어젯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확인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비차의 고도를 평소보다 더 높였다. 지난번 강원도 산간 지역에서 받은 대공포 공격을 다시 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먼저 비차가 밤새 촬영한 나와 김윤대 대표의 모습을 확인해야 했다. 나는 녹화된 영상을 비차 안의 허공에 띄웠다. 불필요한 부분은 건너뛰어 가면서 영상을 살폈다. 김윤대 대표도 자신의 영상을 점검했다.
공개된 장소에서 식사하고 노래하는 부분은 특별한 내용이 없었다. 여흥을 끝내고 김혜련 소좌가 나를 침실로 데리고 간 이후 장면부터 나는 신경을 곤두세웠다. 김혜련 소좌는 술이 취해 흐느적거리는 나를 겨우 부축해 침실로 데리고 갔다.
침대 옆 창가에 놓여있는 작은 원탁 의자에 나를 앉히더니 미니바에서 마실 걸 내왔다. 아마도 물인 것 같았다. 나는 목이 말랐는지 벌컥벌컥 마셨다. 김혜련 소좌는 내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홍길동 동무, 정신 좀 차리시라우요”
“아, 너무 마셨나 봐요. 김정은이하고 김여정이 술을 너무 권하더라고... 아이고 죽겠네...”
“그래도 그렇지 홍길동 동무가 술이 너무 약한 것 아닙네까? 위원장 동무하고 김여 정 동무가 술을 그렇게 권했다는 것은 홍길동 동무를 몹시도 친애한다는 뜻 아니겠습네까? 그런 영광스런 술을 받았다면 우리 북조선 인민들은 절대 취하지 않았을 겁네다.”
“나는 남조선 국민이니까 취해도 뭐 관계없겠네요. 아, 들쭉술, 마오타이... 다시는 안 마셔야지...”
“호호호. 그나저나 홍길동 동무, 비차는 어떻게 만든 거래요?”
“어떻게 만들다니요? 보셨잖아요. AI들이 척척 만들고 있었잖아요?”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원리가 어떻게 되냐 이런 말이지요.”
“원리? 그건 내가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할 수 없어요. 지구 사람들은 아직 4차원도 이해 못 하는데 어떻게 5차원을 이해하겠어요?”
“그럼 비차가 5차원을 이용한 기술인가요?”
“바로 그렇지. 그러니 지구 사람들은 내가 보여주고 설명해도 이해 못 하는 기술이 라고요.”
“그래도 설명을 좀 듣고 싶습니다, 홍길동 동무”
“허허, 이해 못 한다니까요. 초등학생에게 고등수학을 설명하면 알아듣나요? 그거 랑 마찬가지라니까요.”
“자, 이해 못 하더라도 설명은 한 번 듣고 싶습네다. 나도 어렸을 때부터 수학이나 물리학은 북조선에서 으뜸인 학생이었습네다. 그러니까 설명을 조금만이라도 한 번 해주시면 안 되갔습네까? 네에?”
김혜련 소좌가 갖은 애교를 부리면서 나에게 설명을 해달라고 졸라댔다. 나는 다음 장면이 어떨지 긴장했다. 비록 이해를 못하더라도 나의 말 한마디를 힌트 삼아 기술의 핵심을 파악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이 생겼다.
“그래요? 정말로 그렇게 비차의 원리를 알고 싶어요? 왜요? 기술을 배워서 북한에 서 독자적으로 만들고 싶어서요?”
“아니, 그런 거이 아니고 이런 훌륭한 기술이 우리 민족의 머리에서 나왔으니 나도 같은 민족의 한 사람으로서, 비록 이해는 못하더라도 설명이라도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는 것이죠. 다른 욕심 없습네다.”
“오케이, 그러면 내가 설명을 한번 해보죠. 혹시 화이트보드나 뭐 칠판이나 그런 거 없어요? 아니면 컴퓨터가 있으면 더 좋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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