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적 과학자-개정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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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dsci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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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12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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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02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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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10개월차

DUMMY

청과 영국이 격돌하고 있는 와중이었으나 조선은 평화로웠다.


비록 저 공충도 끝자락에 이양선이 와서 그 일대를 장악하고, 사실상 작은 독립국처럼 변해버린 것이 현 작태였으나 애써 무시하고 살면 또 살 만한 것이 현재 상황이었다.


초창기에는 그것을 제거하려 애를 써 본 적도 있었다. 허나 조선의 무력으로는 어찌 해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오히려 풀을 건드려 뱀을 놀라게 한 형국이었으니, 나름 고르고 골라 보냈던 순무영이 괴멸되고 역으로 한양이 털려버리는 일이 있었다. 아니, 뱀을 놀라게 한 형국이 아니라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이 홀라당 타버리는 꼴이 될 뻔 했던 것이다.


조선이 가장 두려워하는 사태는, 공충도 앞바다에 툭 튀어나와 있는 마량진 일대가 봉쇄되어 조운선이 제대로 한양으로 들지 못하고, 한양으로 들어오는 물길이 막히는 것이었다. 허나 다행스럽게도, 공충도에 있는 그 이양선은 굳이 조운선을 건드리려 하지는 않고 있었다.


그것은 공충도 앞바다에 영국이라고 하는 서역의 큰 나라의 군선들이 득시글대는 지금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공충도의 그 거대 이양선에 버금가는 커다란 배들과 양이들이 그 좁은 공충도 마량진 끄트머리에 바글바글 모여 있음에도 천운인지 딱히 그들은 조선 땅에 따로 피해를 입히거나 관심을 두지는 않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조선의 왕은 아직 어렸다.


선대 왕이 죽은지 이제 5년.


왕은 아직 열다섯, 수렴청정이 계속되고 있던 때였다.


사실 공충도 마량진 일대의 발전 속도가 전례없이 빠른 것이었지, 조선에서 5년이라는 시간은 긴 시간이 아니기도 했다.


왕은 아직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나라는 어떤 식으로 굴러가고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고 신료들은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배우면서 동시에 유학적 지식을 습득하고 선대 왕들이 후대에게 이르는 글을 읽어가면서 배우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조선 조정에 폭탄이 떨어졌다.


“구라파(유럽)에서 황제라고 부른 것은 로마에서 시작되었으며 그 후 게르만과 오스트리아는 로마의 옛 땅으로서 황제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덕국은 게르만 계통을 이어 마침내 황제로 칭호를 정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의관과 문물은 모두 명나라의 제도를 따랐으니 그 계통을 이어서 칭호를 정한들 안 될 것이 없습니다.


또한 청나라와 우리나라는 다 같이 동양에 있으므로 게르만과 오스트리아가 로마의 계통을 이어받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고종실록 36권.


소중화(小中華)

신성 로마 제국

동로마

서로마


한족 최후의 통일 왕조이자 중원의 지배자였던 명나라, 지중해 일대를 장악했던 로마 제국.


단순히 한 시대의 패권을 가지고 있던 제국이었다는 점 외에도 인류 문명에 큰 영향을 끼친 각종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 군사적 업적을 이루어 낸 나라들이라는 점에서 문화 승리를 이루어낸 대제국들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그런 그 제국들이 멸망하고 난 후, 그 진정한 계승자가 누구인가 하는 이야기는 항상 뜨거운 떡밥이 될 수밖에 없었다. Barbarian과 Civilized, 오랑캐와 문명인을 가르는 가장 명확한 기준이 바로 로마의 후예, 혹은 중화의 울타리 안쪽에 있느냐 바깥쪽에 있느냐를 중요시하던 시대가 아직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명나라의 시스템을 제대로 받아들여 천자 중심의 세계관을 가지고 군주를 모시며 유교적 통치 체계와 국가 기틀을 마련한 조선의 경우 스스로를 ‘소중화’라 부르며 자랑스러워 했었다.


이는 명나라가 망한 이후, 더더욱 발전하여 청을 오랑캐들이 세운 나라라 하여 중화의 명맥은 명 이후 끊어졌다고 여기는 조선 선비들은, 진정한 중화가 조선에서 명맥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했다.


“명나라는 죽었어. 이젠 없어!

하지만, 내 맘에, 이 조선에,

하나가 되어 계속 살아가!”


특히 만력제, 흔히 고려 천자라고도 불리는 그 황제는 황제가 30여년간 파업을 하는 전무후무한 사태를 벌여 명을 사실상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하였으나, 조선에 대해서만큼은 유독 따뜻한 남자였다.


“짐이 대통을 이어 억조 창생을 다스리니, 바닷가나 산골짜기의 인민도 다 나의 적자이므로 정말 큰 악인이 아니면 두루 포용하고자 하였다.


-중략-


짐이 생각건대 ‘조선은 대대로 공순하다고 일컬어졌는데 마침 곤란을 당했으니 어찌 좌시만 할 것인가. 만약 약자를 부축하지 않으면 누가 은덕을 품을 것이며, 강자를 벌주지 않으면 누가 위엄을 두려워하겠는가. 더구나 동방은 바로 팔다리와 같은 번방이다. 그렇다면 이 적은 바로 집뜰에 들어온 도적인 것이니, 그를 저지하고 죄를 주는 것은 나 한 사람에게 달려 있다.’고 여겨 일부 군대에게 간단히 명하여 조금 정벌하게 하였다.


-중략-


아, 우리 국가의 인자한 은혜는 넓고도 넓어 공순한 자가 곤궁할 경우 구원해주지 않은 적이 없고, 의로운 무위를 분발하고 북돋우어 함부로 날뛰는 자가 비록 강해도 반드시 죽여 없앴다. 이에 천하에 포고하여 사방 오랑캐에게 밝게 보이며 나의 부득이했던 마음을 밝히는 한편 감히 용서하지 않는 나의 뜻을 알리는 바이다.

-후략“


파업하던 황제가 친히 저런 장문을 조선으로 보내며 파병을 해 주고, 그 파병의 규모만 하더라도 명나라조차 휘청할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물론, 명나라 입장에서도 조선이 망하기 전 조선 국토를 전장으로 삼아 강적을 외부에서 막는 것이 본토의 피해를 줄이는 방법이기는 했으나, 조선 입장에서도 큰 은혜를 입은 것만은 사실이었다.


게다가 그 이후 전쟁으로 초토화 된 조선의 식량사정을 감안하여 쌀을 적게 잡아도 수십만 석, 많게 잡으면 백만 석 가까이 보내주기까지 했으니, 조선에서 망국 이후까지 만동묘에서 제사를 지내 온 것도 이해가 가는 부분이었다.


재조지은(再造之恩)

나라를 다시 만들어 준 은혜.


남명이 망하고 명의 마지막 황제가 죽은 지 2백여년이 가까운 지금에서도 북벌을 외치고 반청복명을 외치며 반란을 일으키거나 사건 사고를 터뜨리는 일이 조선에서 종종 일어나고 있으니, 어쩌면 조선 왕실과 양반층의 피에 새겨진 것이 재조지은과 반청복명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안동 김문의 천주교도 김건순이 서양 배를 불러다 청을 치고 병자호란의 치욕을 갚겠다고 설치다 잡혀 들어갔던 것이 얼마 전 일이었고, 당장 박규수의 조부 박지원이 쓴 열하일기에도 ”명나라가 멸망해 산천은 비린내 나는 곳으로 변했고, 성인들의 업적은 사라져 오랑캐의 말들만 남았습니다. 진실로 10만 대군이 있다면 산해관을 쳐들어가 만주 오랑캐들을 소탕한 뒤에야 무엇이 볼 만한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라는 말이 나오는 곳이 조선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조선 조정이 술렁이고 있었다.


무려 2백여년 전에 명맥이 끊겼던 그 명으로부터 서신이 날아온 것이었다.


"오랑캐의 운수가 이미 끝나고, 천명(天命)이 이미 갔다. 짐의 황고(皇考)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가 천명을 받아 중화와 이적을 통일하였었고, 짐이 상천(上天)의 권고를 입어 내난(內難)을 평정하고 대통(大統)을 이어받아, 사방 만국(萬國)이 신하로 순종하지 않음이 없었는데, 다시 보니 패잔(敗殘)해야 할 오랑캐의 무리만이 교화를 거역하고 조회하지 않으며, 참람하게 황제를 자칭하며 북경에 앉아 천명을 거스르고 있다. 짐이 대명의 기치와 이름을 다시 바로 세우고 친히 육사(六師, 황제의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그 죄를 토벌하려 한다. 부디 말과 병장을 보내어 국용(國用)에 이바지하게 해 주면 좋겠다.”


그것도 무려 주체, 조선 태종 시대 때의 명 황제가 ‘칙서’를 보내 온 것이었다. 밀서의 형식으로 보내져 온 것이라 칙사가 예를 갖추어 온 것도 아니었고, 서신을 가지고 온 자도 예를 갖출 것을 요구하지는 않았으나, 그 내용은 가볍지 않은 것이었다.


물론 4백여년 전 황제를 자칭하는 누군가가 문서를 보내었다고 한들, 그것을 그대로 사실이라고 받아들일 만큼 조선 조정이 멍청하거나 무능하지는 않았다.


대신, 모든 왕실과 관의 일을 기록으로 남기는 조선은 기록과 아카이브의 민족답게 어지간한 기록은 모두 보관하고 있었기에 그것으로 서류의 진위 여부를 검증하기로 했다.


조선은 영락제 시절의 칙서와 당시 기록들도 모두 가지고 있었고, 특히 영락제의 경우, 연왕일 때 부터 당시 세자였던 이방원과도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기에 서신을 교환한 적도 여러 번 있었는데, 그 서신들 또한 조선 왕실에서 보관하고 있었다.


그 서신들과 기록을 꺼내어 지금 온 그 ‘칙서’라고 주장하는 글과 인장을 비교해보았다.


“필체는 옛 칙서와는 다르나, 연왕이 보냈던 서신의 필체와는 비슷합니다, 또한, 찍힌 인장이 칙명지보(敕命之寶, 칙명, 즉 조서를 내릴 때 사용되던 명의 옥새)도 일치합니다. 또한...”

“무엇이냐?”

“영락 8년에 보내어 온 칙서와 전반부의 내용이 완전히 동일합니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4백여년 전의 황제가 살아서 돌아오기라도 했다는 것인가.


하기사, 선왕이신 순조의 치세 때부터 서학쟁이들이 등장하고 양이 사교도가 출몰해 혹세무민을 일삼더니, 공충도 앞바다에 고금 유래 없는 거대한 철선이 나타난 것 하며 쭉 세상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지금 왕의 보령 고작 15살.


수렴청정을 맡은 순종의 비이자 지금은 대비가 된 김씨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왕실의 권위가 추락하고 민생은 도탄에 빠져있었으며, 남편이 죽고 순종이라는 묘호를 받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청이 쳐들어오는 바람에 부랴부랴 남한산성으로 대피해야 했으며, 결국 그 과정에 친정 안동 김문의 도움을 많이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그녀 또한 친정의 권세가 지나쳐 종묘사직을 해하고 왕실에 누를 끼치지 않을까 노심초사 하며 어느정도 사가를 멀리 하려 했었다.


그러나 너무나 짧은 기간에 몰아치는 사건은 결국 그녀가 해결하기에는 너무나 버거운 것이었다. 남쪽으로는 저 이양선에 부화뇌동하는 자들의 반란 기도, 북쪽으로는 청의 침입, 그리고 내부적으로는 급격하게 쇠락하는 조선 왕실의 힘과 그에 반해서 늘어나는 관료의 횡포와 부정부패 등등. 해야 할 일은 폭증하는데 믿을 자는 없었던 것이었다.


하늘조차 조선을 버리려는지, 매해 가뭄과 홍수가 번갈아 오고 황충(메뚜기)무리마저 습격해대는 상황이었으니 작은 폭동과 중규모 반란 또한 잦았고, 아사자와 병자가 속출한다는 이야기가 하루가 멀다 하고 보고되는 상황이었다. 평양 이북으로는 듣도 보도 못한 돌림병이 돌아 사실상 큰 고을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으며 청국과의 국경 또한 초토화된 상황이었다.


그 와중에 날아든 자칭 명나라의 황제가 보냈다는 칙서는 골치아프게도 마냥 헛소리로 치부할 것은 아니었으니, 수렴청정중인 대비는 남편이 왜 머리를 싸매고 누웠다가 먼저 떠났는지 이해가 가면서도 원망스러운 심정이었다.


물론 조정에서는 이를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질 수 밖에 없었다.


“군자는 괴력난신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어찌 4백여년 전의 황제가 살아서 돌아올 수 있겠습니까? 이는 필시 청의 또 다른 간악한 계략으로, 지금 양이들의 침노에 형태가 심히 곤궁하니 무엇이라도 구해 보고자 보낸 더러운 글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설사 그 글이 참이라고 하더라도 조선은 지금 명에 지원할 물자도, 군사도 없습니다.”


“허나 신하가 임금을 위하고, 자식이 아버지를 위하고, 아내가 남편을 위하고, 아우가 형을 위하고, 친구가 친구를 위하는 절박한 마음이 일호의 사사로움이나 거짓이 없어서 천리의 바름에 순수하게 부합하면, 여기서 느끼어 저기에 반응하는 이치가 그렇게 될 것을 기약하지 않아도 그렇게 되는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명을 대하는 마음이 어찌 자식이 아버지를 위하는 마음에 버금간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저 중원에도 명을 그리는 자가 부지기수일진대, 그 바램이 명을 잇고자 하는 자를 내세우게 되는 것도 마냥 허황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사옵니다. 대가 오래된 먼 조상은 그 기(氣)는 비록 멸하였지만 그 이(理)는 멸망한 것이 아니니, 그러므로 또한 정성으로써 감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맑고 푸른 하늘에 본래 비가 올 기운이 없다가 갑자기 구름이 모여들어 드디어 큰 비를 내리는 것은, 비록 비가 내릴 기운은 없었지만 역시 능히 비가 내릴 수 있는 이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원대(遠代)의 조상은 진실로 감응할 수 있는 기운이 없지만 지극한 정성으로 염원하면 마침내 감응하게 되는 것은, 비록 능히 감응할 수 있는 기운은 없지만 역시 능히 감응할 수 있는 이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결론은, 명나라가 다시 일어났을 확률은 매우 낮지만 확인을 해 보는 것만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조선도 현재 청국과의 관계는 최악이었던 데다 중원쪽으로 이어지는 인맥은 국경 붕괴와 함께 완전 박살난 상태였으니, 그 일을 알아볼 자가 없었다.


황제의 밀사라는 자 또한 서신을 전달하였을 뿐, 자세한 이야기는 입을 꽉 다물고 있던 터라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는 없었다.


단지 현 황제가 직접 하북성에서 군사를 일으켜 강북 상당 부분을 청으로부터 “탈환”하고 명의 깃발을 걸었으며 조선이 명의 은혜를 잊고 있지 않다면 응당 도움을 줄 것이라고 했다는 이야기만 해줄 뿐이었다.


결국 대비는 그나마 청국의 현 사정을 잘 알고 있을 만한 사람에게 비공식적으로 이 일에 대해 논의를 해 보기로 했다. 바로 공충도로 사람을 보내기로 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즈음,


비행선의 관측 내용과 장릉에 나가 있던 닌자들의 보고, 그리고 영국군의 청국에 대한 첩보등을 바탕으로 사영도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대략 그 전모를 파악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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