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의 계승자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저스연
작품등록일 :
2015.03.21 02:01
최근연재일 :
2015.09.01 03:28
연재수 :
345 회
조회수 :
362,128
추천수 :
11,009
글자수 :
2,844,987

작성
15.05.18 03:39
조회
983
추천
22
글자
19쪽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1)

DUMMY

며칠 후 루도는 프란츠가 남겨준 노새를 활용해 자그마한 수레마차를 만들었다. 노새가 워낙 늙어 운반속도는 전혀 기대할 수 없었지만, 어차피 현재 레미나의 상태로는 격렬한 진동에 견딜 리도 없으니 그것대로 괜찮았다.

수레에 먹을 것과 무구 등을 싣고 나니 딱 두 사람이 앉을 만한 공간이 만들어졌다. 루도는 옆자리에 레미나를 태우고서 동이 트는 이른 새벽에 카잘산맥을 향해 출발했다. 노새는 루도가 이끄는 대로 천천히, 마치 지팡이를 짊어진 노인처럼 여유롭게 발굽을 놀렸다.

행여 모를 훼창기사단의 수색망도 점점 시간이 흐르다 보니 남의 일처럼 맥이 빠졌다. 산을 타고 내려오는 능선은 사람은커녕 들개 한 마리도 눈에 띄지 않았다. 레미나가 예견한 대로 레오문드는 수도에 틀어박혀 그 나름대로 정보수집에 주력하는 모양이었다. 지금까지의 시간에 쫓기던 일정과는 다른, 그저 바람 불어가는 대로, 바퀴 굴러가는 대로 시간을 맡기는 그런 고즈넉한 여행이었다.

이동하는 동안 두 사람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가장 주된 내용은 각자 그날 무슨 일이 있었냐는 것이었다. 특히 레미나는 루도가 자의로 각성한 일과, 제리온을 만난 일에 큰 관심을 보였다.


“제리온을 만났어? 세상에나, 저세상에 갖다 온 거야 그럼?”


“그건 아닌 거 같고. 그쪽에서 나를 만나러 왔달까. 아니, 펠아람의 아이가 부른 게 되나. 하여튼 좋아 보이더라고.”


“세상에나 세상에나...그 제리온이 생텀가드라니...걔처럼 천사에 안 어울리는 사람도 없는데.”


“동감입니다.”


레미나는 제리온의 장례식 때가 떠올라 눈물을 글썽거리기까지 했다. 그녀에게 있어 제리온의 안부(?)는 더할 나위 없는 낭보였다. 그녀가 기뻐하는 모습에 루도도 자연스레 어깨가 으쓱해졌다.

두 사람은 어깨를 맞댄 채 북으로 북으로 하염없이 움직였다. 차디찬 겨울의 북풍도 그들이 움직이는 동안은 잠시 몸을 움츠리는 것만 같았다. 중간 중간 들리는 마을에서도 단지 의식주만을 해결할 뿐 안개송곳니에게 소재를 파악 당할 만한 여지는 남겨놓지 않았다. 다만 일행에게는 소식을 전해두어야 했기에 루도는 도중에 적당한 상회를 골라 인력을 고용했다. 단지 쪽지를 전해주는 것만으로도 거액의 보상을 약속했기 때문에 사람을 찾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루도는 쪽지에 오직 로샤단 사람들만이 알아볼 수 있게 메시지를 적어 보냈다.


“정말로 이걸 전해주기만 하면 된다 그거요?”


“네. 로샤단 누구든 괜찮아요. 그게 아니면 왕실기사단의 케이달 위릭을 찾아가 주세요.”


그렇게 어느덧 마차 모서리에 성에가 쌓이고 쌓여 하얗게 눌어붙기 시작할 때였다. 촌락을 떠난 지 1주일이 지나 두 사람은 마침내 리크나이츠의 서북 끝단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레미나는 생전 처음 보는 산맥의 위용에 연방 감탄사를 토해냈다.


“와아아...대단하다아.”


카잘산맥을 실제로 보지 못한 사람들은 왜 인간이 한낱 지형 따위에 얽매어야 하는지, 왜 500년이라는 세월이 브리토리스와 리크나이츠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사실 레미나도 그런 부류 중의 하나였다. 지식으로서는 습득하고 있지만, 카잘산맥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백문이 불여일견인 법이다. 차라리 장벽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가파른 경사에 하늘이라도 찌르는 듯 구름 너머로 끝이 보이지 않는 봉우리들, 대낮인데도 이따금 멀리서 들려오는 맹수의 포효소리. 그저 바라보고 있을 뿐인데도 숨이 턱턱 막혀오는 기분이었다. 행여 태풍이 불면 산이 그대로 기울어져 마을을 덮치진 않을까 싶어 레미나는 끊임없이 산맥의 경사를 재확인해야 했다.


“우린 델키아나 레인스터보다도 훨씬 북쪽까지 와 있는 거야. 실질적으로 여기가 국경선 끝이라고 봐도 무방하고, 카잘산맥 안으로 들어가자면 여기가 사람이 사는 최후의 장소인 셈이지.”


“으응...알고 있어.”


산맥의 위용에 기가 질린 것인지 레미나는 마을에 들어왔을 때부터 목소리가 잔뜩 위축되어 있었다. 움츠러든 그녀를 보고서 루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무서우면 지금이라도 돌아가도 돼. 말했잖아? 이건 장난이 아니라고.”


하지만 그게 오히려 레미나의 투쟁심을 자극한 것일까, 그녀는 독이 올라 앙칼지게 소리쳤다.


“무슨 소리야! 난 절대 안 돌아갈 테니 그리 알아!”


“네, 네. 그러셔야죠 공주님.”


루도는 우선 등정에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마을은 연말을 맞아 단출한 축제를 벌이는 중이었다. 아른아른 불을 밝히는 화톳불과 이를 중심으로 옹기종기 모여 잔치를 벌이는 사람들. 그제야 새해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는 실감이 느껴졌다. 루도는 보급품을 구입하기에 앞서 레미나와 함께 마을 광장으로 나왔다. 여관에 오도카니 앉아 있던 그녀는 시끌벅적한 거리의 풍경에 금세 얼굴이 환해졌다.


“어머나...이게 다 뭐야?”


“연말축제라는 건가봐. 오늘이 금년 마지막 날이더라고.”


“벌써 그런 시기였나? 아하하, 루도 저것 봐. 개가 춤을 추고 있어.”


쌀쌀한 날씨라 그런지 곳곳에 밝혀둔 화톳불이 더욱 아늑하게 느껴지는 때였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축제의 행렬에 녹아들었다. 아무리 가난한 마을이라도 축제 때엔 넉넉하게 음식을 내놓는 법이다. 이곳 역시 마찬가지라서 걸음을 걷는 자리마다 고기 굽는 냄새가 가득했다.

레미나는 한 농부가 양고기를 꼬치로 꿰어 화로에 굽고 있는 광경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숯불에 알맞게 익은 꼬치에 향초가루를 뿌리자 냄새만으로도 군침이 흐를 지경이었다. 루도도 요 며칠간 변변한 식사를 하지 못했기 때문인지 음식냄새에 허기가 져오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막 레미나의 이름을 부르려는데 갑자기 그녀가 거칠게 기침을 토하는 것이었다. 루도는 또 상처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닌가 싶어 화들짝 놀라 달려갔다.


“뭐야? 왜 그래? 괜찮아?”


“콜록, 콜록...괜찮...콜록!”


그녀는 얼굴이 시뻘게져서는 루도에게 다가오지 말라고 절박하게 손사래를 쳤다. 그러면서 그녀는 주먹으로 명치를 연방 두드려댔다. 루도는 당황하여 그녀를 부축하려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손사래만 쳐댈 뿐이었다.


“대체 왜 그래? 상처는 거의 다 아물었을 텐데.”


“그게...아니라...콜록 콜록.”


그러나 루도는 이런 상황에서는 또 비상하게 눈치가 빨랐다. 아니, 다른 관점에서 보면 또 눈치가 없다고 봐야겠지만 말이다. 그는 비정상적으로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과 가슴을 두드리는 모양새, 쉽사리 멎질 않는 기침을 보고서 그녀의 문제를 정확하게 유추해냈다.


“너 혹시...침 삼키다가 사레들린 거야?”


“.....”


정곡을 찔린 것일까 레미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말이 없었다. 순간 주변이 웃음바다가 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양고기 굽던 남자가 껄껄 웃으며 루도에게 손짓했다.


“와하하하 귀여운 아가씨로구만. 원래 음식을 앞에 두면 침도 삼키고 그러는 거지. 자자, 이리 와서 좀 먹게.”


루도는 싫다는 레미나를 굳이 이끌어 화로 곁으로 데려갔다. 중간에 그녀가 옆구리를 사정없이 두들겨댔는데 그로서는 영문을 알 길이 없었다.

오물거리며 양고기를 씹고 있자니 지켜보던 아낙네가 술잔을 건넸다. 일 년 농사한 복숭아를 꿀과 땅콩, 대추 등과 함께 섞은 뒤 증류시켜 만들었다는 친절한 설명이 뒤따랐다. 향기야 물론 기가 막혔지만, 문제라면 그윽한 향기 너머로 전해지는 독한 술 냄새였다. 수도권 사람들은 한 모금씩 홀짝거릴 만한 도수의 술을 커다란 맥주잔에 담아주었으니 받는 사람으로서는 망설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말릴 틈도 없이 레미나가 잔을 받아 벌컥벌컥 들이켰다. 독이 오를 대로 오른 독한 술이 그녀의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장면에 루도는 말없이 침을 꿀꺽 삼켰다. 술 한 잔을 말끔히 비워 내려놓는 그녀의 안색은 물론 마시기 전과 비교하면 엉망으로 달아올라 있었다.

루도는 균형을 잡지 못해 뒤로 넘어가려는 그녀를 얼른 부축했다.


“얌마! 아직 몸도 안 좋은데 뭔 술을 그렇게 마셔!”


“시끄러웟! 이 젠장처먹을 놈아.”


“어...네.”


루도는 만취한 그녀가 내뿜는 패기에 얼른 꼬리를 내렸다. 그 뒤로도 레미나는 훈제 오리구이와 새끼돼지 통바베큐, 으깬 감자 등을 꾸역꾸역 밀어 넣다가 마지막으로 증류주를 한 잔 더 들이켜곤 기절해버렸다. 루도는 시종처럼 뒤를 따르다가 그녀가 쓰러지자 얼른 받아 숙소로 옮겼다.

마을 사람들은 그런 두 사람을 보며 너나 할 것 없이 웃음 지었다. 축제라는 고조된 분위기 탓도 있겠지만, 그들은 외지를 찾아온 젊은 손님에 큰 관심을 보였다. 루도가 레미나를 재우고 자리로 돌아오자 또래의 소년들이 순식간에 그를 에워쌌다. 그들은 특히 루도가 차고 있는 으리으리한 롱소드에 큰 관심을 보였다.


“형씨, 군인이에요? 전쟁에 나가본 적 있어요?”


“네? 군인은 군인인데...”


“아스트리카가 어디까지 내려왔죠? 아직 수도는 안전한 건가요?”


“아까 아가씨는 역시 아내인가요? 젠장, 왜 우리 동네엔 그런 미인이 없는 건지.”


“저기, 그 검은 얼마 정도 하는 거예요? 그걸로 사람 죽여 봤어요?”


사람들은 그가 대답할 틈도 없이 제각기 다른 질문을 쏟아냈다. 루도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했지만 사람들은 개의치 않았다. 마치 무언가 대답을 얻기보단 단지 질문을 건네는 행위 자체에 의미를 두는 것 같았다.

그때 처음 양고기를 권했던 농부가 소년들을 조용히 시키며 물었다.


“그런데 이 시골 마을에는 어쩐 일인가? 신혼여행 오기에 그리 좋은 관광지는 아닐 텐데.”


“아...카잘산맥으로 들어가려고요. 오늘 준비하고 내일 아침 출발할 생각입니다만.”


그 순간 서로 어울려 시시덕거리던 사람들의 표정이 싹 굳어졌다. 그를 둘러싸고 있던 소년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무신경하게 음식을 나르던 노파도 우뚝 멈춰 서 뒤를 돌아보았다. 흥겹게 춤을 추던 사람들도 멍하니 서서 그를 응시했다. 오직 일렁이는 화톳불과 다 타서 연기를 토해내는 양고기만이 시간이 멈춘 것이 아님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농부가 잘못 들었다는 듯 다시 물었다.


“어딜 간다고?”



***



루도는 축제 도중에 빠져나와 마을을 돌며 보급품을 구입하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의 반응은 예상한 대로였다. 사람들은 루도의 옷깃을 부여잡고 마음을 고쳐먹으라는 등, 아직 살날이 창창하다는 등의 이야기와 함께 그를 설득하려 했다. 아마 절벽에서 뛰어내리려는 사람을 말릴 때도 이만큼 정성을 들이진 않을 것이다. 그만큼 카잘산맥에 입산한다는 게 위험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북부 레인저들 사이에선 카잘산맥을 두고 이런 우스갯소리를 하곤 한다. 「열이 들어가 둘이 나온다」 레인저 열 명이 들어가면, 단 두 사람만이 살아 돌아온다는 뜻이다. 둘은 실족사하고, 둘은 맹수에게 잡아먹히고, 둘은 행방불명되고, 또 다른 둘은 생존자와 함께 하산하긴 하지만 풍토병에 걸려 일주일을 넘기지 못하고 죽는다. 로샤단 내에서도 카잘산맥에 등정한 경험이 있는 사람은 람카디스, 디리터를 포함해 극소수에 불과했다. 루도도 펠아람의 아이 문제만 아니었다면 이런 무식한 장소에 발을 들여놓으려 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되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요. 겨울이니까 적어도 곰이나 독사는 마주치지 않을 테고.”


“그렇지. 대신 얼어 죽을 확률은 극단적으로 올라갔고 말이지. 정말 들어갈 생각인가?”


“이래 봬도 델키아 출신 레인저라고요. 산속에서 살아남는 법은 대충 알고 있어요.”


“그게 일반적인 레인저들의 유언이지.”


입산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강추위에 대한 대비였다. 루도는 우선 타고 온 노새와 적군에게서 빼앗은 갑옷을 팔아 어느 정도의 목돈을 마련했다. 그는 확보한 돈의 절반을 투자해 모피란 모피는 전부 사들였다. 망토는 물론이요 담비 털로 짠 카디건과 귀돌이, 털실장갑과 장화, 오리털 담요 등등. 모직물들을 구입하고 나자 어느새 짐바구니가 수북하게 쌓였다.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식료품이었다. 감자와 밀을 포함한 곡물, 훈제 처리한 양고기와 소시지, 바짝 말린 육포와 뼛가루 등. 영양을 섭취할 수 있다면 어느 것이든 상관없었다. 또한 루도는 잡화점에 들러 찻잎을 돈 되는 대로 구입했다. 뜨겁게 달인 차는 체온을 보존함과 동시에 비타민을 보충할 수 있는 훌륭한 영양식품이기 때문이다.

루도는 정확히 10일 치의 식량을 준비했다. 모피야 입고 간다고 쳐도 식료품의 무게만으로도 제법 허리에 묵직함이 전해져왔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카잘산맥의 높이는 평균 4000m정도다. 그가 향하려는 폭풍협곡은 이보다는 훨씬 낮겠지만, 그래도 10일 치의 식량이 넉넉하리라고는 보장할 수 없다. 때문에 배낭의 무게는 어쩌면 목숨의 무게라고도 할 수 있었다.

한편 루도가 이 모든 걸 준비하는 사이 술에 취해 여관방에 쓰러져 있던 레미나는 다음날 출발할 때가 되어서야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루도가 건넨 모피 옷과 털 망토를 보며 눈을 반짝거렸다.


“이걸 입고 가는 거야? 무지 따뜻해 보이는데!”


“따뜻하다기보단 덜 추운 거지.”


두 사람은 이른 아침을 먹고서 기약 없는 등정 길에 올랐다. 목표는 폭풍협곡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나타니엘의 거처. 애초에 케리아돌이 알려준 정보가 이것뿐이니 애매한 정보라고 해도 달리 방법은 없었다. 그들은 마을 경비대에게 구입한 자그마한 안내책자를 이정표 삼아 부지런하게 산을 올라갔다.

카잘산맥을 오르는 코스는 매우 단순하다. 하루를 기준으로 삼아 포인트에서 포인트까지. 각 포인트에는 레인저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오두막이 마련되어 있다. 다만 그 오두막까지 무사히 도착하느냐가 그날그날의 관건이라고 할 수 있었다.

첫날은 일반 등산로와 크게 다를 바 없는 길이 계속되었다. 중간 중간 하산하는 나무꾼과 만나기도 했고, 레인저들과 만나 위험사항에 관한 지침을 받기도 했다. 이때까지 레미나는 만면에 미소를 띄운 채 희희낙락한 모습이었다. 고산지대에 발을 들여놓은 경험이 없는 그녀로서는 산을 오른다는 사실 그 자체가 커다란 호기심으로 다가오는 모양이었다.

둘째 날부터 산의 경사가 급격하게 가팔라지기 시작했다. 발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나뭇가지 등을 붙잡아 몸을 고정시켜야 하는데, 이마저도 길이 얼어 생각대로 되질 않았다. 레미나는 몇 번이나 빙판에 몸을 미끄러뜨리고는, 급기야는 루도에게 매달리다시피 하여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 시점에서 그녀는 더 이상 전처럼 생글거리지 않게 되었다. 사람은 물론이요 산짐승의 기척마저도 마주할 때가 없었다. 그저 지치지도 않는 나무와 바위의 연속이었다.


“루우도오~! 조금만 쉬었다 가아. 발목 힘줄이 끊어질 것만 같아.”


“이제 곧 해가 진다고. 그전까지는 숙소에 도착해야 돼.”


“말이야 쉽지. 어떻게 이런 길로 사람이 다닌다는 거야.”


그녀는 길목을 막아선 바위를 올라가지 못해 발을 동동 굴렀다. 루도는 그런 그녀를 붙잡아 번쩍 안아 올려주었다. 아래쪽을 바라보자 이미 안개에 둘러싸여 시작지가 어디였는지 눈대중으로도 짐작이 가지 않았다.


“우리가 갈 수 있으면 충분히 쉬운 길에 속하는 거야. 여기가 브리토리스로 통하는 유일한 길목이라고.”


“거짓말이지? 세상에 이런 길로 어떻게 물자를 운반한다는 거야.”


그나마 다행인 점은 혹한의 추위 덕인지 소문이 자자한 맹수들과는 마주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인간을 먹이로 취급하기로 유명한 회색곰이나 바질리스크는 모두 겨울에는 동면에 들어가기 때문에 적어도 이 부분에 있어서는 안전을 보장할 수 있었다. 문제가 있다면 무리지어 움직이는 늑대와 겨울에도 서식지를 바꾸지 않는 거대맹금류인데, 이런 것들과 조우하면 어떻게든 싸워 쫓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루도는 묵직한 짐을 짊어지고, 레미나를 에스코트하는 동시에 맹수의 습격에도 대비해야 했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날 목표로 한 포인트에 도착했을 때엔 둘 다 녹초가 되어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곤 곧장 잠자리에 들곤 했다.

그렇게 사흘을 움직이자 두 사람은 제법 구름에 몸을 뉘일 만한 고도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물론 해발이 올라갈수록 기온은 급속도로 내려갔다. 세 번째 오두막에 도착했을 즈음엔 두 사람 다 온몸이 얼어붙어 제대로 입을 열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루도는 이빨을 딱딱 부딪치며 벽난로에 불을 지폈다.


“으으...얼어 죽겠네 젠장.”


“앞으로 얼마나 더 가야 하는 거야?”


레미나의 질문에 루도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지도 한 지점을 가리켰다.


“이제 절반쯤 왔어. 폭풍협곡이 이즈음이니까.”


사흘 걸려 절반. 이 정도면 순조로운 진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난로에 통나무를 네댓 개씩 던져 놓고는 담요를 있는 대로 끌어안은 채 잠이 들었다. 그렇게 그날의 등정도 끝이 났다.

나흘째 되는 날은 어쩐 일인지 레미나가 루도보다 일찍 일어났다. 전날 오두막 문이 덜컹거리는 소리에 잠을 설친 그녀는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이며 여닫이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들이닥친 눈보라의 풍압에 밀려 데굴데굴 굴렀다.


“와악?! 뭐야? 갑자기 뭔데?”


아직 단잠에 빠져있던 루도는 그녀의 비명에 놀라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도 곧 눈보라에 휩쓸려 모피째로 방바닥에 엎어졌다.

목이 뒤로 젖혀질 정도의 엄청난 풍압. 광풍에 실려 뺨을 때리는 싸라기눈은 그 자체로 화살이 된 것 마냥 시큰한 통증을 몰고 왔다. 그나마 불씨를 이어가고 있던 벽난로의 장작은 눈보라의 성화에 못 이겨 전부 죽어버리고 말았다. 루도는 거의 기어가다시피 하여 문을 닫았다. 겨우 안정을 되찾은 오두막 내부로 불편한 정적과 어둠만이 감돌고 있었다.

레미나는 아직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하지 못한 듯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다.


“...방금 그거 뭐였어?”


덜컹덜컹덜컹! 요동치는 문턱의 흔들림이 그 대답이었다. 루도는 말없이 탁자와 장작을 가져와 문 앞에 차곡차곡 쌓았다. 통나무 벽에 가만히 귀를 대고 있자니 바람의 포효가 그대로 전해져왔다.

눈보라는 그 후로 나흘간 계속되었다.



***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람의 계승자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일러스트를 받았습니다! +7 15.07.26 1,316 0 -
공지 세계관 - 데루루피아의 편지 +7 15.03.22 3,328 0 -
345 람의 계승자 - ep.7 - 바이올렛(4) +107 15.09.01 2,342 49 24쪽
344 람의 계승자 - ep.7 - 바이올렛(3) +15 15.08.20 1,068 26 20쪽
343 람의 계승자 - ep.7 - 바이올렛(2) +11 15.08.09 1,070 35 23쪽
342 람의 계승자 - ep.7 - 바이올렛(1) +11 15.07.26 1,186 39 22쪽
341 람의 계승자 - ep.7 - 이 추하고 아름다운 세상(14) +23 15.07.20 1,228 40 11쪽
340 람의 계승자 - ep.7 - 이 추하고 아름다운 세상(13) +26 15.07.13 1,137 53 16쪽
339 람의 계승자 - ep.7 - 이 추하고 아름다운 세상(12) +35 15.06.12 1,409 51 11쪽
338 람의 계승자 - ep.7 - 이 추하고 아름다운 세상(11) +11 15.06.10 1,025 42 11쪽
337 람의 계승자 - ep.7 - 이 추하고 아름다운 세상(10) +12 15.06.03 1,024 36 19쪽
336 람의 계승자 - ep.7 - 이 추하고 아름다운 세상(9) +6 15.06.02 1,101 32 17쪽
335 람의 계승자 - ep.7 - 이 추하고 아름다운 세상(8) +6 15.06.02 961 31 15쪽
334 람의 계승자 - ep.7 - 이 추하고 아름다운 세상(7) +2 15.06.02 977 27 16쪽
333 람의 계승자 - ep.7 - 이 추하고 아름다운 세상(6) +3 15.06.02 983 28 20쪽
332 람의 계승자 - ep.7 - 이 추하고 아름다운 세상(5) +2 15.06.02 933 25 15쪽
331 람의 계승자 - ep.7 - 이 추하고 아름다운 세상(4) +3 15.06.02 999 25 19쪽
330 람의 계승자 - ep.7 - 이 추하고 아름다운 세상(3) +7 15.06.01 925 33 18쪽
329 람의 계승자 - ep.7 - 이 추하고 아름다운 세상(2) +2 15.06.01 940 27 22쪽
328 람의 계승자 - ep.7 - 이 추하고 아름다운 세상(1) +3 15.06.01 887 26 23쪽
327 람의 계승자 - ep.7 - 후회없는(5) +6 15.05.31 941 29 13쪽
326 람의 계승자 - ep.7 - 후회없는(4) +1 15.05.31 861 23 19쪽
325 람의 계승자 - ep.7 - 후회없는(3) +2 15.05.31 928 25 22쪽
324 람의 계승자 - ep.7 - 후회없는(2) +2 15.05.31 956 24 19쪽
323 람의 계승자 - ep.7 - 후회없는(1) +1 15.05.31 788 21 20쪽
322 람의 계승자 - ep.6 - 사자의 심장(5) +10 15.05.30 986 34 21쪽
321 람의 계승자 - ep.6 - 사자의 심장(4) +5 15.05.30 884 26 19쪽
320 람의 계승자 - ep.6 - 사자의 심장(3) +6 15.05.27 1,029 30 18쪽
319 람의 계승자 - ep.6 - 사자의 심장(2) +2 15.05.27 756 28 15쪽
318 람의 계승자 - ep.6 - 사자의 심장(1) +3 15.05.27 779 29 14쪽
317 람의 계승자 - ep.6 - 시간싸움(4) +1 15.05.27 907 26 18쪽
316 람의 계승자 - ep.6 - 시간싸움(3) +8 15.05.26 907 23 27쪽
315 람의 계승자 - ep.6 - 시간싸움(2) +2 15.05.26 778 24 23쪽
314 람의 계승자 - ep.6 - 시간싸움(1) +3 15.05.26 877 20 28쪽
313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5) +2 15.05.26 855 26 21쪽
312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4) +1 15.05.26 902 25 18쪽
311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3) +3 15.05.26 1,100 24 25쪽
310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2) +3 15.05.25 880 25 28쪽
309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1) +2 15.05.25 981 22 18쪽
308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11) +2 15.05.25 729 26 23쪽
307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10) +1 15.05.25 760 20 22쪽
306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9) +1 15.05.25 776 20 14쪽
305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8) +4 15.05.25 817 27 17쪽
304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7) +2 15.05.24 945 26 19쪽
303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6) +3 15.05.24 877 22 13쪽
302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5) +2 15.05.24 955 28 19쪽
301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4) +1 15.05.24 851 21 16쪽
300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3) +2 15.05.24 894 23 24쪽
299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2) +2 15.05.24 1,045 29 18쪽
298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1) +2 15.05.24 916 25 21쪽
297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5) +6 15.05.23 1,116 21 29쪽
296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4) +1 15.05.23 852 23 20쪽
295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3) +1 15.05.23 960 22 20쪽
294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2) +3 15.05.23 1,143 20 21쪽
293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1) +2 15.05.23 1,085 27 17쪽
292 람의 계승자 - ep.6 - 하나의 몸, 두 개의 영혼(3) +3 15.05.23 1,155 25 19쪽
291 람의 계승자 - ep.6 - 하나의 몸, 두 개의 영혼(2) +10 15.05.21 1,060 28 22쪽
290 람의 계승자 - ep.6 - 하나의 몸, 두 개의 영혼(1) +2 15.05.21 1,121 26 19쪽
289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6) +2 15.05.21 1,088 26 25쪽
288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6) +3 15.05.21 948 24 27쪽
287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5) +1 15.05.21 1,009 26 25쪽
286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4) +5 15.05.20 1,024 29 21쪽
285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5) +3 15.05.20 942 27 21쪽
284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4) +3 15.05.20 919 24 14쪽
283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3) +1 15.05.20 1,056 27 24쪽
282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2) +3 15.05.20 759 23 19쪽
281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1) +1 15.05.20 1,003 28 22쪽
280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3) +11 15.05.19 1,017 31 30쪽
279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2) +3 15.05.19 1,229 28 17쪽
278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5) +9 15.05.18 1,143 24 18쪽
277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4) +2 15.05.18 820 24 17쪽
276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3) +4 15.05.18 950 22 24쪽
275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2) +3 15.05.18 940 23 23쪽
274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1) +2 15.05.18 1,036 25 19쪽
»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1) +2 15.05.18 984 22 19쪽
272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3) +1 15.05.18 1,233 25 25쪽
271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2) +2 15.05.17 1,022 29 25쪽
270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1) +1 15.05.17 877 20 22쪽
269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0) +1 15.05.17 978 23 23쪽
268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9) +1 15.05.17 1,051 24 20쪽
267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8) +6 15.05.17 923 26 22쪽
266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7) +5 15.05.16 1,001 27 22쪽
265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6) +1 15.05.16 897 23 26쪽
264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5) +2 15.05.16 1,038 30 26쪽
263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4) +1 15.05.16 1,014 25 24쪽
262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3) +3 15.05.16 872 24 25쪽
261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2) +2 15.05.16 937 24 26쪽
260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 +3 15.05.16 1,074 32 31쪽
259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6) +8 15.05.14 1,076 30 22쪽
258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5) +7 15.05.14 922 23 11쪽
257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4) +4 15.05.14 1,043 22 20쪽
256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3) +3 15.05.14 905 23 31쪽
255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2) +5 15.05.14 1,009 25 27쪽
254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1) +6 15.05.13 914 25 30쪽
253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10) +3 15.05.13 958 23 24쪽
252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9) +1 15.05.13 1,010 22 27쪽
251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8) +1 15.05.13 907 19 27쪽
250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7) +4 15.05.12 1,097 27 27쪽
249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6) +5 15.05.12 1,005 26 27쪽
248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5) +3 15.05.12 1,118 26 28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