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륜환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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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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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0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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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3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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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하늘이 지는 밤에(4)

DUMMY

※※※



검고 하얀 공간이었다.


발 아래로 펼쳐진 것은 끝없이 새하얀 풍광. 북방의 끝없는 평원에 순백의 눈보라가 뒤덮인다면 이리 될까.


소년의 뇌리를 스친 것은 다른 것이었다.


‘구름......’


운해(雲海)다.


그리 생각하는 순간, 소년의 발끝에 닿은 구름이 살풋 흔들렸다. 그 위로 끝없는 흐름이 물결처럼 번져나갔다.


구름에 발을 딛고 선 소년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여긴?’


생각이 흐릿하고 감각이 무디다. 스스로가 어째서 여기에 있는지도 잘 기억이 나질 않는데, 유난히 포근한 감각이 주변을 감싸고 있다는 것만은 느껴졌다. 한없이 부드러운 봄날 산들바람처럼.


솨아아아아아-


바람 소리가 귓가를 스친다. 등을 살포시 밀어주는 듯한 감각을 느끼며 소년은 천천히 구름 위로 걸음을 내딛었다.


끝없이 펼쳐진 구름 바다다. 그 저편을 따라서 흐릿한 경계가 일렁인다. 땅이었으면 마땅히 지평이라 했겠으나, 운해 위에서는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 알수가 없었다.


그 위로 펼쳐진 것은 끝없는 검정.


흑색의 하늘이 광활히 펼쳐져 사방을 뒤덮고 있다. 하늘이라 하기에도 어색할 정도의 공간은, 우주(宇宙:천지만물)라 불러야 마땅할 광대함을 품고 있었다. 그 속에 깃든 별무리의 수가 영원에 다가서고 있었으니까.


‘저 속에는 무엇이.’


소년은 문득 생각했다.


저 별빛 하나하나가 담고 있는것이 무엇인지 궁금하다고.


때문에 그는 손을 내밀었다. 길게 뻗은 새하얀 손가락 사이로, 둥글게 쥐어진 별빛이 별안간 구붓하게 떨어지며 길게 휘어졌고.


일검(一劍)이 종횡으로 세상을 갈랐다.


“......”


소년은 손에 쥐어진 별빛을 보며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는 중얼거렸다.


“삼재(三才).”


그것은, 검(劍)이었다.


“전부.”


검이다.


곧이어 소년은 깨달았다. 구름 바다 위를 뒤덮은 우주의 별무리는, 고금의 세월동안 수없이 많은 무인들이 펼쳐낸 검의 총화와도 같다고.


별빛 하나에 검식 하나다.


그리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허나 소년은 동시에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일평생 목도한 검법의 숫자는 저렇게까지 많지 않다. 밤하늘을 별무리로 가득 채우기는 커녕, 기백여개에 달하는 것도 어려울 것이다.


허나 그러한 의문도 잠시.


“오행(五行).”


“육합(六合).”


“칠성(七星).”


“태을(太乙).”


소년이 손을 뻗을때마다, 하늘의 별무리가 떨어지며 검식의 빛줄기로 화해 세상을 조금씩 물들인다. 한개의 별무리가 깃들때도, 때로는 수십개가 동시에 손아귀에 쥐어질 때도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소년은 깨닫고 있었다. 그가 밤하늘의 별무리만큼 많은 검을 목도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고금을 따라 이어져온 수많은 검은 곧 깨달음의 연속이니.


작금의 시대에 이르러 완성된 하나의 검법은, 곧 수천개의 뿌리를 지니고 있는 까닭에.


“적화(赤火).”


한순간에 수백개의 별빛이 소년의 손아귀로 스며든다. 동시에 작열하는 화염의 꽃비를 구름 바다 위로 피워올린 소년이 흐린 미소를 지었다.


사박.


그렇게 걷기를 한참, 어느 순간 소년의 걸음이 멈추었다.


끝없는 구름 바다 위, 검은 하늘을 따라 흐르는 별무리의 끝자락이었다.


하늘과 운해가 만나는 지점을 따라 별무리가 휘돌며 한곳으로 모이고 있었다. 꼭 구름 위로 솟구치는 것 같은 형상을 자아내며 흐르는 커다란 줄기.


그것은 언뜻 보기에는 나무 같기도 했고, 한 사람의 모습 같기도 했으며, 커다란 용(龍)이 꿈틀거리며 승천하는 형상 같기도 했다.


그 앞에 선 소년은 천천히 시선을 들어올렸다.


“......이게 나의.”


심상속 모든 검이 깃든 한줄기의 검.


태허도룡검(太虛屠龍劍).


스치는 기억과 함께 소년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의 심상속 모든 검식의 사이에 아직 닿지 못한 검 한자루가 끼어있는 탓이었다.


백색 별무리로 물든 커다란 줄기 속, 흐릿하게 일렁이는 한자루의 검.


“......풍백?”


이것만큼은 그 또한 따로 익힌적이 없다. 무형검은 풍백의 절기였으며, 벽을 넘은 무인들 중에서도 쓰는 이가 별로 없는 희귀한 기예.


그것이 어째서 자신의 심상에 깃들어 있는가.


그런 의문을 품으며 다가선 소년은 손을 뻗었다. 심상에 깃든 단 한줄기의 검을 향해서였다.


그렇게 길다란 손가락 사이로 수천개의 별무리가 휘몰아치며 깃들었고.


별빛과 바람, 뇌전으로 이루어진 이름없는 무형검(無形劍)이 손에 잡히는 순간-


“백연! 세상에, 괜찮은......!”


소년은 잠에서 깨어났다.



※※※



귓가에 들려오는 것은 소리 뿐이었다.


의식이 아직은 수면 아래 한꺼풀 잠겨 있는 듯한 감각.


“의식은 아직......”

“......진기 순환을 계속......”

“지혈이 되나?”

“호흡은 이제 안정......”


몽혼하다. 의식은 아직까지 흐릿한데, 감각만은 천천히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귓가를 스치는 것은 천둥같은 말발굽 소리와 다급하게 이어지는 말소리들.


한편으론 부드럽게 흔들리는 스스로의 몸도 느껴진다. 위아래로 주기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말을 타고 있는 듯 했는데 혼자가 아니었다. 그를 꽉 붙잡은채로 쉴새없이 진기를 순환시키는 누군가의 손길이 느껴진다.


‘예린.’


투명한 진기를 불어넣으며 그를 껴안고 있는 무인의 이름이 머리를 스쳤다. 그러자 삽시간에 기억이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혈마, 용해곡, 솟구치던 적룡과 그것을 저지시킨 백연 자신의 일검.


초월의 벽을 넘은 검격과, 그의 가슴을 꿰뚫은 천뢰시 종리군의 화살.


‘......어떻게 벌써 깨어났지?’


거기까지 기억해낸 백연은 의문했다.


태허무극결의 반동이 여기에서 그칠 것이 아니었다. 막대한 외기를 다룬 대가는 작지 않다. 초월의 벽을 넘었다고 해서 그것이 갑자기 무마되는 것도 아니다. 한동안은 진기가 봉인되고 평범한 사람의 수준에 이를 것인데, 이 순간 그의 몸속에는 투명한 산들바람 같은 내공이 천천히 세맥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운기요상의 형태.


전신 세맥과 혈도를 치유하고 있다. 바깥으로 진기를 퍼뜨렸다 흡수하기를 반복하는데, 그 형태가 내가중수법의 여파를 밀어낼때와 같다는 사실을 백연은 깨달았다.


예린의 솜씨인가.


그 섬세한 진기 운용이 육신을 안에서부터 짓이기던 종리군의 내가중수법을 흩어놓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해가 되질 않는다.


그의 혈도를 휘돌고 있는 진기는 예린의 내력이 아니었으며, 또 태허무극결을 사용한 육신이 회복될 정도로 막대한 진기가 어디서 별안간 생겨났을리도 없는 까닭에.


“호흡은 이제 괜찮아요. 육신에 무언가 손상이 생길 단계는 지났으니......”

“그래도 도착할 때까지는 계속 유지해주시지요. 악가의 뇌룡이라 했지요? 진기 운용의 섬세함이 엄청나군요. 악가창은 공격 일변도의 무학이라 들었는데.”

“......빗나가면 안되니까요.”

“당신에게 그를 맡긴 검성의 판단이 옳았군요.”

“......”


이어지는 침묵. 단번에 공기가 무거워진다. 그 속에서 백연은 무언가 기묘한 것을 읽었다.


‘풍백은?’


없다.


지금 그의 주변으로 백여기가 넘는 인마가 내달리고 있는데, 어디에도 바람을 휘감고 다니는 검객의 유쾌하면서도 자유로운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때문이었다. 수면 아래 반쯤 잠겨 있던 의식을 억지로라도 붙잡고 끌어올린 백연이 힘겹게 눈을 뜬 것은.


“......쿨럭.”


마른 기침과 함께 눈앞이 화악 밝아진다. 시야 저편의 검은 하늘 위로 휘영청 떠오른 달빛이 눈에 들어온다. 그와 함께 시야 양옆으로 흘러내리는 피에 젖은 흑단같은 머리칼도 엿보였다. 악예린의 것이었다.


“백연!”

“......예린. 여기는.”

“쉿. 조용히 해요. 아직 운기요상이......”


백연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말 위에 쓰러지듯 실린 상황. 그를 뒤에서 끌어안은 악예린이 말을 다리로만 몰며 등에 손을 얹고 진기를 흘려넣고 있었다.


“이제 괜찮습니다.”

“하지만......”


조심스레 악예린의 손을 밀어낸 백연이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그제서야 주변의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미친듯이 전력으로 내달리며 전진하고 있는 대막의 군세. 아륵탄의 검은 성도가 있는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은 금새 깨달았다.


그 사이에 내달리던 살막주가 백연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깨어났군요.”

“어떻게......된겁니까?”

“큰 전투가 몇번 있었습니다. 추격을 떼어놓는게 쉽지는 않았습니다만, 제 나름 재주가 있어서.”


그리 말하며 싱긋 웃는 살막주다. 그의 장포 아래로 핏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것이 언뜻 눈에 스쳤다.


“당장은 안전합니다. 이대로 검은 성도까지 거리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살았다 봐도 좋겠지요.”


한편으론 시야 저편 맨 뒤에서 내달리는 붉은 진기의 파동도 보인다. 나단이 진형의 맨 뒤에서 맹렬한 기세로 전진하며 군세를 수호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리에 없는 사람이 둘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뇌리 한켠을 스쳤지만 백연은 물을 수 밖에 없었다.


“검왕과, 검성께선.”

“......”

“안계시는군요.”

“백연.”


악예린이 뒤에서 흐릿한 음성으로 그를 불렀다. 그 안에 깃든 익숙함을 백연은 너무 빠르게 눈치채고 말았다.


전생의 검귀가 자주 들었던 어조. 누군가의 죽음이나 희생을 알릴때 사람들은 항시 저런 목소리를 하던가.


소년은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귓가를 스치는 바람을 느끼며 눈을 비스듬히 내리깔았다가 뜬 그가 이윽고 뇌까렸다.


“알려주십시오.”


살막주는 백연의 뒤를 힐끗 보았다. 그것을 알려줄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는 듯이. 이어지는 것은 담담한 악예린의 음성이었다.


“검왕께서 시간을 버셨어요. 혼자 천뢰시 종리군과 황실 군문의 장수 여섯을 묶고, 압도하면서 군세의 진격을 저지하셨으니.”

“......”

“그리고......검성께선.”


악예린이 백연의 등을 매만졌다. 종리군의 화살이 꿰뚫고 지나간 자리였다.


“백연의 내상이 너무 심했어요. 무공의 반동은 둘째 치고서라도, 내가중수법을 당장 해소하지 않으면 백연은 죽었을거에요.”

“그래서, 격체전력이었군요.”


소년은 뇌까렸다.


이제는 이해했다.


어째서 그의 심상 속에 풍백의 무형검이 깃들어 있었는지.


일평생 쌓아온 모든것을 그대로 넘겨주었다. 격체전력의 순간에도 무형검의 구결까지 그에게 새겨주고 간 낭인 검객.


“네. 그런 다음, 선천진기는 넉넉히 남았다며 검 한자루를 들고 검왕께 도움을 주러 가겠다고 하셨고요.”


천하오대검수의 둘.


한 소년을 지키기 위해 북방의 하늘 아래 남았다. 백연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마지막으로 덧붙이는 악예린의 목소리를 귓가에 새기면서였다.


“백연의 검이, 일평생 목도한 가장 완벽한 검이었다고.”


침묵 속에서 천둥같은 말발굽 소리만이 감각을 채웠다. 어느새 저편 멀리 하얗게 밤을 짓이겨오는 검은 성도의 성벽 끝자락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그것을 응시하며 백연은 천천히 뇌까렸다.


“천주 남궁산.”


검왕(劍王).


“풍백 이신.”


검성(劍星).


이름을 삼키듯 중얼거린 백연이 몸을 일으켰다.


말 위에서 그가 느릿하게 손을 펼쳤다. 백연의 창백한 손아귀 사이로 공간이 깨지듯 일그러지며 검(劍)의 형태를 자아내는 것이 찰나였다. 별빛과 뇌전, 바람을 손에서 피워올린 소년이 이윽고 그것을 천천히 거두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점차로 밝아져 오는 하늘이 시야 저편으로 스쳤다. 아침이 도래하는 풍경. 빛을 잃고 사라져가는 별하늘을 힐끗한 백연이 천천히 눈을 내리감았다.


긴 밤이 끝나가고 있었다. 조하(朝霞)의 빛살이 소년의 눈가에 내려앉으며 별빛같은 반짝임을 일으켰다.


작가의말

지각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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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 용해곡(龍骸谷)(4) +5 24.07.15 1,443 43 13쪽
311 용해곡(龍骸谷)(3) +6 24.07.13 1,574 48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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