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빛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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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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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15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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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14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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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천_소망단이라 이름하다

DUMMY

사빈이 반김길 건너편에 있다가 텃밭으로 다가왔다.


바나는 찻집으로 향하던 뜀박질을 멈추고 사빈에게로 돌아갔다.

“왈왈, 지예를 가르치고 있어라. 어떻게 혼을 데려오는지 말이어라.”


얼룩무늬 지예의 등 위에 혼 하나가 엎드려 울고 있었다.


사빈은 지예의 목덜미과 콧잔등을 쓰다듬었다.

“수고했어. 위로할 혼을 어떻게 찾는지 알았어?”


“예. 울고 있는 혼이 있으면 조심해서 다가가요. 무서워하지 않도록 웃으면서.”

지예가 송곳니를 드러내고 활짝 웃었으나 사빈은 웃지 못했다.


애써 올린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기는 해도, 전혀 웃음으로 보이지 않았다.

‘웃는 연습부터 가르쳐야겠구나.’


“그런데, 계속 울기만 하고, 말은 안 해요.”

“내가 얘기해볼게.”

지예가 다리를 구부리고 혼을 내려놓는 사이 바나는 옆에서 껑충거렸다.


“왕, 혼들이 너무 빨리 가버려라. 팬을 만들 시간이 없어라.”

“잘 찾아보면 붙박이 혼도 꽤 있어. 바나는 그런 혼을 맡아.”


“계속 머물 혼 말이어라?”

“아니. 오래 묵은 혼을 염라부로 보내줘야지.”

“왕, 그라믄, 팬은 어쩔 거라? 없어졌어라?”


“음···.”

사빈은 텃밭 가장자리에 혼을 앉히면서 대답을 궁리했다.


낯선 땅에 적응하느라 긔니초가 시들해졌지만, 더 갖다 심었기에 긔니초밭이라 부를 만했다.


“여기서는 바나가 대장이고 인도자야.”

“대장이라고라?”


“그래. 비뢰수를 이끄는 대장, 혼에게 염라부와 영천옥을 알려주고, 인도자들에게 신호해야지.”

“대장이고, 인도자여라?”

바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귀를 쫑긋 세웠다.


“한얼님과 같은 거여라? 인간세에서 한얼님이 대장이었어라. 천계에선 인도자였어라.”

“그래, 네가 한얼님 대신 중천을 돌봐줘.”

사빈은 바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왈왈! 나만 믿으셔라. 지예! 가자고라!”

바나는 쓱거리며 앞발을 내밀었다.

비뢰수 지예도 고갯짓으로 인사하고는 느릿느릿 바나를 따라갔다.


사빈은 울고있는 혼을 위해 무릎을 꿇고 앉았다.

“여기서는 실컷 울어도 돼.”


혼빛은 어린아이처럼 작고 여렸다. 그 위에 크고 둥근 모습이 겹쳤다. 걸어 다니기에도 힘들어 보였다.


“삼도천에서 기억이 지워지지 않아서 그래. 가장 슬픈 일이 뭐야?”

“나를 따돌리고 놀릴까 봐 무서워요.”


사빈은 여린 혼빛을 쓰다듬었다. 혼 덩어리가 물컹거렸다.


혼빛에 어울리는 모습이 있어도 중천에서는 완전한 모습을 가질 수 없었다. 씻김을 끝내고 마음숲에 들어가야 모습을 갖게 된다.


그래도 아름누리의 차를 마실 수는 있었다.


“들어갈래? 사부랑차와 단비차가 있어.”

사빈이 혼의 어깨를 다독였다.


혼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혼이 머금은 슬픔이 물방울이 되어 떨어졌다.


눈물방울이 긔니초 잎에 닿자 희고 동그란 알갱이로 바뀌었다. 모래 알갱이 같은 방울이 긔니초 잎을 타고 뿌리를 향해 또르르 굴러갔다.


사빈은 물끄러미 구슬을 보고 있다가 손바닥으로 받아냈다.

‘이게 뭐지?’


긔니초로 떨어진 알갱이들을 모두 모았다.

손바닥 위에서 작은 알갱이들이 서로 붙어 더 큰 알갱이가 되었다. 이슬방울 같았다.


사빈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어디선가 소리가 들렸다.

‘사리수.’


“사리수?”

사빈이 이름을 부르자 사리수가 꾸물거렸다.


아날빛숨 천장에 매달려있던 숨꼭지와 비슷했다.

‘이거··· 뭔가 있을 것 같아. 나중에 살펴봐야지.’


사빈은 사리수를 숨의 공간에 밀어 넣었다.

그 사이 혼은 고마의 기운을 받아 평안해졌고,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


사빈은 혼을 데리고 아름누리로 들어섰다.

삼 층 나토두의 방에서 누군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은 눈치채지 못했다.


*


에밀레와 나토두를 위한 떠들썩한 환영의 자리가 마련되었다. 고샅공방에서 가져온 음식이 있어 식탁이 빈약하지 않았다.


바나는 비뢰수와 함께 먹겠다며 도우미 숙소로 갔다. 대장으로써 부하들을 이끈다며 음식을 잔뜩 싸 들고 갔다.


단가람은 별빛바다의 샘까지 살펴본다며 아침 일찍 나갔다.

중천의 물을 살피고 씨앗이 얼마나 살아남았는지 알아본다고 했다. 적어도 삼사일은 걸릴 것이다.


아름누리에서는 조용하고 느긋한 식사가 이어졌다.


오늘은 백하도 시간에 맞춰 들어왔다.

다른 정혜부 보위들처럼 그 역시 처음보다 중천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다.


백하는 늘 그렇듯 사빈의 옆자리에 앉았다.

“이대로면 곧 열린마을에 오온재가 들어설 것이오. 나도 매일 그대 곁에서···.”


백하가 싱글거리자 예사달이 수저로 접시를 따닥 두드렸다.

“에헴, 그때 가서 얘기하게나. 에밀레한테 들을 말이 있으니.”


“어르신, 이젠 예사당에도, 동녘뜰에도 안 가십니까? 황제님을 뵈러 가셔야죠.”

“응, 사빈을 지켜야 해서 갈 수가 없네.”


“사빈님은 걱정 마십시오. 제가 있으니까요.”

“자네가 있어서 걱정이라고!”


예사달은 주름 깊은 손으로 백하의 가슴을 가리켰다. 갑자기 목에 힘을 준 탓인지 켁켁 기침을 했다.


“아이, 할머니. 오늘은 환영의 자리예요.”

“응, 그렇지. 그래. 얘기를 들어야지. 고럼, 고럼.”


사빈이 가만히 백하의 손을 잡았다. 그의 볼이 발갛게 물들었다.

“백하님도 에밀레의 이야기를 좋아하게 될 거예요.”


사빈은 특히 에밀레의 여행 이야기를 좋아했다.

동녘뜰에 살 때, 예사달도 우주를 떠돌던 이야기를 해주었지만, 에밀레 만큼 재미있게 말하지 못했다.


에밀레는 천사장 임명식에 대해 그림을 그리듯 이야기했다.

사빈은 꿈꾸는 눈빛으로, 예사달은 이미 아는 내용을 확인하는 기분으로 이야기를 들었다.


백하는 이야기보다 사빈의 손을 잡은 이 시간이 즐거웠다.


“천사국 분위기는 어때? 다훤 아저씨가 천사장이라 엉망진창 되는 거 아냐?”

“다훤님이 엄청 꼼꼼하시대요. 자상하기도 하지만, 엄해서 다들 조심하고 있어요. 예전에는 시끌시끌 장터 같았는데, 지금은 수련원 같달까.”


“흥. 그 녀석이 꼼꼼하고 엄하다고?”

예사달이 피식 웃었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사빈은 예사달의 손을 흔들었다.

“할머니, 사리수가 뭔지 아세요?”


“사리수? 오랜만에 들어보는구나.”

예사달이 꽃떡을 오물거렸다.


“혼이 흘리는 후회의 눈물이야. 순수한 미련과 진실한 후회여야 해. 그렇지 않으면 땅이 썩어버린단다.”

“그래서 중천도 못쓰게 된 거군요.”


“아, 사빈님! 어디선가 들었는데요···.”

에밀레가 손을 들었다.


“순수한 눈물을 백팔 개 모으면 알약 하나가 된대요. 그게 사람에게 용기와 희망을 준다던데요. 선택받은 한 사람에게만요.”


‘어디서 듣기는···.’

나토두가 입을 실룩거렸지만, 아무도 그에게 귀 기울이지 않았다.


사빈은 곧장 사리수 백팔 개를 모으는 방법에 몰두했다.


수명환은 숨꼭지 일천팔십 개로 만든다. 순백초가 있어야만 숨꼭지를 하나로 모을 수 있다.

‘그건 수명과 관계된 것이니 더 많이 필요하구나.’


수명환을 만드는 방식과 똑같을 것이다. 사리수를 하나로 모을 풀이 있을 거야. 그게 뭘까?


백하는 생각에 빠진 사빈을 지켜보았다. 슬며시 입꼬리가 올라갔다.

진지한 눈빛, 가끔 치켜 오르는 눈썹, 생각이 막힐 때마다 살짝 내미는 입술까지 모든 것이 사랑스러웠다.


“순수한 눈물이 그렇게 많이 모일까요?”

나토두가 콧잔등을 구겼다. 에밀레는 빼꼼 혀를 내밀었다.


“할 수 있어. 중천이 꿈꾸고 있거든. 그 꿈이 이루어질 거야.”

사빈이 큰소리쳤다.


오래전 중천에서 보았던 환영이 되살아났다. 푸른 중천에서 어린 혼이 자신을 ‘고마님’이라고 불렀다.

그때는 착각인 줄 알았는데, 바로 자신이 고마가 되지 않았는가.


*


아름누리 삼 층, 고아당에서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사빈이 작은 단지를 붙잡고 흥얼흥얼 콧노래를 불렀다.


바닥에는 텃밭에서 뽑은 약초가 널브러져 있고, 얼굴과 손, 소매는 풀물이 들어 얼룩덜룩했다.


“미소화야, 미소화. 네가 사리수를 아는구나.”

사빈은 싱글거리며 단지 바닥에 놓인 알약 하나를 꺼내 들었다. 새끼손톱 크기의 진주 같았다.


사리수가 이백 방울 정도 모이자 텃밭의 약초란 약초는 모두 가져왔다. 차례대로 넣었다 빼며 반응을 살폈다.


미소화 꽃과 잎이 들어가자 사리수가 하나로 오그라들었다.

정확히 백팔 개가 사라지고 나머지 방울은 그대로 바닥을 굴러다녔다.


“이걸 뭐라고 부를까?”

사빈은 진주같이 영롱한 알약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용기와 희망을 준다니··· 소망단?”


사빈이 벌떡 일어났다.

“그래! 소망단! 이걸 사람에게 주는 거야. 다시 일어설 힘을 주는 거지. 하하핫!”


양손을 허리에 올리고 천장을 바라보며 환호를 질렀다.

‘마고는 할 수 없지만, 고마는 할 수 있다 이거야. 그믐이 아니라도 언제든 갈 수 있다고!’


소망단을 높이 들어 올렸다.

“정말 효과가 있겠지?”


쓰읍 소리 내어 침을 삼켰다.

“해봐야 알지. 일단 내려가서···.”


언제든 중천을 벗어날 수는 있지만, 나갔다가 돌아오는 것이 문제였다. 가까운 대명천이나 마음숲이라면 몰라도.


현재의 겹이나 시간의 결에 걸릴 수도 있고, 또다시 전쟁터에 떨어질 수도 있다.

하염없이 떠나있을 수 없으니 누군가는 돌아오는 시간을 알려줘야 했다.


정확히 이곳으로 불러들일 열쇠가 필요했다. 마고의 꽃수 열쇠처럼.


사빈은 곰곰이 생각하다 침대 머리맡을 지키는 아리 인형을 찾아냈다. 천사 가온이 만들어 준 노란 병아리 인형.


인형은 두 쪽으로 나눌 수 있고, 그 눈은 검은 한빛돌이었다.

‘둘이 한 쌍이야. 하나가 여기 있다면 어디 가든 길을 잃지 않아. 그럼 이걸···.’


사빈은 아리 인형을 반으로 나눠 하나씩 손에 쥐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러라고 준 건 아니지만···.’


가온이 한빛돌 인형을 준 이유는 따로 있었다.

‘정인이 정해지면 그 정표를 나눠 가져.’

‘한빛돌을 하나씩 갖는 거지. 그걸 품으면 서로에게 가는 길을 잃지 않아.’


사빈은 아리 인형을 눈앞까지 들어 올렸다. 두 개의 한빛돌에 반짝 빛이 지나갔다.


“소망단은 현원님께 말씀드린 다음에···.”

사람의 일에 관여하는 것이니 소망단을 함부로 갖고 나갈 수 없었다.


여기서는 나비의 날갯짓이라도 인간세에서는 어떤 결과로 바뀔지 모른다. 중앙황제의 허락이 먼저였다.


“아리 인형부터 시험해야지. 외출의 목적은···.”

사빈은 반쪽짜리 인형을 나눠 쥐고 방안을 서성거렸다.


언뜻 창밖으로 텃밭이 내다보였다.

마음숲에서는 싱싱하던 약초가 시들시들하고 힘이 없었다. 씨앗도 많이 심었지만, 싹이 트지 않았다.


겨우 중천을 깨울 준비를 마쳤지만, 차와 약초는 지금 당장 필요했다.

“좋아. 신성한 땅에 가서 흙을 가져와야지.”


한얼이 있으면 부탁하겠지만, 그가 어디 있는지 아직도 모른다다.

‘뭐가 문제야? 직접 가면 되지!’


창밖을 내다보며 나토두와 바나를 불렀다.

“나토두! 바나! 갈 곳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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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 그다음_싸움 구경 23.09.15 64 3 12쪽
» 중천_소망단이라 이름하다 23.09.14 51 3 12쪽
172 중천_열린마을의 식구들 23.09.14 75 3 10쪽
171 중천_도우미 구하기 23.09.13 79 3 12쪽
170 중천_첫 번째 손님 23.09.13 61 3 12쪽
169 중천_임천사령 고마 사빈 +2 23.09.12 57 3 11쪽
168 천계_새로운 마고 23.09.12 56 3 12쪽
167 천계_암연층으로 +2 23.09.11 58 3 13쪽
166 천계_잃어버린 조각 23.09.11 84 3 12쪽
165 천계_오래된 사연 23.09.10 64 2 12쪽
164 천계_이안남존의 라온성 23.09.10 60 2 12쪽
163 천계_마고가 돌아오다 23.09.09 61 3 10쪽
162 천계_해날품곡의 함정 23.09.09 66 3 13쪽
161 천계_마음숲의 침입자 +2 23.09.08 77 3 11쪽
160 그믐_삼도천이 막히다 23.09.08 75 3 10쪽
159 그믐_다시 현재로 23.09.07 61 3 12쪽
158 그믐_도룡과의 혈투 23.09.07 62 3 12쪽
157 그믐_악마 미지의 정체 +2 23.09.06 60 3 12쪽
156 그믐_마물 도룡 23.09.06 54 3 12쪽
155 그믐_신례국 백슬곤아 +2 23.09.05 68 3 12쪽
154 그믐_백령성 지하보관실 23.09.05 60 3 11쪽
153 그믐_안개에 서린 무늬 +2 23.09.04 62 3 10쪽
152 그믐_마물의 단서 23.09.04 57 3 11쪽
151 그믐_시작된 미래 23.09.03 76 3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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