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하추풍검 - 5분 후 갈라져 죽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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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렉스
작품등록일 :
2023.05.10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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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12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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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0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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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이십사수매화검 천추강

DUMMY

"당신은 죽었습니다."


객점의 객실에 언질도 없이 들어가, 나무 탁자 앞에 앉으며 내뱉은 말이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사내는 나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넌 뭐냐?"


"왼쪽 어깻죽지에서 오른쪽 골반까지 단칼에 잘랐습니다. 이제 유언을 하십시오."


사내는 내 말을 이해하려는 듯 굳은 표정으로 눈알을 이리저리 굴려대더니, 곧이어 폭소를 터트렸다.


"누군가 했더니 이천 대협 슬하의 '숨겨진 검'이라는 녀석인가."


"월하추풍검月下抽風劍 이월이 천추강 선배를 뵙습니다."


나는 포권 인사를 하여 그에게 예를 표했다. 그는 누런 이를 드러내며 껄껄 웃었다.


"아까 네가 한 말의 의미가 뭐지? 유언을 해라? 내게 빈틈이 너무 많아서 언제든지 베어버릴 수 있었다는 말인가?"


천추강은 도자기 잔에 담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나는 달리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가 멋대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당돌한 꼬맹이로군. 정말로 네가 날 베어버릴 생각이셨다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았겠지."


"요컨대, 제가 진심이었다면 그것을 알아채고 임전의 태세에 들어가셨을 거라는?"


"그렇지."


새하얀 매화 송이들이 수놓아진 검은 칼집. 사내는 탁자 옆에 세워 둔 그것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네가 오기 전 의義와 협俠의 본질에 대해서 되새기고 있었다."


"의와 협?"


"요즘에는 무공이라는 게 필요가 없는 시대지. 관아는 대부분의 국토를 완벽히 통제해내고 있고··· 아니, 정부라고 해야겠군. 그들이 힘써준 덕에 더 이상 무고한 사람들이 참살당하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게 되었어.


이제 사람들은 말 대신 자동차를 타고 다니고, 백병전에서는 총포가 검을 거의 완벽히 대체하게 되었지."


나는 그의 말을 듣는 동안 빈 잔에 차를 따라 마셨다. 따뜻했다. 한편 천추강은 내 행동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말만 늘어놓았다.


"그런 이 시대에, 아무리 뛰어난 검법을 익혀도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이 시대에, 세존世尊 노요한께선 다시금 '신무림'과 무공의 시대를 열어젖히셨지. 그 공의 크기는 우리 '구무림'인들에겐 있어선 헤아릴 수조차 없다.


평생 무공을 접하지 않은 일반인이라도 '뇌단법雷斷法'의 이치를 조금만 익힌다면 쉽게 몸이 만들어지고, 또 자신만의 무공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되었지.


하지만 그렇기에 요즘 무림인들은 참된 의와 협에 대해서 모른다. 불우한 이가 있다면 금전을 다소 포기하고서라도 돕고, 항상 부모에게 깍듯하며, 벗이 필요로 한다면 언제든지 발 벗고 나서줄 수 있는 그런 정신이 없다.


또한 의와 협 뿐만 아니라 무武 역시 부족하다.


내가 익힌 화산華山의 매화검법梅花劍法은 검증된 무공이다. 그렇기에 화산에서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것이지.


하지만 그 옛날 화산에서 문하생들끼리 한솥밥 먹으며 지내던 시절과는 달리···."


귀는 열려 있었지만 더 이상 듣고 싶진 않았다. 나는 이를 악물고 하품이 새어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그가 이야기를 끝냈다는 생각이 들 즈음에 내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요점은?"


"이 소협, 자네의 아버지 이 대협께선 구무림 시절 아주 뛰어난 협객이셨다. 살수로 활동하시던 시절엔 그 오묘한 비법으로 날고 기는 고수들을 쥐도 새도 모르게 불귀의 객으로 만들어 버리셨지."


"아버지에 대해서 잘 아시나 보죠?"


"그래, 그 때문에 내가 널 부른 거잖나."


그는 차를 또 한 모금 들이켰는데, 이번엔 잔을 탁자에 내리치다시피 놓았다.


"너도 알겠지만, 세존 노요한은 늙었어. 이제 세대가 교체될 때가 왔다. 그에게는 출중한 자질을 가진 세 명의 딸이 있다. 그리고 그 세 명이 후계자 경쟁을 하고 있지.“


천추강의 말대로였다.


장녀 노루나.

차녀 노루미.

삼녀 노루아.


이 셋이 신무림의 패권을 쥐기 위해 피 튀기는 경쟁을 하고 있었다.


"내가 지지하는 건 삼녀 노루아 쪽이다. 그러니 네가 아버지께 잘 말씀드려서 나와 같은 인물을 지지하시도록 만들어 줄 수 있나?"


나는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이미 차녀 쪽을 지지하고 있었다.


기다란 사슬이 달린 은색 회중시계를 품에서 꺼내 펼쳐 보았다. 시침과 분침이 있고, 초침이 째깍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사내는 그것을 보고 반가운 듯이 말했다.


"너는 어린놈이 물건은 '빈티지'한 것이 취향이냐?"


빈티지?


"내 것도 한번 봐 봐라."


그는 소매를 걷어 손목에 차고 있는 휘황찬란한 황금 손목시계를 내보였다.


"아주 멋지지 않나? 내가 애용하는 시계다.


요즘에는 이런 게 힘力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쓰이고 있지. 겉모습으론 사람의 크기와 깊이를 재지 못하는 신무림 애송이들에게 맞춰주려면 이 정도는 해줘야 해. 껄껄."


하품은 겨우 참아냈다. 하지만 그 직후 순간적으로 몰려온 작은 웃음기는 참지 못했다.


내가 피식 웃는 것이 거슬렸는지 그는 눈썹을 찌푸렸지만, 나는 그딴 건 신경 쓰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당신은 신무림 애송이들을 혐오하면서 하는 짓은 그들을 그대로 따라가려 하는군."


"뭣이?"


검집을 쥔 그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지만, 나는 멈추지 않고 일갈했다.


"기왕 따라가려면 제대로 따라가던가. 의니 협이니 지껄여 대면서, 자신은 그들과 다르지만, 시대가 시대니 어쩔 수 없이 조금 따라 주겠다는 그 태도가 마음에 안 들어.


애초에 당신은 신무림에 고작 한 발짝만 들이밀어 놓고서는, 그들의 삶을 완벽히 이해해 보려 하지도 않았잖아. 그런 주제에 신무림이 어쩌고 판단할 자격은 있는 거냐?"


그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네놈, 비꼬는 거냐?"


"비꼬는 게 아니야. 직설적으로 비난하는 거지."


"무엄하다!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냐!"


"아까 당신이 지루하게 늘어놓았잖아. 매화검의 천추강."


"이월!" 그가 버럭 소리쳤다.


"네놈은 방금 내 명예를 더럽혔다. 그러니 너를 베겠다."


"벨 수는 있고?"


나는 여전히 앉은 채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붉으락푸르락하는 그의 얼굴이 보였다.


"이런 자리에 검도 안 챙겨온 미숙한 아이를 내가 놓칠 것 같나?"


나는 대답하지 않고 따라놓은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아직 따뜻했다.


"이놈!"


그가 단숨에 칼을 뽑아 휘둘렀다.


아니, 휘두르지 못했다. 검이 검집에서 완전히 뽑혀 나오기 직전, 그가 피를 토해냈다.


처음에 알렸던 대로 왼쪽 어깻죽지에서 오른쪽 골반까지, 깔끔하고도 조용히 잘려 나갔다.


나는 방 안으로 들어오면서 이미 그를 베었다. 실존하는 칼날이 아닌, 보이지 않는 칼날이었지만 말이다.


내 칼날은 워낙에 예리하여 벤 물체가 토막이 나는 것을 최대 5분까지 지연시킬 수 있다.


그 유예기간 안에 정좌하여 운기조식을 행하면 잘린 세포가 도로 달라붙어 살 수 있지만, 그러지 않고 오만하게 설쳐 대면 이 천추강처럼 죽음을 재촉하는 꼴이 되는 것이다.


고깃덩이가 바닥에 두 번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추강이 꽤나 시끄럽게 굴어댔기에 점소이가 곧 방 안으로 들어올지도 몰랐다.


나는 회중시계를 품 안에 집어넣고 빠르게 자리를 떴다.


매화검 천추강은 자신이 베였다는 것을 알아채는 것은 물론, 내 말을 믿는 것조차 못하고 끝까지 의義와 협俠 따위를 떠벌려 댔다.


결국 그는 사死 앞에서 쓰러졌다.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도, 남을 도우려는 마음도, 매화검법도 죽고 나면 쓸모없는 거다.


나 이월은 신무림 출신의 무림인이다. 이 각박한 현대의 신무림 사회에는 오직 생生과 사死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한 시간이었다.


객점에서 멀리 떨어진 후, 나는 거리를 거닐었다.


언제나 축축한 아스팔트 바닥. 사방을 빽빽하게 채운 무허가 건물들. 건물들 위에 또 세워진 건물들.


태어나서 한 번도 실제로 본 적이 없는 별이 뜬 밤하늘.


시민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지만, 그 정보가 시민의 보호에 쓰이지는 않는 감시 체계.


나는 근방의 외진 골목으로 들어갔다. 가로등 빛을 받아 안쪽이 희미하게 보였다.


거기서 검고 작은 수첩을 꺼냈다. 평소에도 품 안에 넣어두고 다니는 물건이었다.


수첩을 펼쳐 보니 절반은 지저분하고 절반은 깨끗했다.


용수철에 끼워져 있던 볼펜을 꺼내 든 뒤, 가로등의 희미한 불빛을 도움 삼아 백지를 한 줄씩 채워 나가기 시작했다.


[20XX/2/9]

[이름 : 천추강]

[문파 : 화산파]

[무공 : 매화검법]

[유언 : "이런 자리에 검도 안 챙겨온 미숙한 아이를 내가 놓칠 것 같나?"]

[10]


그것은 내가 지금까지 죽여온 암살 대상들의 유언을 기록해 놓은 것이었다.


말했다시피, 내가 다루는 칼날은 극도로 예리하여, 벤 상대를 곧바로 죽이지 않고 유예를 준다.


그러니 자기 죽음을 깨달은 인간이 어떤 언행을 하는지 확인하고 기록하는 것이 가능했다.


비록 오늘의 천추강처럼, 자기가 5분 뒤에 죽는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인간들밖에 없긴 했지만 말이다.


천추강은 이런 말을 했다. 정부는 국토를 완벽히 통제해내고 있고, 죄 없는 인간이 참살당하는 일은 더 이상 없게 되었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진짜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그는 자신이 지지하는 후계자를 위해 많은 적대자를 죽여왔고, 나 또한 그가 지지하던 세력의 무림인을 10명이나 죽였다.


이 나라는 겉으론 어떨지 몰라도, 보이지 않는 곳에선 항상 피의 강이 흐르고 있었다.


이 분쟁이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나 이월에겐 끝이 정해져 있었다.


나는 수첩의 맨 뒷장을 펼쳐 면수를 확인했다. '100'이라는 글자가 구석에 적혀 있었다.


앞으로 90명을 더 죽이면 나는 자유가 된다.


작가의말

안녕하세요, 창렉스입니다.


이번에 공모전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230522 수정 사항

천추강이 언급한 용어 ’뇌신공雷神功‘을 ‘뇌단법雷斷法’으로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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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하품하생下品下生 1 23.06.09 145 5 12쪽
24 쟁탈전 삼參 - 종언과 회자정리 +2 23.06.08 148 5 13쪽
23 쟁탈전 삼參 - 백살존과 백살존 23.06.07 150 5 13쪽
22 무엇을 위해 바람은 부는가 3 +2 23.06.06 153 7 15쪽
21 무엇을 위해 바람은 부는가 2 +1 23.06.05 168 6 11쪽
20 무엇을 위해 바람은 부는가 1 23.06.02 154 8 13쪽
19 쟁탈전 이貳 - 원공수라검 원지원 2 23.06.01 162 5 13쪽
18 쟁탈전 이貳 - 원공수라검 원지원 1 23.05.31 183 8 14쪽
17 쟁탈전 일壹 - 정주폭렬공 류지열 2 +1 23.05.30 229 7 14쪽
16 쟁탈전 일壹 - 정주폭렬공 류지열 1 +2 23.05.29 235 12 14쪽
15 병급 작명공 김송하 2 23.05.26 252 13 14쪽
14 병급 작명공 김송하 1 23.05.25 303 14 16쪽
13 열식탄지공 이열 3 +3 23.05.24 344 17 13쪽
12 열식탄지공 이열 2 23.05.23 336 14 12쪽
11 열식탄지공 이열 1 +2 23.05.22 370 16 13쪽
10 벽력독립창 노루아 2 +2 23.05.19 357 19 10쪽
9 벽력독립창 노루아 1 23.05.18 351 21 11쪽
8 석산검 진림 2 +1 23.05.17 356 19 13쪽
7 석산검 진림 1 +1 23.05.16 385 20 11쪽
6 환림비검 최서용 2 23.05.15 444 25 16쪽
5 환림비검 최서용 1 +3 23.05.12 520 27 11쪽
4 만상발도공 조황현 2 23.05.11 542 32 10쪽
3 만상발도공 조황현 1 +1 23.05.10 649 34 12쪽
2 문둥검 문영화 +5 23.05.10 902 38 13쪽
» 이십사수매화검 천추강 +7 23.05.10 1,617 45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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