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3 한 번의 기회 (3)
다음 날 오전. A-1구역. 오 박사 진료실.
백설이 오 박사의 진료실로 들어온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백설과 오 박사가 차례로 인사한다.
백설이 오 박사에게 새해 인사를 전한 후 자리에 앉는다. 가볍게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요즘 불편한 건 없어요?”
오 박사가 묻는다.
“전보다 괜찮아진 거 같아요. 오래 걷거나 날 안 좋으면 아프기는 한데, 전보다는 고통이 심하지 않아요.”
백설이 말한다.
“다행이네요. 그럼 일단 약 줄여보고, 혹시 다시 아프면 그때 상황 보고 처방할게요.”
오 박사가 말한다.
“네.”
백설이 고개를 끄덕인다.
“오늘 물리치료 받고 가는 거 잊지 말고요.”
오 박사가 말한다.
“네.”
백설이 말한다.
오 박사가 진료기록을 빠르게 정리한다. 백설이 그런 오 박사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오 박사가 진료기록 정리를 끝낸 후 백설을 바라본다.
“혹시 한 박사님 이야기 들었어요?”
오 박사가 작은 목소리로 묻는다.
“아. 어제저녁에 변 박사님께 들었어요.”
백설이 말한다.
“네. 한 박사님, 아직 안 만나셨죠?”
오 박사가 묻는다.
“네. 오후에 시간 나면 가 보려고요.”
백설이 말한다.
“그렇군요.”
오 박사가 고개를 끄덕인다.
백설이 멍하니 허공을 바라본다. 한 박사를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걱정이다.
♬
그때, 오 박사의 컴퓨터에서 알림음이 들린다. 오 박사가 무슨 일인가 싶어 알림을 확인한다. 알림을 확인한 순간, 오 박사가 미간을 찌푸린다. 백설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무슨 일 있어요?”
백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는다.
“아. 건강센터 센터장실에 허 센터장님께서 오셨대요.”
오 박사가 말한다.
“허 센터장님이요?”
백설이 묻는다.
“네. 요즘 들어 자주 오시더라고요. 아무래도 불안하신 모양이에요.”
오 박사가 말한다. 그러고는 어깨를 으쓱인다.
“그런가 보네요.”
백설이 말한다.
백설이 비릿한 웃음을 짓는다. 요즘 들어 센터에서 자신의 입지가 좁아지는 것 같으니,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자기편으로 사람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노력하는 모양이다.
“빨리 가 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백설이 묻는다.
“그래야겠죠?”
오 박사가 내키지 않는다는 듯 말한다.
오 박사가 다음 일정을 확인한다. 허 센터장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을 계산하기 위해서다.
“그럼 먼저 일어날게요.”
백설이 말한다.
“네. 갈 때 약 챙겨가고, 물리치료 꼭 받고 가요.”
오 박사가 말한다.
“네.”
백설이 고개를 끄덕인다.
백설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리고 곧장 진료실을 나선다. 오 박사는 주변을 정리한 후 밖으로 나선다. 갑자기 온 손님이 달갑지는 않아도, 혹시 모르니 가야 했다.
*
오후. A-2구역.
백설이 한 박사를 만나기 위해 병원에 왔다. 곧장 한 박사의 병실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에 탄다. 백설이 자연스럽게 엘리베이터 구석으로 들어간다.
백설이 엘리베이터 문 오른쪽을 바라본다. 엘리베이터가 어디쯤 왔는지 층수가 보인다. 숫자가 빠르게 변한다.
‘~~~~’
백설이 계속해서 중얼거린다. 한 박사에게 할 말을 정리하기 위해서다. 필요한 말만 정확하게 하고 빠질 생각이라, 할 말을 고르고 또 고른다.
후.
이내 백설이 깊은 한숨을 쉰다. 한 박사를 만나야 한다고 생각하니 괜히 화가 났다. 그래도 그 뻔뻔한 얼굴을 보고 화내지 않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계속 심호흡한다.
♬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문이 열린다. 백설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린다. 복도를 따라 천천히 걸어간다. 고요해서인지 복도가 길게 느껴진다.
“한 선생님.”
뒤에서 누군가 백설을 부른다. 백설이 뒤를 돌아본다. 변 박사가 서 있다. 백설이 변 박사에게 꾸벅 인사한다. 변 박사가 백설 쪽으로 다가온다. 백설이 스마트워치로 방음앱을 켠다. 백설이 변 박사에게 방음앱을 켰으니 말을 편하게 해도 된다고 알려준다.
“한 박사님, 만나러 온 거야?”
변 박사가 묻는다.
“네.”
백설이 고개를 끄덕인다.
“불편하면 굳이 안 그래도 되는데······.”
변 박사가 말한다.
“아니에요. 한 박사님 입 열게 설득하려면, 제 도움도 필요하잖아요. 그런데 가만히 있을 수 없죠.”
백설이 말한다.
“그래.”
변 박사가 한숨 쉬듯이 말한다.
변 박사가 백설을 가만히 바라본다. 백설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면 괜찮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계속 백설에게 짐을 지워주는 것 같아 미안하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한 박사님 만난다고 제가 잘못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백설이 장난스럽게 말한다.
백설이 변 박사를 보고 살며시 웃는다. 변 박사의 걱정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기 위해서다. 변 박사가 고개를 끄덕인다. 자신이 너무 걱정하는 것도 백설에게 불안함을 심어주는 것 같아, 백설을 믿고 걱정하는 걸 그만두기로 한다.
“그래. 이야기 잘하고 와.”
변 박사가 말한다.
“네. 이야기 다 하고 나서 상황 이야기해드릴게요.”
백설이 말한다.
“응.”
변 박사가 말한다.
백설이 변 박사와 이야기를 마친 후 한 박사의 병실 앞에 선다.
후.
백설이 작게 심호흡한다.
똑. 똑.
노크한다. 안에서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드르륵.
조심스럽게 문을 연다. 그리고 천천히 병실 안으로 들어선다.
―
한편, 한 박사가 침대에 기대어 앉아있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났는지 침대 위에 책상을 펼치고 그 위에 스마트폰을 올린다. 인터넷 앱을 연 후 화면을 위로 쓸어올린다. 그러자 허공에 홀로그램 화면이 뜬다.
한 박사가 최근 센터에 관해 올라온 기사들을 하나씩 살펴본다. 평소와 같이 손으로 허공을 휘휘 저으며 스크롤을 내리다가 멈칫한다.
‘회복을 빨리하려면 평소에도 신경을 써야 해요.’
문득 김 박사의 말이 떠오른다. 김 박사가 그동안 근육을 사용하지 않아 굳었는데, 빨리 회복하려면 평소에도 근육을 많이 쓰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터치펜을 하나 주면서 핸드폰을 할 때도 이걸 쓰라고 했다.
한 박사가 침대 옆에 있는 서랍을 바라본다. 그 위에 김 박사가 주고 간 터치펜이 있다. 한 박사가 손을 뻗어 터치펜을 잡는다. 그리고 터치펜으로 화면을 내린다.
툭.
갑자기 손에 힘이 빠지면서 터치펜을 놓쳤다. 펜은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진다. 한 박사가 멍하니 떨어진 펜을 바라본다.
하.
한 박사가 깊은 한숨을 쉰다. 고작 펜 하나도 제대로 잡지 못해 떨어뜨리는 자신이 한심했다.
한 박사가 허공을 바라본다. 오늘 아침, 변 박사를 만났을 때가 생각난다.
어제 깨어난 후 종일 이런저런 검사를 받았다. 변 박사는 한 박사가 깨어나고 난 후 얼마 되지 않아 잠시 병실에 왔었다. 그리고 한 박사가 검사를 받는 걸 지켜보다가 떠났다. 그리고 오늘 아침 다시 한 박사를 찾아왔다. 달갑지 않은 사람을 계속해서 보니 불편했다.
변 박사는 한 박사의 태도에 개의치 않고 한 박사 옆에 앉았다. 그리고 차분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 박사님이 쓰러지시고 나서 무슨 일인가 싶어서 경찰에서 조사를 진행했어요. 그랬더니 허 센터장님께서 주신 술을 마시고 쓰러졌다는 걸 알게 되었죠.’
변 박사가 덤덤하게 말했다.
한 박사는 당장이라도 반박하고 싶었다. 자신이 쓰러지기 지전에 허 센터장에게서 받은 술을 먹은 건 사실이지만, 꼭 그것 때문에 쓰러진 건 아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변 박사의 말이 견고하게 들려서 쉽게 반박할 수 없었다.
‘물론 쉽게 믿을 수 없겠죠. 몇 년을 충성했던 사람에게 버림받았다는 걸 쉽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변 박사가 싸늘하게 말한다.
한 박사는 떨리는 눈으로 변 박사를 바라보았다. 변 박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한 박사를 바라보았다. 눈빛이 한 치의 흔들림도 없다. 자신의 말이 사실이라는 걸 강하게 말하고 있다. 한 박사가 침을 꼴깍 삼켰다.
변 박사는 차분하게 증거 몇 가지를 보여주었다. 한 박사는 묵묵히 변 박사의 말을 들었다. 변 박사가 한마디 한마디 할 때마다 자신은 10cm씩 아래로 추락하는 것 같았다. 허 센터장이 자신의 단단한 동아줄이라고 믿었는데, 그 믿음이 무너졌다. 비참했다.
한참 이어지던 변 박사의 말소리가 뚝 멈췄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주희야, 너가 원하는 게 뭐야?’
변 박사가 나지막이 물었다.
그 말에 무언가에 얻어맞은 듯 머리가 새하얗게 변했다. 늘 답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 답이 생각나지 않는다.
‘센터로 돌아오는 게, 니가 원하는 거 아니야? 너는 센터에 대한 애정이 많잖아.’
변 박사가 말했다.
변 박사의 말을 듣는 순간, 그동안 센터에서 있었던 이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수십 년 동안 청춘을 바쳐가며 열심히 보냈던 무수한 날들이 생각났다. 그러면서 센터에 애정을 쏟아붓게 되었고 센터에서 나간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하게 되었다.
‘너가 원하는 대로, 다시 센터에 돌아올 수 있게 해줄게. 그러니까 나 좀 도와줘.’
변 박사가 말했다.
한 박사는 입을 꾹 다물었다. 변 박사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여태 자신과 대립하던 사람을 쉽게 믿을 수는 없었다. 자신이 센터로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어떻게든 끌어내리겠다고 생각했던 사람과 쉽게 손을 잡을 수는 없었다.
흠.
길어지는 침묵에 변 박사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정말 내가 너한테 위협적인 존재인 거 같아? 허 센터장님께서 그렇게 말하니까 그게 사실이라고 믿었던 게 아니고?’
변 박사가 침묵을 깨고 물었다.
다시 무언가가 머리를 강타하는 기분이 들었다. 가슴이 쿵, 하고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한 박사가 멍한 얼굴로 변 박사를 바라보았다.
‘정말 변 박사가 나한테 위협이 되는 존재였나.’
한 박사의 마음 깊은 곳에서 그런 의문이 피어 올랐다.
그 의문이 들기 시작하니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자신이 수십 년 동안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혼란스러웠다.
‘아무튼 지금 너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잘 생각해.’
변 박사가 단호하게 말했다.
변 박사는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생각해보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한 박사는 변 박사가 간 후 내내 감정을 추스르지 못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답답했다.
후.
한 박사가 깊은 한숨을 쉰다. 자신이 보았던 것 중 무엇이 진짜였는지, 믿었던 것 중 무엇이 진실이었는지 다시 생각해야 한다. 수십 년 동안 쌓아왔던 탑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똑. 똑.
노크 소리가 들린다. 한 박사가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빼고 문 쪽을 바라본다.
드르륵.
문이 열린다. 그리고 백설이 들어온다.
한 박사가 놀란 얼굴로 백설을 바라본다. 예상하지 못한 손님이다.
“일어났다는 이야기 듣고 왔어요. 몸은 좀 괜찮으세요?”
백설이 걱정 어린 얼굴로 묻는다.
한 박사가 벙벙한 얼굴로 백설을 바라본다. 백설이 그런 한 박사를 가만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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