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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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라프
작품등록일 :
2023.05.12 23:43
최근연재일 :
2024.09.1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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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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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월의 밤 (4)

DUMMY

“적이 옵니다!”

“대열을 점검하라! 너희가 뚫리면 무고한 국민이 죽는다!”

“예!”


한창 전쟁이 벌어지는 어느 행성의 한복판.


“전열을 갖춰라! 무너지면 안 된다!”


지휘관의 애절한 외침에도 전열은 물 먹은 종이처럼 후두둑 흩어졌다.


“으아아악!”


처절한 병사들의 고통 섞인 신음이 전장을 메웠다.


“살려 주십시오! 제발!”


병사들의 처절한 외침이 장군에게 닿았다.

어찌할 바를 모르던 한 장군이 결국 자신의 무기를 집고는 전장을 향해 달려나갔다.


“제가 가겠습니다.”

“안 된다! 저곳은 이미··· ···.”


이를 본 다른 장군이 그를 만류했으나 이미 늦었다.


쐐애애액!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나타난 장군이 언월도(偃月刀)를 휘두르며 몰려오는 적을 헤집었다.


“와아아아아!”

“글레오 장군께서 오셨다!”


장군 글레오.

그는 최연소로 장군이라는 칭호를 단 인물이자 이 나라의 400년 역사 중 가장 위대한 장군이라 평가받는 사람이었다.


“흐아아아!”


우렁찬 기합과 함께 공기를 가르며 적의 목을 베는 글레오 장군의 모습은 마치 전장의 지배자와 같았다.


“장군님! 이 녀석들 뭔가 이상합니다! 죽어도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입니다!”


진녹색의 피부와 군데군데 드러난 뼈와 눈동자 없는 눈이 무차별적으로 손에 닿는 모든 것을 뜯고, 죽이고, 씹었다.

이를 본 글레오 장군이 다시 한번 용맹하게 외쳤다.


“여기 나 글레오가 있다! 전 병사는 두려워 말고 싸워라!”


용맹한 외침이 모든 전장에 울려 퍼졌고, 이에 병사들이 용기백배하여 달려오는 괴인(怪人)들을 모두 처리하며 전진했다.

어느새 전열을 다듬은 병사들이 두려울 것 없다는 듯 글레오를 따랐다.

글레오의 난입으로 전쟁은 여느 때처럼 왕국의 승리로 끝날 것만 같았다.

마침내 적의 본대를 마주한 글레오가 병사들에게 명했다.


“전군! 돌겨—“


퍼거걱!


정확히는. 명하려 했다.

전장의 선봉장에 서서 군대를 통솔하려던 글레오의 머리가 가차없이 터지며 남은 몸뚱어리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어··· ···어?”


그때부터였다. 파멸의 대학살극이 시작된 것은.


“으··· ···으아아··· ···아아아아아!”


글레오를 믿고 따르던 병사들과 그 병사들을 보좌하기 위해 달려온 장군들까지 모두 하나같이 혼돈의 구렁텅이로 추락했다.


[이 몸의 정벌에 해가 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불길하고 또 불안한 신언(神言)이 모두의 불안을 유발했다.

이를 무심한 듯 지켜보던 총지휘관은 누군가가 거처하고 있는 집으로 향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총사!”


벌컥 열린 문의 뒤로 넓은 책상이 보였다. 책상의 양 끝에는 두 개의 붉은 초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총사, 다음 명을 내려 주십시오! 무고한 병사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책상에는 총사라 불린 백발의 노인이 앉아 무언가를 끼적이고 있었다.

어딘가에 계속 신경을 쓰는 듯한 노인은 무언가를 쓰는 동시에 책을 범독하고 있었다.


“총사··· ···?”


노인의 답이 돌아오지 않자 당황한 지휘관이 그에게 다가갔다.


“병사가 죽어나가고 있단 말입니다. 나라가 망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총사께서 몇백 년간 현명한 판단을 내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어서 빨리 명을··· ···.”


조금전까지는 열릴 것 같지 않던 노인의 입이 쩌저적 벌어졌다.


“종말이다··· ···.”

“예?”


뇌까리듯 말한 노인의 눈에 명백한 두려움이 어렸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 종말이라니··· ···.”


눈에 있던 종말에 대한 두려움이 이제는 전신으로 퍼져 나간 듯 노인은 차마 입을 떼지 못했다.

떼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떼어 벌려 말한 한 마디는 다음과 같았다.


“외물(外物)이··· ···강림했다.”

“외물··· ···이요?”

“내가 이 종말을 막으려 언제고 숨어 지냈는데 결국, 결국 드러나고 마는구나.”


덜덜 떨리는 입술과 그 입술로 가져다 댄 물컵마저 지진이 난 듯 명동했다.


“내가 누누이 말했지. 언젠가는 누구의 힘으로도 막을 수 없는 종말이 올 거라고.”


이건 지휘관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유언을 뇌까리는 말일 뿐이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사백 년간 이 세계를 지켜왔는가.”

“총··· ···사?”


문득 정신이 든 노인이 지휘관을 불렀다.


“명한다. 받들거라.”


그러자 지휘관이 한쪽 무릎을 굽히며 노인의 명을 받들었다.


“모든 병사를 물려라.”

“예?”


명령을 받들며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한 지휘관이 흠칫 입을 틀어 막았으나, 노인은 신경쓰지 않았다.


“모든 병사를 물리고, 모든 국민을 피난시켜라. 왕과 왕비, 왕의 아들, 딸을 우선으로 대피시키고, 모든 군인의 자격을 박탈한다. 그들은 앞으로 특별 국민이 되며, 일반 국민의 호위를 맡는 이들이 된다. 짐을 많이 챙기지 마라 명하라.”

“총사··· ···?”

“이는 내가 총사로서 하는 마지막 명이며, 절대 복종할 것임을 한번 더 강조한다.”


당혹 어린 눈으로 노인을 바라보는 지휘관이 반문하려는 순간.


“뭐하느냐? 어서 명을 이행하지 않고.”


노인은 어느새 평온을 되찾은지 오래였다.


“자네도 어서 가게. 30년간 내 말동무가 되어주어 고맙네.”


적어도 이 행성에서 총사의 명은 일부 왕의 권한보다 위에 있다.

그런 총사의 명을 이행하지 않는 것은, 게다가 무려 ‘마지막 명’을 이행하지 않는다는 건, 곧 죽겠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명을··· ···, 받듭니다.”


등을 돌리고 미련 없이 밖을 향하려던 지휘관이 문고리를 잡고 말했다.


“총사께서도, 수고하셨습니다.”


덜컹!


낡은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총사의 방은 침묵으로 가득 찼다.


“길고 길었던 내 삶도, 여기서 끝이 나는가.”


노인은 책상에서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갖춰 입었다.

후줄근한 백의를 벗고 꽤 세련된 남색 비단 정장을 갖춰 입었다.

허리까지 오던 백발은 상투를 틀어 깔끔해졌고, 상수(霜鬚)는 여전히 광택을 내며 빛나고 있었다.

마지막을 만끽하기 전. 노인은 책을 하나 집어 들었다.

아까까지 대충대충 범독하던 그 책이었다. 붉은 표지를 갖춘 책은 책장에 꽂힌 다른 책들과는 확연히 다르리라 불릴 만한 상상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제야 한 나라의 총사라고 불릴 만한 모양새를 갖춘 노인이 직급에 맞지 않는 허름하고 낡은 방에서 나와 크게 한숨 들이켰다.

맑은 공기 사이로 흘러 들어오는 피비린내가 총사의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종말이로구나.”


이제야 총사의 눈에 제대로 된 종말이 보였다.

나뒹구는 침략자의 시체와 아군의 시체.

‘참혹함’이라는 단어를 제하면 이 광경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철벅철벅!


짙은 농도의 피가 바닥을 가득 메워 총사의 하얀 신을 붉게 물들였다.

그 신은 어쩌면 본래보다 더 아름답게 보였다.


그에에엑!


침략자들이 총사를 인식한 동시에 그에게 달려들었다.

총사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마주보았다. 그리고는 마주보는 것과 맞지 않게 눈을 감았다.

이 전쟁이 무사히 종결되기를 기도하듯이 말이다.


크아아아!


침략자의 손이 총사의 얼굴에 닿으려는 순간.


[잠깐.]


누군가의 이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총사는 미소를 지으며 눈을 떴다.


“미천한 국민이 위여한 외물을 뵙습니다.”


[잘도 숨어 지내더군. 사백 년 동안 신들의 눈을 피하다니.]


“외물께서는 신(神)이라고 불리시는 모양이군요. 신님. 간곡히 청하옵니다. 제 목숨을 대가로 가여운 백성을 구제하여 주십시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신께서는··· ··· 꾀돌이 달변가.”


총사의 눈이 반짝이는 옥색으로 변화하며 무언가를 관철했다.

동시에 총사의 품에서 책이 펼쳐지며 책엽을 무수히 넘기던 중 어느 한 부분에서 멈췄다.


[뭐?]


이에 신이 금방이라도 그를 죽일 듯한 기색을 드러냈지만, 총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신, 헤르메스의 하수인(主民)이었으나, 자격을 박탈당한 후 독자적인 신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를 얻기 위해 온갖 더러운 행동을 저질렀고, 결국 —“


[아아, 거기까지.]


총사의 옥색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말이 많군.]


“죄송합니다. 말로 먹고 사는 것을 직업으로 삼다 보니.”


[방금 네가 떠든 것 때문에 확신했다. 네가 이 행성의 행동자군.]


“행동자라··· ···, 일각에서는 저와 같은 존재를 행동자라 부르는군요.”


[너는 대체 무엇을 가지고 있길래 그렇게 평화롭지? 너도 세계를 이동할 수 있는 건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런 대단한 재주 따위는 없습니다. 저는 그저 남들이 감추고 있는 비밀을 관철하고, 분석할 뿐이죠.”


[그럼 방금 그것이 네 능력의 전부인가?]


“예, 그렇습니다.”


[별볼일 없는 놈이었군. 그럼 이제 남은 행동자는 그 녀석뿐인가.]


“제가 마지막에서 두 번째 행동자입니까?”


[그래, 이제 너를 죽이면 더 이상 행동자는 생성되지 않을 것이다.]


“저는 제 능력을 괴이하게 쓰고 있었군요. 세상의 비밀을 강구하는 데 써야 할 능력을, 한낱 유구한 왕조를 잇기 위해 사용했었다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이 책 또한 이렇게 쓰이는 것이 아니었겠군요. 그저 후회막심할 뿐입니다.”


[슬슬 네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도 지겹군.]


“이제 되었습니다. 모든 이들은 저 반대편으로 도망쳐 살아남았겠지요. 처음부터 제가 목적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 미련이 없습니다. 죽여 주십시오.”


천천히. 그렇지만 확실히, 나그네의 형상을 갖춘 좀비(Zombie)가 노인을 죽이기 위해 다가갔다.


“다음 생이 있다면, 꼭 평범한 인간으로 태어나고 싶습니다. 무수히 많은 신 중에서, 제 소망을 들어주실 신 한 분은 계시겠죠.”


좀비의 산에 둘러싸인 노인은 그렇게 살점 하나, 뼛조각 하나, 머리카락 한 톨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이제 모든 우주를 통틀어 남은 행동자는, 지구의 행동자 하나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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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가스페르 (8) 24.01.07 47 0 10쪽
82 가스페르 (7) 24.01.05 55 0 10쪽
81 가스페르 (6) 24.01.03 42 0 10쪽
80 가스페르 (5) 23.12.31 43 0 10쪽
79 가스페르 (4) 23.12.29 54 0 9쪽
78 가스페르 (3) 23.12.27 87 0 9쪽
77 가스페르 (2) 23.12.24 40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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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월의 밤 (4) 23.12.17 70 0 10쪽
73 가월의 밤 (3) 23.12.15 60 0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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