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님들은 꼭 전설, 아니 레전드가 될 거예요
얼큰하게 술이 한 잔 들어가면 안주로 고민거리가 빠지지 않는 법이다.
대중음악연구회와 혼, 두 밴드가 모인 곳은 한국대학교 인근 막걸릿집.
공연이 끝난 다음 날이었다. 두 밴드는 이른 저녁부터 모여 먹자, 마시자판을 벌였다. 날씨도 우중충하니, 막걸리에 전 먹기에도 딱 좋은 때였다.
문학인들에게는 문학적 고민거리가, 화가들에게는 미술적 고민거리가, 음악인들에게는 음악적 고민거리가 하나씩은 있는 법이다.
대중음악연구회와 밴드 혼은 서로의 음악적 고민을 터놓게 되었다.
막걸리를 너 한잔, 나 한 잔, 따라주며 호형호제하게 된 건 덤이었다.
“그래서 넌 뭐가 고민이냐?”
귀까지 새빨개진 종운이 기현에게 먼저 물었다.
얘는 뭐가 그렇게 고민이라 머리를 싸매며 새끼강아지마냥 끙끙 앓고 있는 건지 궁금했다.
“작사는··· 어떻게 하면 형님들처럼 잘하나요? 제가요, 사실은요 제 가사에 자신이 없어요. 옛날에 가사가 쪽팔린다는 말까지 들었거든요, 제가.”
잘한다, 잘한다, 하며 연거푸 먹이다 보니 금방 취기가 올랐다.
이상하다, 원래는 이 정도로 취하지 않았는데.
23년의 장기현과 다르게 여기 장기현은 술에 약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쪽팔린다고? 얘네가 그랬어?”
종운은 손가락으로 나머지 멤버들을 가리켰다.
대중음악연구회 멤버들은 덩달아 당황해서는 빠르고 격렬하게 손사래를 내치며 고개를 내저었다.
“우리는 그런 적 없어요! 우린 아녜요! 와, 형 많이 취했나보다!”
“그럼 얘는 대체 어디서 그런 말을 들은 거야?”
기현이 던진 화두에 모두가 웅성거렸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졸지에 아군을 공격한 꼴이 됐다. 쪽팔린다는 얘기를 들은 건 물론 80년대로 오기 전, 날 버리고 간 그 새끼들한테서였다.
“그런 게 있어요···. 예전에 그런 얘기를 들었었어요. 하여튼, 그래서 저는 가사 쓰는 게 문제예요. 그렇게 말 들은 이후로 작사에 자신이 없어요. 맨정신으로는 작사를 못하겠어요.”
기현은 푸념하며 연거푸 알콜취가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이번에 공연한 너희 곡 그거 작사 누가 했어?”
“당연히 기현이 형이요.”
“뭐야, 그럼 작사 잘하네. 가사 좋던데?”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기현은 혁철의 칭찬에 손을 설렁설렁 내저었다.
“아뇨, 아니에요. 저 술 먹고 써서. 뭔 정신으로 썼나 기억도 안 나고, 그건 제 진짜 실력이 아녜요.”
“술 먹고 쓴 너도 너잖아. 그건 네가 아닌 것처럼 말하네.”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 술 먹고 쓸 수는 없잖아요. 밴드 하는 이상, 작사는 계속하게 될 텐데···. 저 술 먹고 고주망태, 고성방가, 그랬다가는 집에서 쫓겨나요. 아부지가 엄하셔서.”
혁철은 팔짱을 끼고 잠시 고민했다. 밴드 혼에서 작사를 맡는 건 혁철이었다. 혼 내에서 유일하게 책을 끼고 사는 남자이기도 했다.
“음, 그럼 내가 작사 과외 해줄까?”
“형니임! 정말 감사합니다!”
‘작사 과외 해줄까’라는 말에 기현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 어떤 말보다 더 황홀했다.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사를 쓰는 남자에게 작사를 배운다? 이거 황송하지. 세상에서 가장 귀한 과외가 될 것이다.
“있잖냐, 사실 우리도 고민 있어.”
“오빠들도 고민이 있어요?”
미선이 젓가락으로 파전을 죽 찢어 먹으며 물었다. 저렇게 실력이 뛰어난 밴드도 고민이 있다는 게 신기하기만 했다.
“본 지 얼마 안 된 사인데, 이상하게 너희들은 오래 본 것마냥 편안하고 그렇다. 뭐, 그래서 얘기하는 건데, 우리 사실... 이 공연 끝나고 해체하려고 했어. 서로 갈 길 가려고 했었거든.”
“···예? 예?!”
찬원이 주저하다 해체에 관해 말을 꺼냈다.
이건 기현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였다.
막걸리로 얼큰했던 기운이 한 번에 훅 깨는 기분이었다. 북엇국이 콩나물국이 따로 필요 없었다.
해체라니. 해체라니. 우리 형님들이 해체라니. 형님들 해체는 2000년대에나 하는 거 아니었어요?! 해체하려다 다시 붙는 역사가 있었나?
“해체요?”
술기운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형님들이··· 오늘 해체하려고 했다고?’
잘못 들은 걸까?
하지만 너무 또렷하게 해. 체. 라고 말씀하셨다.
기현은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싶어, 눈만 부비적댔다. 손가락 왼쪽 오른쪽 열 개, 형님들은 세 명, 우리는 나 합해서 다섯 명. 아마도 정신은 말짱했다.
“어, 우리 해체하려고 했었어. 이런 얘기 좀 그런가?”
종운의 확인 사살.
“아, 아뇨. 괜찮아요. 그런데 대체 형님 같은 분들이 왜요?”
“헤비메탈은 인기가 없잖냐. 그래서 장르를 틀 거냐, 안 된다. 우리는 끝까지 메탈 해야 한다. 싸우다가 결국 그렇게 됐던 거지.”
“아···.”
기현은 속이 상해, 막걸리를 한 사발 또 들이마셨다.
기현은 사랑받지 못했던 지난날을 떠올렸다. 수도 없이 장르 변경을 시도해보았지만, 결국 가장 사랑하는 포크 록으로 되돌아오던 그때.
기현은 착잡함에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 밴드는 고작 이렇게 와해 되어서는 안 됐다.
기현은 이들을 완전히 붙잡아야만 한다는 생각 반, 술기운 반에 두서없이 주절거렸다.
“형님들 같이 미친 실력의 밴드가 해체하는 건 정말로 대한민국의 아니, 세계 전체의 손실이잖아요.”
“대한민국에 세계 전체까지 나오네. 우리 같은 무명이 무슨-”
기현이 주절거리자 혼 멤버들은 웃음을 터트렸다. 혼이 해체되는 건 현시점에서는 미래를 아는 기현만 아쉬울 뿐이다.
“사실 있잖아요, 저 말씀 안 드렸지만 혼 정말 좋아하거든요, 형님들 노래도 다 안다고요. ‘무소의 뿔처럼 가라’랑 ‘휘몰이’ 제일 좋아하거든요···.”
기현의 입에서 혼의 노래 제목이 튀어나오자, 혼 멤버들은 다 똑같이 그걸 어떻게 아느냐는 표정을 했다.
“야, 네가 휘몰이를 어떻게 알아? 와, 그건 딱 한 번 공연한 건데.”
“제가 형들 좋아한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저 같은 놈도 있으니까 꼭 계속 혼 활동 해주셔야 해요. 두 명 말고 한 명 말고 꼭 이 세 명이서요.”
기현의 취중진담은 세 사람에게 감동이 치사량 이상이었다.
“...고맙다. 너처럼 말해주는 사람 처음이야.”
“뭘요.”
기현은 다시 테이블 위로 이마를 처박았다. 그 상태로 가만가만 생각을 해보니, 혼이 유명해지게 된 계기가 불현 듯 떠올랐다.
‘파고다 예술극장에서 공연하다 방송국 라디오 피디 눈에 띄어서 데뷔했댔나···.’
하지만 파고다 예술극장은 84년에 처음 문을 열었다. 지금은 81년. 3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무턱대고 제가 미래를 볼 줄 아는데요, 따악 3년만 존버하세요, 하기에는 좀···.’
누가 무명 생활을 길게 가지고 싶겠는가? 이만큼 고생했는데 또 참아? 기현도 그건 좀 싫었다.
‘방송국 라디오 피디라.’
문득 공씨디에 노래를 입혀 여기저기 홍보를 돌았다던 해외 유명 가수들의 데뷔 일화가 떠올랐다.
그러다 어느 유명한 레코드사 프로듀서 눈에 띄게 되고, 데뷔 길과 돈방석 길을 걷게 되었다던 전설과도 같은 얘기 말이다.
‘어떤 방식이든 그 방송국 라디오 피디 눈에만 띄면 되는 거 아냐?’
"...형!"
“뭐, 뭐야. 뭐예요.”
잔뜩 취해서는 잠잠해져 있던 놈이 다시 불쑥 일어나자, 기현의 양옆에 앉아 있던 미선과 성호가 화들짝 놀랐다.
“형님, 붐박스나 녹음 기능 달린 테이프 레코더 있어요?”
“어어, 붐박스 있어. 큰맘 먹고 장만했거든. 와, 그거 정말 비싸더라. 그건 왜?”
종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 세션비를 조금씩 떼서 모은 돈을 부어 큰맘 먹고 소니 붐박스 한 대를 장만했더랬다.
“형, 오늘 처음 본 사이이긴 한데, 저 딱 한 번만 믿고 방송국 라디오국 쪽에 형님들 노래 녹음한 테이프 보내보시면 안 돼요?”
“레코드사도 아니고 방송국 라디오국?”
의아했다. 음반 제작 조언을 위해서라면 레코드사로 음악을 보내야 하는 게 맞을 텐데. 왜 하필 방송국 라디오국일까?
혼 멤버들은 반신반의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반면 기현은 단언했다. 거의 이게 안 되면 제 손에 장을 지지겠다, 수준이었다.
“네. 제가 말은 못하지만 그런 게 있어요. 다른 데 말고 꼭 방송국 라디오국이에요.”
“어려운 것도 아니고 알겠어.”
“형님들은 꼭 전설, 아니 레전드가 될 거예요.”
혼은 기현이 대체 뭔 소리를 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기현의 얼굴은 웃음기 하나 없이 진지했다.
정말 일어날 수 있겠다는 착각에 빠지게끔 할 정도로, 진지하고 이채가 도는 눈빛이었다.
그래서 다른 말 없이 고개만 주억거렸다.
*
기현이 말했던 것처럼 붐박스로 공테이프를 녹음했다. 테이프에 든 곡은 모두 다섯 곡. 다섯 곡 안에는 기현이 제일 좋아한다고 했던 ‘무소의 뿔처럼 가라’와 ‘휘몰이’가 들어있었다.
‘우리 대체 뭐 하는 거지?’
혼 멤버들은 방송국 라디오국에 녹음한 테이프를 보내면서도 큰 기대를 갖지 않았다.
‘이걸로 뭔 일이 생기겠어?’
하지만 그들은 지금으로부터 딱 보름 후, 이 일이 무슨 일을 불러일으키게 될지 몰랐다.
- 작가의말
오늘의 곡
Nirvana- Lithium
Comment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