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 대중음악연구회 대학가요제 특별상 축
“여섯 곡, 언제까지 가능해요?”
기현은 책상을 두드리며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이내 운을 떼었다.
여섯 곡? 여섯 곡이라면 이 정도가 적당할 것 같은데···.
“삼 주. 여섯 곡 완성까지 삼 주요.”
미친···.
저 애 진심인가? 아니면 나랑 장난하자는 건가?
그 잠시간 여러 생각이 오갔다. 하지만 대학가요제에서 보여준 모습과 입학식에서 보여준 모습을 떠올려 보면···.
‘진심이다. 저 말, 정말로 진심이야.’
진심이라는 수 밖에 나오지 않았다. 기현은 정말로 삼 주 내에 여섯 곡을 만들어 낼 셈이었다. 나승연은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아도 경악했다.
‘곡의 완성도를 봐야겠지만 저게 가능하다면, 내가 정말로 대어, 아니 용을 낚은 거겠지.’
기현의 눈은 흔들림 없이 또렷했다. 진심이었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여섯 곡··· 인디 밴드하면서 만든 곡 몇 곡이랑, 새로 만든 곡 몇 곡 하면 금방 만들 수 있겠어.’
기현은 그동안 만들었던 곡을 손 보고, 거기에 새로 만들 곡을 합해 총 여섯 곡을 가져올 생각을 하고 있었다.
확신에 찬 기현의 두 눈에 나승연 팀장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여섯 곡이면 말도 안 되는 작업량일 텐데. 혹시 다른 친구가 작곡도 하나?'
"기현 씨 말고 작곡, 작사하는 사람 있어요?"
대중음악연구회 멤버들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다면 작곡이랑 작사를 저 청년 혼자서 도맡아 하고 있다는 건데···. 정말 괜찮을까? 본인이 괜찮다니까 뭐라고 더 얘기할 수도 없고.
나승연은 한양레코드의 직원이기도 했지만, 대중음악연구회라는 밴드의 팬이기도 했다.
'밑질 게 뭐 있나, 삼 주 거뜬히 기다릴 수 있지.'
나승연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삼 주. 삼 주 뒤에 봅시다. 시간, 더 드릴 수도 있으니까, 그건 그때 가서 얘기하고요.”
*
그리고 나승연 팀장이 온 다음 날, 다시 학교를 찾았을 때는 예상해 보지 못한 광경이 눈앞에 벌어지고 있었다. 분명히 대학가요제 끝난 다음 날에는 저런 게 없었는데? 밤 사이에 생긴 거라고?
“···저게 뭐냐?”
기현은 두 눈을 의심하며 병철에게 물었다. 두 눈을 비벼봐도 똑같은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그러게요. 저 저런 거 처음 달려 봐요.”
그건 기현도 마찬가지였다. 저런 거, 고시 수석 합격해야 달아주는 거 아니었나?
병철도 두 눈이 의심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대체 저 흉물은 무엇이며, 저 흉물이 왜 학교 한복판에 대문짝만하게 걸려 있는가 하며···. 저 흉물에 왜 자신들 이름이 쓰여 있는지도···.
[경 대중음악연구회 대학가요제 특별상 축]
속없이 학교 한복판에 펄럭이는 저 대형 현수막은 무엇인가.
‘아니 저런 거 달아달라고 한 적 없는데!’
분명 이렇게 시끄럽게 금의환향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대학가요제에서 상을 탔어도 조용히 묻어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기현의 생각과 정반대로 돌아갔다.
"대학가요제 잘 봤어요!"
"대학가요제 특별상 팀 맞죠?! 와, 정말 최고, 최고!"
"선배, 저 사인 한 번만 해주면 안 돼요?"
주변이 조용히 일상을 살도록 기현을 놔두지를 않았다. 3보 1사인도 아니고, 기현은 몇 발자국 걸을 때마다 학생과 교직원들의 사인 요청을 받아야만 했다.
'이거, 아직 스마트폰이 없어서 다행인가. 스마트폰까지 있었으면 큰일···.'
사인이라고 해봤자, 제대로 사인도 없어서 정자로 이름을 적는 것에 불과했지만, 그것 마저도 좋아서 함박 웃음을 짓는 학생들을 보면 또 좋아서 피로가 사르르 녹았다.
하지만 이것은 고작 시작에 불과했다.
어떻게 어떻게 서클실에 도착하자마자 들은 것은 보았던 현수막보다도 더한 것이었다. 미처 학교에서 대학가요제 특별상을 이렇게까지 크게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얘들아.”
서클실에 먼저 와있었던 미선이 비장하게 운을 떼었다.
미선은 어쩐지 살짝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이때 충분히 짐작했어야 했다.
“우리보고 상 받으러 오라는데.”
“상? 웬 상?”
대학가요제에서 상 탔다고 학교에서도 상을 준다고?
“자랑스러운 한국대인 상이라는데··· 뭔 장학금도 준댄다.”
“장학금?”
“그게 내일이라는 게 문제긴 한데···.”
“갑자기?!”
가면 갈수록 어처구니 없는 일의 연속이었다. 기현은 제 귀를 의심했다. 학교 일처리가 원래 이렇게 막무가내였나?
“아니 뭔, 상을 오늘 통보하고 다음 날 준다고···.”
“총장님 미국으로 출장 나가신다고 내일밖에 시간이 없다는데.”
“미국 다녀오신 다음에 시상식 하면 되는 거 아냐?”
“그러게나 말이다.”
“그게 다야?”
미선은 병철의 물음에 고개를 내저었다. 설마 그게 끝이 아니라고? 분명 좋은 일은 좋은 일인데, 너무 갑작스러워서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그리고 대강당에서 교수 전체회의 하는데, 그거 끝나고 공연해달래요. 상 받은 곡 연주해달라고 해서, 일단 알겠다고는 했어요. 뭐, 어쩌겠어요. 총장님 지시라고 하도 해달라, 해달라 하니까 까라면 까야죠.”
가면 갈수록 일이 커지는 느낌이다.
다음 날 기현은 오랜만에 셔츠 단추를 끝까지 잠갔다.
‘이게 이렇게까지 답답했었나?’
조이고 답답하다. 영 유쾌하지는 않은 감각에 기현은 목깃을 검지로 끌어당겼다.
‘시상식 때까지만 참고 풀어야지, 뭐.’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학교 생활하면서 총장실이라는 곳은 처음이다. 교장실도 안 들어가 본 내가 총장실이라니. 그것도 기타를 들고.
‘기타는 대체 왜 들고 오라는 거지? 뭐, 연주라도 해달라는 건가? 시상식에 기타가 왜 필요한 거지?’
기타를 꼭 들고 오라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총장실 비서가 기타를 꼭, 꼭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들고 오라기에, 기현과 성호, 성현은 영문도 모른 채 기타 가방을 메고 총장실로 향하고 있었다.
“총장님, 대중음악연구회 학생들 도착했습니다.”
“네, 네. 들여보내세요.”
기현과 멤버들은 나란히 서서 총장실로 들어갔다.
“어서오세요, 대중음악연구회 학생들이죠?”
중년의 남성은 부드럽게 웃으며 멤버들을 반겼다. 이곳에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부담스러운 이 기분. 기현은 멤버들은 나란히 서서, 어색하게 웃으며 허리를 살짝 굽혀 인사했다.
“대학가요제, 정말 감명 깊게 봤습니다. 특히 우리 대중음악연구회 학생들, 대학가요제에서 엄청난 활약을 해주었더군요.”
“아이고, 별말씀을요.”
총장은 허리를 굽혀가며 차례로 멤버들과 악수를 했다. 살짝 허리를 숙이자 기현의 시야로 떨어지는 검정 물체.
정수리 가발이다.
“···풉!”
물체의 정체를 알아챈 이상, 웃음은 터질 수밖에 없었으나, 미선은 머릿속으로 온갖 슬픈 생각을 하며 가까스로 한 차례 참아냈다.
‘아 여긴 안 된다, 여긴 안 된다···.’
눈가가 촉촉해지는 무엇을 떠올리며 미선은 숨을 골랐다. 더 이상 터진다면 이건 참사였다.
총장의 정수리 가발을 눈앞에서 목격한 기현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질끈 눈을 감으며 눈앞을 스쳐간 그것을 필사적으로 모른 척, 못 본 척했다.
총장은 모르는 건지, 아니면 그도 부끄러워 모르는 척, 없는 척을 하는 건지, 부드럽게 다음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덕분에 우리 학교의 위상이 많이 올랐습니다. 우리 한국대학교는 학생들의 학업뿐만 아니라, 이런 서클 활동도 많이 지원하고 있습니다. 자자, 학생들 기타 한 번만 꺼내서 들어주세요.”
그는 떨어진 가발을 주워 자연스럽게 머리에 얹으며 환하게 웃었다.
‘총장이 되려면 저 정도는 해야 한다, 이런 건가.’
기현은 부끄러운 기색 하나 없이 가발을 머리에 얹는 총장의 모습에 다른 의미로 감탄했다.
“자, 자세 잡읍시다. 기타 드시고-”
기현과 멤버들이 기타를 꺼내자 총장은 예의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중앙에서 포즈를 취했다.
“최 비서, 얼른 찍어.”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려던 총장실 소속 최 비서는 문득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멈칫한다.
“다른 두 분은 왜 기타가 없···.”
“저는 피아노입니다.”
“저는 드럼이고요.”
“아··· 그렇군요. 제가 그룹사운드는 잘 몰라서. 그럼 찍겠습니다.”
최 비서는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이며 사진기 버튼을 눌렀다. 조리개가 찰칵, 닫히며 대중음악연구회의 어색한 모습이 담겼다.
사진기에 찍힌 사람 중 가장 자연스러운 사람은 단연코 총장이었다.
“그럼, 이제 학생들은 가보도록 하세요.”
사진 찍으면 볼 장 다 봤다는 거냐.
최 비서에게 한 부씩 상장을 나눠 받은 뒤 대중음악연구회 멤버들은 쫓겨나듯 총장실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럼, 학생들, 이따 공연 기대하겠습니다.”
최 비서는 정중하게 인사하고는 사라졌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
“글쎄요, 사진 찍었죠?”
“우리 상 받은 건 맞아?”
“이게 상은 맞을 걸요. 아마.”
“아까 가발, 진짜 웃겼죠?”
“나 죽을 뻔했어.”
얼 타다가, 기타 들래서 기타 들고, 가발 떨어지는 거 보고, 사진 찍고, 그랬던 것 같은데. 정말 이게 시상식이라는 건가?
기현은 영문 모를 허무함과 허술함에 내내 답답했던 셔츠 맨 끝 단추를 풀어 헤쳤다.
*
총장을 비롯한 교수, 직원들이 대강당 자리를 꽉 채웠다. 당연하게도 여기에 학생들은 없었다.
“우와, 진짜 싹 다 교수님들밖에 없네.”
성호는 무대 옆으로 객석을 슬쩍 바라보고는 중얼거렸다.
“내가 그랬잖아. 교수회의니까 교수님들밖에 없을 거라고.”
“분위기 살벌한데요.”
“어쩌겠어, 우리가 또 띄워야지.”
흐르는 긴장감 따위는 없었다. 너무 큰일을 겪고 나니, 이 정도 일쯤이야 식은 죽 먹기다.
“대중음악연구회 학생들, 무대 나와주세요!”
당당하게 무대로 나섰다. 이쪽 시대로 와 처음 섰던 무대가 바로 여기 대강당이다.
대학가요제에서 입상 후, 다시 이 무대에 서다니. 감회가 새롭다.
‘여기는, 내가 이쪽 세계로 와서 첫 공연을 치렀던 곳.’
묘한 두근거림이 일었다.
‘이런 상을 타게 될 줄 상상도 못했지. 갑자기 이렇게 인생이 바뀌게 될 줄도 상상 못했고.’
기현은 지난날을 떠올렸다. 터널 같았던 지난 삶에 이런 행운이 깃들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예전에는 하루하루가 그저 견디기 위해 살았던 거라면··· 지금은 달라.’
마음이 맞는 멤버들, 제 꿈을 응원해주는 부모님, 제 음악을 들어주는 관객들.
기현을 북돋아주는 모든 게 여기 있었다. 같은 나라, 다른 시대지만 기현은 이제 이곳이 고향인 것만 같았다.
‘이제는 하루하루가 기대돼. 다음에는 무엇이 있을까 궁금하고.’
다음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하는 설렘. 기대감이 기현의 마음속을 가득히 채웠다.
“안녕하세요! 대중음악연구회입니다!”
기현은 또 다른 프레이즈로 넘어가기 위한 첫 스트로크를 내리쳤다.
- 작가의말
오늘의 곡
럼블피쉬- I go
Comment '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