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 흑막이 칼을 숨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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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dos
작품등록일 :
2023.11.29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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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12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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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9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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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출도(2)

DUMMY

눈을 부릅뜬 채 팔짱을 끼고 있는 아버지. 반면 어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허어!”


안유의 행색을 보고는, 아버지의 눈썹이 위로 치솟았다.


“한동안 밖으로 나돌더니 이젠 아예 야반도주라도 할 셈이더냐!”

“······.”

“네 재주가 적지 않고 머리 또한 영민하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은 그냥 못 넘어가겠구나.”

“······.”

“언제까지 한량처럼 지낼 생각이냐. 땅을 일구기 싫으면 장사를 배우고, 장사를 배우기 싫으면 철이라도 두드려야······.”

“아버지.”


안유는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그간의 방만(放漫)을 사죄드리겠습니다.”


한결같던 미소가 서서히 사라진다. 아들은 전에 없이 진중한 얼굴이 되어 말을 이어나갔다.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마을을 떠나고자 합니다.”


촌부는 저도 모르게 아내를 힐끔거렸다.


‘뭔가 달라졌다더니······. 그저 감싸려는 말이 아니었나?’


아내는 조용히 웃기만 했다. 아무 말 않겠다는 표명, 알아서 하라는 뜻이었다.


“······무슨 일이길래 이다지도 서두르느냐. 잔치도 잔치고······ 미리 언질이라도 줄 것이지!”

“그 또한 사죄드리겠습니다. 워낙 화급한지라 경황이 없었습니다. 사정이 있어 소상히 말씀드리기도 어렵습니다.”

“이놈! 부모에게 고하지 못할 얘기가 어디 있다는 말이냐! 얼른 이실직고하지 못할까!”


호통은 공허하게 울릴 뿐이었다.


아들의 두 눈은 마치 한겨울의 숯불과도 같았다. 기세를 숨긴 채 조용히, 은은하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열기.


촌부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내 사내가 되었구나.’


아이라면 품어 마땅하지만 사내라면 싸고돌 이유가 없다. 떠나보낼 때가 된 것이다.


“후······. 중한 일이더냐.”

“예. 굉장히 중한 일입니다.”

“꼭 네가 해야 하는 일이더냐.”

“저밖에 하지 못 하는 일입니다.”

“······언제든지 돌아오거라.”

“끝나는 대로 돌아오겠습니다.”


촌부는 벌떡 일어난 뒤 장롱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장롱 깊숙한 곳에서 두툼한 주머니를 꺼냈다.


“잔치가 물 건너갔으니 쓸데가 마땅치 않구나.”


휙!


아버지는 피식 웃으며 안유에게 전낭을 던졌다.


“여비로 쓰거라. 대신 다음 잔치는 네가 준비하도록 해라.”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안유는 다시 생글거리며 돈주머니를 챙겼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리고 안유도 웃고 있었다.


‘돌아오겠습니다. 반드시.’


안유는 부모님께 절을 올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갔다.


더할 나위 없는 작별.


회귀 전의 고독하고 참담한 출도(出道)와는 정반대였다.


***


안유는 쉬지 않고 부지런히 걸어 늦은 오후 무렵에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는 어느 서고(書賈)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고창서고(高敞書賈)>


유려한 필치의 현판(懸板) 아래로 문사들이 분주하게 드나들었다.


‘앞으로 사일. 이것저것 제하면 이틀. 이틀 안으로는 그자를 만나야 한다.’


운 좋게 그와 맞닥뜨리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당장 훑어봐도 생면부지(生面不知)의 서생만 보였기에 우선은 지나치기로 했다.


‘이대로는 문전박대나 당할 테지.’


현재 안유는 땀과 흙먼지에 범벅이 되어 꼴이 말이 아니었다. 조금 과장해서 거지보다 조금 나은 수준.


우선은 외관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었다.


“이틀 정도 묵고 가려 합니다. 목욕물도 준비해주십시오.”


안유는 싸구려 객잔에 짐을 풀고 잠깐 숨을 돌렸다. 그리고 몸을 씻고 가볍게 배를 채운 후, 근처의 포목점을 물어물어 찾아갔다.


“흑의와 백의 한 벌씩. 있습니까?”

“지어 입으려는 건 아닌 거 같고······ 만들어둔 건 저쪽에 있소. 대충 둘러보쇼.”


점원은 안유를 슥 훑어보고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안유는 그나마 문사처럼 보일 만한 백의 한 벌과 품이 유달리 큰 흑의 한 벌을 샀다.


‘금세 홀쭉해졌군.’


안유는 몸피가 절반으로 줄어든 전낭을 챙기고 다시 객잔으로 돌아갔다.


“헐값이지만 이만하면······.”


후줄근한 백의라 할지라도 갈아입으니 과연 돈값을 했다.


곱상한 외양과 여유 넘치는 모습이 더해지니 안유는 영락없이 서생처럼 보였다.


서고 주위에는 안유와 비슷한 행색의 청년들이 많았다.


“과연 고창서고는 다르군. 성도에서 이름난 서책을 벌써 들여놓다니!”

“우리 같은 재사(才士)들에겐 가히 홍복(洪福)이라고 할 만하지.”


‘재사는 무슨. 글줄만 꿰는 한량들이지.’


점원은 한심한 듯 서생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안유는 그러한 눈빛을 받아넘기며 서고 안으로 들어갔다.


“흠!”


대충 아무 서적이나 뒤적이며 면면을 살폈지만 별 소득은 없었다. 또 다른 점원이 눈치를 주기에 안유는 슬며시 자리를 옮겼다.


그러길 두어 번 반복했을 때쯤 안유의 눈이 이채를 띄었다.


‘음!’


고창서고는 꽤 컸기에 점원도 여러 명을 쓰고 있었다.


이번에 안유를 힐끗거리는 자는 특출나게 험상궂게 생긴 점원.


그 눈빛은 다른 점원들과 마찬가지로 싸늘하기 그지없었으나 문제는 눈빛이 아니었다.


‘저자는 무공을 익혔군.’


수많은 한량이 인산인해를 이루는 틈바구니에서 오직 저 점원만이 자유롭게 움직이고 있었다.


누구와도 부딪히지 않고, 멈칫거리지도 않는다.


나름대로 숨긴다고 숨기고 있으나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몸동작은 틀림없이 보법의 일종이었다.


‘뛰어난 고수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서고의 점원으로 썩을 정도는 아니다. 한쪽에서 그물질하며 다른 쪽에서는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형세······.’


“음?”


안유는 점원에게 싱긋 웃어 보인 후 서고를 빠져나갔다.


‘다행히 길이 엇갈리진 않은 모양이군.’


저들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건 길조다. 그자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듯했다.


안유는 가까운 노점에 죽치고 앉아 있다가 다시 서고로 들어가 서책을 뒤적였다.


해가 완전히 질 때까지 기다리던 사람은 오지 않았다.


“······밥 버러지 같은 놈들.”


점원이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손님들을 몰아냈다. 서생들이 미적거리자 험상궂은 점원이 눈을 부라렸다.


‘온다. 반드시······.’


안유는 인파에 섞여 거리로 사라졌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나절, 서고가 문을 열기 무섭게 주인에게 눈도장을 찍었다.


아직 한적한 시간이라 그런지 서고 주인이 꽤 살갑게 말을 걸었다.


“부지런하시군요. 찾으시는 책이라도 있으신지요?”

“확실히 어떤 책을 찾고 있긴 합니다.”


움찔.


험상궂은 점원이 근처에서 서가를 닦다가 일순 몸을 떨었다.


그러나 이어진 말을 듣고는 곧장 흥미를 잃어버린 듯했다.


“값싸고 좋은 서책으로 하나 골라주시겠습니까.”

“값싼 서책 중 좋은 놈은 없고 좋은 서책 중 값싼 놈은 없지요. 뭐······ 둘러보시지요.”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안유는 서고를 몇 바퀴나 돌면서 끈질기게 서고에 달라붙어 있었다.


“음!”

“음.”


점원들이 눈치를 줘도 요지부동. 눈과 귀를 놀리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크흠!”

“이거 참 좋은 책이로군!”


밥 버러지를 충실하게 연기하며 미적거리다 보니 어느덧 해가 저물고 있었다.


서생들이 하나둘 떠나가려는 찰나 누군가가 서고로 들어섰다.


“주인장 계시오?”


안색이 초췌한 문사가 대뜸 주인장을 찾았다.


그의 나이는 서른쯤 되어 보였는데 제법 준수한 용모에 청색 유삼이 썩 잘 어울리는 편이었다.


외견이 여느 밥 버러지에 비할 바가 아닌지라 점원도 싹싹하게 응대했다.


“내실에 계십니다만 어인 일로 찾으시는지······?”

“안내해주시오.”


문사는 품에서 은자를 꺼내 점원에게 건넸다.


두 사람이 가게 안쪽으로 사라진 직후 험상궂은 점원의 눈에 광망이 스쳐 지나갔다. 안유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역시······.’


문사의 외모는 기억 속 그대로였다.


유유선(悠悠煽) 신전흥.


태평촌의 혈사는 전부 그로부터 비롯되었다.


***


이 시기 암천회는 어느 기서(奇書)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서책의 이름은 ‘강호지이(江湖志異)’.


잡다한 전설과 야담을 비롯해 명승지에 대한 감상, 친우와 주고받은 편지는 물론 자신의 협행에 대한 자화자찬까지.


‘강호지이’의 저자는 무림인으로 강호를 주유하며 보고 들은 것을 한데 모아 책으로 엮어냈다.


언뜻 보기엔 평범한 신변잡기(身邊雜記)에 지나지 않는다.


이 책을 읽은 누구나 그리 생각할 터, 그러나 암천회는 기어코 ‘강호지이’에 숨겨진 비밀을 알아내고야 말았다.


현재 신전흥의 목숨은 바람 앞의 촛불과도 같은 신세였다.


‘그리고 당신이라는 불씨는 겁화(劫火)가 되어 태평촌을 집어삼키게 되겠지.’


이전 생처럼, 안유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신전흥은 어느 주루의 창가 자리에서 술을 들이켜고 있었다.


“쯧.”


만두와 소채, 그리고 백주. 서고에서와는 달리 점원들이 눈길이 영 차가웠다.


안유는 무척 자연스럽게 신전흥의 맞은편에 앉았다. 문사의 눈에 경계의 빛이 어렸다.


“낯이 익군. 서고에서 본 듯한데.”

“눈썰미가 좋으시군요.”

“인상적인 미소였소. 아까도, 그리고 지금도. 하지만 오늘은 혼자 술잔을 기울이고 싶소만.”

“먼 길을 오셨으니 피곤하실 법도 합니다. 안휘(安徽)에서 예까지는 천릿길이니······.”

“······.”


톡톡.


안유는 검지로 자신의 머리를 두어 번 두드렸다.


“목적지가 멀수록 걸음을 늦춰야 하지요. 자칫 잘못하다 발병이라도 나면 여간 골치 아픈 일이 아닙니다.”

“많이 걸어본 모양이군. 평범한 서생은 아닌가 보오?”

“연이 닿는 대로 떠돌아다니는 방물장수입니다. 서책은 가벼운 도락(道樂)에 지나지 않죠. 이런 물건을 취급하는데 혹시 생각이 있으신지?”

“참으로 기이한······ 조각상이군.”

“서책을 누르기 좋은 문진입니다. 어느 장인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것이죠.”

“······.”

“각양각색이라 하나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으신 듯하군요. 이거 실례했습니다, 하하!”


안유는 조금도 멋쩍어하는 기색 없이 주루를 빠져나갔다.


“별 비렁뱅이를 다 보는군. 술맛 뚝 떨어지게, 쯧.”

“주향(酒香)이라도 맡고 싶었나 보지.”


취객들은 안유를 손가락질하며 욕했고 점원들도 마찬가지로 욕지거리를 중얼거렸다.


신전흥은 굳은 얼굴로 마지막 잔을 털어 넘겼다.


셈을 치르고 나오자 골목 저편으로 백의 자락이 사라지고 있었다.


‘대체······.’


빠른 걸음으로 따라붙는 신전흥. 백의는 잡힐 듯, 잡히지 않을 듯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인적이 드문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몇 개의 골목을 지나치자 곧 막다른 길이 나왔다. 백의의 사내는 실실거리며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신전흥의 신형이 순간 흐릿해졌다. 눈 깜짝할 사이 신전흥은 사내의 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누구냐. 어떻게 본 서각(書閣)을 알고 있는 거지?”

“유유선 신전흥. 목련서각(木蓮書閣)의 사재(四才) 중 하나.”

“대답해라!”

“꼬리는 진작에 붙었습니다. 당신이 안휘에서 출발한 순간부터 줄곧. 그리고 고창서고를 방문하며 의심은 곧 확신으로 바뀌었겠지요.”

“넌······.”

“서고에서는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안타깝게도 그 ‘서책’은 얼마 전 누군가가 사 갔다고. 책 주인은 어디 사는 아무개이니, 정 만나보고 싶다면 이리로 가보라고. 맞습니까?”


백의 사내의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함정입니다. 이대로 가다간 횡액(橫厄)을 면치 못할 겁니다. 당신을, 그리고 서각을 노리는 자들이 있습니다.”

“······.”

“도와드리겠습니다. 활로(活路)를 열어드리죠. 다음 백중(百中)까지 혼자선 버티기 어려우실 겁니다.”

“회합(會合)마저 알고 있다는 말인가······. 너는, 아니 자네는 대체 누군가? 무슨 연유로 우리를 도우려 하는 건가?”


안유는 웃었다.


참으로 어려운 질문이었다.

그 내막과 곡절을 어떻게 다 설명할 수 있을까.


전생(前生)과 금생(今生)의 간극.

은원과 인연에 얽힌 이야기.

그리고 자신의 목적까지.


어느 것 하나 쉬이 설명하기 어려웠다.


그렇기에 답은 정해져 있었다.


“저는······.”


신전흥의 눈이 화등잔처럼 커졌다. 목젖을 틀어쥐고 있던 손이 스르르 풀렸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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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백학무관(2) +1 23.12.07 861 12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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