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치 않는 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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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ros
작품등록일 :
2024.01.02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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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4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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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지 #1

DUMMY

# 485-1


샘플이 투여된 실험체의 부작용을 관찰하는 중이었다.


죽은듯이 멈춰있는 피실험체의 꺼져가는 생체반응을 바라보며, 언제부턴가 셈을 포기한 실패 중 하나라고 판단을 내리려는 순간이었다.


활성화된 피실험체의 움직임에 변화가 생겼다.


투여하기 전보다 더욱 힘찬 움직임에 작은 설렘을 가졌다.



# 485-2


움직임이 멈추질 않았다.


쉬지도 않고 먹지도 않았다.


검사를 위해 피를 뽑으려 했으나 투입된 바늘을 통한 혈액채취가 안 된다.


주사기 바늘에 얇은 막이 형성된 것처럼 몸속으로 파고든 바늘이 무언가에 막힌 것 같았다.


메스로 잘라도 금세 아물어 버렸다.


반복되는 실패에 일도양단 내버리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다.



# 485-3


움직임이 줄어들었다.


호흡이 약해지더니 이내 숨을 쉬지 않았다.


하지만, 미세한 떨림이 멈추질 않았다.


사후경직이라 생각되어 잠자코 지켜보았으나, 오전에 시작된 움직임이 점심을 먹으며 기다려도 끊이지 않았다.


일도양단의 시간이다.


작은 메스는 소용이 없었기에 부엌용 중식도를 사용했다.


대형무기라서? 죽어서?


메스로 실패했던 작업에 깔끔하게 성공했다.


반으로 갈라진 채 널브러져 있는 모습에서 검은 피가 흘러내렸다.


피 뿐만이 아니라 생명체의 안에 당연히 있어야 할 모든 것이 검은 액체와 뒤엉켜 있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검은 액체는 바닥으로 넓게 퍼져갔다.


실험체의 모습은 핏기 하나 없는 고깃덩이가 되었다.


비교를 위해 새로운 실험체를 갈라볼 필요는 없겠지...



# 485-4


실험체가 사라졌다.


인큐베이터를 향해 설치한 카메라를 확인하니 황당한 영상이 찍혀 있었다.


바닥에 고여있던 검은 물체가 사체를 덮더니 연신 꿈틀거리며 서서히 작아졌다.


잠시후 검은 물체가 작은 물방울 모양으로 뭉치더니 인큐베이터 구석으로 이동했다.


모서리에서 곰팡이가 핀 것처럼 작아진 검은 물체를 발견했다.


플레이트에 옮겨 현미경으로 확인해보니 짙은 어둠뿐이었다.



# 485-5


다른 개체에 이식해보려 했다.


주사기를 통해 주입된 검은 물체는 실험체의 몸에 생긴 바늘구멍을 통해 다시 흘러나왔다.


흘러나온 물체는 서서히 구석으로 이동해 곰팡이 코스프레를 했다.


몇번을 시도해도 같은 반응이다.


나름의 의지를 갖춘 생물의 거부반응이라 받아들여야 하나?



# 485-6


다른 종에 이식했다.


이번에는 거부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초기모습은 이전과 같은 증상을 보였다.


실험실에 갇혀 지내는 동물이 흔히 보이는 무기력증에 가까운 운동량을 보이던 녀석이 분출되는 에너지를 감당하지 못하고 미친 듯이 뛰어다녔다.



# 485-12


크기가 커질수록 버티는 - 버틴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 시간이 길어지는 모양이다.


한번 이식되었던 생물에 다시 이식되지 않으니 정확한 결과를 알 수 없다.


보유중이던 실험체는 모두 사용했으니 다른 연구재료를 신청해야겠다.



# 485-30


실험체가 바뀔 때마다 잠복기에 차이가 있을 뿐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더 많은 연구재료를 신청한다면 다른 오해를 받게 되겠지?


마지막으로...


해본 적 없는 동물을 사용해야겠다.



# 485-31


완전체는 아니지만, 용케 이식에 성공했다.


시체의 일부분이었기에 성공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이전과 같은 활발한 움직임은 아니지만, 조금씩 꿈틀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서둘러 한 부분을 잘라냈다.


베이거나 찔리는 건 내성이 있지만, 부분적인 절단에는 방법이 없는 모양이다. 이 부분도 더욱 많은 실험을 해봐야겠다.


샘플을 조금씩 잘라내 조직검사와 DNA 검사를 해보겠다.



# 485-32


움직임이 멈추지 않았다.


실험체의 크기를 봤을 때 2~3일 정도는 더 이어질 것 같다.


DNA 검사에서 여태까지 사용했던 실험체의 것이 모두 검출되었다.


내 것도 섞여 있었다.



# 485-39


예상외로 움직임이 멈추지 않는다.


떠오르는 망상을 몇 가지 가설로 압축해서 정리했다.


고민 끝에 실험체의 다른 부위를 투입했다.


마치 떨어진 조각을 발견한 자석처럼 서서히 붙기 시작했다.


몇분이 채 걸리지 않아 원래의 모습이 복원되었다.


* 정확한 시간은 별첨 #2


나머지 부분을 추가해볼까 싶었지만, 샘플을 뽑아 같은 조사를 더 해보는 걸로 생각을 굳혔다.



# 485-45


정리 해두었던 가설 중 마지막 한 가지를 실험해보겠다.


가설에 문제가 있다면, 뒤를 부탁한다.



# 485-50


온몸이 마비되며 의식이 흐려졌었다.


의식이 돌아온 정확한 시간은 확인할 수 없으나, 대략 48시간에 2~3시간 정도 오차가 있을 것 같다.


발견한 사람의 말에 따르면 시체처럼 기절해 있었다고 한다.


CPR이 필요할 만큼 호흡이 약해지지 않았다는 말도 덧붙였다.


한명을 세워놓고 시도할 걸 그랬나 싶은 아쉬움도 있지만, 예상이 비슷하게 맞아떨어졌으니 상관없다.



# 485-51


혈관을 따라 움직이는 액체를 더는 ‘피’라고 부르지 못할 것 같다.


일단 색깔부터 검은색이다.


정맥혈에서 볼 수 있는 ‘검붉은’ 색이 아니라 ‘검은’ 색이다.


애시당초 채취가 안 되니 칼로 베어낸 순간에 언뜻 보이는 것으로 유추할 수밖에 없다.


이걸 성공이라고 할 수 있을까?


믿을만한 결과를 얻을 방법이 안 떠오른다.



# 485-60


처음에는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에 환청이려니 생각했다.


하지만 내 입을 통해서 나오는 낯선 목소리는 정확히 ‘나’를 향해 말을 하고 있었다.


몇가지 질문을 해보니 짧은 단어로 의미를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느껴졌다.


끊임없이 혼잣말로 떠들었다.


점점 어휘가 늘어나고 문장이 만들어지는 것이 언어를 학습하는 모양이다.


낯선 목소리가 하고자 하는 말은 -조합 해보자면 - ‘무엇을 원하는가?’ 였다.


정체를 묻자 알지 못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간단한 질의응답에 걸리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우선은 원활한 소통을 위해 학습을 시켜야겠다.



# 485-61


이제 갓 입을 뗀 유아 수준의 대화가 가능해졌다.


아기 - 우선은 이렇게 부르기로 했다. - 와의 첫 대화에 부푼 마음으로 녹음 버튼을 눌렀다. * 별첨파일 #5


첫 질문은 ‘왜 자신을 다치게 하는가?’였다.


마음이 아팠지만, 차근차근 설명했다.


못 알아들을 거라 예상하지만 상관없다.


내가 말을 많이 하면 할수록 아기의 학습량이 많아지며 사용하는 어휘량이 늘어날 것이다.


한동안 말없이 가만있더니 다음 질문을 했다.


예상대로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다.


‘원하는 게 무엇이냐?’였다.


이 또한 최대한 길게 설명해주었다.


눈에 보이지 않으니 수긍을 하는 것인지 어떤지 알 수 없다.


이어서 내가 궁금한 것을 물어봤다.


시기상조였다.


하나의 문장을 말하면 거기에 사용된 단어를 풀어 설명하는 시간이 더 오래 걸렸다.


급할것 없다.


누구도 걷지 않았던 길은 천천히 한 발 한 발 내딛는 게 가장 안전하며 확실한 방법이다.



# 485-67


하나의 인격체로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자신이 어째서 이곳에 있는가 궁금한 모양이지만 그건 내가 물어봐야 할 부분이다.


정체성에 대해 상당한 고민을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는 기가 찼다.


그동안 알게 된 사항들을 정리해보자면,


1. 영양 공급원은 동물의 혈액이다.


1-1) 섭취한 동물의 DNA 정보를 자신의 것으로 확보할 수 있다.


2. 힐링팩터에 준하는 자가치유능력을 갖추고 있다.


3. 원하는 만큼의 세포분열을 할 수 있고 각 세포의 능력과 정보를 정할 수 있다.


3-1) 분열된 세포는 독립개체로 살아간다.


3-2) 분열되기 전에 정해진 능력과 정보는 발전할 수 없다. 즉, 분열된 상태 그대로 자생하게 된다.


4. 혈액을 가진 동물이라면 무엇이든 가능하지만, 인간에 대한 적응력이 가장 높다.


* 별첨자료 #12


지금까지의 연구결과로 판단하자면 새로이 발견된 기생체라고 할 수 있겠다.



# 485-68


알면 알수록 녀석의 지능은 놀라울 따름이다.


언어 습득능력에서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그동안 주어진 실험용 동물을 통해 이 녀석도 실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혈액의 역할에 대해 알지 못하던 초기에는 성장을 위한 섭취를 우선하여 생각했지만, 숙주에게 치명적인 손상을 입히는 것이 더욱 손해라는 것을 자각한 다음부터 공생에 대해 생각하고 실험을 진행했단다.


그렇게 분석한 신체에 대한 정보가 석사과정의 논문으로 발표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 485-69


웬만한 보조 연구원보다 훨씬 낫다.


가르치는 데로 기억하고 학습하여 한 단계 더 나아간 질문을 던지며 필요한 실험과 연구를 보조하는 역할은 이제껏 겪어본 어떤 사람보다 월등히 뛰어났다.


게다가 필요한 유전자를 가지고 끊임없이 생성되는 샘플은 실험용 동물의 존재가치를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동물권을 주장하는 각종 사회단체에 희소식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주어진 과제가 아니라면 이대로 발표를 하고 싶지만...



# 485-70


하루하루가 즐거움의 연속이다.


하루의 절반은 대화를 나누고 나머지 절반은 끊임없이 실험하는 나날의 연속이다.


녀석이 가진 인류에 대한 호기심은 끝을 알 수 없었다.


단순히 자신의 숙명을 받아들이고 더욱 진보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라기에는 너무나도 진지했다.


‘프로이트’가 논하는 ’에로스’와 ‘타나토스’를 주제로 꺼내 들었을 때는 두 눈만 껌뻑이고 있었다. 도대체 어디서 본 걸까?



# 485-71


그동안의 결과를 바탕으로 좀 더 대담한 실험을 진행해야겠다.


어느정도의 상처까지 치유할 수 있는지 알고 싶었으나, 차마 목숨을 담보로 위험한 도박을 할 수 없었기에,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오체분시’를 한다 해도 걱정하지 말라는 녀석의 허풍 - 언제부턴가 허언이 심해졌다. - 을 믿기 힘들었던 이유가 가장 컸다.


상해부위를 점점 키워가는 실험을 통해 신체 부위의 어디를 절단하더라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원복이 가능하다는 결과를 얻고 나서야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결과는... 적어도 실험실 내에 있는 물체로는 상해를 입힐 수 없었다.


비인가 임상시험이기에 자세한 기록을 남기지 않겠다.


반으로 갈라진 ‘나’를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한 녀석은 자신의 이름을 ‘베르’라고 명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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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건투를 빌겠소. 24.01.30 19 0 10쪽
28 그건 아니죠. 24.01.29 17 0 12쪽
27 일지 #2 24.01.28 18 0 10쪽
26 꼴통쉑 24.01.27 16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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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사양말고 드세요. 24.01.22 16 0 11쪽
20 내 밑으로 집합! 24.01.21 14 0 12쪽
19 사람이 제일 어려워 24.01.20 15 0 11쪽
18 담당 저격수 24.01.19 25 0 11쪽
17 배추도사 무도사 24.01.18 16 0 11쪽
16 중간이 뭐예요? 24.01.17 17 0 11쪽
15 피곤한 세상 24.01.16 22 0 12쪽
14 선남선녀 24.01.15 19 0 11쪽
» 일지 #1 24.01.14 19 0 11쪽
12 기다렸어? 24.01.13 20 0 12쪽
11 SmackDown 24.01.12 23 0 12쪽
10 니가 왜 거기서 나와? 24.01.11 22 0 11쪽
9 살살 좀 부탁합시다. 24.01.10 24 0 13쪽
8 라면 먹고 갈래? 24.01.09 27 0 11쪽
7 조롱이야. 24.01.08 36 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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