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치 않는 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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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ros
작품등록일 :
2024.01.02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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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8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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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추도사 무도사

DUMMY

손에 든 샌드위치를 우걱우걱 씹어먹는 지예의 모습에서 어릴 때 귀여웠던 모습을 찾으려 애쓰던 한 검사는 지난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진리를 떠올렸다.


‘그래... 포기는 빠를수록 좋은 거랬어...’


포기란 배추 셀 때나 쓰는 말이라 생각했던 한 검사는 지예에게서 과거의 모습을 찾는 일 만큼은 배추를 세기로 했다.


대신, 오늘만큼은 자신이 느꼈던 과거의 감정을 끌어와 이 웬수를 최대한 부드럽게 대하리라 다짐했다.


“왜 그렇게 백연을 캐는 거야?”


“애아여?”


뒷산에 굴러다니는 도토리를 잔뜩 주워 먹은 다람쥐 마냥 양볼을 잔뜩 부풀린 지예가 똘망똘망한 눈으로 반문한답시고 하는 모양이다.


“맛있어?”


끄덕 끄덕...


“샌드위치 처음 먹니?”


도리 도리...


“대답하기 싫어서 그러는 건 절! 대! 아니지?”


살포시 올라가는 입꼬리, 씰룩거리는 광대뼈, 반달 모양의 눈...


정곡을 찔린 부하직원들은 보통 이런 표정을 짓곤 하지.


“먹어. 먹고 얘기하자.”


“다 먹었어요.”


급하게 씹어 삼킨 샌드위치를 넘기기 위해 커피까지 단숨에 마셔버린 지예는 맘을 다잡은 듯, 결의에 찬 표정으로 상관을 마주했다.


“저번 건도 그렇고, 왜 그렇게 백연에 목숨 거는 거야?”


“꼭 이유가 있어야 하나요? 정의 실현, 사법 수호... 뭐 그런 거 하려고 검사하는 건데.”


더이상 ‘화제 전환’ 스킬이 먹히지 않을 거라 느낀 지예는 모든 걸 포기하고 상관의 질문에 성심성의껏 대답했다. 지예 나름으로는 말이다...


“공부는 좀 하고 덤비는 거냐?”


“대충은요. 뭐 세계적으로 손에 꼽히는 재벌이고 몇 대를 거쳐 장자 세습의 원칙을 지켜온 기업이라는 정도?”


“그 몇 대가 몇 댄 데?”


“그런 것까지 알아야 해요?”


훅 들어온 질문에 미처 답변을 준비 못 한 지예는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종로 바닥에 대한독립 만세가 울려 퍼지던 시절에도 백연 그룹은 돈으로 나라를 들었다 놨다 하던 곳이야.”


“흥! 오래도 해 먹었네요.”


“지예야. 냉정하게 생각해봐. 그 정도 세월을 끊임없이 해먹을 수 있다는 게 돈만 있으면 되는 일이냐?”


“운? 요행?”


한 검사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뇌를 거치지 않은 대답을 툭툭 던져놓는 과거에’만’ 귀여웠던 애물단지의 뒤통수를 불끈 쥔 주먹으로 어루만져 주고 싶은 충동을 겨우 가라앉혔다.


‘미운 일곱 살이다... 미운 일곱 살...’


끈기를 가지고 정신교육을 하리라 마음먹었던 조금 전의 다짐을 떠올린 한 검사는 주먹에 모인 온몸의 기운을 원래의 자리로 돌려보냈다.


“그래. 운도 좋았겠지. 하지만 그게 전부일까? 나라를 세울 수 있을 정도로 축적된 부와 명성이 정말 요행만으로 가능할까?”


“잠깐, 친일파였어요? 오~ 새삼스레 투지가 불타오르는데요?”


한 검사는 점점 지예의 집중력이 걱정스러워졌다. 어릴 때도 ‘선택적 집중력 결핍 증상’을 보이곤 했지만 최근 들어 심해진 건 아닌가? 아니, 공감능력에 문제가 생긴 건가?


일단 급한 문제는 아니니 나중에 조용히 검사해 보기로 하고 오늘은 최대한 지예의 눈높이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로 단단히 마음먹었다.


“좋아. 세상에 알려진 유명한 친일파 중에 백씨 성을 가진 사람 있어?”


곰곰히 생각해보던 지예는 선뜻 답을 내놓지 못했다.


“그럼 독립유공자 중에는?”


“알아요! 나 어릴 적에 훈장 받은 분도 백씨 성이었고 몇 분 더 계셨는데...”


“긴 세월을 이어져 온 백연의 명성이 그렇게 혼란스러운 시기에 과연 친일행동만으로 이어져 내려올 수 있을까?”


“그럼요?”


지예는 할아버지의 소싯적 이야기에 흥미를 느낀 손녀딸처럼, 한없이 순수한 표정으로 한 검사의 이야기보따리를 뒤적였다.


“백연은 독립운동과 친일 양쪽을 병행했어. 미래의 일이 어찌 될지 모르니 양쪽 모두에 투자한 셈이지.


보통사람이 그러면 박쥐라느니 회색분자라느니 하며 돌을 던졌겠지만, 백연은 양쪽 모두에 진심으로 지원했기에 그런 비판을 면할 수 있었어.


독립지사에게 어지간한 부자의 전 재산이라고 할 만한 금액을 지원한 다음 날, 일본 고위관료에게 그만큼의 용돈을 찔러 주는 식으로 말야.”


“와~”


일본이 물러나지 않았다면, 독립투사로 활동한 백연가의 사람이 세간에 알려질 리 없다.


어떤식으로든 일제 강점기가 끝났기에, 일본 편에 섰던 백연가의 흔적이 사라진 것이다.


‘두 마리 토끼를 쫓다 한 마리도 못 잡는다.’는 말을 ‘둘 다 잡아야 하나를 고를 수 있다.’는 말로 바꿔버린 게 백연이다.


그런식으로 국가적 위기에서 살아남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온 것이 돈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돈으로 모든 걸 해결했다고 받아들이면 많은 부분에서 설명할 수 없는 허점이 생긴다.


“돈으로 모든 게 해결되는 세상이 아니잖아요.”


“물론이지. 돈은 방법과 구실은 될지 몰라도 목적으로 사용하면 오히려 독이 되는 경우가 많지.”


사람을 움직이고 삶의 질을 끌어올리는 일에 돈이 필요한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돈을 모으기 위해 사람을 움직이고 삶의 질을 끌어올린다면 적잖은 부분에서 부작용이 발생하게 된다.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는 백연은 결코 돈을 목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백연이 가장 집중해서 투자한 곳은 사람이었다.


유능한 인재를 끌어들이기 위해 돈을 아끼지 않았고, 그렇게 모은 사람을 백연의 인재로 키워내는 게 그들의 진정한 힘이었다.


그런 백연의 힘은 ‘백년지계’를 세워 결과를 이끌어내는데 최적화되어 인맥 형성에 든든한 밑거름이 되었다.


어린시절부터 우수한 학생을 선별해 장학금을 지원하고 그렇게 키워진 인재들이 그룹 산하의 직원이 되는 것은 물론, 의사, 법조인, 국회의원뿐만 아니라 정부부처의 고위 공무원으로 성장했다.


그렇게 ‘백연 재단’의 장학금을 받으며 자란 아이들은 각계각층에 분포되었다.


일본의 항복선언 이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는 데 필요한 인적, 물적 자원의 대부분이 백연에서 나왔다는 소문도 돌 정도였기에, 재계를 움켜쥐고, 언론을 움직여, 정계를 쥐락펴락하는 보이지 않는 왕이라는 헛소문도 괜히 떠도는 말이 아니었다.


“그건 그거고, 잘못 한 게 있으면 벌을 받아야죠.”


“백연이 무슨 잘못을 했는데?”


자신들의 이미지 메이킹에 사활을 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일반 서민들에게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명사로 회자되는게 백연이었다.


천재지변으로 발생한 피해자들을 위함은 물론이고, 평상시에도 백연그룹의 기부금은 사회적 취약계층을 위해 널리 사용되었다.


그룹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봉사활동은 일일이 나열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동종업계 최고 수준의 직원복지로 매년 시행되는 신입사원 채용 경쟁률은 세 자리 수 밑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 운영상 흔하게 발생할 수 있는 조세포탈도 없었으며 국세청에서 매년 선정하는 ‘모범 납세 사업자’에서 백연의 이름이 빠진 해는 한차례도 없었다.


“말이 안 되는데요? 막말로 백 원을 세금으로 낸다는 건 백 원 이상을 벌었다는 거잖아요. 세금은 세금대로 내고, 뿌리는 건 그 이상 뿌리고, 거기다가 사회 환원까지? 도대체 뭘 해서 돈을 벌어야 그렇게 할 수 있는 거에요?”


백연의 사업은 조금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인터넷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오히려 백연과 상관없는 사업을 찾는 게 더 힘들 정도로 모든 분야에 손을 대고 있었기에, ‘문어발식 경영’ 보다는 ‘지네발식 경영’이란 말이 어울릴 지경이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는 사람에게 물어봐야지.”


한 검사는 자신이 대답할 수 없는 질문에 욱하는 옹졸한 성격은 아니었다. 질문하는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다를 뿐이지...


“그렇죠? 불법적인 행위 없이 그 많은 돈을 어떻게 벌었는지 백 회장한테 물어볼까요? 영장 청구 콜?”


머릿속에 온통 한 가지만 박혀 있는 지예의 입에서 백 회장이 튀어나오자 한 검사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너 배트맨의 약점이 뭔지 아냐?”


이건 또 무슨 뜬금없는 질문인가?


“예? 전 마블빠라 DC는 잘 모르는데요?”


“뭔 빠? 암튼, 배트맨은 알지?”


“예. 박쥐 인간.”


엄밀히 말해 박쥐 코스프레 하는 탐정이지만 그런 것까지 따지고 들 필요는 없겠지.


“빌런들은 흔히 가슴의 로고가 약점이라 생각하지만, 그건 그냥 위장일 뿐이야. 눈에 잘 띄는 부분을 가장 튼튼하게 만들어 모든 공격을 한 곳에 집중시키는 거지. 실제로 취약한 곳은 아무도 찾지 못할 은밀한 곳에 감춰두고 말야.”


지예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피어났다.


‘눼~ 눼~ 누가 노땅 아니랄까 봐 퍽이나 대단한 걸 알고 계십니다.’


물론, 소리내 말할 수 있는 대사는 아니다.


“백연그룹에 있어서 백 회장은 그런 존재야. 전면에 나서 있기에 모든 포화가 집중되지만, 한번 건드려 보면 철통 같은 방어태세만 확인할 뿐, 제풀에 나가떨어지기 마련이지.”


“아···”


이미 겪어본 지예가 이해 못 할 얘기는 아니었다.


툭 건드렸더니 자신을 향한 화살을 무위로 돌려버리고, 꼬리 따위 흔적도 없이 잘라낸 후, 유유히 해외로 산책하러 나가지 않았는가.


“그럼... 백 회장은 절대 못 잡아요?”


“아니지. 방어력을 부술 정도로 강력한 무기를 준비하던가...”


잠시 뜸을 들이며 호흡을 고른 한 검사는 몸을 소파에 깊숙이 묻으며 숨겨둔 비전 절기라도 전수해주는 표정으로 지예를 바라봤다.


“숨겨둔 진짜 약점을 찾아야지.”


“아저씨는 알죠? 그쵸? 아! 좀 알려줘요~~~”


순진한 손녀로 위장하길 잘했다.


역시 연륜은 무시 못한다고, 괜히 먼 곳에서 헤매고 돌아다녔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 현명한 조력자가 있다는 걸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그걸 알면 내가 가만 있겠냐?”


지예의 주먹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아무리 천둥벌거숭이라도 직속상관에게 주먹을 휘두를 만큼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오진 않았다.


순간적으로 성격 나올 뻔한 지예의 얼굴이 어딘지 모르게 결의에 가득 차 보였다.


“그러니까... 백연을 파고 싶으면 공부하라는 말이죠?”


“그렇지. 이제야 말귀를 좀 알아듣는구나. 백연은 그렇게 무식하게 달려들면 절대 못 잡아.”


“잘 알겠습니다. 백연을 잡고 싶으면 제대로 각오하고 덤비라는 말이죠?”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게 어째 수상하다.


가만, 뒤에 이어진 말이 미묘하게 다른 거 같은데...


“부장님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우선은 백 회장부터 소환하겠습니다. 대가리부터 족치다 보면 뭐라도 하나씩 튀어나오지 않겠어요?”


지예를 바라보는 한 검사의 촉촉한 눈에 과거를 회상하는 노부의 아련함이 차올랐다.


왜 얘기가 그렇게 흘러갈까...


한 검사가 원하던 반응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어디부터 시작해야 이 상황을 바로 잡을 수 있을까...


칙칙한 사무실을 따뜻한 사랑방 삼아, 탁자에 노니는 샌드위치의 잔재를 화롯불에 구운 고구마 삼아, 신나고 재미있는 한지운 할아버지의 옛이야기는 막을 내려야 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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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건투를 빌겠소. 24.01.30 19 0 10쪽
28 그건 아니죠. 24.01.29 17 0 12쪽
27 일지 #2 24.01.28 18 0 10쪽
26 꼴통쉑 24.01.27 16 0 11쪽
25 지예 안돼! 24.01.26 14 0 12쪽
24 활짝 핀 벚꽃 24.01.25 15 0 12쪽
23 미끼는 물었고 24.01.24 15 0 11쪽
22 맘대로 해봐. 24.01.23 18 0 13쪽
21 사양말고 드세요. 24.01.22 16 0 11쪽
20 내 밑으로 집합! 24.01.21 13 0 12쪽
19 사람이 제일 어려워 24.01.20 15 0 11쪽
18 담당 저격수 24.01.19 25 0 11쪽
» 배추도사 무도사 24.01.18 16 0 11쪽
16 중간이 뭐예요? 24.01.17 17 0 11쪽
15 피곤한 세상 24.01.16 22 0 12쪽
14 선남선녀 24.01.15 19 0 11쪽
13 일지 #1 24.01.14 18 0 11쪽
12 기다렸어? 24.01.13 20 0 12쪽
11 SmackDown 24.01.12 23 0 12쪽
10 니가 왜 거기서 나와? 24.01.11 22 0 11쪽
9 살살 좀 부탁합시다. 24.01.10 24 0 13쪽
8 라면 먹고 갈래? 24.01.09 27 0 11쪽
7 조롱이야. 24.01.08 36 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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