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치 않는 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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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ros
작품등록일 :
2024.01.02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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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21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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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밑으로 집합!

DUMMY

하윤은 상관을 기다리게 하는 부하직원에게 ‘몇 분 몇 초 늦었어요.’라는 식으로 갈구는 좀팽이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조용히 넘어갈 정도로 오 이사의 행동이 맘에 들지도 않았기에, 그의 사소한 실수는 앞으로 벌어질 사태에 명분을 쌓는 좋은 밑거름이 될 것이다.


“부르셨습니까. 이사님.”


‘하? 노크도 없이?’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해맑은 미소로 벌컥 문을 열고 들어서는 오 이사의 모습은 장녀의 방에 서슴없이 들어서는 아버지와 같았다.


겉으로는 충성스러운 종으로서 열과 성을 다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그것은 남들의 눈이 있는 곳에서만 그럴 뿐이고, 하윤을 풋내기 상관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이렇게 멋대로 행동할 리가 없었다.


잠시 오 이사 처지에서 생각해보자면, 그동안 실질적인 권력자로서 회사의 모든 것을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여태까지 그룹의 직접적인 간섭이 없었던 이유는 전임 대표이사의 능력 때문이었지만, 그런 것은 전혀 생각 못하고, 그저 관심이 없기 때문이라 착각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왕가의 자식이 무슨 일 때문에 이곳에 부임하게 된 것인지 알 길이 없지만, 권력의 핵심에서 한참 벗어난 이런 촌구석에 뼈를 묻을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대충 비위나 맞춰주다가 때가 되면 가고 싶은 곳으로 떠나는 상관을 환한 얼굴로 배웅해주는 게 자신의 역할이라 믿었다.


그 후에, 얼마 안 남은 정년을 마치고 그룹에서 나오는 연금으로 핑크빛 노후를 맞이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실질적인 책임자인 자신을 함부로 대하지 못할 거라는 믿음이 있었고, 남들 앞에서 분위기만 맞춰주면 하윤도 만족할 거라 착각하고 있던 것이다.


접대용 멘트도 기다리지 않고 맞은편에 앉은 오 이사는 그런 속내를 가슴에 품고 자신의 상관을 마주했다.


“앉... 으셨군요.”


“허허~ 로비에서 충분히 인사를 못했죠. 영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이사님.”


‘그놈의 영전...’


“고마워요.”


어찌됐든, 이 능구렁이가 산전수전 겪은 백전노장인 건 사실이다. 하윤은 앞에 앉은 늙은이에게 자기 생각을 노출하지 않아야 했다.


모든 백전노장이 임하는 전투에서 무조건 승리하는 게 아니라는 건 하윤도 모르지 않았으나, 조심해서 나쁠 건 또 없으니까.


“저 때문에 이사님이 불편하진 않으실까 봐 걱정되네요.”


“아이고~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비어있던 왕좌에 주인님이 오셨으면 서둘러 내어 드리는 게 신하의 도리지요.”


‘비어있는 왕좌에서 주인 노릇 하고 있었다는 건 알고 있네?’


“비유가 적절치 못해요. 제가 왕도 아니고 이사님이 신하라뇨? 저는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요.”


하윤의 말에 오 이사의 입이 귀에 걸렸다. 자신을 섭정관 쯤으로 인정하겠다는 뜻이 아닌가? 물론, 본질에서 한참 벗어난 착각이지만...


“하하~ 그렇습니까?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저 농담 아닙니까? 농담~ 하하~”


“네. 저도 농담이었어요.”


무엇이 농담이었다는 것일까? 불편할까 봐 걱정된다는 게? 그렇게 생각한 적 없다는 게?


오 이사는 하윤의 중의적인 화법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 정도 눈치가 있었으면 로비에서부터 기어 다녔겠지...


이미 자신의 처세술과 뛰어난 언변으로 하윤을 녹여놨다고 철석같이 믿는 오 이사는 이쯤에서 쐐기를 박으려는 생각에 어깨를 쫙 펴며 말을 이었다.


“저녁에 환영회를 준비해뒀습니다. 혹시... 선약이 있으신가요? 그럼 어서 취소하세요. 오늘은 그냥 못 보내드립니다. 하하하~”


“예?”


없는 인내심까지 겨우 끌어모아 철저히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던 하윤도 결국 인상을 구기고 말았다.


“아이고~ 그렇게 부담가지실 필요 없습니다. 조촐하게 마련한 자리니까 편하게 오셔서 식사하시면 돼요. 그럼 저는 미리 가서 준비해놓고 있겠습니다.”


하윤의 구겨진 인상을 무안해서 난감해하는 것이라 착각한 오 이사는 대답도 듣지 않고 방을 빠져나갔다.


저녁에 한다는 환영식을 아직 점심시간도 안됐는데, 벌써 가서 준비하겠다고?


“저 새끼 뭐야?”


고민했던 시간이 무의미하게 준비한 말도 못하고 혼자 남겨진 하윤은 결국 참아왔던 감정을 폭발시키고 말았다.


“입으로만 신하니 종이니 떠들어 대면서 하는 짓거리는 지가 왕이잖아?”


속으로만 생각하던 게 터져 나오기 시작하니 다시 집어넣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는데 서툰 아마추어의 모습을 보일 하윤이 아니었기에, 방 밖으로 새어나갈 만큼 큰소리로 격분하진 않았다.


“당분간 좀 지켜보려고 했더만... 뒤졌어.”


복수를 다짐하며 터져 나온 화를 눌러 앉힌 하윤의 모습에 명예희 여사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


“오~ 맨날 삼겹살이더니 웬일로 한우야?”


“바보야. 좋아할 일이냐? 또 명세서에 ‘회식비’ 항목으로 삥 뜯어가겠지.”


“그래도 이게 얼마 만에 소고기냐~ 어차피 뜯길 거 오늘은 본전 뽑는다.”


넓은 홀을 꽉 채운 직원들이 앞에 차려진 식탁을 바라보며 수군거렸다.


가운데의 화로는 덩그러니 비워둔 채 밑반찬만 가득한 식탁이었지만, 처음 자리하는 한우 집이었기에 직원들은 전의를 불태우며 회식이 시작되기만을 기다렸다.


“이사님 오십니다.”


상석에 가깝게 자리 잡은 임원들을 시작으로 모든 직원이 일제히 일어나 식당으로 들어서는 하윤을 맞이했다.


“와~~~ 이사님! 이사님!”


전쟁에 승리한 개선장군도 이 정도 환대를 받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아침에 한번 겪어봤기에 마음 단단히 먹고 자리에 참석한 하윤이었지만, 좀처럼 익숙해지기 힘든 분위기였다.


“아우... 진정들 하세요. 다른 손님들이 불편하시겠어요.”


“하하하~~ 오늘은 저희밖에 없습니다. 그런 걱정 붙들어 매시고 맘 편하게 계셔도 됩니다. 하하~”


너털웃음으로 하윤의 걱정을 떨쳐버리는 오 이사는 상관의 말에 숨은 의도를 알아채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이쪽으로 오세요. 이사님.”


넓은 홀에 가장 눈에 잘 띄는 자리로 안내받은 하윤은 은은한 미소를 띤 채 자리에 앉았다.


하윤의 착석에 맞춰 직원들이 하나둘 자리에 앉자, 기다리고 있던 식당직원들이 불판과 함께 고기를 내왔다.


‘설마, 이것도 리허설 한 건 아니겠지?’


하윤이 자리한 탁자를 시작으로 일사불란하게 깔리는 음식의 모습은 충분히 의심받을 만한 움직임이었다.


“제가 귀한 손님들 접대할 때 자주 애용하는 식당입니다. 이 집 고기도 고기지만 반찬도 기가 막힙니다.”


‘그래. 그래. 안 봐도 알겠다. 네 돈 주고 먹은 적은 없단 말이잖아?’


“오 이사님의 숨겨둔 맛집이에요? 오~ 기대해도 되겠죠? 호호~”


속내와 달리 오 이사의 장단에 맞춰주고 있는 하윤은 머릿속으로 준비한 계획을 리허설 해보고 있었다.


하윤이 기다린 순간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자자~ 우선 새로 오신 대표이사님을 환영하는 의미에서 건배 제안하겠습니다~ 다들 앞에 놓인 잔을 채워주시고~”


“우워~~~”


오 이사의 행동 하나하나에 반응하는 직원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동안의 행적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얼마나 구워삶았으면...


“다들 잔 채우셨죠~”


“예~”


“그럼, 대표이사님의 말씀을 청해 듣겠습니다~ 다들 어때요?”


“우와~~~ 이! 사! 님! 이! 사! 님!”


분위기에 휩쓸려 자리에서 일어선 하윤은 오 이사의 손짓을 신호로 일제히 조용해진 직원들을 둘러보며 앞에 놓인 잔을 들었다.


“이렇게까지 열렬히 환영해주시는 여러분을 보고 있자니 이곳에 발령받은 게 정말 잘 된 일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우와~~~”


“오늘 마음껏 드시고! 내일부터 잘 부탁하겠습니다. 자~ 건배~”


“백하윤 이사님 만세~~~”


다소 밋밋한 건배사를 마친 하윤은 손에 들고 있던 물컵을 단숨에 들이킨 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높으신 분들은 제가 따로 준비한 장소가 있으니 그쪽으로 자리를 옮기겠습니다.”


“···”


예상치 못한 하윤의 발표에 시끄럽던 식당에 정적이 찾아들었다.


“오 이사님. 여기 회식비는 어떻게 되는 거죠?”


“아. 그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관례상 전 직원이 각출하는 걸로...”


“에이~ 그러지 마시고요. 김 실장님.”


하윤의 부름을 받은 김도윤 실장이 주머니에 있던 카드를 꺼내 하윤에게 전달했다.


“여기 노조 위원장이 어느 분이세요?”


“···”


하윤의 호출에 선뜻 일어나는 사람은 없었다.


“위원장은 오늘 잔업이 많아서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무슨 일 때문에...”


“그래요? 그럼 부위원장이나 노조 관계자분들 안 계세요?”


“제가 부위원장입니다.”


슬며시 손을 들며 일어나는 사람에게 다가가 카드를 건넨 하윤이 전 직원이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말했다.


“오늘 회식비는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의미로 제가 쏠게요.”


조금씩 웅성거리는 직원들을 향해 하윤은 과장된 몸짓으로 말을 이었다.


“한도 없는 카드니까, 저 파산 한번 시켜보세요.”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던 소리가 서서히 환호로 바뀌기 시작했다.


“워~”


“2차 가도 됩니까?”


눈치없이 분위기만 타는 사람은 어느 조직이나 있게 마련이다.


“음주 가무에 한해서 얼마든지 허락할게요. 단!”


환호성을 지르려던 직원들은 단서조항을 듣기 위해 하윤의 목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정확히 9시에 해지할 거니까, 2차든 3차든 서두르셔야 할 거예요. 멀리 사는 분들도 있을 거잖아요? 아. 현금서비스는 막아놨으니까 시도 하지 마세요.”


장난스럽게 윙크까지 하는 하윤을 향해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쏟아졌다.


“우와~~~”


“그럼 저는 먼저 일어날 테니까 많이들 드세요.”


“우와~~~ 백! 하! 윤! 백! 하! 윤!”


이제껏 만세 삼창과 함께 이름을 연호해주면 입이 귀에 걸리던 상관에 익숙해진 직원들은 지금의 감정을 다르게 표현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이사님. 아직 고기가 익지도 않았는데 벌써 일어나시게요?”


“제가 더 좋은 걸 준비해 뒀어요. 기대하셔도 좋아요.”


“아... 알겠습니다.”


자신이 설계했던 그림이 그려지지 않자 풀이 죽어버린 오 이사는 하윤의 말에 반박할 마땅한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야! 야! 이게 무슨 일이냐?”


“낸들 알겠냐?”


“이거 이러다가 회사 다니는 게 재밌어지는 거 아냐?”


“됐다 싶다. 처음이나 환심 끌려고 그러지 좀 지나면 다 똑같아질걸?”


아무리 여론형성이 중요하다지만 겨우 이런 걸로 이끌어낸 환심이 지속될 리도 없거니와 효과적으로 활용될 리도 없다.


게다가, 중소기업도 아니고 대표이사가 사원들에게 환심을 사서 무슨 덕을 보겠는가?


그간 겪어온 모든 상관의 처음과 끝이 달랐다는 점에 비추어 보건대, 하윤의 행동을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직원들이 대부분이었다.


“이사님 미혼일까? 젊어 보이는데 결혼하셨나?”


“왜? 들이대게? 고백공격 하시게요?”


“안될까? 나도 신데렐라 되지 말란 법은 없잖아.”


“이 미친놈아. 어디 감히 형수님한테!!!”


떡줄 사람은... 아니다. 이런 속담을 언급하는 것도 아깝다. 지치고 힘든 삶 속에 행복한 꿈을 꾸는 자유 정도는 만끽하도록 놔두자.


안절부절 하는 오 이사를 두고 당당히 식당을 벗어난 하윤은 차에 오르며 냉랭한 목소리로 지시했다.


“부장급 이상에게 준비해둔 장소. 문자로 돌리세요.”


“예. 시간은 몇 시까지로 할까요?”


“지금 당장이요.”


분노를 표하지도, 인상을 구기지도 않고 차분하게 지시하는 하윤의 목소리에서 자신보다 늦게 도착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뜻을 감지한 김 실장은 간부급들을 도와줄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치사하게 먼저 차에 타서 문자 보내라고 지시하는 사람보다 일찍 도착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앞으로 몰아칠 피바람을 예감한 김 실장은 몇 사람을 머리에 떠올리며, 자신의 안위를 걱정할 필요는 없을지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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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지예 안돼! 24.01.26 14 0 12쪽
24 활짝 핀 벚꽃 24.01.25 15 0 12쪽
23 미끼는 물었고 24.01.24 15 0 11쪽
22 맘대로 해봐. 24.01.23 18 0 13쪽
21 사양말고 드세요. 24.01.22 16 0 11쪽
» 내 밑으로 집합! 24.01.21 14 0 12쪽
19 사람이 제일 어려워 24.01.20 15 0 11쪽
18 담당 저격수 24.01.19 25 0 11쪽
17 배추도사 무도사 24.01.18 16 0 11쪽
16 중간이 뭐예요? 24.01.17 17 0 11쪽
15 피곤한 세상 24.01.16 22 0 12쪽
14 선남선녀 24.01.15 19 0 11쪽
13 일지 #1 24.01.14 18 0 11쪽
12 기다렸어? 24.01.13 20 0 12쪽
11 SmackDown 24.01.12 23 0 12쪽
10 니가 왜 거기서 나와? 24.01.11 22 0 11쪽
9 살살 좀 부탁합시다. 24.01.10 24 0 13쪽
8 라면 먹고 갈래? 24.01.09 27 0 11쪽
7 조롱이야. 24.01.08 36 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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